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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칼럼] 이어령의 눈물방울

컴퓨터 저장 용량에 대하여 말하던 중 동료가 말했다. “미국에서 엄청난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무한대의 저장장치가 나왔대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런 저장장치가 있어요?”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직 못쓰고 있대요. 지난 수개월 동안 포맷팅하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른대요!” 아뿔싸! 낚였다. 무한의 개념세계와 구현기술의 유한함을 풍자한 유머로 생각된다. 수십년이 지난 예전 일이 생각났다. 이미 판매가 시작된 중형서버를 본사에서 갑자기 영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1'을 '3'으로 나누고, 다시 '3'을 곱하면 '1'이 안 나오고 0.9999999…의 무한소수로 처리하는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이유이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계산을 컴퓨터는 원래 이렇게 처리한다. 사람들이 이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버 플로우 방지 알고리즘이 작동하여 “1”로 바꿔 주기 때문이다. 원주율도 마찬가지다. 3.14…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원주율의 계산은 기원전 3세기 아르키메데스가 시작하여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장 최근의 계산은 2021년 8월 17일 스위스의 슈퍼컴퓨터로 108일 가량 계산한 결과, 62조 8318억5307만1796자리까지 계산했다고 한다. 의도를 가지고 자릿수를 끊어주지 않는다면 원주율이 들어간 공식의 계산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합리성은 무한의 속성을 유한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결정과 통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께서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방송 중에 “눈을 뜨고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인터뷰를 보았다. 매일 어둠속에서 죽음과 팔뚝 씨름을 하신다는 그분의 시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하신 듯하다. 그분에게 붙이는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는 당연하다. 한때 유한한 인간이 무한세계에 대하여 갖는 동경과 관심은 죽음 앞에서는 헛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줄기찬 호기심의 삶을 보내신 이어령 선생님을 추앙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노인이 되어 섬망으로 눈앞에 북망산이 어른거려도, 머리맡의 사자를 노려보며 죽음까지도 학습하려는 호기로운 선생님의 인생은 숭고함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과연 숨을 멈추는 절명의 순간에 무엇을 깨우치셨는지 궁금하다. 이 선생님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 낮추기도 하셨다. 아버지와 남편으로는 실패한 삶일 줄 모르겠으나, 죽는 순간까지 무한소수와 같은 미지의 세계를 알아내려는 지성의 여정을 보내셨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반인들은 감히 흉내를 내기도 벅찬, 탐구하는 '시대의 지성'이 가진 뇌는 과연 일반인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 는 2008년 말에 TED 출연해 놀라운 경험을 말했다. 그녀는 어느 날 뇌출혈로 좌뇌의 시냅스가 차츰 차츰 기능을 정지하는 경험을 실제로 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일은 좌뇌가 정지하자 사물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시간의 순서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간도 사라지고 우주와 나를 분리하는 경계도 사라진 순간, 그녀는 무한한 행복감을 누리는 열반의 감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책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원서명: My Stroke of Insight, 2009)'에는 뇌출혈 당시의 사건과 이후 8년의 회복 경험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칼 융(Carl Jung)의 이론처럼 사람의 뇌에는 네가지 마음이 있다고 설명했다. 합리적 지성을 보여주는 페르소나,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쉐도우, 잘될꺼야 하며 동기를 조장하는 에니머스(남성)/에니마(여성),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전우주적 교감을 이루는 진정한 나의 네 가지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감정을 얹는 기능은 뇌의 변연계가 담당한다. 변연계는 갓난아기 시절에 감각자극에 반응하면서 시냅스가 연결된다. 그렇지만 변연계는 평생동안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 버튼이 눌려지면 반응하는 능력은 성인이 되어서도 두살 때와 같다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감성은 한창 어린시절과 같다'는 의미이다. 감성이란 두살 때에 만들어진 시냅스로 충분한 것일까? 한창 나이에는 유년기의 이런 감정이 어디에 갔는지 사라져 버린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경계, 구조, 순서, 관계와 같은 합리성의 교육으로 세뇌된다. 어린 시절, 감성은 억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시니어가 되면서 감성은 합리성을 뚫고 슬그머니 모습을 들어낸다. 나이가 들면 쉽게 눈물이 나는 이유 같다. 이선생님은 여섯살에 굴렁쇠를 굴리다가 그늘까지 사라진 정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찰나의 정오에 무엇을 느낀 것인가? 여섯 나이에 우주적 교감을 통하여 죽음의 신비를 깨우친 것일까? 노인이 되어 죽음과 맞짱뜨면서, “생애의 절정이 죽음이고, 죽음이 한낮 정오”라고 말씀하시니 이 또한 무슨 말인가? 이 선생님은 핏방울, 땀방울, 눈물방울의 메타포로 삶의 무게를 표현하신 것을 보았다. 추정하건대 핏방울은 이념적 신념가치를, 땀방울은 주도적 삶을 꾸려나가는 노력, 눈물방울은 인간의 공감능력으로 해석해 보았다. 선생님은 “신념은 위험하다”고 말씀하며 핏방울을 경계했다. 그리고 “떼지어 살지 말고, 외롭더라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한 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라며 땀방울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씀의 끝은 눈물방울이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거라네!” 나는 아직도 여섯살짜리 아이가 퇴약볕 아래 굴렁쇠를 굴리다가 그림자도 사라진 한낮 정오에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어령 선생님처럼 죽음과 매일 팔씨름해야 알게 될까? 적어도 타인의 눈물방울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 공감은 합리성의 경계인 죽음을 허무는 힘이며, 생명을 연결하는 열쇠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이메일 서명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를 붙인다.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하며…

2022.05.03 16:39이정규

[이정규 칼럼] 초월적 인간능력학 개론

2019년 10월말 네팔의 한 젊은이가 전세계 산악인을 놀라게 했다. 그의 이름은 니르말 푸르자(NIRMAL PURJA). 세계적으로 용맹하기로 이름난 네팔의 용병 구르카(GURKHA) 출신이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형들을 따라 용병의 길을 선택하였고, 영국군 특수부대의 멤버로서 몇 년만 더 근무하면 연금을 받을 좋은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제대를 하고 PROJECT POSSIBLE 14/7이라는 등반계획을 짠다. 푸르자가 위대한 것은 프로젝트 이름처럼 단 7개월이 안되어 8천미터급 14봉을 모두 등정하는 신기록을 세웠다는 것이다. 푸르자 이전의 최단 기록은 故 김창호님의 7년 10개월 6일이었다. 목숨을 바쳐 도움을 주고도 백인의 이름에 가려 잊힌 네팔 셀파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도전했다고 한다. 그를 보면 도대체 인간 능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진다. 때때로 후배가 경력개발에 대한 조언을 청할 때가 있다. 이 경우 내가 자주 들먹이는 키워드는 정체성(IDENTITY), 지배가치(GOVERNING VALUE), 능력, 역량, 지식 그리고 스킬과 같은 말이다. 정체성은 지배가치(혹은 지배원칙)와 통하는 단어로서 이것이 분명치 않으면 장기적 경력개발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인생을 항해로 비유해 본다면, 배에서의 나의 역할이 정체성이고, 배가 향하는 방향이나 목적지가 지배원칙이 된다. 정체성이나 지배가치는 모두 상황 속에서 형성되는 관념이다. 미약한 정체성이나 다수의 정체성은 삶을 혼란으로 내몰아가겠지만, 지배가치는 여럿 가질 수 있고 가치별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도 있다. 그 다음 용어인 능력, 역량, 지식, 스킬의 경우는 뜻이 엇비슷하여 구분이 쉽지 않다. 능력을 넓게 정의한다면 역량, 지식, 스킬의 개념을 포괄한다. 그러나 지식은 행동을 상정하지 않지만, 능력, 역량, 스킬은 행동을 전제한다. 비행기 조종법 매뉴얼을 달달 외어서 지식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비행기를 다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 능력과 역량은 어떻게 다를까? 역량(COMPETENCY)과 능력(CAPABILITY)은 한글로는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래서 전자사전에서'역량'이나 '능력'을 검색하면, 영단어 두개가 같이 제시되곤 한다. 역량의 라틴어 어원인 COMPETENTIA는 '자격 충족'의 뜻을 가지고 있고, 능력의 라틴어 어원인 CAPABILIS는 '파악하거나 보유할 수 있는'의 뜻을 가진다. 라틴어 의미로도 이해가 쉽지 않지만, 두 용어의 뜻은 경영학에서 다음 세가지의 관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로 시간 개념의 차이가 다르다. 역량은 현재형이지만, 능력은 미래 시간을 포함한다. 당장은 직무 역량이 미흡하더라도, 회사가 인내하는 시간 안에 직무역량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면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업무 도메인의 차이가 있다. 역량은 직원의 직책과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지만, 능력은 직무 독립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발팀에 근무하는 K가 프로그램 역량은 미흡하지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세번째 차이점은 집단 적용의 관점이다. 영어단어 CAPABILITY(능력)는 개인과 조직레벨 모두에 활용가능 하지만, COMPETENCY(역량)는 개인역량에 한정해서 사용한다. 물론 이상의 설명은 영어단어에 따른 구분이다. 한편 능력의 범주는 두가지가 있다. 도메인 의존적인 능력과 도메인 초월적인 능력이다. 니르말 푸르자는 용병이었고 산악인이 되었다. 그러나 용병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무기를 다루는 능력은 산악인의 능력과 호환된다. 극한의 과제에 도전했던 니르말은 군인과 산악인 사이에 공유될 수 있는 도메인 의존적인 능력을 갖춘 것 같다. 아울러 도전을 즐기는 마음, 셀파의 기치를 높이겠다는 스토리텔링, 그리고 함께 등반했던 셀파와의 팀워크 덕택에 최고의 효율을 발휘했다. 하지만 천하의 니르말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도전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변화된 환경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도메인 초월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적응해 나갈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이질적인 주체와 뜨개질하듯 매듭으로 엮어진 사회이다. 이질적인 존재는 서로 다른 도메인 환경에서 성장한 주체들이니, 결국 미래의 능력은 도메인 초월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 도메인 초월적인 능력은 무엇일까? 이미 OECD와 같은 글로벌 조직의 교육모델이 어느 정도 도메인 초월적인 교육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OECD는 2003년에 DeSeCo(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es)라는 프로젝트의 결과, 다가올 세상의 핵심 역량으로 다음의 3가지를 들었다(OECD, 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ies: executive Summary, 2003). *도구의 지적활용 능력(Use tools interactively) *이질적 집단과의 상호작용(Interact in heterogenous group) *자율적 활동(Act autonomously) 모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능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인공지능이 지배할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지 불안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운명의 시간을 특이점(Singularity, 싱귤래러티)이라고 부른다. 과학개념상으로 싱귤래러티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인과관계를 공식으로 계산해 낼 수 없는 위상파괴의 시공간을 말한다. 천체물리학에서는 빅뱅과 블랙홀과 같다. 또한 싱귤래러티의 개념은 한번 파괴된 위상은 회복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인간지능을 넘어선 AI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세상이 오면, 그 역사를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하니 인류에게 두번의 기회는 없다.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조만간 싱귤래러티의 세상이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술이 인류의 웰빙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의견과 재앙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되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기계와 인간의 경쟁을 말할 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미국 개척시대 철도 건설의 영웅 존 헨리(John Henry)의 서글픈 이야기이다. 1870년 헨리를 고용한 C&O 철도회사는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증기의 힘으로 암석에 다이너마이트 구멍을 뚫는 스팀 드릴을 도입한다. 인간이냐 기계이냐? 보스의 내기 제안에 가장 힘센 스틸 드라이버인 헨리가 나섰다. 반나절 동안의 작업시간 동안 스팀 드릴은 9피트(약 2.7미터)의 구멍을 뚫었는데, 헨리는 15피트(약 4.5미터)를 뚫고 극적으로 승리한다. 그러나 헨리는 용을 너무 쓴 나머지 바로 누워 버렸고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미국 어린이의 유명 동화가 된 이야기는 뛰어난 인간이라도 자동기계를 이용하는 일반 사람과 경쟁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미래학자들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연장선에서 미래사회를 예측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어떻게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나가야 할지 대안을 제시한 경우는 많지 않다. 혹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여도 주로 환경변화에 따른 적응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인식의 핵심은 왜 우리는 “적응만을 이야기하는가?”하는 것이다. 디즈니 채널의 영화 중에서 조지 클루니(프랭크 워커 역) 주연의 투모로우랜드(Tomorrow Land)가 있다. 영화에는 두개의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선형적 공식에 따른 확률 100%로 디스토피아를 예언하는 인공지능(나쁜 늑대의 메타포), 그리고 꿈꾸는 사람을 찾게 디자인되었고 인류에 헌신하는 인공지성 로봇(좋은 늑대의 메타포)이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 케이시 뉴튼과 좋은 인공지능 로봇인 아테나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여주인공 뉴튼은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아니라 인공지능과 더불어 공존하는 웰빙 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영화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선언적 메시지로 끝이 난다. 워커: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떠벌리는 사악한 건물을 허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정말 어려운 건, 그 자리에 뭘 짓는가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우리 둘이선 못해요. 여러분이 필요하죠. …뉴튼양. 뭘 찾아야 하는지 말해 줄래요. 뉴튼: …꿈꾸는 사람들. 우리가 찾는 건 꿈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착한 늑대(좋은 인공지능)에게 먹이를 줄 사람. 워커: 난, 여러분 전임자(로봇 아테나)에게 0과 1로 만들어졌다고 비아냥댄 적이 있어요. 내가 틀렸던 거죠. 그 이상이었어요. 여러분도 그 이상이지요. 여러분이 할 일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는 겁니다. 그것이 인류의 미래니까! 젊은 세대들이 더 나은 미래와 웰빙 세상을 욕망하고, 선형적인 적응 보다는 경로이탈과 경로도약을 감행하는 용기가 있는 초월적 능력자가 되기를 고대한다. 그런 여러분에게 인공지능은 영화의 인공지성 아테나와 같은 친구가 될 것이며, 싱큘래러티가 만들 디스토피아는 없다! 나쁜 늑대에게 무릅을 꿇지 말고, 좋은 늑대를 양육하자.

