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칼럼] ESG 경영과 MSG 조미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조상 중에는 어렸을 때 죽은 자는 하나도 없다.” 유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에덴의 강'이라는 책의 1장에서 독자에게 던진 말이다. 그의 말대로 수천 세대에 걸쳐서 우리의 조상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지 않았고, 하나 이상의 배우자를 만나 후대에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미래의 우리 후손은 어떨까? 우리의 노력 여하를 떠나서 지구 환경이 나빠진다면 예단하기 쉽지 않다. 개인의 생존과 결혼 의지와 별개로 무분별한 자원착취, 화석 에너지 남용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균형조절 실패는 갈수록 우리가 살아갈 지구 가정(家庭)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2000년의 UN MDG(새천년개발계획), 그리고 2016년에 시작된 UN SDG(지속가능발전계획) 프로그램이 이러한 걱정에 대한 초국가적 응답이었다. P4G 서울정상회의가 최근 종료되었다. 이 회의 역시 UN SDG의 맥락과 같은 선상에 있다. UN SDG의 핵심 키워드는 누가 뭐라 하던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너무 달라서, UN이 오랜 전에 답안을 내 놓았다. 1987년 노르웨이 총리 출신인 할렘 브룬틀란은 '우리들 공통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보고서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 시키는 발전'이라 정의했다.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방점을 둔 정의다. 경영의 세계에서는 지속가능성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범주에 포함했다. 그런데 일단의 경영자가 책임이라는 단어에 부담을 느꼈다. 이에 마이클 포터 교수는 2006년과 2011년 HBR 논문에서 CSR을 대신할 용어로 '공유가치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개념을 고안해 냈다. 다분히 기업친화적인 용어이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부담되는 말을 '공유된 가치'로 바꿔버린 것이다. 전지구적 지속가능성의 담론이 더욱 강해진 지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 둘러 가는 CSV 용어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기업들에게 최근 ESG(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라는 키워드가 압박을 주고 있다. 주주가치 증진을 지향하는 기업에게 '사회적'이라는 말에 환경과 거버넌스라는 부담을 얹었으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었다. ESG 역시 2006년 발표된 UN의 '책임투자의 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이 말을 안 들으니 UN이 분별 있는 기관투자가와 연대를 한 것이다. 어떤 학자는 헤지펀드 행동주의로부터 스튜어드십 행동주의로 기관투자가들이 움직이도록 UN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2019년 6월 기준 물경 80조 달러의 자본을 운영을 하는 2,450개의 기관투자가들이 이 원칙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기업이 ESG의 실천의지가 없다면 앞으로는 투자도 받기 힘들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에도 수백억의 투자환수로 정신이 번쩍 들었던 무기 제조사와 화력발전 관련 기업의 사례가 있다. '툰베리' 같은 청소년 환경운동가들이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쁜 ESG 기업으로 낙인이 찍힌다면 젊은 인재의 채용도 힘들어질 것이다. 2020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4개의 경영 컨설팅 업체가 22개의 정량적 핵심지표를 제안하여, 기업의 실질적 행동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지표는 4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거버넌스'는 딜로이트, '지구'는 PwC, '사람'은 KPMG, '번영'에 대한 지표는 Ernst & Young 이 설계했다. 이들 지표가 UN SDG 17개 지표와 연계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재무회계기준위원회, 국제회계기준위원회의 전통적 표준회계기준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회계와 공시기준을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켜야 할 규제는 사업이 된다. ESG 이행을 심사하겠다는 국내외 평가 기업들이 벌써 돈벌이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이들 업체들은 서로 다른 평가기준으로 기업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사의 교육 프로그램, 회원제 클럽, ESG 시상식 등에 일반기업을 끌어 들이려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ESG준수가 아직은 자발적 리포팅에 기반하고 있으니, 이러한 혼란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표준 프레임워크를 여러 NGO단체와 국제기구들이 앞다투어 발표하고 있다. GRI의 지속가능보고서, CDP(Carbon Disclosure Project), TCFD(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 WDI(Workforce Disclosure Initiative), CDSB(Climate Disclosure Standards Board) 등 약자의 뜻을 외우기도 쉽지 않다. 사안이 이러하니 대응하려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ESG는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일과 같다. 그래서 식견 있는 전문가들은 업종에 맞는 하나의 프레임워크에 집중하기를 권고한다. ESG의 주요 개념을 분석해 본다면 크게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당사자자본주의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From Shareholder to Stakeholder Capitalism) 이해당사자라 함은 기업활동의 영향을 받는 시민과 지역사회, 지구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된다. 둘째는 사회적 책임을 지구적 환경 책임으로 확대했다.(From Social to Environmental Responsibility), 셋째는 관리에서 거버넌스로 기업경영의 맥락을 바꾸어 버렸다.(From Management to Governance Context). 이중에서 이해하기 어렵고, 많은 오해를 받는 키워드가 '거버넌스'이다. 거버넌스는 기업이 잘못을 했을 경우 “왜?”에 답변해야 하는 설명 책무(Accountability)와 관련된다. 관리는 협력사나 부하에게 미룰 수 있지만, 거버넌스는 회사 밖 조직이나 부하에게 떠넘길 수 없는 조직 정체성에 관계된다. 원래 행정학에서 발전시킨 거버넌스의 개념은 엘리트 중심의 전통적 계층체제를 탈피한 시민 협치와 네트워크 사회를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이 여러 학제로 전파되면서 거버넌스에 대한 이질적 정의가 파생되었다. 