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섭 AI 진테제] AI지원 韓中日 다른 접근..."더 줄까"에서 벗어나야
지난 18일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은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이하 독파모) 2차 단계평가 결과를 발표하면서 예상 밖의 말을 덧붙였다. 현재의 지원 규모와 경쟁 방식만으로는 최정상급 모델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판단, 그래서 지원 규모와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재검토의 방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정부가 진행 중인 자기 사업의 한계를 공개 브리핑에서 인정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점에서 이날 발언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리고 필자는 이 말에 매우 동의 한다. 다만,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재검토가 '얼마를 더 줄까'로 흐르면 지난 8년간 반복된 실패를 더 큰 금액으로 다시 하게 된다. 바꿔야 할 것은 '금액'이 아니라 '문법'이다. 1. 마중물의 결산서...마중물은 왜 자꾸 증발하나 공교롭게도 엿새 전인 8월 12일, 감사원이 'AI 산업 육성 실태' 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과기정통부가 2017년부터 2024년까지 1조6328억원을 들여 908종의 AI 학습용 데이터를 구축했으나, 기관 간 조정 없이 유사 데이터가 중복 구축됐고 품질검증은 기관마다 제각각이었으며, 오류가 발견된 데이터는 납품업체 폐업을 이유로 수정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는 내용이다. 감사원의 결론 문장이 가장 아프다. 공공부문이 AI 기업 지원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쓸 만한 데이터가 없다는 기업의 호소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1조6000억원을 들여 공급을 만들었는데 수요자는 여전히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8년치 마중물의 결산서다. 액수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2. 의무 조항이라는 자연 실험 더 선명한 사례가 있다. 국가AI컴퓨팅센터다. 이 사업은 작년 5월과 6월, 두 차례 연속으로 응찰자를 한 곳도 구하지 못해 유찰됐다. 민간 참여를 가로막은 조항으로 세 가지가 지목됐다. 공공 지분 51%, 민간이 공공 지분을 되사야 하는 매수청구권, 그리고 2030년까지 센터 반도체 구성의 최대 절반을 국산 신경망처리장치(NPU)로 채우라는 의무 장착 조건이다. 정부는 3차 공모에서 셋을 동시에 풀었다. 공공 지분을 30% 미만으로 낮추고, 매수청구권을 삭제하고, 국산 NPU 의무를 통째로 없앴다. 그러자 삼성SDS 컨소시엄이 단독으로 들어왔고, 올 3월 우선협상대상자를 거쳐 5월 사업자가 최종 확정됐다. 정리하면 이렇다. 국산 칩을 사주겠다는 조항이 국산 칩이 들어갈 데이터센터 자체를 2년 가까이 늦췄다. 정책 실험으로 이보다 깔끔한 대조군은 찾기 어렵다. 같은 기간 국산 NPU는 다른 곳에서 검증받았다. 퓨리오사AI는 8월 5일, 미국 I/ONX HPC 및 벨록스와 함께 스웨덴 스톡홀름에 조성하는 15MW(메가와트) 규모 데이터센터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1단계에 추론 가속기 '레니게이드(RNGD)' 1800장을 공급하고, 확장 단계까지 포함해 총 8800장 이상을 순차 납품한다. 카드당 약 1만 달러 기준으로 전체 1230억원 안팎으로 추산되는 규모다. 이 숫자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정부가 독파모 3개 팀에 6개월간 지원하는 GPU 임차 총액이 1200억원이다. 팀당 400억원꼴이다. 금액은 사실상 같은데, 하나는 보호받는 시장에서 빌려 쓰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 시장에서 벌어온 돈이다. 3. '모두의 AI'가 드러낸 것 같은 문법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겨오는 중이다. 정부가 연내 출시를 목표로 추진하는 '모두의 AI' 프로젝트의 조건은 이렇다. 독파모 기준에 부합하는 국산 AI 모델을 50% 이상, 타사 국산 모델도 30% 이상 활용해야 한다. 외산 모델은 최소한의 기능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하되 정부 지원 대상에서는 제외된다. 올해 엔비디아 B200 512장을 우선 지원하고 내년부터 운영비를 지원하며, 2028년까지 전 국민에게 무료로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서 익숙한 딜레마가 생긴다. 외산 모델을 넣으면 왜 국산을 안 쓰느냐는 비판이 나오고, 국산만 쓰면 성능 좋은 무료 서비스를 두고 굳이 왜 이걸 쓰겠느냐는 반문이 나온다. 숫자를 보자. 8월 22일 기준 오픈라우터(OpenRouter)에서 업스테이지 솔라 프로 4는 100만 토큰당 입력 0.03달러, 출력 0.12달러다. 다만 이것은 90% 할인이 적용된 가격이고, 정가는 입력 0.3달러, 출력 1.2달러다. 같은 화면의 오픈AI GPT-5.6 루나는 입력 0.2달러, 출력 1.2달러로 별도 할인 표기가 없다. 정가끼리 비교하면 국산 모델의 입력 단가가 50% 비싸고 출력은 같다. 컨텍스트는 52만4288 토큰 대 105만 토큰, 서빙 제공자는 1곳 대 5곳, 처리량은 초당 39토큰 대 최대 81토큰이다. 그러나 여기서 서둘러 결론을 내면 안 된다. 90% 할인은 정부가 준 것이 아니다. 업스테이지가 자기 돈으로 시장에서 싸우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실제로 먹히고 있다. 