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美 반도체 보조금..."그래도 신청해 받는 게 최선"
미국 정부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자국내 반도체 생산 지원금을 받는 기업을 선정하는 조건으로 ▲기업의 초과 이익 공유 ▲재무 건정성 검증 ▲중국에 첨단 반도체 투자 금지 등 까다로운 조항을 내걸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딜레마에 빠졌다. 두 회사는 현재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당량의 메모리를 현지에서 생산, 수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반도체지원법 지원금을 신청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28일(현지시간) 반도체법에 따른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절차와 6개 지급 기준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대한 527억달러 규모 재정지원, 투자세액공제 25%를 규정한 반도체지원법이 지난해 8월 발효된데 따른 후속 조치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에 총 설비투자액의 5~15% 수준의 보조금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 미국으로부터 1억5천만 달러(2천억원) 이상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을 낼 경우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일정 기준을 넘어선 수익을 올릴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까지 이익을 환수하겠다는 얘기다. 또 중국, 러시아 등 일부 국가에 10년간 반도체 제조시설 확장을 금지하고, 중국과 공동 연구 또는 기술 라이선스를 할 경우 지원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 이는 미국의 국가안보와 이익 증진을 염두에 둔 조항들이다. 다만, 가드레일에 대한 세부 규정은 향후 공개할 예정이다. 이밖에 ▲미국 국방부가 최첨단 로직 반도체를 요구시 우선 공급해야 하며 ▲지원금을 배당금 지급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해선 안 된다. 또 ▲공장 직원과 건설 노동자에 보육 서비스 제공 ▲미국산 건설 자재 사용도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도 제시했다. 中에 추가 투자 금지 조항이 관건…삼성전자·SK하이닉스 "난감하네" 미국의 이같은 반도체 보조금 지급 조항에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미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구축 중이거나 계획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당연히 보조금 신청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중국 반도체 공장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게 될 경우 사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 단장은 "이번 조항에서 제일 우려되는 점은 한국 기업이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에 투자를 못 한다는 내용이다"라며 "중국에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조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으며, 2024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향후 20년간 텍사스주 테일러시와 오스틴에 1천921억달러(약 252조원)를 투자해 추가로 11개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150억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해 미국에 첨단 패키징 제조시설과 연구개발(R&D)센터를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팹 부지와 착공시기는 아직 미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 당장 첨단 시설을 투자할 계획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피해가 우려된다. 시설이 노후화되면 추가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 쑤저우에는 후공정(테스트, 패키징) 공장을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과 파운드리(8인치) 공장이 있으며, 다롄에는 인텔에서 인수한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초과이익 공유 이유로 영업기밀·회계장부 공개 요구할 수도 미국이 운영 관리 이유로 기업의 영업기밀, 연구개발(R&D) 비용 등이 포함된 회계장부 공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부담이다. 반도체는 빠르게 기술이 변화하는 만큼 다른 산업보다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인다. 또 기업의 재정과 투자비용은 향후 사업 계획과 직결된다. 미국 정부의 과도한 감시에 따른 개입이 우려된다. 실제로 백악관은 2021년에도 '반도체 대책회의'에서 반도체 기업들에게 재고, 수요, 판매 정보 등을 제출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 유재희 반도체공학회 부회장겸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예상을 초과하는 부분을 환수한다는 조항에 대해 기업은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초과이익을 산정하려면 일일이 기업의 장부를 열람한다는 뜻이어서 우려된다. 이런 조항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예속되는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미국 국방부가 요구할 경우 최첨단 반도체를 우선 공급해야 한다는 조항도 장기적으로 부담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 군사용 반도체를 대량 공급하고 있지 않지만, 향후 미국이 요구하면 제안을 들어줘야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군사용 반도체는 기업에서 선호하는 분야는 아니다"라며 "장기간 공급을 해줘야 하고, 반도체의 품질 수준이 꽤 높아야 하므로 시간을 더 많이 들이고,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삼성은 군사용 반도체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 기업인 인텔, 글로벌파운드리 정도가 군사용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일단 기업의 부담과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국과의 소통 채널을 통해 수시로 협의를 벌이고 있다"며 "우리 기업에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신청해서 받는 게 최선"...사업적으로 유리 그럼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시장 확대를 위해서 보조금을 신청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란 의견이 다수다. 김형준 단장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에 투자를 못 하게 되더라도, 미국에 보조금을 받고 생산시설을 늘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며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미국에 짓고 있는데, 파운드리는 결국 팹리스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미국에는 파운드리 고객사인 팹리스 기업이 다수 있다. 미국과 가까이 위치하며 친밀하게 공급하는 것이 사업적으로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에 투자를 금지하는 압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중국에서 기술 탈취 문제가 여러 번 불거져 나오면서 중국 투자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는 게 사실"이라며 "중국 수출 비중이 높더라도 중국 내 반도체 투자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보복을 우려하는 의견도 나왔다. 국회 관계자는 "한국이 미·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며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은 어쩔 수 없겠지만, 중국이 가만히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