2022.02.14 13:28이정규

[이정규 칼럼] 호모 데우스 말고, 더불어 즐기는 사람

서사시처럼 인류 탄생의 스토리를 써내려 간 '우주여행(Journey of the Universe)' 이라는 책이 있다. 진화의 시원을 173억년전 빅뱅 시점의 암흑물질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설명이 이채롭다. 책의 내용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글은 인류 진화의 원동력을 젊은 세대에서 찾는 다음의 글이다. "어린 포유동물의 행동은 성인의 관심과 다릅니다. 그들이 몰두하는 일은 놀이 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탐험합니다. 그들은 입으로 맛봅니다. 그들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서 살아있는 충만함을 발견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욕구와 욕망이 기성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적 제약을 깨부수는 융통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젊은 세대의 놀이가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사고의 틀을 깨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플라톤은 머리를 이성과 지성이 거하는 곳, 심장을 의지와 도덕이 발휘되는 곳, 위장을 욕구와 욕망이 발생되는 곳이라 정의했다. 그래서 훌륭한 인간은 선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고, 자신의 의덕(意德)을 통해서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머리가 몸의 다른 지체보다도 고귀하며, 다른 지체는 머리보다는 위격이 낮으니 당연히 머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욕구와 욕망을 저급하게 간주했다. 자연이 욕구와 욕망에 집착하는 젊은이는 통제의 대상이며 어느 시대이건 기성세대에게는 문제 집단이었다. 그러면 현대의 기성 세대에게 어느 것이 가장 가치 있는 품성일까? 이를 위해 경영의 세계에서 강조되어 온 가치지표를 살펴보자! 바로 효과와 효율이다. 효과는 달성정도와 관계되고, 효율은 투입 산출량과 관련된다. 기성세대가 숭배하는 합리성의 쌍둥이 자식이 바로 효과와 효율이다. 최진석 교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에서 합리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합리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은 이미 있는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생각이 꼭 합리적이어야만 하나요? 왜 기존에 있는 것들과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하나요… 왜 우리가 하는 생각들이 항상 합리성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나요.” 이처럼 그는 합리성에 접근할수록 우리가 기존 체제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어떤 시점에서 논하는 효과와 효율은 기성세대가 이룩한 사회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합리적 방법론과 통한다. 그러나 젊은이의 타고난 욕구와 욕망에 효과와 효율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BTS ARMY의 팬덤 현상이나, 춤에 미친 스우파(Street Women Fighter) 멤버의 열정도 합리성의 멘탈 모델에 물든 기성세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합리성은 젊은이의 꿈을 앗아간다. 몇 년 전 파주에서 작가 장석주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21세기는 재미가 성공의 척도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재미로 삽니다. 돈이 많이 있더라도 재미가 없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 재미를 남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은 더욱 성공한 사람입니다. 21세기는 뭐든지 끌어안는 사람의 세계였다면, 21세기는 나누어 주는 사람, 주변에 자기 것을 넓게 뿌리는 사람의 세계입니다.” 미드 드라마 '루시퍼'의 최종회에 이런 대사가 있다.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요. 그보다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가 더욱 중요하지요!”젊은이는 물려받은 시스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도구가 아니다. 저마다 호기심에 충만하여 세상과 꿈을 탐험하며 놀이하는 주체이다. 베스트셀러 '호모 데우스(HOMO DEUS)'에서는 인간이 지구상의 월등한 우세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도구를 잘 만들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그 힘의 원천은 다른 동물 보다도 집단의 협업 능력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MAN OF GOD)'이라는 뜻이다. 영생하고 싶은 욕망으로 궁극의 과학적 성취를 통해 신과 같게 된 미래사회의 인간모습을 예언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너무 먼 시간 후의 이야기 같다. 내 생각에는 신이 된 인간에 도달하기 이전에 '즐기는(MAN OF ENJOYING)' 인간이 먼저다. 그러하니 호모 데우스 이전에 호모 프루엔스(HOMO FRUENS)의 세계다! 그것도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즐기는 인간이다. 더불어 잘 노는 젊은이가 세상을 바꾼다. IT업계의 후배들이 지난해 보다 좀 더 재미난 새해를 맞이하기를 희망한다.

2021.12.27 19:36이정규

[이정규 칼럼] 페이스북, 너 누구냐?

페이스북의 비도덕적 경영행태에 대한 프랜시스 하우겐(Frances Haugen)의 내부고발이 IT업계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그가 미국 상원에서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소셜미디어가 청소년에 미치는 해악을 무시하였다. 또한 수익 우선의 알고리즘으로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가짜정보와 여론 조작을 방관했으며, 대테러 모니터링을 등한시함으로써 사회 안전에 위협을 주었다. 이번 일을 나름 풀어 본다면,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whistleblower)가 “너 누구냐?”하며 기업 정체성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 사건이라 해석한다. 정체성이란 존재할 이유와 관계된다. 그러므로 기업에게 “너 누구냐?”하며 묻는 일은 결국 회사의 존재이유를 따지는 것과 같다. 공동체에게 주는 이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적지 않다면 이처럼 기업의 정체성은 도전 받게 된다. 정체성은 개인과 그룹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 개인에게 정체성이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게 만드는 특성이다. 이를테면 멘탈 모델, 행동패턴, 경험이력, 자의식과 자존감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것을 모두 포괄한다. 정체성에 혼돈이 생기면 중음신(中陰身)처럼 떠돌며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반면에 기업 정체성은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유사성에 관련된다. 이러한 유사성은 구성원 간에 합의된 명분이나 공유된 비밀, 소속감, 역할 활동과 같은 것이며, 제복과 위계, 집단에서만 사용되는 언어, 관행이나 예식, 공유된 기업 철학과 직업윤리 등으로 표출된다. 기업 정체성이 혼란에 빠지면 이탈하는 직원이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 이직률은 기업의 계속사업을 예측하는 훌륭한 측정지표이기도 하다. 정체성은 긍정과 부정의 가치가 공존한다. 하우겐의 이번 고발은 개인의 긍정 정체성이 기업의 부정 정체성과 충돌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개인과 조직의 정체성이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하우겐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이 소속 회사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려는 시도는 자신의 인생을 거는 일과 같다. 개인이 건강하게 살려면 삶 속에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에서 기업의 건전한 정체성은 조직 존립의 뼈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은 영원 불변하지 않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천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정체성과 사업을 영위하는 사회 환경은 절대로 따로 떼어내서 설명할 수 없다. 생활환경이 각박해지면 사람이 이기적 모습을 보일 수 있듯이, 경쟁이 심화되거나 시장환경이 열악해지면 기업도 탐욕적으로 바뀌기 쉽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기업의 초심은 사라지고 이윤 극대화의 욕심만 남게 된다. 아마도 영속기업이 어려운 이유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조직의 정체성을 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주어진 환경이 사람이나 공동체에게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때, 자기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대한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이 있다. 바로 스탠포드 대학의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이하 SPE) 이다. SPE 실험은 원래 1971년 8월14일 토요일부터 2주간으로 계획되었다. 日當 14불의 신문광고에 혹하여 공모한 70명의 대학생 지원자 중에서 마약이나 전과 같은 결격사유가 없는 중산층 출신의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별하였다. 이들을 동전 던지기를 통해 죄수와 간수 각 12명으로 나누었다. 대학의 심리학과 빌딩 지하에 마련된 실험공간은 최대한 감옥과 같은 모양새로 만들었다. 감옥 설계는 17년간 옥살이 경험이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으며 복종 않는 죄수를 세워서 가두는 Hole이라는 특별 감옥까지 설계하였다. 이후에 감옥에서 벌어진 간수와 죄수와의 대결, 죄수에 대하여 갈수록 악랄해 가는 간수의 학대, 고문, 성적 수치심 자극 등의 사건은 전과정이 테이프로 녹화되었다. 계속되던 실험은 담당교수가 정신을 차린 끝에 6일만에 조기에 종료되었다. 한편, 미국은 알카에다 무장단체가 감행한 2001년 9.11 테러의 군사적 보복의 연장으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다. CIA는 의심스러운 사람을 바그다드 서쪽 32키로미터에 위치한 아브 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 수감한다. 이곳에서 미군에 의하여 자행된 참혹한 포로학대 사건은 간수들이 자발적으로 촬영한 1천여장의 사진이 외부로 노출되면서 전세계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발생시점은 다르지만 두개의 사건은 마치 감옥소 평행이론과 유사하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SPE 실험을 주관했던 짐바르도 Philip Zimbardo 교수는 36년이 지난 2007년 두 감옥의 사례를 모티브로 하여 루시퍼 효과Lucifer Effect라는 책을 펴냈다. 책에서 짐바르도 교수는 감옥에서 인간의 성격을 결정하는 힘을 아래의 세가지로 설명했다. * 개인의 기질(individual disposition): 섞은 사과가 누구냐? * 외부적 상황(external situation): 어느 것이 섞은 사과가 든 상자이냐? * 시스템의 힘(systemic power): 누가 이 나쁜 사과상자를 만들었냐? 짐바르도는 3개의 힘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시스템이라 선언한다. 물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도 남보다 더욱 악행을 일삼은 섞은 사과(간수)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누구든 그러한 시스템에 들어간다면, 아무리 선하고 원칙에 충실한 개인도 입을 다물고 방관하거나, 수동적이라도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나쁜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에게 궁극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시스템을 누가 설계하고 수정할 수 있는가? 회사의 대표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업에서 벌어진 일탈에 대하여 오너가 직접 설명해야 하며, 책임을 몇 명의 썩은 사과(임직원)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수하 직원이 자신의 힘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적 폭력의 재발 방지를 위해 짐바르도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슈퍼히어로' 교육을 제안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세대는 언제나 젊은 세대였다. 기득권 세대가 방관하거나 디자인한 폭력적 시스템을 향해 '호루라기 부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들으니, 세상을 바꾸는 교육의 힘에 대하여 동서양의 인식이 같은 듯하다. 페이스북에 대한 정체성 이야기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온라인 게임사인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성희롱, 국내 소셜미디어 기업의 검색 순위조작, 직장내 괴롭힘, 골목상권 파괴와 같은 사건은 기업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기업이 사람보다 재무적 성과를 앞세울 때 시스템의 폭력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아브 그라이브 사건을 “일부 썩은 사과” 이슈로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만든 “섞은 사과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가 아니다. 잘못된 시스템이 유발하는 폭력은 해당 조직이 폐망의 문지방 위에 서있다는 표징이다. “모두 내 탓입니다” 하고 대표가 나설 시점이다. 조직이 괴물이 되기 전에 고장난 시스템을 멈추고, 조직 정체성을 원복 시켜야 할 “Moment of Truth(진실의 순간)”이다.

2021.10.25 11:15이정규

[이정규 칼럼] 메타버스와 오염된 피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이며,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괴기스러운 '크툴루' 환타지 세계의 창시자인 소설가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말이다. 그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다가올 일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면 무서움이 덜하다는 뜻과 통한다. '예측 가능성'은 철길을 따라 가듯 현재의 일이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선형적 믿음'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맥락상 선형적이다. 관성과 중력이 통하고, 힘을 가하면 구부러지거나 늘어난다. '뉴턴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 공식으로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다. 이론을 만들어 내는 연구방법인 연역법과 귀납법도 선형적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독립변수의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추이를 예측하는 회귀분석도 선형적인 미래 예측법의 하나이다. 축적된 데이터로서 미래를 예측하는 인공지능과 기계학습 역시 과거의 패턴이 미래에도 높은 확률로 계속될 것이라는 선형적 믿음에 기반한다. 러브크래프트의 통찰과 같이, 인류는 선형적인 가정에 기반한 예측 이론으로 미지의 공포를 극복해 왔다. 그러므로 공포는 불연속을 대면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현재가 뻗어져 나간 경로 상에 있는 미래를 그려보지만, 기대와는 아주 딴판인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면 두려움을 느낀다. 기울어진 방향을 서서히 바꾸는 곡선은 직선은 아니지만 선을 따라가니 맥락상 선형적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거나 갑자기 끊어져 버린 기차길처럼, 원인과 궤적을 추적할 수 없는 불연속의 미래는 선형적이지 않다. 불연속의 사건은 도대체 가늠이 안되고 계산할 수 없으니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공포 영화에서는 불연속의 시간과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방금 죽었는데 부활한 좀비, 괴수로 변하는 사람,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림자,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순식간에 나를 덮치는 장면 속에서 관객들은 놀라 까무러치고 괴성을 지른다. 예측하지 못한 사물을 대면하니 무섭고 두렵지만, 그래도 영화가 허구라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으니 스릴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현실의 세계에서 불연속은 재미가 아닌 불편함과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멈추어 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는 순간, 당신은 어색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내 몸이 아주 잘 적응했기 때문에 생긴다. 에스컬레이터가 평소처럼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니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선형적 세계에서 비선형적 세계로 이동하는 일이 이와 같다. 그러나 일단 다른 세계에 진입하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일들이 점차로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미래를 선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같다. 생뚱맞았던 불편함의 時空이 하루하루 익숙해지는 時空이 된다. 이러한 학습과 적응의 가변적 시공간을 혹자는 薄明의 시공(Twilight zone)이라 부른다. 박명의 시공은 불편한 혼돈과 적응이 공존하는 시공이다. 태양이 비추어 사물을 명확하게 보이는 낯 시간도,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지척을 알 수 없는 한밤중도 아닌 안개속과 같은 어중간한 틈새 시공간이다. 다가오는 동물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어슴푸레한 땅거미의 시간이다. 이렇게 피아 구별이 어려운 박명의 시공간, 선형과 비선형이 공존하는 시공을 IT기술이 창조했다. 바로 메타버스(Metaverse, 초우주)이다. 메타버스라는 말은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Snowcrash(1922)라는 SF소설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세계 굴지의 IT 기업들이 메타버스를 미래의 먹거리 사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기업이 경쟁적으로 엄청난 기술투자를 한다면 영화 'Ready Play One'의 가상 우주가 한 세대 다음에 진짜로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컴퓨팅 파워가 만드는 저해상도 가상공간은 사람의 오감을 속일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발전하는 영상 처리능력이 우리의 감각을 완전하게 속일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의 가상공간을 언젠가는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메타버스의 기술이 궁극에 다다르게 된다면 '먹는 것, 자는 것, 배설하는 것' 외에는 우리의 오감을 완전히 속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루에도 서너 시간씩 인터넷에 연결되어 생활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후손은 메타버스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은 아주 높다.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제2의 생을 메타버스가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타버스 세상에서 꿈꾸던 인생을 살아가고, 가상 자산을 획득하고 축적하며 커뮤니티 안에서 대인 관계를 넓혀갈 것이다. 신뢰할 경제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그곳에 투입한 가상자본의 교환가치가 갈수록 증대할 것이다. 그 결과 메타버스의 지속가능성이 나날이 탄탄해질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메타버스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마음대로 바뀌고, 공간도 순식간에 바뀐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아바타로 살아간다. 덕분에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제2의 인생을 원하는 모습으로 대신 살아갈 수 있다. 2개의 언어를 배우는 젓먹이의 혼돈처럼, 메타버스가 만들 시공간은 삶의 경계가 모호한 박명의 시공이다. 그런 메타버스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는 'We can do that' 이라는 이태리 영화가 적절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태리는 1978년 전국의 모든 정신병원을 폐지하는 바실리아법을 통과시킨다. 정신과 의사인 바실리아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이 법의 영향으로 정신병자를 커뮤니티로부터 격리시키던 전국의 정신병원은 점차로 축소되어 1998년 완전히 사라졌다. 영화에서는 정신병동의 감방에서 나와 갈 곳이 없어진 정신병자들을 혁신적 리더가 협동조합의 주인(조합원)으로 초대한다. 아무도 안될 것이라는 주변의 의구심 속에서, 그들은 좌충우돌하면서 '감방이 없다'는 뜻의 '논첼로(Noncello)' 라 불리는 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가꾸어 간다. 기억과 정신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는 정신병 환자들이 말이다. 이영화는 엄청난 담론의 소재가 되지만, 소수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인간 정체성의 답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정신병자는 어떤 의미에서 경계의 세계인 박명의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이다. 어슴푸레한 틈새의 정신 세계에 갇혀 있던 그들의 이야기에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절대명제는 미친 사람에게는 들어 맞지 않는다. 우리의 오감을 속여 기억과 정신의 眞僞가 오락가락하는 메타버스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개의 우리는 선형적인 세상에서 자신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다. 사람마다 소속된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공유된 경험과 보편적 가치관이 통하는 세상이니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한다면, 당신은 박명의 시공에 진입했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메타버스와 같은 박명의 시공에서 아바타로 살아가는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상대가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가상세계에서 사람은 자신이 설정한 아바타의 외양에 따라 행동을 한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점잖던 사람도, 자신을 악당 아바타로 설정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구 총질을 해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러한 메타버스 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잘 설명해 주는 귀한 사례가 있다. 바로 WoW 게임에서 2005년 9월에 벌어진 “오염된 피(corrupted blood)”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개발자가 악의 없이 만든 무증상 전염병과 관련된다. 무증상 팬데믹에 감염된 게이머들과 NPC(non-player character)들이 텔리포트를 통해서 쉘터에 돌아와서 커뮤니티를 괴멸하게 만든 사태가 벌어졌다. 전염병에 노출된 아바타들의 행동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만 죽기 억울하다고 주변에 마구 전염병을 전파했던 자, 다른 아바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용한 곳에 자신을 격리했던 자 등, 아바타마다 서로 다른 유형의 행동패턴을 보여주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위적인 질병전파 연구가 불가능 하기에, 가상공간의 전염병 사건은 예방의학자들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고호트별로 특정된 게이머 군집단의 행동패턴에 대한 무궁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팬데믹이 출현하면 어김없이 '오염된 피'의 스토리가 기사로 나오곤 한다. “Epidemiology(2007)와 corrupted blood”로 인터넷 검색하면, 이 사건에 대한 전염병학회지의 논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메타버스 세상에서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고는 인간 관계를 쉽게 맺을 수 없다. 옆에 있는 아바타와 공유된 경험과 보편적 가치관이 미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바타의 모습이지만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제2의 삶도 지속될 수 없다. 현실이던 메타버스이던 나의 정체성은 설명가능해야하고, 그래야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존속된다. 모든 아바타들이 좀비가 되어 날 뛰는 '오염된 피'의 세상이라면 가상공간이라 한 들 꿈같은 제2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메타버스를 살아갈 인류에게 영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정체성에 대한 시사점을 상기시켜 준다. “우린 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 양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행동이다.” 박명의 시공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당신이 품격있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방법은 상황이 어떠하든 '사람다운 행동'에 답이 있다. 정신병자로 배척받았지만 멋진 성공을 일구어낸 논첼로 조합원, 그에 앞서 정신병자에 대한 마음속의 차별주의를 깨부수고 혁신 환경을 일구어 냈던 선구자처럼 말이다.

