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칼럼] 문화에 투자하라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반도체에 투자해야 한다. 인공지능(AI)에도 투자해야 한다. 전력망과 첨단산업에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거대한 산업 인프라가 하나 있다. 문화다. 정확히 말하면 콘텐츠다. 우리는 오랫동안 문화를 산업정책의 중심이 아니라 지원 대상으로 생각해왔다. 영화와 드라마, 음악과 웹툰에 들어가는 정부 예산을 '문화예산'이라고 불렀다. 이제 생각을 바꿀 때가 됐다. 콘텐츠 투자는 문화예술인을 돕는 돈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상품을 세계시장에 팔기 위한 선행 투자다.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투자이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이 축적할 지식재산권과 브랜드 자산을 만드는 투자다. 나는 지금이 대한민국이 콘텐츠에 대대적으로 투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역사를 보면 한 나라의 문화가 세계로 퍼지는 데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로마는 군대가 먼저 갔다. 영국은 상품이 먼저였다. 미국은 자본과 영화가 함께 갔다. 일본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먼저 세계인의 신뢰를 얻었다. 한국은 다르다. 노래와 이야기가 먼저 퍼졌다. 드라마가 아시아인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강남스타일과 BTS, K팝이 세계인의 귀를 열었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뒤를 음식과 화장품이 따라가고 있다. 라면과 김, 만두와 소스가 세계인의 식탁으로 들어간다. 한국 화장품이 세계인의 피부에 닿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을 여행하려는 사람도 늘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문화가 먼저 가서 한국에 대한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를 따라 상품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새로운 수출경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신뢰의 사다리'라고 부른다. 음악을 듣는 것은 쉽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위험이 없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것은 몸 안에 넣는 일이다. 화장품은 피부에 바르는 것이다. 옷은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표현한다. 교육과 의료,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큰 신뢰를 요구한다. 그래서 세계인은 한 칸씩 올라간다. 문화에서 음식으로. 음식에서 화장품으로. 화장품에서 패션과 관광으로. 다시 기술과 서비스로. 마지막에는 교육과 의료, 제도와 표준으로 간다. 문화가 이 사다리의 첫 번째 칸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투자도 첫 번째 칸에서 시작해야 한다. 콘텐츠는 대한민국의 수출 인프라다 우리는 도로를 만들 때 투자라고 한다. 항만을 만들 때도 투자라고 한다. 반도체 공장을 짓고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는 것도 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상품을 세계인의 마음속으로 운반하는 콘텐츠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인프라다. 도로는 상품을 항구까지 운반한다. 콘텐츠는 한국 상품을 세계인의 마음까지 운반한다. 좋은 드라마 하나가 세계 수억 명에게 한국을 알린다. 세계적인 K팝 스타 한 명이 수십 개 나라의 젊은 세대에게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영화 한 편, 드라마 한 편, 노래 한 곡이 음식과 화장품, 패션과 관광의 시장을 함께 연다. 따라서 콘텐츠 제작비를 단순한 문화지원금으로 보는 관점부터 바꿔야 한다. 콘텐츠는 대한민국의 '신뢰 인프라'다. 문화예산이 아니라 산업투자다. 수출투자다. 국가 브랜드 투자다. 문제는 성공이 아니라 생산량이다 콘텐츠 산업에는 결정적인 특징이 있다. 무엇이 성공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부도 모른다. 대기업도 모른다. 플랫폼도 모른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공할 작품을 골라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도전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다. 100개의 작품이 만들어져야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커진다. 100명의 창작자가 도전해야 세계적인 창작자가 나온다. 10개의 제작사가 아니라 100개, 1000개의 제작사가 경쟁해야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은 '어떤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창작자가 실패를 감수하고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자본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는 이야기와 사람이 있다. 문제는 자본이다. 콘텐츠 산업은 성공 확률을 예측하기 어렵고 제작 기간이 길다. 담보도 부족하다. 전통적인 금융기관이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래서 국가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이 콘텐츠 산업에 대규모 장기자본을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K-콘텐츠 투자국가'를 만들자 첫째, 대규모 K-콘텐츠 성장펀드를 만들자. 정부만 돈을 내는 펀드가 아니다. 정책금융기관이 마중물을 넣고 민간 금융회사와 기업, 기관투자가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다. 영화, 드라마, 음악, 게임, 웹툰, 애니메이션에 장기적으로 투자한다. 단순 보조금은 한번 쓰면 끝난다. 투자는 성공하면 돈이 돌아온다. 그 돈으로 다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든다. 문화정책을 '지원하고 끝나는 구조'에서 '투자하고 회수하고 재투자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둘째, K-IP 국부펀드를 만들자. 콘텐츠를 많이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권리를 가져야 한다. 오징어게임과 같은 세계적인 콘텐츠가 나올수록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누가 IP를 가지고 있는가." 21세기 문화산업에서 IP는 영토와 같다. 좋은 콘텐츠가 10년, 20년 동안 영화와 드라마, 게임, 캐릭터, 상품으로 확장되면 엄청난 현금흐름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기업의 IP를 빼앗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대신 제작자와 창작자가 IP를 보유할 수 있도록 투자하고, 그 투자지분을 통해 국민도 성공의 과실을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낸다면 K-IP는 장기적으로 국가의 중요한 무형자산이 될 수 있다. 셋째, 콘텐츠 제작에 파격적인 세제 인센티브를 주자. 반도체와 배터리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세금 경쟁을 벌인다. 콘텐츠도 다르지 않다. 