같은 페이지의 트래픽 상위 앱 2위가 다음(Daum)이고 누적 167억 토큰이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업스테이지가 모델을 다음 포털에 얹기로 한 것이 성능 발표보다 중요한 뉴스라고 썼는데, 그 판단은 벤치마크가 아니라 트래픽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정부가 그 옆에서 하려는 일이다. 의무 비율은 업스테이지가 지금 하고 있는 싸움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90% 할인을 감수하며 트래픽을 사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쓰이기 때문이다. 수요가 비율로 보장되는 순간 그 이유가 사라진다. 8월 18일 마감된 공모에 SK텔레콤·KT·카카오 등 6개 컨소시엄이 참여했지만 네이버클라우드가 최종 불참한 것도, 이 구조를 각자 계산해 본 결과일 것이다. 4. 배부른 스타트업이 가장 위험하다 전례가 있다. 2020년 비대면 서비스 바우처 사업이다. 예산 2880억원, 기업당 400만원, 10만1146개사가 신청했다. 결과는 페이백과 리베이트, 조직적 대리신청이었다. 중기부는 공급기업 7개사를 수사의뢰했고, 특정 공급기업이 25% 이상 점유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어야 했으며, 부적정 서비스로 분류한 상품만 80개였다. 그리고 올해도 AX 원스톱 바우처가 260억원 규모로 돌아가고 있다. 기술 전략을 다뤄온 관점에서 보면, 스타트업에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매출이 0인 상태가 아니다. 잘못된 매출이 있는 상태다. 매출이 0이면 제품을 고치지만, 공고에서 나온 매출이 있으면 다음 공고를 준비한다. 피드백 루프가 시장이 아니라 사업계획서로 연결되는 순간 조직의 학습 방향 자체가 뒤틀린다. 지원금이 사주는 것은 런웨이가 아니라 판단 유예다. 배부른 스타트업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의 AI 공고에는 참여 기업이 이용자 프롬프트 데이터 활용 등 자체 수익 모델을 마련해 서비스를 지속할 전략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 있다. 정부 지원은 2028년까지다. 그렇다면 2029년에 무엇이 남는지가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이다. 5. 일본과 대만은 무엇을 샀나 한국만 돈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대만 정부도 쓴다. 다만 다르게 쓴다. 일본에는 국산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올 3월 기준 30종 이상 있다. 라쿠텐 AI 3.0이 7000억 파라미터, SB인튜이션스 사라시나가 4600억 파라미터이고 NTT 츠즈미, PFN PLaMo, 후지쯔 다카네, NEC 코토미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들 중 누구도 프런티어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다. 대신 디지털청이 생성형 AI 플랫폼 '겐나이'를 구축해 올 3월 7개 벤더를 선정하고 공무원 약 18만 명에게 배포했다. 만드는 데 돈을 쓰는 대신 쓰이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경제산업성의 국산 모델 육성 사업 GENIAC은 1~3기 공모 총액이 339억엔, 약 3000억원이다. 독파모의 2027년까지 총예산 5300억원보다 작다. 그리고 2026년부터 사업의 축을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과 제조 데이터의 AI-Ready화로 옮겼다. 자국이 이미 강한 자리로 전선을 이동한 것이다. 6월 22일 공개된 사카나AI의 'Fugu'는 아예 자체 프런티어 모델을 학습하지 않고, 외부 모델을 런타임에 호출해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로 설계됐다. 대만은 더 명시적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는 국가 LLM인 TAIDE의 임무를 프런티어 모델과 경쟁하지 않고 산업 전반의 AI 배치를 지원하는 인프라로 공식 재정의했다. 대신 7월 30일, 대만 대표 하드웨어 기업들이 3억 대만달러(약 93억원)를 모아 TAIONE 오픈소스 재단을 세웠다. 용도는 칩도 서버도 모델도 아니다. vLLM, 쿠버네티스, 레이 같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코어 거버넌스에 자국 엔지니어를 앉히는 펠로우십이다. vLLM에 기능 하나를 병합할 권한이 사실상 전 세계 추론 인프라의 표준을 쓰는 일이라는 계산이다. 한국은 국산을 사준다. 일본은 국산이 쓰이는 자리를 만든다. 대만은 표준을 정하는 자리를 산다. 같은 돈으로 셋은 서로 다른 것을 사고 있다. 마무리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가 함께 공개한 숫자가 하나 더 있다. 아티피셜 애널리시스 지능지수(AAII)에 등록된 58개 AI 개발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이 7곳이고, 등재된 12개국 중 프랑스나 싱가포르보다 두터운 개발 생태계를 갖췄다는 자평이다. 이 자산은 사실이다. 다만 이 자산을 만든 것은 GPU 임차권이 아니라 사람이다. 모델은 6개월이면 낡고 임차한 컴퓨트는 계약 종료와 함께 사라지지만, 그것을 돌려본 엔지니어는 남는다. 마중물 정책의 유일하게 확실한 잔여물이 인재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 인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다. 시장을 보고 있으면 자산이 되고, 다음 공고를 보고 있으면 그마저 소모된다. 보호 조항과 단발성 바우처는 정확히 후자를 만드는 장치다. 그러니 3차 재설계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얼마를 더 줄까"가 아니다. "지원이 끝나는 날, 이 팀에 무엇이 남는가"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항목은 금액을 두 배로 올려도 두 배로 증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