2021.08.24 11:03이정규

[이정규 칼럼] ESG 경영과 MSG 조미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조상 중에는 어렸을 때 죽은 자는 하나도 없다.” 유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에덴의 강'이라는 책의 1장에서 독자에게 던진 말이다. 그의 말대로 수천 세대에 걸쳐서 우리의 조상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지 않았고, 하나 이상의 배우자를 만나 후대에 자녀를 둔 성공적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미래의 우리 후손은 어떨까? 우리의 노력 여하를 떠나서 지구 환경이 나빠진다면 예단하기 쉽지 않다. 개인의 생존과 결혼 의지와 별개로 무분별한 자원착취, 화석 에너지 남용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균형조절 실패는 갈수록 우리가 살아갈 지구 가정(家庭)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2000년의 UN MDG(새천년개발계획), 그리고 2016년에 시작된 UN SDG(지속가능발전계획) 프로그램이 이러한 걱정에 대한 초국가적 응답이었다. P4G 서울정상회의가 최근 종료되었다. 이 회의 역시 UN SDG의 맥락과 같은 선상에 있다. UN SDG의 핵심 키워드는 누가 뭐라 하던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너무 달라서, UN이 오랜 전에 답안을 내 놓았다. 1987년 노르웨이 총리 출신인 할렘 브룬틀란은 '우리들 공통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보고서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 시키는 발전'이라 정의했다.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방점을 둔 정의다. 경영의 세계에서는 지속가능성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범주에 포함했다. 그런데 일단의 경영자가 책임이라는 단어에 부담을 느꼈다. 이에 마이클 포터 교수는 2006년과 2011년 HBR 논문에서 CSR을 대신할 용어로 '공유가치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개념을 고안해 냈다. 다분히 기업친화적인 용어이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부담되는 말을 '공유된 가치'로 바꿔버린 것이다. 전지구적 지속가능성의 담론이 더욱 강해진 지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 둘러 가는 CSV 용어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기업들에게 최근 ESG(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라는 키워드가 압박을 주고 있다. 주주가치 증진을 지향하는 기업에게 '사회적'이라는 말에 환경과 거버넌스라는 부담을 얹었으니,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었다. ESG 역시 2006년 발표된 UN의 '책임투자의 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이 말을 안 들으니 UN이 분별 있는 기관투자가와 연대를 한 것이다. 어떤 학자는 헤지펀드 행동주의로부터 스튜어드십 행동주의로 기관투자가들이 움직이도록 UN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2019년 6월 기준 물경 80조 달러의 자본을 운영을 하는 2,450개의 기관투자가들이 이 원칙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기업이 ESG의 실천의지가 없다면 앞으로는 투자도 받기 힘들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에도 수백억의 투자환수로 정신이 번쩍 들었던 무기 제조사와 화력발전 관련 기업의 사례가 있다. '툰베리' 같은 청소년 환경운동가들이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쁜 ESG 기업으로 낙인이 찍힌다면 젊은 인재의 채용도 힘들어질 것이다. 2020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4개의 경영 컨설팅 업체가 22개의 정량적 핵심지표를 제안하여, 기업의 실질적 행동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지표는 4개의 기둥으로 구성된다. '거버넌스'는 딜로이트, '지구'는 PwC, '사람'은 KPMG, '번영'에 대한 지표는 Ernst & Young 이 설계했다. 이들 지표가 UN SDG 17개 지표와 연계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재무회계기준위원회, 국제회계기준위원회의 전통적 표준회계기준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회계와 공시기준을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켜야 할 규제는 사업이 된다. ESG 이행을 심사하겠다는 국내외 평가 기업들이 벌써 돈벌이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이들 업체들은 서로 다른 평가기준으로 기업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사의 교육 프로그램, 회원제 클럽, ESG 시상식 등에 일반기업을 끌어 들이려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ESG준수가 아직은 자발적 리포팅에 기반하고 있으니, 이러한 혼란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표준 프레임워크를 여러 NGO단체와 국제기구들이 앞다투어 발표하고 있다. GRI의 지속가능보고서, CDP(Carbon Disclosure Project), TCFD(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 WDI(Workforce Disclosure Initiative), CDSB(Climate Disclosure Standards Board) 등 약자의 뜻을 외우기도 쉽지 않다. 사안이 이러하니 대응하려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ESG는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일과 같다. 그래서 식견 있는 전문가들은 업종에 맞는 하나의 프레임워크에 집중하기를 권고한다. ESG의 주요 개념을 분석해 본다면 크게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당사자자본주의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From Shareholder to Stakeholder Capitalism) 이해당사자라 함은 기업활동의 영향을 받는 시민과 지역사회, 지구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된다. 둘째는 사회적 책임을 지구적 환경 책임으로 확대했다.(From Social to Environmental Responsibility), 셋째는 관리에서 거버넌스로 기업경영의 맥락을 바꾸어 버렸다.(From Management to Governance Context). 이중에서 이해하기 어렵고, 많은 오해를 받는 키워드가 '거버넌스'이다. 거버넌스는 기업이 잘못을 했을 경우 “왜?”에 답변해야 하는 설명 책무(Accountability)와 관련된다. 관리는 협력사나 부하에게 미룰 수 있지만, 거버넌스는 회사 밖 조직이나 부하에게 떠넘길 수 없는 조직 정체성에 관계된다. 원래 행정학에서 발전시킨 거버넌스의 개념은 엘리트 중심의 전통적 계층체제를 탈피한 시민 협치와 네트워크 사회를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이 여러 학제로 전파되면서 거버넌스에 대한 이질적 정의가 파생되었다. 특히 경영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거버넌스는 원래의 개념을 많이 벗어난 듯 하다. 그 이유를 풀어보자. 거버넌스 개념의 원형은 네트워크 관계철학에 기반하고 있고, 조직 내외의 이해당사자 모두를 동등하게 다룬다. 네트워크처럼 복잡하게 엮어있을 때 모든 개체는 하나 하나가 중요해진다. 그러하니 주주-이사회-경영진-부서장-직원으로 이어지는 계층적 통제조직인 주식회사 시스템과 거버넌스 개념은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디 행정학의 신 거버넌스 개념은 중앙의 엘리트 통제조직이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주식회사는 이사회와 같은 통제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사회는 법적으로 함부로 해체할 수도 없다. 주식회사의 정체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주식회사의 거버넌스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권한 보다는, 이사회의 권한과 역할을 이전 보다 더욱 포괄적으로 확대시켜 버렸다. 나는 거버넌스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거버넌스란 “미시권력을 가진 조직원이 환경변화 속에서도 활력적 유동성을 유지하고자 자원을 자기조직적으로 배치하고 고착화된 체제를 전향적으로 바꾸는 네트워크적 조정 활동”이다. 학문적 정의를 내리니 말이 어렵게 된다. 핵심 메시지는 이렇다. 거버넌스는 조직의 지속적인 유동성을 목적으로 하며, 엘리트에 의한 주도가 아니라 자기조직화하는 구성원의 자발적인 네트워크 협동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미시권력, 자기조직화, 네트워크 협동이 거버넌스의 키워드이다. 지속적 생존과 의사결정의 투명성은 좋은 거버넌스의 결과이지 선행조건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오너집안의 경제사범을 회사의 ESG 컨트롤 타워의 수장으로 앉히는 조직은 거버넌스가 안 되는 회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기업이다. 미시권력자인 조직원의 감시와 통제력이 미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CSR, CSV, ESG는 맥락의 범주는 다르지만 모두 '지속가능성'이라는 담론의 부분 집합이다. 그런데 더 멀리 나간 사람이 있다. 2009년에 작고한 '예수 수난회' 소속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라는 지구(신)학자이다. 그는 진화론을 수용하여 종교와 과학의 화해를 도모했던 예수회 소속 고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에게서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베리는 '위대한 스토리(Great Story)로 우주 안에서의 인류의 소명, 그리고 이의 깨우침을 통한 우주 완성의 위대한 과업(Great Work)'을 주창한다. 담론이 너무 크고 넓어서 그릇이 작은 내게는 설명이 벅차다. 이 사상의 핵심은 “우주는 물체 집단이 아니라, 주체의 친교이다.(The universe is a communion of subjects, not a collection of objects)” 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한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토마스 베리의 담론이 너무 우주적이라 아직 경영의 세계 까지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먼저 응답한 분야는 법철학이었다. 바로 지구법리학(Earth Jurisprudence)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 재 낀 것이다. 지구법학의 신봉자들은 전통적인 인간 중심적 법철학은 궁극적으로 지속가능성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발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물체로 소외시키지 않고, 물질을 포함하여 말 못하는 생물들을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우주 안의 주체로서 정당하고 존엄 된 주인으로 간주할 때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지구법학 관점에서 지구의 모든 구성 요소는 예외 없이 모두 중요하다. 사람 역시 구성원의 하나일 뿐, 다른 구성요소를 마음대로 착취할 권한은 없다고 선언한다. 단지 인간은 성찰이 가능한 존재로서, 지구 공동체를 위한 청지기(Stewardship)의 의무를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 지구법학의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CSR, CSV, ESG 역시 인간중심적 담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고 단언한다. 현재의 법률이 인간친화적이며, 지구친화적 법보다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유기견을 함부로 대하면 사람이 감옥에 갈 수 있듯이, 지구친화적 법이 인간친화적 법 위에 위치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국제사회의 식견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결집하고 움직이고 있으니, ESG는 물론 이보다 큰 지구친화적 행동주의는 지금보다 더욱 널리 전파될 것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일단의 진보적 법조계 인사들이 지구법학회를 결성하여 토마스 베리의 사상을 활발히 전파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발전은 필연적으로 복잡도가 높아지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기업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변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많이지는 것이 지구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부합하는 방향이기를 희망한다. 거버넌스가 만드는 네트워크 체제는 정보를 사방으로 보내는 통신망과 같고, 거미줄처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려주며, 추락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안전 그물이다. 이슈는 기업이 거버넌스 체제를 도입하고 실천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조직원의 자율적 권한강화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데 있다. 이사회와 경영자들이 엘리트 의식을 탈피하고, 전향적으로 조직원과 더불어 기업의 미래를 논의할 때 거버넌스는 정착하게 되고 기업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ESG를 돈벌이 혹은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한 새로운 MSG 조미료로 다루는 기업은 ESG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은 기업이다. 미시권력, 자기조직화, 그리고 네트워크 협동이 거버넌스 탄생의 모태임을 빨리 깨우쳐야, 우물쭈물 하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 그래야 100년 기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2021.06.07 10:26이정규