촬영 하나가 들어오면 제작회사만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배우와 스태프, 숙박과 교통, 관광과 지역경제가 함께 움직인다. 더 중요한 것은 성공한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장기적인 국가 브랜드 효과다. 따라서 국내에서 제작하고 국내에 IP와 핵심 권리를 축적하는 콘텐츠 투자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세제 지원을 검토해야 한다. 네 번째 투자는 사람이다 돈만 넣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콘텐츠 경쟁력은 결국 작가와 감독, 프로듀서, 배우, 음악가, 디자이너, 게임 개발자와 수많은 기술 인력에게서 나온다. AI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영상 생성 AI, 번역, 더빙, VFX와 버추얼 프로덕션이 콘텐츠 제작비를 크게 낮출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이 기술을 가장 먼저 콘텐츠 산업에 결합해야 한다. AI와 문화는 별개의 산업이 아니다. AI가 콘텐츠의 생산성을 높이고, 콘텐츠가 AI의 세계시장 진출을 돕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 최고의 'AI 콘텐츠 제작국가'를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 다섯 번째 투자는 세계시장이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놓고 국내에서 기다려서는 안 된다. 제작 단계부터 세계시장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 번역과 더빙에 투자해야 한다. 해외 배급에 투자해야 한다. 현지 마케팅에 투자해야 한다. 한국어 교육에도 투자해야 한다. 세종학당도 단순한 문화교류기관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한국의 음악과 영화, 음식과 상품을 장기간 소비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언어는 가장 오래가는 문화 인프라 가운데 하나다. 영국문화원과 알리앙스 프랑세즈가 오랜 기간 보여준 국가전략이다. 그리고 문화투자를 산업투자로 연결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는다.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성공했는데 삼성과 현대자동차만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소기업과 새로운 브랜드가 함께 세계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콘텐츠와 상품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식품이 따라가고, K팝이 성공하면 화장품과 패션이 따라가고, 영화가 성공하면 관광이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콘텐츠는 문화체육관광부, 식품은 농림축산식품부, 화장품은 관련 부처, 수출은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 등으로 나뉘어 지원한다. 그러나 세계인은 그렇게 한국을 소비하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다가 라면을 먹는다. 음악을 듣다가 화장품을 산다. 한국어를 배우다가 한국을 방문한다. 소비자는 하나의 사다리를 오르는데 정부만 칸막이에 갇혀 있다. 이것을 바꿔야 한다. K콘텐츠 → K푸드 → K뷰티 → K패션 → K관광 → K서비스를 하나의 투자전략으로 묶어야 한다. 문화투자의 목표는 '국민의 자산'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 문화투자의 성공을 제작사와 플랫폼만 가져가야 하는가. 국민도 투자자가 될 수 있다. 정책금융과 연기금, 민간자본이 K-콘텐츠와 K-IP에 투자하고 성공한 콘텐츠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다시 국민과 사회에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반도체 공장을 국가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IP도 국가경제의 자산으로 봐야 한다. 공장은 낡는다. 그러나 미키마우스와 스타워즈 같은 IP는 세대를 넘어 돈을 번다. 좋은 IP 하나는 공장 하나보다 오래갈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공장과 부동산뿐 아니라 지식재산을 축적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문화투자의 최종 목표는 문화예산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을 늘리는 데 있다. 지금이 투자할 때다 투자에는 때가 있다. 세계가 한국을 모를 때 콘텐츠에 10조원을 투자하는 것과 세계가 한국을 궁금해하는 지금 투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금은 BTS와 K팝,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신뢰자본이 존재한다. K푸드가 성장하고 있다. K뷰티가 세계시장으로 나가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젊은 세대가 세계 곳곳에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가 세계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때 투자해야 한다. 문화산업의 특성상 오늘 투자한 돈이 내년에 모두 성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작가를 키우고 제작사를 만들고 IP를 축적하고 세계적인 브랜드가 탄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부가 해야 한다. 정치의 임기는 짧지만 문화와 브랜드를 만드는 시간은 길다. 국가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자본을 공급해야 한다. 반도체만큼 콘텐츠에 투자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제조업으로 성장했다. 반도체에 투자했다. 자동차에 투자했다. 조선과 철강에 투자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이제 새로운 국가 자산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 콘텐츠다. 반도체는 세계의 기계 속으로 들어간다. 콘텐츠는 세계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반도체가 대한민국의 산업 경쟁력을 만든다면 콘텐츠는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신뢰를 따라 음식이 팔리고, 화장품이 팔리고, 패션과 관광이 움직이고, 기술과 서비스가 세계로 나간다. 그래서 문화투자는 문화만을 위한 투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 산업을 위한 선행투자다. 이제 문화정책의 질문을 바꾸자.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가 아니다. “얼마를 투자해서 어떤 자산을 남길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지원에서 투자로. 제작에서 소유로. 국내 흥행에서 세계시장으로. 개별 작품에서 IP 자산으로. 정부 예산에서 국민의 투자로. 문화는 신뢰의 선발대다. 콘텐츠는 그 신뢰를 생산하는 산업이다. IP는 그 신뢰를 저장하는 자산이다. 브랜드는 그 신뢰를 돈으로 바꾸는 힘이다. 지금 세계가 대한민국을 보고 있다. 이 기회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지금 투자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문화가 강한 나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화에 투자하고, IP를 축적하고, 그 수익을 다시 국민에게 돌려주는 나라'로 만들자. 한류의 다음 칸은 더 많은 지원이 아니다. 더 크고, 더 길고, 더 과감한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