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치를 오늘의 작품으로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미디어공학자 정지윤, 판소리 국악인 최한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밤의 경회루를 바라본다. 누각 위에는 달이 떠 있고, 그 아래 수면에는 누각과 달빛이 다시 비친다.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반영도 조금씩 흔들린다. 경회루의 매력은 건축의 형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건축과 물, 달빛과 반영, 그 사이에 생기는 여백과 시간이 함께 경회루라는 장면을 만든다. 2012년 경회루 건립 600주년 기념 야간 실경공연 '2012 경회루 연향'을 제작할 때는 그 건축과 연못을 실제 공연의 무대로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작품으로 경회루를 다시 해석하면서도 건축의 형태뿐 아니라 물과 빛, 반영과 고요한 시간에 시선을 머물게 했다. 이러한 풍경이 이제 거실 TV 속 예술작품이 됐다. LG전자는 지난 3일 아트 콘텐츠 서비스 'LG 갤러리 플러스(LG Gallery+)'를 통해 조선시대 궁궐과 왕실회화, 도자기 등을 디지털 아트로 재해석한 'K-헤리티지 컬렉션: 시즌1 조선왕실 시리즈' 21점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4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월드IT쇼의 LG전자 전시관에서 대표 콘텐츠 2점을 먼저 선보인 데 이어, 조선왕실 문화의 여러 층위를 하나의 시즌형 컬렉션으로 확장한 것이다. 필자는 이번 K-헤리티지 컬렉션의 감독으로 참여해 전체 개념과 창작방향, 작품 선정과 구성, 시즌·시리즈 체계, 큐레이션과 최종 작품화를 총괄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었다. 각각의 유산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오늘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창작할 것인가였다. 국가유산을 디지털콘텐츠로 만든다는 것은 오래된 형상을 화면에 옮기는 것 이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술보다 먼저 읽어야 할 것 국가유산을 디지털콘텐츠로 창작할 때 흔히 기술부터 생각하기 쉽다. 어떤 3D 기술을 활용할 것인지, 어떤 움직임과 시각효과를 적용할 것인지부터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기술은 새로운 표현과 감상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기술적 가능성을 먼저 정해놓고 여러 유산에 적용하면 소재는 달라도 작품의 인상은 서로 닮아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유산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미감은 표현의 뒤편으로 밀릴 수도 있다. 창작의 순서는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고 본다. 먼저 유산과 장소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읽고, 무엇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정한다. 여기에 예술적 상상을 더해 콘텐츠를 창작하고, 이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기술을 선택한다. 마지막에는 연출을 통해 관객이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떤 경험을 남길 것인지까지 연결한다. 유산의 가치와 의미에서 출발해 해석, 예술적 상상, 콘텐츠 창작, 기술 선택과 연출을 거쳐 관객 경험에 이르는 과정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출발점은 결국 해석이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를 같은 방식으로 작품화할 수는 없다. 근정전에서는 왕조의 중심과 공간의 축, 대칭과 위계가 먼저 읽힌다. 반면 경회루에서는 달빛과 수면의 반영, 건축 주변의 여백과 시간성이 중요하다. 공예에서도 백자 달항아리는 둥근 형태와 백색을, 분청사기는 흙의 물성과 문양을, 청화백자는 흰 바탕 위 푸른 선의 회화성을 중심에 놓았다. 하나의 시각효과를 여러 유산에 반복하기보다 각각의 특성에 따라 표현방식을 달리한 것이다. 유산마다 다른 창작문법이 필요한 이유다. 기술의 정교함도 중요하지만, 그 기술이 해당 유산의 본질을 얼마나 적절하게 드러내는가가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21개 작품보다 먼저 만든 것 이번 프로젝트에서 먼저 고민한 것은 개별 작품의 수가 아니었다. 작품들이 어디에 놓이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앞으로 다른 시대와 장소의 유산을 다룰 때도 이어갈 수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래서 개별 작품에 앞서 컬렉션과 시즌, 시리즈, 큐레이토리얼 챕터로 이어지는 체계를 설계했다. 작품을 제작한 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은 것이 아니라 컬렉션의 구조를 먼저 정하고, 그 안에서 각 작품의 위치와 의미를 구체화한 것이다. 시즌 1은 디지털 회화 3점, 미디어아트 영상 8점, 디지털 아트 이미지 10점으로 구성된다. 작품들은 '왕실의 상징', '왕실의 공간', '물과 정원', '형태와 공예'라는 네 개의 주제 아래 연결된다. 일월오봉도와 국새, 근정전과 경회루, 왕실회화와 도자기 등이 각각의 의미와 감상 흐름 안에서 관계를 맺는다. 