[이정규 칼럼] 대리인 경영론

미소 냉전의 긴장감이 고조됐던 1961년 9월 25일, UN 총회장 연단에 오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연설 시작 8분 여만에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남녀와 아이들은 사고, 오판 혹은 미친 짓 때문에 언제든 떨어질 지 모를, 가장 가는 실에 매달린 다모클레스의 핵폭탄 칼(a nuclear sword of Damocles)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해진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은 로마시대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인 키케로(Cicero)가 말년에 쓴 '투스쿨란의 대화(Tusculanae disputations)' 5권 21장에 실린 스토리에서 유래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시라쿠사(Siracusa)의 폭군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25살에 정권을 장악하여 38년 동안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권력자 밑에는 아첨배도 있는 법. 신하인 다모클레스는 주인의 재산, 강력한 권력, 무한한 즐거움, 황홀한 궁전 등.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왕처럼 행복할 수 없다며 칭송한다. “다모클레스! 나처럼 한번 살아보겠나?” 왕은 화려하게 장식된 금침대, 금은실로 수를 놓은 옷, 수려한 하인들의 시중, 산해진미 음식으로 차린 식탁, 진귀한 꽃과 향내음 속에 다모클레스를 파묻히게 만들었다. 왕좌에 앉은 다모클레스가 행복에 겨워 하는 와중에 왕은 번뜩이는 칼날의 검을 한오라기 말총에 묶어, 다모클레스의 정수리를 향해 천정에 매달도록 명령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금은보화, 맛난 음식과 호화 찬란한 주위 환경이 다모클레스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외견상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왕좌가 겉보기와는 달리 수많은 정적들로 부터 언제 권력을 빼앗길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고통스러운 자리임을 다모클레스에게 온몸으로 느끼도록 한 듯 하다. 이러한 다모클레스의 일화를 경각에 달린 안보상황으로 비유한 케네디 대통령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외견상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자의 보이지 않는 비애를 외둘러 표현하려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유권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 혹은 독선적인 경영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의 비유로 말하려 한다.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는 사회과학 이론에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위임받은 권한범위 안에서 주인을 섬겨야 해야 하는 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싶은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조직관리의 많은 에너지는 대리인이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잘 유지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에 쓰인다. 작게는 주주-이사회-경영층의 내부통제 구조가 그렇고, 크게는 정치인을 뽑는 선거활동에도 많은 사회적 비용이 사용된다. 의뢰인과 변호사 관계, 생산자와 유통업체 사이에서도 제한된 범위(법률서비스, 판매활동)에서 대리인 관계가 성립된다. 서비스 비용을 받지만 대리인 관계가 아닌 직업도 있다. 감사 보고서를 내는 경우, 회계사는 회사의 대리인이 아니다. 불특정 투자자의 공익을 위하여 재무제표를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창업자에게 대리인 이론은 남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누구에게 위임 받지 않았고,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일구워낸 성과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조직원을 대하는 일부 몰지각한 사장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지난 4월 2일 작고하신 채현국 선생님의 일갈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채 선생님은 불특정 다수인 국민이 회사의 주인이며, 창업자 역시 그들의 재산을 잠시 맡아 기여한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 있으신 듯 하다. 채 선생님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 아래 대리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최근의 투표결과에 권력의 대리인이 당황스러워 한다. 그 자리에 오를 때에는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던 유권자들이,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해댄 때문이다. 비루할 지언정 '평범한 사람의 집단적 선택은 신의 섭리를 반영한다.' 열심히 일했다는 진정성을 들이대며 자연의 섭리와 싸울 일이 아니다. 기대와 다른 주인의 심판이 있었다면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반추하고 노선을 바꾸어야할 시점이다. '이 워꼬!”하는 화두를 던져, 세상과 담론을 나누며, 새로운 가설을 고안해야 한다. 권력의 대리인, 경영의 대리인들은 채 선생님이 말씀하신 융통과 포용의 다음 말씀을 다시금 새겨 들어야 한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유권자와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일은 언제 떨어질 지 모를 다모클레스의 검날을 살피는 일이고, 주인이 갖는 신뢰의 말총 끈을 강화시키는 길은 융통과 포용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고하신 채현국 선생님을 기리며, '다모클레스의 칼'로 대리인 경영론의 메타포 하나를 꾸며본다.

2021.04.14 14:35이정규

[이정규 칼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과 디지털 역량(DC)

인터넷이 널리 알려지기 이전인 1995년 인터넷 카페를 방문한 적 있다. 모뎀에 연결하여 사용하는 비디오텍스(videotex) 기반의 하이텔, 천리안이 원시적 소셜 미디어로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IT업계의 직장인들에게도 하이퍼텍스트로 서핑 하는 넷스케이프 브라우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만큼 홍익대학교 앞에 'NETSCAFE' 인터넷 카페가 개점했다는 뉴스는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카페 사장과 연락이 됐고, 모시던 상사와 함께 홍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K대표의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인터넷은 기득권층이 독점해온 정보에 일반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더욱 가속시킬 것이며, 자신은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고교 동창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를 나는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인터넷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변화될 미래를 내다본 나비였고, 나는 “뭔 말이지?”하는 애벌레였다. 트랜스포메이션(변환)은 이질적인 도메인을 건너는 일이다. 그래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기술로 넘어가는 혁신을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이하 DX)'이라 한다. IDC는 DX를 '신기술을 사용하여 프로세스, 고객경험과 가치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즉 아날로그식 기술이나 모델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 혁신을 통해 뼈 속까지 디지털기업(digital native enterprise, 디지털태생기업)을 만드는 일이라 설명한다. DX은 넓은 의미로 디지털 기술과 기업목표의 전략연계 방법이다. 전략연계는 목표와 수단을 통제하는 활동으로, 가치의 효과적 지향(orientation)과 자원의 효율적 정렬(coordination)을 의미한다. 혁신은 운영혁신과 파괴혁신이 있다. 운영혁신은 지속적 개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파괴혁신에 비로서 트랜스포메이션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파괴는 과거를 부수고 새것을 만든다는 뜻이며, 한편으로 조직문화의 통편집을 의미한다, 부수지 않으면 새것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파괴가 없는 트랜스포메이션은 없다. 이렇게 말하니 트랜스포메이션의 개념이 새로워 보이지만 과거의 전략 이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례로 1993년 하바드비즈니스리뷰(HBR, Jan-Feb)에서 트레이시(Michael Treacy)와 위어세마(Fred Wiersema)는 기업전략의 3가지 보편적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운영탁월성(operational excellence), 고객친밀감(customer intimacy), 제품리더십(product leadership)이다. IDC가 DX의 정의에서 언급한 '프로세스'혁신은 '운영탁월성'에 관련되고, '고객경험'혁신은 '고객친밀감'에 연관되며, '제품가치'혁신은 '제품리더십'과 맥락이 비슷하다. 우리는 상상력이 투영된 영화에서 미래를 본다. DX가 만들 미래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어떤 SF 영화에서 가상세계에서 쇼핑한 디지털 물건을 현실세계로 넘어오면서 실제 물체로 변환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인간의 복제는 물론이고 기억과 감정까지도 디지털로 변환하고 전송하는 영화 줄거리도 보았다. 인간 정체성을 헷갈리게 만드는 섬뜩한 상상이 넷플릭스 '미드' 프로그램에 넘쳐난다. 그러나 DX는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웍스테이션에서 설계한 3차원 솔리드 디지털 데이터를 액체 고분자화합물 표면에 레이저를 주사하여 층층이 굳히는 입체석판장비(Stereo Lithography Apparatus) 는 1980년 중반부터 국내 대기업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상세계에서 만든 물건이 바로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3차원 프린터의 초기버전이다. 이러한 기술은 비싼 금형으로 플라스틱 사출물을 뽑기 전에는 확인할 수 없었던 제품특성을 반나절 만에 확인하게 해주었다. 운영탁월성과 제품리더십을 가능하게 하는 초기 DX 기술이다. 이처럼 엔지니어링 분야에는 이미 30년 전부터 DX가 실현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원시적인 디지털 기술에 대비하여 총체적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DX를 'Deep Digitiz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니엘 롤스와 토마스 브라운(Danial Rowles & Tomas Brown)은 DX의 목적이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도록 기업의 디지털역량(digital capability, 약자 DC)을 향상시키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느정도 빨라야 급격한 변화일까? 쉽게 이해할 비유가 그들의 저서 '디지털문화세우기(Building digital culture)'라는 책에 나온다. 당신이 완전히 밀폐된 스타디움의 맨 윗자리에 묶여 있고, 그곳에 수돗물을 넣는다고 가정하자. 정오 12시 정각 수도꼭지에서 물 한방을 떨어진 이후에 매 1분마다 2배로 수돗물이 증가된다면, 과연 당신은 언제 죽게 될까? 12:45 경에도 단지 7%만 물이 찬다. 그러나 4분후인 12:49분에 모든 스타디움이 물에 잠긴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올 급격한 환경변화가 이와 같다는 주장이다. 대홍수와 같은 파괴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안전한 방주를 만든 '노아'처럼, 기업들이 DX기술과 DC향상에 에너지를 써야 할 이유이다.

2021.02.15 09:55이정규

[이정규 칼럼] 데밍과 능력주의(Meritocracy)

다가오는 12월 20일은 품질경영의 구루인 윌리엄 에드워드 데밍(William Edwards Deming)이 1993년 93세의 나이로 소천한 날이다. 데밍이 유명해진 이유는 1, 2차 오일쇼크 이후에 급등한 일본 자동차의 인기를 의아하게 여긴 미국 자동차업계가 일본의 품질경영을 벤치마킹 하면서부터이다. 한반도는 전쟁의 도가니였던 시절, 태평양전쟁의 폐허에서 부흥을 꿈꾸던 일본의 산업계 리더들은 데밍(1950년)과 조셉 주란(1954년)을 초대하였고, 그들에게서 미국을 이길 해법을 통계적 품질관리에서 찾았다. 데밍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일본의 품질관리대상은 '데밍상(Deming Award)'으로 명명되었다. 데밍이 주장한 과학적 품질관리 경영은 그의 말대로 슈와르츠(Walter Shewhart)의 연구에 빚을 지고 있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은 데밍의 가르침을 PDCA(Plan, Do, Check, Act) 사이클로 축약하여 이를 '데밍사이클'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작 데밍은 PDCA 사이클이란 용어를 자신이 만든 바가 없다고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이론적 유산을 슈와르츠에게 돌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데밍은 PDCA 사이클은 자신의 철학을 오염시켰다면서, 구지 데밍사이클을 정의하여야 한다면, 검증(Check)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학습(Study)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한다고 피력하였다. 데밍의 이러한 생각은 동료학자인 모엔(Ronald D. Moen)이 201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데밍의 편지(1990년)를 인용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PDCA사이클은 계획-실행-검사-수정의 의미이다. 반면 데밍의 PDSA사이클은 계획-실행-학습-개선의 의미가 된다. 데밍은 마지막까지 직원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학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견지했으며 이러한 그의 생각이 왜곡된 품질경영의 단어인 'Check”을 배제하고, “Study”로 대체한 것이 아닌가 후학들은 생각하고 있다. 내게는 Check라는 단어가 항상 어딘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Check는 문제점이 상존한다는 가정에 기반하며 -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는 - 상사가 부하의 잘잘못을 따져 본다는 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와중에 '모엔'의 논문이 알려준 90세 데밍의 편지는 그가 40년이 넘도록 구성원들의 전향적인 학습문화를 품질경영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기쁘게 생각되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린사이클'을 주창한 에릭 리스(Eric Ries)는 스타트업 기업의 경영철학으로 능력주의(Meritocracy)를 표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능력주의는 좋은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을 일과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창업가로서 우리는 타 산업에서보다도 강한 능력주의 비즈니스에 있다. 회사는 직책, 정치와 계층조직이 아니라, 능력에 기반하여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마이클 샌들'교수는 Tyranny of Merit(능력의 폭거)이라는 책(한글책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삐뚤어진 능력주의가 배태하는 사회적 문제를 비판했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이 그 사람이 성장한 환경, 부모의 영향력과 교육혜택, 그가 가진 네트워크 자산 소위 “빽”과 때때로 “운”까지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는데, 실패 혹은 성공을 개인의 역량 프레임만으로 덧씌운다면,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예전에 GE와 같은 다국적 기업은 개인성과로 측정되는 능력주의에 함몰되어, 매년 저평가 직원의 5%씩 해고하는 정책을 자랑스럽게 전파했다. 당시에 IBM을 포함한 많은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들이 이러한 인사정책을 기꺼이 수용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직장 동료는 경쟁자였으며, 서로간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단기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해쳤다. 데밍이 후학들에게 존경 받는 이유는 품질경영의 철학을 과학적 합리성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밍의 14훈은 지금도 회자되는 인간중심적 품질경영의 철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는 직장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고, 과업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팀워크를 강조했으며, 재무목표에 직원들을 내몰아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을 깨부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습과 끝임 없는 재교육을 강조했다. 데밍의 14훈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이를 실행 옮기는 다국적기업, 대기업의 경영자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누군가 내리 사랑은 자연스럽지만, 위로 향하는 효도와 공경은 자연스레 되는 것이 아닌 고결한 덕성이라 말한 것을 기억한다. 경도된 능력주의의 잣대는 들이대기 쉽다. 그러나 조직원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 협업공동체의 구현은 쉽지 않으며 품격 있는 경영철학이다. 승자와 패자의 철학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본성의 긍정적 에너지를 끌어내어 공동 선을 지향하려 했던 데밍의 한결같은 품질경영 철학이 그가 떠난 27년의 오늘도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2020.12.16 11:05이정규

