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열풍에서 저널리즘을 읽는다
영화 '오디세이'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작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 19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연초 '왕과 사는 남자' 이후 또다시 천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거센 '오디세이 열풍'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근 출간된 김헌 교수의 번역본 '오뒷세이아'를 집어 들었다. 호메로스 특유의 운율과 시적인 문장을 생생히 살려낸 번역이 인상적이었다. '오디세이' 이야기는 영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많은 작가가 이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빚어냈다. 영문학 최대 걸작 중 하나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역시 '20세기판 오디세이'가 아니던가.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저널리즘'을 떠올렸다. 거친 풍랑을 헤치고 고향 이타카로 향하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21세기 언론의 운명과 참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프레임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넘쳐나는 바다 속에서, '진실'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항해해야 하는 외롭고도 힘든 운명 말이다. 흔히 '오뒷세이아'를 '10년 동안 방랑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 속 오뒷세우스가 실제로 바다 위를 헤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을 요정 칼립소의 섬 '오귀기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칼립소의 사랑을 받으며 불사와 안온함을 보장받은 채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른 적 없었고, 흘러갔다, 감미로운 나날은 귀향을 애타하는 그에게, 더 이상 뉨페가 기쁨이 아니했기에. 그러나 밤마다 그는 잠을 자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움푹한 동굴에서 원하지 않는 그가 원하는 그녀 곁에서. 낮에는 바위 위와 바닷가에 앉아서 눈물과 탄식과 고통으로 기개를 찢으면서 불모의 바다 위를 응시하곤 했다, 눈물을 쏟으면서." (225쪽) 영생과 안락함이라는 유혹 속에서도 왜 그는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칼립소와 함께하는 삶은 편안했지만 늘 허전하고 고통스러웠다. 그에겐 '진짜 삶'이 있는 고향 이타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언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칼립소의 섬'에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이 잘 차려놓은 각종 자료에 길들여진 편암함, 현장 확인 없이 추측과 프레임에 의존해 쉽게 판단하고 기사를 쏟아내려는 유혹 말이다. 항해를 방해하는 달콤한 유혹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며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자극적인 클릭베이트와 속보 경쟁은 기자의 취재 윤리를 끊임없이 흔든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을 돛대에 묶어 세이렌의 유혹을 견뎌냈듯, 기자 역시 철저한 보도 준칙이라는 돛대에 스스로를 매어두지 않으면 윤리적 타락의 바다에 빠지고 만다. 오뒷세우스는 결국 안락한 칼립소의 섬을 뒤로하고 직접 뗏목을 엮어 거친 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이타카에 도달한다. 하지만 고향에서 그는 또 한번 '철저한 검증'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108명의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던 페넬로페는 돌아온 그를 선뜻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진짜 남편인지 입증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만약 참말로 저 분이 오뒷세우스이고 집에 이른 거라면, 정말로 우리 둘은 알아볼 것이다, 서로를 더욱더 잘. 우리에겐 있으니까, 징표가, 우리 둘만 알고 다른 이들에겐 숨겨진 것이." (716쪽) 20년 만에 돌아온 남편을 확인하기 위해 페넬로페는 “침대를 방 밖으로 옮기라”고 요구한다.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의 요구에 이렇게 절규한다. "누가 다른 곳에 놓았소, 내 침대를? 그건 곤란할 텐데, 아주 능숙한 사람에게도, 신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맘먹고서 다른 장소로 손쉽게 옮겨주시지 않는다면." (720쪽) 올리브나무 뿌리로 박아 만든 침대의 비밀을 정확히 짚어내고 나서야, 페넬로페는 비로소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주장의 화려함이나 당위성에 속지 않고 끝까지 사실을 확인하는 철저한 팩트체킹이야말로 저널리즘을 지탱하는 신뢰의 마지막 거멀못이다. (이 대목에서는 "사랑한다는 어머니의 말도 일단 의심하고 검증하라"는 언론계의 오랜 우스갯 소리가 생각났다.) 안락한 '칼립소의 섬'을 빠져나오는 용기, 자극적인 유혹을 뿌리치는 '취재 윤리', 그리고 사실을 끝까지 입증해 내는 '팩트체크'.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질 때 언론은 비로소 진실이라는 이타카에 도달할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고난과 눈물은 오늘을 살아가는 저널리스트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편안한 섬에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진실을 향해 거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가?" [덧글] 개봉된 영화 제목은 '오디세이'이다. 반면 김헌 교수의 번역본은 '오뒷세이아'로 돼 있다. 김헌 교수는 그리스어 원어에 충실하게 옮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칼럼에서는 둘 모두를 살리기 위해 '오디세이'와 '오뒷세이아'를 혼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