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날로그의 낭만, 컴퓨터 음악 그 신선한 충격
워크맨 이어폰 너머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음악을 듣고, LP의 지직거리는 노이즈조차 감성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CD의 선명함에 감동하던 시대, 당시 소리는 물리적인 실체였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 기타를 치고 노래하던 즐거움을 넘어 음악을 만들어 보겠노라며 전문 장비 하나 없이 기타 한 대와 마이크를 전축에 연결해 자작곡을 녹음하곤 했다. 크롬(Chrome) 테이프에 담긴 서툰 노래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꿈을 키우던 그 시절, 음악 제작은 곧 '기록의 노동'이었다. 이 낭만적인 아날로그의 시대에 거대한 균열을 낸 것은 신해철 2집 'Myself'였다. 혼자서 작곡, 편곡, 연주를 컴퓨터와 미디(MIDI)로 해냈다는 사실은 당시 주류였던 아날로그 환경에 익숙한 어린 나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어떻게 혼자서 이런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동경 속에 카세트테이프 속 아날로그 낭만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 음악 대학 시절, 학교 커리큘럼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컴퓨터 음악과 '케이크워크(Cakewalk)'라는 작곡 프로그램, 이른바 시퀀서(Sequencer)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모든 악기의 배치와 사운드 메이킹, 연주 그리고 믹싱까지 완결할 수 있다는 흥분은 나에게 창작의 문법을 흔드는 전율이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손에 넣은 나의 첫 장비는 롤랜드사의 사운드 캔버스 88(SC-88)이었다. 당시 노래방 반주에 주로 쓰이던 음원 모듈이었기에 전문적인 하이엔드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나만의 사운드를 만들 수 있다는 설렘은 밤을 새워가며 컴퓨터에 노트를 새기게 했고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이 나 혼자 감동하며 밤을 지새우게 했다. 당시의 음악 제작 환경은 여전히 하드웨어 시스템이 주류였으나, 내부 작동 방식은 이미 디지털로 이동하던 하이브리드 형태였다. 그 중심에는 음악 작곡 프로그램인 시퀀서가 있었다. 초기 시퀀서는 오디오를 직접 녹음하는 도구라기보다, MIDI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주를 설계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즉, 컴퓨터 → MIDI 신호 → 외장 악기 → 실제 사운드 출력의 구조였다. 컴퓨터가 명령을 내리면 실제 소리는 신디사이저, 사운드 모듈, 샘플러 같은 외장 악기가 담당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번거로운 공정일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가히 혁신적인 변화였다. 필자가 실질적인 음악 활동의 길로 들어서던 그 시점은 음악이 '연주'에서 '설계'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당시 음악 대학에서 현대음악은 거스를 수 없는 성전(聖典)과도 같았고, 실제 연주자가 없는 컴퓨터로 음악을 발표하는 것은 일종의 '외도'이자 불온한 시도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졸업 전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가 갈 길의 음악으로 온전히 평가받고 싶었다. 코르그 트리니티(Korg Trinity)와 롤랜드(Roland) JV-1080, 그리고 E-MU ESI 샘플러를 동원한 미디 오케스트레이션 결과물은 교수님들의 교차하는 시선 속에 발표되었고, 이 작업은 이후 한국 컴퓨터 음악 대회 1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이는 음악 제작의 디지털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사운드 설계'라는 본질에 몰입하게 한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거운 외장 하드웨어를 차에 싣고 다니며 녹음실에서 소스 하나하나를 넘기던 낭만이 있던 시기, 디지털 편집과 미디 기반 작곡 방식의 정착, 1인 제작 시스템의 가능성을 제시했던 이때 컴퓨터 음악은 이후 특수한 영역이 아닌 대중적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또한 오늘날 음악 제작 방식의 토대를 만든 핵심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하드웨어 신디사이저의 노브를 돌리고 랙(Rack)을 쌓아 올렸던 그 물리적 제작 과정은 훗날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로 대체되는 거대한 범람 속에서도 당시 음악인들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해준 단단한 뿌리가 됐다. 이렇게 디지털의 신속함이 가속화되고 창작의 희열이 공존하던 그때, 나 역시 그 변화의 물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기술은 빨라졌고 도구는 편리해졌지만, 소리를 향한 중심의 한편에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낭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 진명용(JLmuse) 작곡가·프로듀서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 음악 분야에서 작·편곡 및 프로듀싱을 진행해왔다. 현재 AI 기반 창작 환경 변화에 맞춰 인간 창작자의 역할과 기술 간 균형을 고민하며 음악 및 사운드 제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