[이정규 칼럼] 무시로 갈무리하라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시니어 가수의 추석맞이 '대한민국 어게인' 이벤트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눈을 맞추고 호흡하며 노래를 불러 왔을 일흔 넘은 백발가수의 대표곡 중에 '무시로'와 '갈무리'라는 제목이 새롭게 다가왔다. 별 생각 없이 들었던 노래였는데,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이들 단어의 의미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시로'의 말뜻은 '시시때때로' 혹은 '수시로'의 방언이라 하고, '갈무리'는 '저·장 정리하다' 혹은 '잘 마무리하다'라는 표준말이다. 그러므로 두 단어를 합쳐서 '무시로 갈무리하라'는 말은 '그때 그때 일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 된다. 인생에서 그때 그때 일을 잘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기업의 경우도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무시로 갈무리'하는 일은 모든 관리자들의 업무원칙이 될 것이다. 스타트업(start-up)의 경영기법에 그때 그때 일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OMTM(one metric that matters)'이라는 개념이 있다. OMTM은 제일 중요한 하나의 성과지표를 일컫는다. 창업기업은 짧은 시간에 민감도 높게 변화관리를 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자원이 부족한 그들에게 한꺼번에 여러 목표를 동시에 쫓고, 성과지표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비용효율적이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창업기업은 특정 시점에 오직 하나의 혁신지표에 관리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초기에는 앱 방문자의 숫자, 그 이후는 재방문율, 다음에는 활동성 높은 사용자의 증가, 매출 전환율, 그 다음은 인당 매출 증가율 등. 자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가치가설과 성장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단계별 성과지표를 시의적절하게 선택하여 '무시로 갈무리(수시로 잘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회사가 성장하면 관리자들이 섣부른 일을 시작하곤 한다. 성과지표를 보다 정교하게 만든다고 OMTM에서 ONE(하나)을 떼어내고 복수의 성과지표인 MTM(metrics that matter)을 창의적으로 도입하려 하는 것이다. 부서별, 직위별, 개인별로 적게는 7개에서 10개 이상의 지표를 부여한다. 담당자가 무시로 갈무리하기에는 에너지를 너무 많은 일에 분산시켜 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경험에 따르면 목표가 3~5개 이상이 되면, 서로 다른 지표 간에 모순의 관계가 발생하기 쉽다. 한 지표를 개선시키면 다른 지표의 달성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성과지표를 직원에게 강제하는 것은 결국 담당자에게 '아무 일에도 집중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 아티카의 강도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행인을 잡아 철제 침대에 뉘이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르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잡아 당겨 죽였다고 한다. 침대의 길이를 몰래 조절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영웅 테세우스에게 붙잡혀서 같은 방법으로 침대에서 죽기까지, 프로크루스테스는 이러한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신화는 획일화된 규율과 기준으로 인간에게 폐해를 주는 강제된 권력을 풍자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의 길이를 남 모르게 조작할 수 있었으니, 외견상으로는 OMTM으로 포장된 MTM 침대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프로크루스테스는 들킬 것을 걱정하면서, 희생자 몰래 침대의 길이를 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좀 더 악랄했다면, 키만 재지 않고, 발의 길이와 너비, 머리의 크기, 목과 팔의 두께와 길이, 배와 둔부의 사이즈, 정강이의 크기, 코와 귀의 높이까지 재어보고, 넘치면 베어내고, 모자라면 당겼다면 어떠했을까? 지구상의 누구도 그러한 기준을 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과지표를 OMTM이 아니고 MTM으로 만드는 일이 이와 같다. 사업목표와 가치지향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섣부른 MTM 성과지표를 들이대어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고 이해당사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관리자들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융통성이 없는 정책을 전개하면서 민원이 없기를 바란다. 접근이 쉬운 시스템을 요구하면서, 보안성이 떨어진다고 트집을 잡는다. 서비스 인력을 줄여가면서 보다 높은 고객만족도를 요구한다. '아포리아(aporia)'는 그리스어로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혹은 모순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맥락적 사고가 결 여된 아포리안 매니지먼트(aporian management)가 이곳 저곳에서 득실댄다. 오랜 시간 달이고 삭혀야 맛이 나는 음식처럼, 바다 건너 들어온 서양의 음율은 100여년의 뜸을 들여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트로트 음악이 되었다. 음악이 좋아 노래하길 수십 년, 무명가수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짓는 중견가수들을 볼 때면, 삶을 공유한 동네 형동생의 이야기 같아 가슴이 저리고 따라 울게 되기도 한다. 그런 가수들이 노래방 기계로 자기 노래를 부르면 점수는 형편없게 나오곤 한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기계의 점수 만으로 가수의 열창을 평가 절하하지 않는다. 신호처리 샘플링으로 점수를 셈하는 노래방 기계가 온몸을 전율시키는 트로트 가수의 감동 어린 노래를 옳게 평가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정적으로 몰두할 과업을 가진 직원에게 여러 가지 MTM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섣부른 짓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을 잘 알고 처신한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도록 관리자들은 MTM화된 지표에 유의해야 한다. 그 대신에 관리자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떤 일이 직원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지, 그 일이 잘되었다는 것을 본인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더욱 잘하도록 하려면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될 지”와 같은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관리자가 과업을 '무시로 갈무리(수시로 잘 마무리)'하려 한다면, 각 시점에 걸 맞는 OMTM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그 관리자의 상사에 의하여 언젠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강제로 눕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니어 가수의 '무시로'와 '갈무리' 노랫말에서도 한가지 경영의 지혜를 찾아본다.

2020.10.12 10:54이정규

[이정규 칼럼] 인공지능과 두려움

“공포는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첫번째 적이다.” 소설 '람세스'에서 야생황소와 마주했던 아들 람세스에게 아버지 파라오가 던진 말이다. 공포는 불안장애(anxiety disorder)의 하위개념이다. 불안장애는 공포 외에도 분리불안, 범(凡)불안장애, 강박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중에서 공포는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특정공포,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일을 회피하는 사회공포, 넓은 광장과 같은 특별한 주변환경에 놓일 때 겪게 되는 광장공포나 폐쇄공포 등이 있다고 한다. 소년 람세스에게는 날카로운 뿔을 들이대고 달려드는 성난 황소가 특정 공포의 원인이었겠으나,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의 색깔이 다르니, 가슴 조이는 두려움과 공포의 보편적 근원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일은 두려움과 공포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도전, 생명의 계속성에 위협을 느껴 편안함과 평정심을 잃게 될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역설적인 것은 편안한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가장 많은 학습을 한다. 그런 이유로 학습은 공포와 두려움이 낳는 긍정적 결과이며, 공포와 두려움이 낳는 부정적 결과가 불안장애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8만년전의 원시생활을 소재로 한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 1981)'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원시인에게는 추위, 굶주림, 어둠, 약탈의 위협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을 터인데, 이러한 공포에 맞서기 위한 도구로서 불은 귀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영화의 원시인은 내려친 번개로 어쩌다 얻은 불을 신성한 것으로 지킬 줄만 알았지 만드는 방법은 몰랐다. 이웃 부족과의 싸움 와중에서 불을 잃은 부족은 3인의 청년을 뽑아 불씨를 찾아 보낸다.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난 3인의 원시인 청년은 두려운 세상과 마주한다. 그러나 그들은 발달된 부족으로부터 마찰열로 불을 만드는 기술을 학습하는 행운을 거머쥔다. 인류가 불을 만드는 순간 불의 신성은 사라진다. 경외의 대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신성은 사라진다. 혹자는 “두려움이 지식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원시인 역시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돌을 깨고 갈아서 창을 만들었고, 굴 속에서 불을 지펴서 밤의 두려움을 극복했다. 얼어 죽을 두려움 때문에 가죽 옷을 꿰매 입고, 배를 곯을 두려움에 경작을 시작하고 남은 식량을 저장했다. 약탈당할 두려움에 부락을 형성하고 성을 쌓아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애써 얻은 경험이 휘발할까 두려워 문자를 발명하고 책을 엮었다. 이렇게 쌓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넓게 활용하려 드디어 인류는 보편적 지식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체계의 핵심은 구조화이다. 구조화란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는 다수의 서브개념을 찾아내는 일이다. 빌딩을 골제와 기둥, 바닥과 지붕, 내장제와 유틸리티(전기, 가스, 상수/하수도)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일이 구조화이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가면서 분화는 심화된다. 학문의 분화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분화된 학문이 복잡성을 가중시키고, 하나의 학문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학제간 융합, 학문의 통섭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저것 합쳐진 여러 요인을 동시에 고려하려다 보니, 정형 데이터와 비정형 테이터, 실시간과 비실시간 정보를 모두 다루어야할 빅데이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결국 빅데이터는 사람의 지혜로 처리할 능력을 벗어났고, 인공지능, 머신러닝, 딥러닝이라는 IT기술이 출현하게 된다. 딥러닝은 머신러닝의 하위개념이고, 머신러닝은 인공지능의 서브셋이다. COVID-19로 지하철의 옆사람이 기침을 하니 주변의 여러 사람이 주저없이 바로 옆 칸으로 이동한다. 너도 나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손을 자주 씻기 때문에 급성호흡기 질환자가 엄청 줄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죽음의 공포가 인류를 감싸고 있다. 아직까지 정복할 수 없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포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IT 신기술이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수단으로 더욱 심도 깊고 넓게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다. 앞서가는 미래학자나 공상영화에서는 IT기술 덕분으로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진 신인류를 예견하기도 한다. 죽지 않는 영혼이라 함은 결국 인공지능의 실현이다. 인공지능으로 신의 영역인 죽음의 정복이 과연 이루어질까? 만약 죽음이 정복된다면 마지막 신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미래의 신인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 것인지 궁금하다. 두려움이 없다면 지혜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코로나가 죽음의 두려움과 함께 지혜의 근원에 대한 화두를 떠올리게 만든다.

2020.08.13 08:30이정규

[이정규 칼럼] 집단지성과 신탁

델파이법(Delphi method)이라는 의사결정기법이 있다. 그리스어로 '델피', 고대 그리스어로는 '델포이' 라 불렸던 도시국가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델피는 지금은 몇 개 기둥만 남아 폐허가 되어버린 산 중턱의 아폴로 신전이 유명하며, 아폴로가 '예언의 신'이기도 하니 당시에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참배객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델포이에서 국가적인 이슈가 생기면 '퓌티아'라 불리던 여 사제가 신전의 뒤편 동굴 아래에서 올라오는 유황가스에 취하여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남자 사제들은 이를 오라클(신탁)로 해석하여 시민에게 선포했다고 한다. 이런 사유로 미래를 예측하는 전문가적 의사결정 기법에 생뚱맞은 '델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델피의 사제가 전한 신탁은 절대적이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로 간주 되었는데, 시점이나 표현을 모호하게 만들어서 신탁의 해석이 모두 그럴 듯 했다고 한다. 당시의 사제들은 여러 나라에 깔아 놓은 정보원을 통하여 국제정세에 관련된 고급정보에 접근하려 노력했을 것이고, 신탁의 권위를 깨지 않을 예언을 구상하기 위해 집단지성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조직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한데, 조직의 결정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미리 가정한다면 따르는 백성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델파이 사제의 근심은 근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승되던 무류성(無謬性)의 원칙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빈번한 신학적 도전 속에서도 교회는 몇 가지 무류성의 교리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즉 개별교회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 교회에 의한 결정은 무류하며, 개별 주교의 결정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 주교단의 결정은 무류하고, 보통 10년 넘게 심도 깊게 토의하는 종교회의(공의회)의 결정은 무류하며, 교황의 가르침 역시 도덕과 신앙에 한정되어 공적으로 선포될 경우 무류하다는 네 가지 교리이다.네 가지 무류성 중에서 세가지는 집단지성(혹은 통찰)에 의한 결정과 관계된다. 집단지성이라고는 하지만 델파이 의사결정기법이나 무류성 교리의 근저에는 엘리트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불완전한 개별 인간이나 비전문가 집단은 실수하고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 도메인에 대한 지식이 충분한 전문가 집단이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목자의 집단적 결정은 오류가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도래하면 과거의 전문성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집단의 심리적 편향에 의한 오류는 항상 발생될 수 있고, 미래를 단순하게 바라 봄으로서 상황이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돌발 변수를 쉽게 간과하는 전문가 의사결정방법의 역기능을 사회과학자들은 제기한다.일례로 스탠포드대학교의 힌즈(Pamela J. Hinds) 교수가 주창한 전문가의 저주(The curse of expertise, 1999)는 이러한 전문가 의사결정방법의 역기능을 잘 설명해준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작업성과를 예측하는 실험에 있어서, 전문가 집단은 도메인 지식이 일천한 신참자 보다 못한 예측결과를 보였고, 과업의 완료시간을 추정하는데 있어서 정확도가 가장 떨어졌으며,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는 일에도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이한 일은 중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이 가장 정확한 예측을 했다고 한다.16년만에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는 21대 총선이 지나갔다. 이를 누구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 사회계층간의 이원적 대립관계로 단순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과학적 통계기법과 AI/머신러닝/딥러닝의 뛰어난 정보기술이 보편화된 지금도 투표함을 열어보기까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미디어의 견해를 들을 때마다, 민초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마치 2천년 전의 델파이 신탁 보다 탁월하다고 느껴진다.바이러스가 없다면 치료하는 백신도 만들어낼 수 없듯이, 인공지능/머신러닝/딥러닝의 학습모델은 데이터의 과거 패턴이 다가올 미래에도 유사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여 결과를 예측한다. 그러나 물리학자인 타이슨(Neil deGresse Tyson)이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에서 인간의 행동이 방정식에 포함되면 상황이 비선형으로 변한다.”한마디로 인간이 활동의 주체가 되면, 전개될 상황을 예측하기 너무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백이면 백 명의 생각과 행동패턴이 다양하니, 발생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선형적 예측은 부질없는 짓이다. 노자의 도덕경 73장에는 “천망회회 소이불실”이라는 말이 있다. 델피의 신탁처럼 모호한 말이지만, 혹자는 이를 “하늘의 그물은 얼기 설기하지만, 뭐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고 해석한다.나는 '하늘의 그물'을 인간군상의 네트워크로, '뭐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오류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므로 다양성이 충만한 보통사람이 발현하는 통합적 집단지성은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오류란 과거의 기준으로 판단한 이상치 값이지만, 관점을 달리한다면 상황이 바뀐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증표일 뿐이다.다양한 개성의 총체적 집단지성은 세상을 견인하는 주류이며 정상이지 오류가 아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부지불식간 형성한 네트워크 지성은 결코 예측하지 않는다. 네트워크 지성은 스스로 조직화하고 미래를 만들어 갈 뿐이다.그 결과로서 예상과 다른 사건이 노골적으로 벌어졌다면, 전문가들은 세상을 못 보는 '전문가의 저주'에 걸렸는지 자신을 먼저 경계해야 한다. 통합적 집단지성에 의한 역동적 세상변화를 센스 없이 알아채지 못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헛다리 짚은 전문가들이 하늘의 신탁 앞에 겸손해져야 할 시점이다.

