EU, 파운드리 투자 공세…차량용 칩 자급자족 목표
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의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각 국가별 경쟁이 격화된 가운데 미국에 이어 유럽, 인도, 일본 등이 속속 전열을 갖춰 뛰어들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정부가 반도체 제조시설에 파격적인 보조금과 세제혜택을 제공해 자국 내 반도체 생산량을 늘린다는 목표다. 유럽은 현재 9%로 떨어진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려 시스템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다. 일본은 80년대까지 메모리 강국이었다가 1위를 한국에게 내어줬지만, 이번 투자를 계기로 종합반도체 국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이 위축된 가운데, 인도는 중국의 대체 국가로서 공백을 채운다는 전략이다. 이에 지디넷코리아는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한 각 국가별 현황과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유럽연합(EU)은 파격적인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인텔,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유럽 내 제조공장 투자를 유치하는 성과를 냈다. 자동차를 핵심 산업으로 두고 있는 유럽은 앞으로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통해 아시아 의존도를 줄이고 차량용 반도체 제조를 자급자족하겠다는 목표다. 유럽의 이같은 투자는 국내 반도체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유럽은 산업용, 차량용 반도체를 위한 레거시(구형) 공정 투자에 집중된 반면, 국내는 메모리와 함께 첨단공정 파운드리 투자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미 경제안보 차원의 협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유럽과도 기술 및 시장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 유럽, 2030년까지 반도체 점유율 20% 목표…차량용 반도체 집중 투자 EU는 지난 4월 2030년까지 민간 및 공공에서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지원하는 EU반도체법을 시행하기로 확정 지었다. 이는 지난 2022년 2월 EU 집행위가 최초로 제안한 EU반도체법안에 유럽의회가 합의를 이룬 것이다. 아울러 EU반도체법은 제조시설 확대뿐 아니라 전문인력 양성,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유럽은 33억 유로(4조7344억 원)를 투입해 유럽 반도체 실행계획(Chips for Europe Initiative)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에는 ASML(네덜란드), IMEC(벨기에)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장비 기업과 연구소가 위치해 첨단 기술 개발에 유리한 상황이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유럽은 과거 반도체 시장에서 20% 점유율을 기록하다가 9%로 내려왔으며, 이번 반도체법을 통해 2030년까지 다시 20%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과거 영광을 되찾고, 반도체 기득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라며 “유럽은 지난 몇 년간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를 못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파운드리에 투자해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은 BMW, 아우디·폭스바겐, 벤츠 등 3대 완성차 제조사가 위치하고 세계 반도체 수요의 20%를 차지하며 미국, 중국에 이은 3대 소비 시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반도체 공급은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유럽 종합반도체업체(IDM)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스위스), 인피니언(독일), NXP(네덜란드), 보쉬(독일) 등은 직접 반도체를 생산하면서 일부 물량은 TSMC, UMC, 삼성전자, 글로벌파운드리 등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겨왔다. ■ 인텔·TSMC, EU 보조금 받아 독일에 파운드리 팹 건설 확정 인텔은 가장 적극적으로 유럽에 신규 팹을 건설하고 있다. 지난해 인텔은 IDM 2.0 전략 일환으로 유럽에 향후 10년 동안 반도체 생산과 연구개발(R&D)에 800억 유로(112조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EU는 인텔에 보조금을 지원을 약속했다. 인텔은 지난해 독일,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투자를 확정한 데 이어 올해 6월 폴란드, 이스라엘 투자를 추가했다. 먼저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300억 유로(43조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올해 건설을 시작해 2027년 가동할 계획이다. 이는 지난해 발표한 투자 규모인 170억 유로(약 23조6천억원) 보다 약 2배 늘린 규모다. 독일 정부도 당초 68억 유로 보다 더 큰 규모의 100억 유로(약 14조3천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아일랜드 렉실립 파운드리 공장은 120억 유로(16조8천억 원)를 들여 생산시설을 확장하고 올해 인텔 4 공정(기존 7나노급 공정)으로 '메테오레이크' 등 프로세서 생산을 시작했다. 또 이탈리아에는 45억 유로(6조3천억 원)를 투입해 첨단 반도체 패키징·조립 공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에는 반도체 R&D 센터를 설립해 고성능컴퓨팅(HPC)과 인공지능(AI) 디자인 연구를 담당할 예정이다. 폴란드 브로츠와프 인근에는 46억달러(5조9천억 원)를 투자해 반도체 패키지, 테스트 공장을 건설해 2027년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대만 TSMC도 이달 초 뒤늦게 독일 드레스덴에 100억 유로(약 14조 3천억원)를 투자해 12나노, 16나노 공정의 300mm(12인치) 파운드리 팹 건설을 확정 지었다. TSMC가 유럽에 반도체 공장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독일 정부는 투자금의 절반(50%)을 지원한다. 해당 팹은 2024년 하반기에 건설을 시작해 2027년 말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TSMC는 협력사인 보쉬, 인피니온, NXP와 합작법인 'ESMC GmbH'를 설립해 공장을 운영한다. TSMC가 70% 지분을 보유하고, 나머지 기업이 각각 10% 지분을 갖는 구조다. 이 외에도 울프스피드(미국), AMD(미국), 브로드컴(미국) 등이 유럽에서 보조금을 받고 신규 팹 및 R&D 센터를 투자한다. ■ 韓, 유럽 공급망 협력 필요…'삼성-초미세, DB하이텍-레거시' 투자 역할 분담 유럽의 반도체 투자는 국내 시장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미국, 대만이 초미세 공정에 투자하는 것과 달리 유럽은 산업용, 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겨냥한 레거시 공정 투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지난 4월 성명서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이 EU에 위치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라며 “EU내 반도체 생산설비 확충은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수출 기회 확대로 이어져 기회 요인도 병존한다”고 진단했다. 김용석 반도체공학회 부회장(성균관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유럽은 자동차 관련 산업이 강하고, 이들 업체에 필요한 칩을 바로 공급하기 위해 인텔, TSMC 등이 12나노 이상의 레거시 공정 팹을 건설하는 것”이라며 “삼성전자가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초미세 공정과 경쟁이 겹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파운드리 산업은 자동차 등에 탑재되는 레거시 공정 물량이 많고, 초미세 공정은 이익률 측면에서 유리하다. TSMC는 초미세부터 레거시까지 균형있게 골고루 투자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TSMC는 가장 앞선 공정은 자국(대만)에서 생산하고, 한두세대 정도 늦은 공정은 미국에, 유럽과 일본에서는 레거시 공정에 투자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삼성전자는 여력이 없기 때문에 초미세 공정 투자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며 “국가 이익 차원에서 DB하이텍이 레거시 공정에 투자를 강화해 삼성과 DB가 역할 분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재희 반도체공학회 부회장(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한국은 대중 무역 감소에 의한 피해가 예상되기에 새롭게 블록화 되고 있는 유럽, 인도, 일본 등의 공급망에서 메모리, 첨단 반도체 공정 등 우위를 점하는 기술을 지렛대 삼아 적극적으로 생태계를 구축해 이를 만회해야 한다”며 “한미 경제안보 차원의 협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유럽 주도의 자체적인 공급망 확보에도 기술과 시장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