큐레이션은 단순히 작품을 분류하는 일이 아니다. 작품 사이에 의미의 관계를 만들고 하나의 흐름 안에서 감상하도록 구성하는 일이다. 콘텐츠의 수가 늘어난다고 저절로 컬렉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사이에 관계와 질서가 생길 때 비로소 컬렉션이 된다. 이러한 구조를 관통하는 철학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오래된 것을 현대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본래의 질서와 미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존중하면서 컨템포러리(Contemporary), 곧 동시대의 예술적 감각과 감상방식으로 다시 창작하는 태도다. 이번 컬렉션은 콘텐츠 기획과 창작을 담당한 헤리티지랩(Heritage LAB), 디지털 자산을 기반으로 제작한 위프코(WIPCO), 플랫폼 연계와 유통을 맡은 엘팩토리(ELFACTORY)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헤리티지랩은 문화유산(Heritage)과 디지털(Digital), 예술(Art)을 결합하는 창작 개념인 '헤디트(HEDIT)'를 바탕으로 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현대적인 작품과 감상경험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번 컬렉션의 연출과 창작에는 감독인 필자를 비롯해 프로젝트 매니저 서정국, 3D 영상 디자인 김성강·김희봉·신혜미, 사운드 디렉터 이영재 등 여러 창·제작 스태프가 함께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이 연결되면서 국가유산의 해석에서 작품 구현과 실제 서비스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설명에서 감상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국가유산 이번 컬렉션에서 세운 또 하나의 원칙은 '설명에서 감상으로'다. 국가유산에는 명칭과 연대, 기능과 역사적 배경처럼 설명해야 할 것이 많다. 이러한 정보는 필요하지만 디지털콘텐츠에서 언제나 설명이 감상보다 먼저 놓일 필요는 없다. 빛과 공간, 형태와 색, 움직임과 소리를 먼저 경험하고 그 뒤에 '이것은 무엇인가', '왜 이런 모습인가'라는 질문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감상이 관심을 만들고, 관심이 질문으로 이어지며, 그 질문이 다시 유산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설명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나는 순서를 바꾸자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LG 갤러리 플러스가 제공하는 감상환경은 주목할 만하다. LG전자는 독자 스마트TV 플랫폼 webOS를 기반으로 TV를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디지털 캔버스로 확장하고 있다. LG전자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webOS는 전 세계 190개국에서 사용되는 플랫폼으로, 2025년 말 기준 약 2억 6,000만 대의 기기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가운데 LG 갤러리 플러스의 프리미엄 서비스는 현재 31개국에서 제공된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 런던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작품을 비롯해 5,000개 이상의 아트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에 조선왕실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더해졌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K-컬처의 확산이 대중음악과 드라마를 넘어 더욱 다양한 문화적 경험으로 이어지려면, 한국의 문화자원에 뿌리를 둔 새로운 K-콘텐츠가 필요하다. 이번 컬렉션은 가장 한국적인 소재가 동시대의 감상방식과 만나 국내외 이용자의 일상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도다. LG전자는 이번 발표에서 기존 협력사들과 '한국의 아름다움'을 디지털 아트로 재현하는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겠다는 방향도 밝혔다. 이러한 시도가 의미 있는 이유는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를 일회성 공개나 기술적 구현에 머물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와 서비스로 연결하려는 데 있다. 물론 디지털 작품이 실제 유산의 공간과 물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히려 디지털콘텐츠는 아직 그 유산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첫 장면을 보여주고, 이미 알고 있던 유산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입구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콘텐츠를 만들었는가를 넘어, 완성된 작품이 이용자의 일상에서 어떻게 발견되고 선택되며 어떤 감상경험으로 남는가다. 국가유산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창작과 기술, 플랫폼이 함께 열어갈 새로운 가능성이다. 옛것의 품격은 지키고, 감상의 방식은 오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