2020.05.04 11:20이정규

[이정규 칼럼]'나무'스키마, '넝쿨'스키마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거닌 적이 있었다. 불쑥 다가온 웬 화가는 손사래 치는 나의 얼굴을 삐쩍 마른 손으로 재빨리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몇 분만에 데생 도화지를 내 눈에 들이댄다. “가난한 화가 같은데, 웬만하면 사줘야지!”하는 생각으로 척 본 인물화가 나 같지 않았다. 전혀 닮지 않았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니 화가의 말이 걸작이다. “난 사진사가 아니오! 예술가적 비전으로 그렸다고요!” 기막힌 답변에 탄복하여 구매한 그림은 다시 보아도 정말 안 닮았다.예술가들이야 현상의 독창적 과장과 왜곡이 차별적 가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개념에 대한 학자들의 과장된 정의와 왜곡은 가치보다는 문제에 가깝다. 품질관리(quality control)와 품질경영(quality management)의 사례가 그렇다. 먼저 나온 영 단어 control 에 '관리'를 붙여 버렸으니, 그 다음에 등장한 management를 '경영'이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경영이 매니지먼트보다는 추상화레벨이 더욱 높은 개념임에도 말이다.이러한 용어의 과장된 번역과 왜곡은 정보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층형데이터베이스(hierarchical database)는 1:N의 다단계 트리 구조로 하나의 루트를 가진 DB 구조를 가졌다. 그러나 N:M의 인덱스를 지원하는 또 다른 데이터베이스구조가 발명되었다. 한 데이터 속성이 여러 곳을 인덱싱 하는 DB스키마의 모양새가 마치 얽힌 그물과 같아서인지 찰스 바크만(Charles Bachman)은 이를 네트워크데이터베이스(network database)라 호칭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성급하게 붙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트워크데이터베이스의 옳은 명칭은 'cross index DB'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네트워크데이터베이스는 관계형데이터베이스(relational database)가 나오면서 업계에서 주도권을 잃었지만, 관계형데이터베이스 역시 용어의 과장이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다. 복수의 테이블을 만들고, 테이블 사이에 공유된 인덱스를 통해서 데이터를 Join 추출하는 기능에 '관계'라는 포괄적 개념을 부여한 것 역시 너무 과장되기 때문이다. 관계형데이터베이스의 적정한 명칭으로 'indexed tabular DB(인덱스 테이블 DB)'정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에 동의할 전문가들은 많이 있다.인덱스 정형 테이블 간의 연계를 SQL로 추출하는 개념이 아니라, 비정형 속성 및 활동(관계)의 저장/검색까지 지원하는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의 개념이 나오자, 일단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데이트베이스의 이름으로 '정(SQL)에 반(No)'하는 변증법처럼 NoSQ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적어도 이들은 새로운 DB 개념을 섣불리 과장하지 않은 양심은 있어 보인다. 이러한 NoSQL DB유형 중의 하나가 그래프데이터베이스(graph database)이다.그래프하면 막대그래프, 선그래프 밖에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용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프는 이산수학의 하나로서 행렬계산이 가능한 점(node, vertex)과 선(link, edge)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네트워크 분석모델이기 때문이다. 대개 점은 주체를, 선은 행위(혹은 관계강도)로 간주된다. 선이 연결되면 1, 연결되지 않았으면 0으로 행렬을 계산한다. 숫자를 키우면 관계의 강도를 계산할 수도 있다. 그래프데이터베이스는 어찌 보면 관계(relationship)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데이터베이스 모델임에도 먼저 태어난 '인덱스 테이블 DB'에게 '관계형데이터베이스'의 명칭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서양과학사에서 이러한 지식체계의 과장과 왜곡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학자들은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4세기 중반 활동한 신플라톤 철학자 포르피리오스(Porphyrius)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Categories)을 계승하여 시각화된 트리형 분류모델인 '포르피리오스의 나무(Porphyrian tree)'를 최초로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나무형 분류법은 서양에서 천년 이상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진 지식체계 모형이며 생물 분류체계의 모델이기도 하니, 계층형데이터베이스의 모형이 전형적인 트리구조를 따르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그러나 나무의 가지치기처럼 모든 개념에는 근원이 존재하며, 그로부터 진보된 개념이 세분화한 것으로 간주하는 수직 계층형 지식체계는 근래에 들어 학자들의 도전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물이 서로 갈라지고 분화되어 경쟁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작게는 몸 속 박테리아부터 넓게는 은하계처럼 우주 만물은 네트워크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관계철학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전통적인 트리형 지식체계는 계층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분화를 가정하지만, 네트워크 지식체계는 뇌세포처럼 창발적 지식형성과 네트워킹으로 지식이 확장한다고 상정한다. 한편 네트워크라는 용어는 관계성을 내포하지만 살아있다는 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포르피리오스가 '나무'라는 메타포로서 계층적 지식체계의 성장과 진화를 설명했었다면, 관계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새로운 네트워크적 지식체계를 땅속의 넝쿨모양 뿌리줄기(rhizome)로 비유했다. 그래프는 네트워크를 묘사하는 수학 도메인의 용어이다. 오해하기 쉬운 그래프DB라는 말 보다 차라리 '넝쿨DB'가 보다 직관적인 용어가 아닐까 웃으며 생각을 해본다.어떤 업체의 메시지에서 바이러스의 전파예측과 방역를 위해서 그래프DB 모델을 사용한다는 스토리를 보았다. 'Massive Change'의 저자 브루스 마우(Bruce Mau)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었을 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고 말했다. 분별없이 단체모임을 강행하여 이곳 저곳으로 바이러스를 전파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그 말의 무게를 절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방지와 예방 노력이 질병관리본부 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책임감과 헌신이 중요한 이유이다. 현대는 얽히고 설킨 넝쿨사회이기 때문이다.

2020.03.20 10:31이정규

[이정규 칼럼] 신화와 시간, 그리고 코로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에서 과학을 '깜깜한 어둠 속의 촛불'로 비유하며, 사람들이 암흑과 같은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에 현혹되지 않도록 과학적 회의주의(scientific skepticism)의 빛을 가져야 한다고 경종을 울렸다.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참혹한 역사를 생각할 때, 과학적 근거가 없는 편향된 신념이 불러일으킬 위험을 경고한 그의 주장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인문학자는 과학 지상주의의 폐단을 말한다. 그들은 과학적 근거가 없더라도 상상력은 인류 발전의 동력이라고 일갈한다. 그리스/로마신화는 물론이고 종교경전 속의 신화적 스토리는 인간공동체의 귀중한 지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과 '헤리 포터'와 같은 판타지 소설은 물론 재미난 액션 어드벤처 게임 역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상상력의 산물이다.이러한 비과학적 상상력은 문명을 진보시켰고,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축적했다. 사회 파괴적인 사이비 과학에는 유의해야 하지만, 지나친 합리주의 철학이 사회복리를 저해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도 설득력은 있다.이처럼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실과 신화는 마치 평행저울처럼 상대가 있음으로써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양비론(兩非論)이 일리가 있다면, 양쪽을 절충하는 중심개념이 필요해진다. 결국은 생각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절제된 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양극단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떤 지혜를 가져야 할까? 우리는 신화적 비유로 현재의 상태를 해석하기도 하고, 과학적 이론으로 신화 속에 내재한 합리적 지혜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상상력(신화)으로 과학을 비유하고, 과학으로 상상력을 판단하는 접근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접근을 위한 좋은 스토리가 시간에 대한 신화이다. 희랍인들은 상대성 이론처럼 이해가 쉽지 않은 시간에 신화적 상상력을 덧붙였다. 시간을 설명하는 신화 속 세 명의 신은 크로노스(Chronos), 아이온(Aion), 카이로스(Kairos)이다.첫번째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로서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상징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여러 사람에게 공히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이고 정량적으로 측정가능하며 선후가 있는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상대적 크기가 있고 양을 비교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공간 상에 표시한다면 x축으로 길게 뻗어 나가는 눈금표시가 된 선형적인 화살표와 같다. 서양에서는 고급 시계를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 부르곤 하는데 좀 더 멋져 보이려 이름 붙인 듯싶다. 두번째 아이온의 시간은 조금 발전된 차원의 사회적 시간 개념이다. 풍차나 수레바퀴와 같이 순환하는 환원적 시간을 의미한다. 고대의 그림에서 아이온은 반복되는 춘하추동 4계절, 1년 12개월, 하늘의 열두 별자리처럼 영원히 순환하는 이미지와 함께 묘사된다. 아이온의 시간에는 봄에는 씨 뿌리고 가을에는 추수하는 농경사회의 반복되는 시간개념이 투영되어 있다. 아이온의 시간은 앞선 것이 알고 보니 뒤에 있기도 한 선후가 불분명한 시간으로 공간 상에 표시한다면 커다란 환원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아이온의 시간은 설명이 쉽지 않아 자주 생략되곤 했다. 기독교 교리에 윤회의 개념이 없고, 종말론적 인과관계에 아이온의 순환개념이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번째 카이로스의 시간은 더욱 발전된 차원의 철학적 시간개념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공간의 한 점으로 상정된다. 그 점은 기하학의 정의처럼 크기도 면적도 없다. 크기를 계량할 수도 없고, 선후도 없으며 접신(接神)하는 깨달음의 순간이며 한 순간의 이벤트이지만 평생 동안 기억되는 개인적 경험의 시간이다. 마치 X맨 영화에서 주변 환경은 정지되어 있는데, 순식간에 적들의 무기를 제거하는 절대자의 초월적 활동시간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로 카이로스는 '행운의 신'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고대 그림에서 카이로스는 앞머리 털만 있고, 뒤 머리는 벌거숭이 대머리로 그려진다. 한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기회와 행운을 상징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최소한의 자가격리 14일은 크로노스 시간처럼 누구나 거쳐야 하는 물리적 시간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지나가도 제2의 무서운 질병이 아이온의 순환시간처럼 또 다시 우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간에는 공동체적 협동이 필요한 사회적 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곤란은 조만간 사라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가 되면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지 생각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이온의 시간인 현재에는 문제의 발생원인으로 타인을 가리키는 짓은 나중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내가 가리킨 손가락이 다시 내 뒤통수를 가리키는 순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2020.02.27 20:11이정규

[이정규 칼럼] 꿈깨! 영속기업은 없다

판타지 SF 영화의 소재로 가끔씩 '영생을 꿈꾸는 악당'이 등장한다. 치졸한 권모술수로 마침내 영약을 손에 쥔 악당은 약병을 벌컥 들이키지만,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한줌의 재로 사그라진다. 중국 진시황도 주변에 영생의 약을 파는 약장수가 판을 쳤다고 하지만, 수은 중독으로 40세에 요절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영화와 고전에는 이렇게 영생을 꿈꾸는 일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지 상기시켜 주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통찰이 기업 세계에서는 증발해 버렸다. 은퇴를 선언한 창업자가 '영속하는 기업'을 후배에게 당부하는 신문 기사를 때때로 보게 된다. 자신이 평생의 노력으로 일군 회사의 영속을 원하는 그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남은 후배에게 현명함을 전하려면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 회계학에 계속사업(going concern)이라는 용어가 있다. 재무제표를 감사하는 회계사는 회사가 내년에도 꾸준히 사업을 계속할 것으로 가정하고 기업의 재무제표를 검토한다. 조만간 회사가 망할 것이라면 미래가치가 반영된 재무제표를 평가하는 일은 적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계사가 대상기업의 계속사업을 상정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계속사업에 의문이 들 경우, 회계사는 청산가치를 기준으로 기업의 재무제표를 감사해야 한다. 법원도 법정관리 기업의 존속여부를 결정할 때, 청산가치보다 계속사업의 가치가 훨씬 커야 존속을 결정한다.계속사업에 대한 정치사회학 용어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UN은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하여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정의한다면 '미래의 니즈를 충족시킬 역량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현재 니즈를 충족하여 계속사업을 유지하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지속가능성의 달성은 예측한 시간을 지나봐야 확인할 수 있으니 현 시점에서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경영인들이 이를 무시한다. 부실 채권을 남발하고 과도한 투자로 미래의 니즈를 앞당겨 써 버린다. 당장 활용할 자산이 부족하여 미래에 활용해야 할 신용자산을 미리 사용한다면 회사의 미래는 없다. 굴지의 기업들이 지속가능성에 실패한 이유는 현재와 미래의 균형을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양자물리학에 임계질량(critical mass)이라는 말이 있다. 원자구조가 불안전하여 핵분열이 일어나는 물질도 폭발이 되려면 일정 규모의 질량(임계질량)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임계질량(臨界質量)은 우라늄과 같은 핵물질이 핵 연쇄 반응으로 자체적 폭발이 가능한 최소 질량을 말한다. 양자물리학과 달리 조직은 규모가 커지고 관료적 구조가 강화 됨에 따라 역으로 활력은 떨어지고 혁신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조직의 임계질량은 혁신이 안 일어나는 조직규모로 정의해야 할 듯하다. 조직이 일정 규모가 되면 예외 없이 활력은 떨어지고 고착화된 관료주의가 자리를 잡는다. 외부에서 관찰되는 관료적 기업문화의 특징은 높은 자만심이다.오래전 참석한 해외 컨퍼런스에서 자만심 지수(pride index)를 들은 적이 있다. 화면에는 우리회사를 포함하여 컴퓨터 업계의 다국적기업 3개 회사의 자만심 지수곡선이 시간대 별로 그려져 있었다. 강사는 자만심 지수가 정점에 찍힌 시점부터 3년 후에 그 기업은 예외 없이 위기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언대로 한 회사는 데이터베이스 업체에 합병되고, 또 다른 회사는 여러 개로 분사했으며, 어떤 회사는 40%의 직원을 구조 조정했다.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에서 기업의 고착화된 성공 관행이 얼마나 생존에 해로운지 설파했다. 시장에 나타난 파괴적 기술은 시장을 재편한다. 파괴적 환경에 부딪히면 기존의 성공 관행은 순식간에 쓸모 없어진다. 기업은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시간 차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새로운 혁신 기업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조직이 활력과 혁신에 실패하면 회사의 미래가 사라진다. 현명한 경영자는 어쩌면 영원히 달성 불가능한 목표, 즉 끊임 없이 혁신을 유지하는 기업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다.그러므로 경영자는 조직활력과 임계질량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성장단계에 맞춘 기업 혁신을 적절하게 북돋아야 한다. 모든 회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구성원의 숫자가 20명이 넘으면 기능분화, 40명에서는 재무 시스템의 도입, 100명에서는 다양한 제품 포트폴리오 역량, 200명은 책임회계 제도, 400명은 프로세스 표준화, 2,000명은 글로벌 생산체제의 구축과 같이 조직 임계질량이 유발하는 도전을 해결해내야 성장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일정한 임계질량에 도달한 조직은 자만심과 관료화, 혁신의 브레이크, 그리고 계속사업의 종말과 같은 사이클이 빠진다. 이런 현상은 조물주가 미리 정해놓은 운명처럼 어느 기업도 피해가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과학자가 현재까지 발견한 영생에 가까운 동물은 히드라, 홍해파리, 해삼, 바다가재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능이 있는 고등동물의 사례는 드물다. 동물이 고등해지는 만큼 환경적응이 쉽지 않아 영생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기업도 성공하여 커지고 고등해지면 그만큼 환경적응이 어려워진다. 자연계의 고등동물은 부질없는 영생에 목숨 걸지 않고, 자신의 학습내용과 건강한 유전자를 후손에 전하는 생식 방법을 선택했다. 기업 역시 갈수록 커지는 몸집을 유지하는 영생을 꿈꿀 일이 아니다. 기업가 정신과 사내창업을 고취하여 새롭게 시장을 창출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 리더들을 양성하여 세대를 건너 진화해 나가는 재생산(reproduction)이 지혜로운 일이다.