특히 경영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거버넌스는 원래의 개념을 많이 벗어난 듯 하다. 그 이유를 풀어보자. 거버넌스 개념의 원형은 네트워크 관계철학에 기반하고 있고, 조직 내외의 이해당사자 모두를 동등하게 다룬다. 네트워크처럼 복잡하게 엮어있을 때 모든 개체는 하나 하나가 중요해진다. 그러하니 주주-이사회-경영진-부서장-직원으로 이어지는 계층적 통제조직인 주식회사 시스템과 거버넌스 개념은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디 행정학의 신 거버넌스 개념은 중앙의 엘리트 통제조직이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주식회사는 이사회와 같은 통제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사회는 법적으로 함부로 해체할 수도 없다. 주식회사의 정체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주식회사의 거버넌스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권한 보다는, 이사회의 권한과 역할을 이전 보다 더욱 포괄적으로 확대시켜 버렸다. 나는 거버넌스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거버넌스란 “미시권력을 가진 조직원이 환경변화 속에서도 활력적 유동성을 유지하고자 자원을 자기조직적으로 배치하고 고착화된 체제를 전향적으로 바꾸는 네트워크적 조정 활동”이다. 학문적 정의를 내리니 말이 어렵게 된다. 핵심 메시지는 이렇다. 거버넌스는 조직의 지속적인 유동성을 목적으로 하며, 엘리트에 의한 주도가 아니라 자기조직화하는 구성원의 자발적인 네트워크 협동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미시권력, 자기조직화, 네트워크 협동이 거버넌스의 키워드이다. 지속적 생존과 의사결정의 투명성은 좋은 거버넌스의 결과이지 선행조건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오너집안의 경제사범을 회사의 ESG 컨트롤 타워의 수장으로 앉히는 조직은 거버넌스가 안 되는 회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기업이다. 미시권력자인 조직원의 감시와 통제력이 미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CSR, CSV, ESG는 맥락의 범주는 다르지만 모두 '지속가능성'이라는 담론의 부분 집합이다. 그런데 더 멀리 나간 사람이 있다. 2009년에 작고한 '예수 수난회' 소속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라는 지구(신)학자이다. 그는 진화론을 수용하여 종교와 과학의 화해를 도모했던 예수회 소속 고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에게서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베리는 '위대한 스토리(Great Story)로 우주 안에서의 인류의 소명, 그리고 이의 깨우침을 통한 우주 완성의 위대한 과업(Great Work)'을 주창한다. 담론이 너무 크고 넓어서 그릇이 작은 내게는 설명이 벅차다. 이 사상의 핵심은 “우주는 물체 집단이 아니라, 주체의 친교이다.(The universe is a communion of subjects, not a collection of objects)” 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한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토마스 베리의 담론이 너무 우주적이라 아직 경영의 세계 까지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먼저 응답한 분야는 법철학이었다. 바로 지구법리학(Earth Jurisprudence)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 재 낀 것이다. 지구법학의 신봉자들은 전통적인 인간 중심적 법철학은 궁극적으로 지속가능성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발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물체로 소외시키지 않고, 물질을 포함하여 말 못하는 생물들을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우주 안의 주체로서 정당하고 존엄 된 주인으로 간주할 때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지구법학 관점에서 지구의 모든 구성 요소는 예외 없이 모두 중요하다. 사람 역시 구성원의 하나일 뿐, 다른 구성요소를 마음대로 착취할 권한은 없다고 선언한다. 단지 인간은 성찰이 가능한 존재로서, 지구 공동체를 위한 청지기(Stewardship)의 의무를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 지구법학의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CSR, CSV, ESG 역시 인간중심적 담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고 단언한다. 현재의 법률이 인간친화적이며, 지구친화적 법보다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유기견을 함부로 대하면 사람이 감옥에 갈 수 있듯이, 지구친화적 법이 인간친화적 법 위에 위치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국제사회의 식견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결집하고 움직이고 있으니, ESG는 물론 이보다 큰 지구친화적 행동주의는 지금보다 더욱 널리 전파될 것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일단의 진보적 법조계 인사들이 지구법학회를 결성하여 토마스 베리의 사상을 활발히 전파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발전은 필연적으로 복잡도가 높아지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기업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변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많이지는 것이 지구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부합하는 방향이기를 희망한다. 거버넌스가 만드는 네트워크 체제는 정보를 사방으로 보내는 통신망과 같고, 거미줄처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려주며, 추락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안전 그물이다. 이슈는 기업이 거버넌스 체제를 도입하고 실천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조직원의 자율적 권한강화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데 있다. 이사회와 경영자들이 엘리트 의식을 탈피하고, 전향적으로 조직원과 더불어 기업의 미래를 논의할 때 거버넌스는 정착하게 되고 기업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ESG를 돈벌이 혹은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한 새로운 MSG 조미료로 다루는 기업은 ESG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은 기업이다. 미시권력, 자기조직화, 그리고 네트워크 협동이 거버넌스 탄생의 모태임을 빨리 깨우쳐야, 우물쭈물 하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 그래야 100년 기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