2019.12.20 11:19이정규

[이정규 칼럼] IT 빅 브라더와 담론

신영복 교수의 저술 중에 '담론'이라는 책이 있다. 담론이란 말을 가볍게 설명하면 '의견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담론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고, 상대가 없이는 불가능한 관계적 소통활동이다.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다르면 지식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담론은 기존 권력으로부터 탈출하는 노력이며, 권력에 의하여 생성된 기존의 지식체계를 깨 부수는 대중적 철학행위이다. 그러하니 기존권력에게 담론은 위험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정보기술 업계에서 큰 반향과 담론을 불러일으킨 애플의 1984년 슈퍼볼 광고를 보자! 짧은 은발, 빨간 반바지, 흰색 민소매 셔츠를 입은 젊은 백인여자가 내달린다. 양손으로 해머 자루를 잡고 강당의 중앙통로를 달려오는 그녀를 시위 진압복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뒤쫓는다. 시민들은 긴 의자에 줄지어 앉아 전방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화면에 확대된 '빅 브라더'의 큰 얼굴이 최면을 걸듯이 말한다. “정화된 정보의 지향…순수한 이상의 정원…반역적 생각을 일으키는 해충으로부터 보호…생각의 통일…우리는 한 사람, 한 뜻, 한 해결책…적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떨고, 우린 그들을 매장할 것이다. 통일이다!” 라는 순간 여자투사가 투척한 해머가 스크린을 작렬시킨다.인터넷 시대에서 IT권력의 정보독재 현상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당신의 멘탈과 소셜 네트워크를, 아마존과 알리바바는 당신의 소비패턴을, 통신사와 자동차업체는 당신의 생활 궤적을 알고 있다. 정보권력에 의하여 소시민이 발가벗겨지는 개인정보 투명성의 세상, 소비자를 길들이는 '빅 브라더'들의 세계가 겁나게 다가왔다.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institutionalized'이라는 단어가 다섯번 나온다. 도서관 지기 노인 '브룩스'가 가석방을 통보 받고, 기뻐하지는 않고 오히려 재수감을 목적으로 폭력을 저지른 사태를 다른 죄수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고참 죄수인 '레드(모건 스탠리)'가 이유를 설명한 말이다.'institutionalized'란 '구성원들이 모두 당연시하는 상태, 정신적으로 동화된 규범화된 상태'이다. 대중문화인 영화에서 'institution'라는 어려운 사회과학 용어를 불쑥 들이대니 너무 생뚱맞다.'institutionalized'를 일상적 말로 번역한다면 '길들여진, 몸에 배인, 익숙해진, 체질이 되어버린, 없이는 못사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어단어 'institution'은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다. 이질적인 두 개념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개념은 18세기 중반 산업혁명 당시 일부 자본가들이 설립한 고아원·양로원·교육기관들을 통칭하는 '조직'을 의미한다. 정부가 하지 않는 공익서비스를 '내부(in)에서 세웠다(설립하다: 라틴어 statuere, 영어 set-up)' 는 의미로 사적 공익조직을 in·stitute로 부르게 된다.두 번째 개념은 '관습'을 의미한다. 이 역시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in)에서 규율이 형성되었다(영어 set-up)' 는 의미로 'in·stitute'을 쓰게 되었다. '쇼생크탈출'에서는 관습·규율·제도·규칙의 두 번째 뜻으로 사용되었고, 'institutionalized'는 습성이 몸에 배인 '길들여진다'로 번역되었다.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 역설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내재화되어 길들여진 상태를 탈출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철학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것이 담론이다. 스티브 잡스가 맥킨토시 광고를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1983년 10월 영업사원 컨퍼런스였다. 유튜브의 기록을 보면 광고를 본 영업사원들의 환성이 들린다. 드디어 기존 체제를 깨려는 '담론'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애플은 퍼스널 컴퓨터는 물론 휴대폰 모바일 시장을 석권 하면서 IBM보다 더 큰 시장가치를 가진 업체가 되었다.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는 '브룩스'가 드러낸 '길들여짐'의 문제를 꿰뚫어 보았지만, 주인공 '앤디'는 '브룩스'처럼 길들여지지 않고 '쇼생크'를 탈출한다. 기존의 체제가 옳거나 그르다는 선과 악의 이슈에 주목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재화된 세상은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영혼은 견디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인간은 내재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깨부수어 버리며 성장해 나간다. 담론은 고착을 부수는 혁신의 출발점이다. 담론의 결과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함께 하면 공감이 전파되어 세상이 변화한다. 그러한 혁신은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다. 중심부는 내재화의 총화를 상징한다. 변방은 혼돈의 상징이고 담론의 시작점이다.작금의 IT업계에서 소비자를 길들인 기술은 무엇일까? 그것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독점된 SNS 앱과 스마트폰 없이는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을 것 같다. 거대 IT권력은 사용자의 관습 속에 자신의 기술을 깊숙이 침투시키고 , 우리들을 모니터링하며 사고를 지배하려 한다. IT권력이 지배하는 모바일 활용문화를 깨부수는 혁신 담론이 다시 시작될 시점이다.지금도 변방의 누군가는 권력화되는 내재화를 떨치고 나가려는 담론을 꿈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들여져서 변화는 싫다고, 문을 활짝 열어 두어도 '브룩스'처럼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들여다 보며 '변화와 대안은 나쁜 것'이라는 최면을 거는 IT 빅 브라더의 스크린을 향해 강철 헤머를 멋지게 던지는 또 다른 리틀 브라더를 기다려 본다.

2019.09.23 13:31이정규

[이정규 칼럼] 운명은 거스르는 자에게 굴복할까?

한 선배가 고객을 대하는 태도를 당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객은 바람나기 직전의 연인이다.” 아마도 고객에 대한 마음가짐에 절실함과 성실함이 요구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듯싶다. 영업사원 시절에 고객이 경쟁사에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선배의 설명이 오래 기억되었다. 이렇게 유사한 속성을 암시하기 위해'A'를 'B'로 대치하는 표현방식을 문학에서는 메타포(metaphor, 은유) 용법이라 부른다.생각을 전달할 때 이해하기 쉽도록 메타포를 적절히 섞어 설명한다면, 메시지가 가진 개념의 본질을 깊이 생각한 사람이다. 대개의 경우 깊은 고찰이 없다면, 그럴듯한 은유 표현은 섣불리 생각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은유에 남다른 실력을 가졌다. 그들은 은유적 표현으로 삶과 자연의 시를 쓰고, 독자들은 이를 해석하며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은유법은 시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는 카오스(chaos theory, 혼돈) 이론을 설명하면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용어를 이용했다. '나비효과'란 필리핀의 나비 날갯짓이 일본열도에 태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메타포이다. 이 말은 로렌츠의 논문에 그의 동료가 붙인 부제목에 기인하였다. 로렌츠가 고안한 기상예측의 시각화 그림이 공교롭게도 나비의 날개 모양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고, 나비효과는 그가 촉발시킨 카오스 이론의 상징적 용어가 되었다.카오스 이론은 초기의 미묘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초기 민감성',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경로가 너무 다양하여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카오스 이론은 관찰 시간을 오랜 동안 크게 넓히면 처음에는 설명이 안되던 우연한 현상이라도 돌연 특정한 패턴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나비의 날갯짓과 태풍이 발생하는 결과 사이에 수많은 경로가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는 설명을 위해 '카오스는 나비의 날갯짓'라는 메타포가 사용된 것이다.한편 법륜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인연과보(因緣果報)'는 카오스 이론과 맥이 통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지만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그 현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지혜가 '인연과보'이다. 이에 대비되는 말로 스님은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다고 했다. 권선징악과 같이 선행을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악행을 하면 필히 벌을 받는다는 직선적 사고가 '인과응보'이다. 그러나 자연계의 현상은 직선적 '인과응보' 보다는 카오스적 '인연과보'에 가깝다. 내가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환경에 따라 원하던 결과가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스님의 주장은 카오스 이론을 삶의 지혜에 연결시킨 말이다.'인연과보'의 진리는 자연환경의 '불확정성 원리'와 더불어 유기체의 '자기조직화(self-oragnization)' 현상을 합친 정황과 같다. 전자는 환경의 우연성을 설명하고, 후자는 환경 속에서 발휘되는 생명체의 창발적 행동 패턴을 가리킨다.이상의 두 가지 원리는 우연한 현상도 오래 관찰하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카오스 이론을 설명해 주는 과학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과학적 사실로 자리잡았지만, '자기 조직화 원리'는 외부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반론이 있는 주제이다.'자기 조직화'는 자기 스스로 조직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기 조직화 능력은 살아있는 유기체에는 공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실제로 자연계의 동물은 객체에서는 보이지 않던 행동 패턴이 군집에서는 드러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뜨거워진 벌집을 환기하여 식히려는 꿀벌집단의 날갯짓,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들의 V자형 비행 패턴, 어스름한 초저녁 새떼들의 군무.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바다 속 물고기가 커다란 공처럼 뭉치는 구형패턴은 특별한 의사소통이나 선행학습이 없었음에도 객체들의 창발적 자기조직화 패턴을 보여준다.자기조직화는 밖에서 강요된 행위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하여 내부로부터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 나갈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기체 집단인 인간세계에도 예외가 아니다. 단세포 태아가 분열하며 사람의 모습을 찾아가는 신비함도 자기 조직화의 증거이다. 자기 조직화가 미약하다면 머리가 여럿인 기형 동물이 자주 발견될 것이다. 개인을 넘어 인간 집단의 자기조직화 현상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호등과 교통경찰이 없는 베트남 하노이 사거리에서 교차하는 수천대 오토바이들의 흐름을 보면 인간집단의 자기조직화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조직화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현상으로, 긍정적 피드백 사이클이 존재할 때 더욱 신속히 강화된다.자기조직화(self-organizing)라는 말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 1790)'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기조직화는 생물학적 목적론과 통한다. 무질서 속에서도 생물들은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목적을 향해 자기 스스로를 조직화한다는 뜻으로, 그 결과는 좋은 발전임을 상정한다. 생물학자인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에 의하면 무생물로부터 생명체가 탄생하는 비밀도 자기조직화에 있다.자기조직화는 외부적 조작에 의하지 않고, 내부적 가이드라인에 따라 더욱 복잡한 체계로 진화한다. 자기조직화를 신뢰한다는 것은 유기체가 통제 없이도 바람직한 상태로 전이한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지구과학에 이르러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을 만들었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지구를 거대한 지적 의사결정을 하는 생명체로 상정하고 '가이아'라는 그리스 대지의 여신 이름을 은유적으로 붙였다. 그에 따르면 가이아(지구)는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이 생존하기 유리한 조건으로 지구의 균형을 지켜나가는 고마운 엄마와 같은'자기조직화'의 주체이다.학자들이 '가이아 이론'에 대하여 모두 호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조직화'의 시작이 혼돈이기 때문이다. 혼돈이 없다면 자기조직화도 발생하지 않지만, 외부의 의지적이고 의도된 개입이 없다면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있다. 불확정된 혼돈의 상태에서 외부의 통제가 없다면 파멸의 길로 이탈할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구는 자기 조직화를 유지할 힘을 스스로 가지지 못했고, 때에 따라서는 생명체를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개념을 '가이아'에 비교하여 '메디아 이론(Medea theory)'이라고 한다. 메디아는 자신을 위해 아들까지 죽였던 비정한 마녀로 은유되는 그리스 신화의 나쁜 엄마이다. 메디아 이론의 추종자는 우주는 우연이나 필연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스스로 조직화되기도 하고, 환경에 따라 비조직화되는 현상이 공존하는 '카오스'로 해석한다.결론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혼돈 속에서 유지와 파괴, 우연과 필연을 넘나드는 개념이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물론 BTS ARMY 클럽의 활동과 지구 곳곳에서 관찰되는 일반대중의 조직적 움직임은 '우연한 일이다'혹은 '필연적 일이다'의 양쪽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점쟁이는 지나간 일은 잘 설명하지만 미래를 100% 예측할 수 없다. 상황과 사람의 의지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후 설명은 가능하지만, 미래의 전개를 예측하지는 못하는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당면한 사건으로 미래를 해석하는 방향은 여러 갈래로 나뉘곤 한다. 현세 역시 가이아와 메디아가 공존하는 카오스의 세계인 것이다.카오스 이론이 필연과 우연 속에서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일정한 패턴이 반드시 인류의 생존에 호의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개인적으로 보이지 않던 어떤 것이 집단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자기 조직화는 발현된다. 그러나 집단적 관계가 항상 긍정적으로 발전한다는 가이아 이론과, 파괴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는 메디아 이론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문제이다.수십년 동안 어떤 사회는 선진국을 향해 발전하는 반면, 어떤 사회는 구조악에 찌들어 세계 최빈국의 수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 대하여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의 예측에 집착하기 보다는, 존재간의 맥락 안에서 우리 스스로 자기조직화의 해법을 찾아 가는 깨우침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연이건 필연이건, 유지이든 파괴이든“운명은 거스르는 자에게 굴복한다. 확률적으로 아주 많이!”

2019.07.30 14:25이정규

[이정규 칼럼] 생각 리더십과 행동 리더십

“이 뭐꼬?”라는 화두 (話頭)가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화두를 “말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라 설명한다. 말길과 생각의 길은 논리적 사고체계를 일컫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결정한다. 경영의 세계에도 프레임이 존재한다.대개는 창업자의 성공경험에 의하여 고착된 사고체계이다. 거듭 성공을 안겨준 사고체계에 대하여 자긍심이 높아진 대기업은 때대로 회사명 뒤에 “Way”를 붙이곤 하는데, IBM Way, Toyota Way 가 그러한 사례이다. 이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대표곡 'MY WAY'처럼 성공한 회사의 기업문화를 품격 있게 부르는 말로 사용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 프레임에 들어맞지 않는 논리적 단절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때가 끊어진 생각의 길을 이어줄 새로운 화두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영의 세계에도 기대와 다른 사업결과를 보이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환경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착된 WAY 프레임은 오히려 혁신에 저항하는 화근이 되기 쉽다. 혁신적 사고에 관계된 경영학의 용어로 '생각 리더십(thought leadership)'이라는 말이 있다.생각 리더십은 끊어진 논리의 단절을 이어주는 사고 역량이다. 침체된 시장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사업 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즈니스 프레임을 다시 설계하여 고객 솔루션을 새롭게 창조하는 활동이 '생각 리더십'이다. 문제는 규모가 큰 회사일수록 '생각 리더십' 이 결코 발휘되지 못한다는데 있다. '혁신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를 저술한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은 경쟁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고객의 목소리에 섬세하게 귀 기울이며, 신기술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등 정말로 잘 관리되는 회사 조차도 예외 없이 시장 우위를 놓치는 불편한 현실을 언급했다. 한때는 선도적인 경쟁력과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위대한 기업조차 몇 십년이 지나면 거의 예외 없이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날렵한 체형을 자랑하던 사람이, 몸무게가 늘면 당뇨병, 심장병, 통풍의 위험에 노출된다.이처럼 혁신 기업도 몸집이 커지면 예외 없이 병이 든다는 그의 주장은 대기업에게 두려운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걱정스러운 코멘트는 대기업의 뛰어난 관리자가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고 해도 회사를 실패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다. 파괴적 기술에 의한 '논리의 불연속'이 발생한 환경변화에서 기업의 가장 뛰어난 관리자의 전략적 의사결정조차 경영실패를 막을 수 없다는 크리스텐슨의 주장은 과연 대기업에서 '생각 리더십'의 고양이 가능한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크리스텐슨의 주장은 스타트업의 경영자에게 고무적인 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스타트업의 창업자는 '논리의 불연속'을 창조하는 일을 한다. 과거의 프레임으로 이해되지 않고 생존이 되지 않는 새로운 사업영역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든 사업 도메인에서는 대기업은 도대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크리스텐슨은 5가지 딜레마 원칙으로 이를 설명한다. 첫째, 대기업은 기존고객을 포기하지 못하고, 투자도 기존사업에 집중한다. 둘째, 새롭게 형성된 작은 시장은 대기업의 성장욕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셋째, 미성숙한 시장은 투자 분석을 위한 정보도 없어 투자결정은 대부분 부결된다. 넷째, 새로이 창출된 신시장 도메인에서는 조직원의 핵심역량이 오히려 무능력이 된다. 다섯째, 고객의 요구수준을 초과하는 과도한 기술공급을 경쟁력의 방편으로 집착하면서 손실을 더욱 늘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대기업의 사고체계를 실패 프레임워크(failure framework)라 이름 붙였다. 대기업이 실패 프레임워크를 스스로 파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불행히도 크리스텐슨의 답은 “거의 불가능”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기업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영속기업으로 꾸준히 살아 남는 일은 매우 어려운 희망사항이다. 세상을 청년이 바꾸듯이, 산업의 구조도 대기업이 아니라 거듭 출현하는 스타트업이 바꾸어 낼 것이라는 예언과 통한다. 인간 생명의 유한함이 기업 도메인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메시지이다. 결국 '생각 리더십'도 리더가 활동하는 기업환경의 맥락이 맞지 않으면 도움이 못 된다는 뜻이다.사람이 시니어가 되면 생각만 많아지고, 행동은 굼뜨게 된다. 젊은이는 지혜는 모자라지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생각 리더십'과 더불어 '행동 리더십(Action Leadership)'이 필요하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윈도우 GUI를 개척한 알랜 케이(Alan Kay)는“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발명하는 일”이라 말했다. 생각을 앞서 하는 것보다도 과감한 창조 활동에 방점이 있다는 말이다. 한때 젊은 후배들에게 창업을 권하는 일에 주저한 적이 있었다. 수년간의 스타트업 생활을 통해 실패확률이 높은 창업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이 심장을 뛰게 만들어? 가슴이 뛴다면, 낭비할 시간이 없어! 너만의 길을 가!” 생각 리더십은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접근을 상정하지만, 행동 리더십은 실제로 미래를 창조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젊은 세대의 행동으로 시작된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 기존 프레임을 쫓지 말고, 새로운 길, 세상을 바꾸는 삶을 젊은 창업자들에게 기대하는 이유이다.

2019.07.08 18:07이정규

[이정규 칼럼] 리좀(Rhizome)과 클라우드

10년 전에 재미있게 시청한 우리나라 첩보액션 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 제목이 안구의 홍채 혹은 무지개를 의미한다는 '아이리스'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되는 한 장면이 있다. 극의 등장인물 중 첩보기관의 팀장이 부하에게 소리쳤다.“누가 생각하라고 했어! 시키는대로 해!” 이 대사의 맥락을 IT업계의 시스템 아키텍처에 견주어 보고 싶어졌다.이런 일방적 명령은 전형적인 메인프레임/더미 단말기식 의사소통이다. 1980, 90년대의 주력 시스템인 대형 컴퓨터는 모든 논리연산 처리를 중앙의 메인프레임에서 처리했다. 단말기는 키보드 입력에 사용하거나 처리된 정보를 단지 모니터 상에 표출하기만 했다. 80컬럼의 글자가 단말기에 뿌려질 뿐, 작동하는 계산 로직이 단말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IT업계에서는 '바보'라는 말을 단말기 앞에 붙였다. '더미 터미널(dummy terminal)'이 그것이다.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가 출현했다.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 기술의 맥락을 인간 일상의 대화로 비유해보고 싶은 발심이 생겼다. 아마도 서버 입장에서는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으면 가끔씩 해줄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의 클라우드 컴퓨팅 아키텍처의 맥락을 비슷하게 풀어보면 어떤 대화 모습이 적절할까?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든 전달할게요! 매달 돈만 제대로 내신다면^^” 정도 되지 않을까 한다.정보의 존재 위치는 권력의 위치와 같다. 메인프레임/더미 단말기 시대에는 계층구조의 최상위 경영자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지시하고, 아래는 시키는 것만 수행한다. 반면에 클라이언트/서버 환경에서는 권력을 서버와 클라이언트가 어느 정도는 나누어 갖고 있다. 업무 별로 정보를 가지는 서버가 존재한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하고, 해당 서버가 응대한다. 특정 서버가 죽으면 해당 서비스는 활용할 수 없다.한편 클라이언트/서버 환경에서는 단말이 어느 정도 지능을 가진다. 직원 역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는 상사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일은 상급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급자는 조언하고 돕는다. 상급자가 요청하고, 직원이 조언하고 서비스하는 것도 가능하다.클라우드 환경은 어떨까? 클라우드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다. 조직의 권력은 계층 위에도 없고 특정인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힘은 더이상 메인프레임이나 특정 서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은 네트워크의 관계 속에 내재한다. 만들어진 네트워크의 짜임새가 권력이고 힘이다. 정보자원은 클라우드 네트워크 상에 분산되어 있고, 구성 요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힘으로 협상력을 가진다. 어떠한 일도 혼자 처리할 수 없다. 당면 과제는 네트워크 상에서 분산된 자원과 협업으로 해결된다. 하나의 컴퓨팅 자원이 파괴되어도 다른 IT 자원에게 업무가 넘어가서 지속적으로 수행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힘을 없애려면, 끊임없이 변신하는 네트워크 전체를 파괴해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 비슷하다.현대철학의 위대한 사상가인 질 들뢰즈는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반복하면서 관계의 장(場)을 만들어 가는 형태를 '리좀(rhizome)'이라고 했다. 리좀은 잔뿌리를 내리며 뻗어가는 땅속의 구근 혹은 덩이줄기를 말한다. 고구마 줄기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고정된 나무와 달리 덩이줄기는 뿌리가 따로 있지 않다. 줄기가 땅에 닿는 접점마다 새 뿌리가 제멋대로 만들어진다. 연결된 선(관계)은 마치 그물처럼 연결된다. 이러한 그물은 환경 변화에 따라 끝임 없이 분절하고, 다시 연결되어 환경에 적응한다. 줄기가 자라날 방향이 미리 결정되지도 않고 새 줄기가 뻗어나가며 스스로 증식한다.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의 메커니즘이다. 결국 생물의 이치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은유법으로 들뢰즈는 '리좀'이라는 용어들 사용했다. 이러한 철학 개념을 '관계의 철학'이라 한다. 도형으로 그리면 불규칙한 그물과 같은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된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한 특징인 클라우드 아키텍처의 변천에 대한 통찰을 관계철학에서 얻을 수 있다.철학의 세계도 절대자를 향한 본질주의 철학에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설명하는 주체주의 철학으로, 그리고 일정한 지향과 방향이 없지만 자기조직화를 지향하는 관계주의 철학으로 변천했다. 컴퓨터 아키텍처도 중앙 집중적 메인프레임 아키텍처에서, 상호적 관계를 존중하는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를 지나서, 일정한 형태를 설명할 수 없어서 '구름'이라는 용어를 빌려온 클라우드 아키텍처 환경으로 진화했다.철학적 관점, 컴퓨터 아키텍처 의 관점도 사회적 현상이 투영되는 거울이다. 무엇인가 인간 세상에서 힘의 중심과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다. 관계철학은 조직의 힘은 구성원 자체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연대한 맥락에 힘이 있다고 설명한다. 시대를 궤뚫는 통찰을 가질 때, 변화해가는 사회에서 나의 미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사회의 관계자로서 나의 역할과 삶을 깊이 성찰때가 된 것 같다. 컴퓨터 아키텍처의 변화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을 얻는다.

2019.06.04 08:46이정규

거버넌스…정부실패, 기업실패, 시장실패의 해법

“성공의 반대말은 무엇일까?”길거리의 아무나 잡고 이렇게 물어보자! 아마도 열에 아홉은 '실패'라고 답할 것 같다. 만번의 실패가 아니라 '만번의 효과없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토마스 에디슨. 누군가 꾸며낸 말이라고 하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했다는 나폴레옹 같은 위인은 아마도 다른 반대어를 댈 수도 있겠다.그런데 이런 생각이 스타트업 벤처에서는 극명하게 바뀐다. 스타트업의 방법론인 '린 개발 사이클'에서는 창업의 궁극적 목표는 '실패를 통한 학습경험'에 있다고 강조된다. 즉,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고객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꾸준히 구매하는 혁신 제품과 참신한 서비스를 찾아내는 일이 창업의 핵심이라 간주한다. 학습이 완성되면 벤처의 딱지를 떼고 일반기업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벤처 기업가에게 '성공의 반댓말은 실패가 아니고 학습' 일 수 있다.스타트업이 아니라면 '실패란 없다. 학습만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언감생심이다.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증명하는 자리다”고 설파했던 이영표 해설위원의 말처럼 공공기관·기업에게 학습과 연습은 남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기관과 기업은 새로운 연습을 시도하고, 때때로 벌어진 실패학습은 쓰라린 사회적 비용으로 고스란히 시민의 고통이 되곤했다. 이것이 정부·시민사회·대기업에게 보다 높은 사명의식과 도덕수준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정부에 의한 실패학습의 일례를 보자. 198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경제체제의 도입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의 강화는 관료적 정부정책의 비효율성을 부각시켰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적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의 전환과 민영화로 특징되는 '신공공관리' 체제가 도입되었다.시장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려는 이러한 자본 친화적 정책 변화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사회 약자를 위한 복지 프로그램과 사회 안전망의 상실도 발생시켰다. 그 결과 사회 양극화는 가속되고 계층 간의 갈등은 증폭되었다. 이런 현상을 행정학자들은 '정부 실패'로 말한다. 나는 출근길의 미어 터지는 6량 급행열차를 이용할 때 마다 사회간접자본을 민영화시킴으로서 격게되는 정부실패를 체감한다.게다가 기업자본의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발발한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사회의 운명을 온전히 시장에 맡길 때 초래될 '시장실패'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2000년대 초 미국의 엔론과 월드컴 스캔들로 밝혀진 회계부정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기업의 내부통제구조와 조직 거버넌스의 적정성에 경종을 울렸다. 이러한 기업문제는 전술한 정부실패, 시장실패와 비슷한 언표처럼 '기업실패'로 부를 수 있다. 그 결과 21세기 초엽 부터 정부·시장·기업실패 현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통제체제의 해법이 새롭게 요구되기 시작했다.1990년대 말부터 정치·행정학 분야에서는 정부실패의 솔루션으로 '굿 거버넌스'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정부실패의 영향이 시민단체의 정책참여를 촉발시켜 수평적 '네트워크 거버넌스'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보기술의 발전과 인터넷을 통한 빠른 정보전파도 원인이 된다.그러나 보다 높아진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능동적 정치참여, 그리고 협치와 동일시되는 거버넌스의 대두에 더 큰 이유가 있다. 정치·행정학 분야의 학자들은 네트워크적 거버넌스를 과거의 관료적이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대안으로 간주하며 이를 뒷받침할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있다. 일례로 진화생물학을 사회적 공진화(co-evolution) 이론으로 수용한다. 대자연에서 발견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현상으로 시민에 의한 '미시권력'이 최적화된 사회질서를 만들어 가는 네트워크 거버넌스 체제를 상정한다.한편 시장실패·기업실패 해법의 하나로 2002년 7월에 발효된 미국정부의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 이하 SOX)을 예로 들 수 있다. SOX법의 302조(재무제표에 대한 기업책임)와 404조(내부통제의 매니지먼트 평가)에서는 기업 재무제표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이를 보증하는 내부통제절차의 적정성에 대하여 CEO가 확약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EU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시장실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은행의 금융 리스크 기준선을 통제하는 BASEL II, III 협약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보험업계 역시 SOLVENCY II 지침을 통해서 위험기반 지불여력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 강화되고 있다. 거시적 거버넌스를 이야기 할 때마다 SOX, BASEL과 같은 명칭이 반드시 거론되는 이유이다.'거버넌스(governance)'는 배의 키(방향타)를 조정한다는 라틴어 'gubernare'에서 유래했다. 정부를 뜻하는 'government'와 어원은 동일하다. 인공두뇌를 의미하는 사이버네틱(cybernetic)도 같은 어원이다. 방향타, 정치, 거버넌스, 인공두뇌라는 단어 사이에 무슨 관계성이 존재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 명확한 맥락을 설명할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하다.거버넌스는 행정학에서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있다. 이를테면 국정관리, 국정관리체계, 신공공관리, 통치양식, 국가경영, 협력적 통치, 네트워크적 관리, 망치, 협치, 공치 등 다양하다 (이명석, 2008). 학자들은 번역된 여러 단어들이 영어 본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동의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원어의 발음대로 '거버넌스'로 하자는 의견이 지금까지 우세하다.이러한 거버넌스에 대한 멘탈 모델이 정치학, 행정학, 경영학, 경영정보학 도메인에서 약간씩 차이가 존재한다. 정치 행정학에서 거버넌스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다양한 이해당사자간의 '네트워크적 거버넌스'를 상정한다. 키워드는 '연대'이다. 경영정보학에서 'IT 거버넌스'는 비즈니스 전략과 정보기술 간의 합리적 '연계'를 통한 효과·효율에 집중한다. 경영학 분야에서 '기업 거번넌스'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계층적 모형에 천착하면서 의사결정의 투명성, 조직의 지속가능성, 그리고 경영자의 책무성에 집중한다.이처럼 기업은 여전히 조직을 거버넌스계층, 관리계층, 운영계층의 피라밋 구조로 보는 관점을 깨지 못했다. 예전에는 전략계층으로 불렀던 경영층을 거버넌스 계층으로 바꿔 부를 뿐이다. 그러므로, 경영학 도메인의 거버넌스는 앞서간 정치·행정·사회학의 '연대와 연계'와 같은 거버넌스의 특징적 DNA를 물려받지 못했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네트워크적 거버넌스의 모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기업 조직이 봉건적 경영체제의 틀을 깨지 못한 이유이다. 다만 일부 기업이 '홀라크라시'라는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초기 모델을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기업 거번넌스에 대한 경영학자들의 심도깊은 '네트워크적 거버넌스' 의 연구 발전을 기대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2019.03.15 16:16이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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