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인프라 퍼스트'와 '디지털 서비스 퍼스트'
2000년 2월 어느 날 SK텔레콤의 주가는 507만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황제주였다. 최근 주가는 4만8천원 안팎이다. 또 최근 10년 동안 최저 2만8295원에서 최고 6만3100원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그 사이 SK텔레콤은 두 번 액면분할했다. 액면가가 5천원에서 100원이 됐다. 따라서 지금의 주가를 당시 액면가로 환산하면 250만원 안팎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사상 최고치를 찍고 4반세기가 지났지만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당시 코스피 지수가 950 안팎이고 지금이 2500 안팎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시장 평균을 고려했을 때 실질적으로는 반의 반토막도 안 된다. 시대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은 누구도 통신주를 성장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보다 배당주로 투자한다. 성장의 모멘텀은 제한돼 있지만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는 거다. 통신사 대표이사의 가장 큰 어려움이 여기서 비롯된다. 시대의 조류 때문에 배당주로 분류되는 업종을 맡고 있지만 한때 성장주로서 각광을 받았던 기억을 저버릴 수 없어 성장주로 다시 변신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듯하다. 통신 3사 모두 '탈(脫)통신'을 경영기조로 삼고 '디지코(DIGICO·디지털플랫폼기업)'라는 새로운 용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여기 아닌 다른 곳'에 답이 있다 보는 거다. 통신사들은 사실 억울할 듯도 하다. 자신들이 구축한 통신망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존재들이 자신보다 더 큰 기업가치를 향유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배가 아플 수도 있다. 아이폰 출시와 함께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카카오톡이 나와 SK텔레콤 등의 단문메시지서비스(SMS)를 순식간에 밀어내버렸을 때 상대적 박탈감이 극심했을 듯하다. '탈(脫)통신'은 그래서 '반격의 구호'인 셈이다. 탈(脫)통신이란 구호의 배경이 그러하기에 이 용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점도 있다. 그것이 회사의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다는 의미는 알겠지만 자칫 투자자에게 인식의 오류를 줄 수 있다. 배당주로 생각하고 투자하는 게 적절한데 자칫 성장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또 통신 본업에 종사하는 임직원들의 열정과 자부심을 조금씩 훼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탈(脫)통신은 사실 구호일 수는 있어도 어쩌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구호대로 된다면 통신은 누가 하란 말인가. 그보다 '뉴텔레콤(Newtelecom)'의 의미를 갖는 적절한 구호가 더 필요할 듯하다. 어찌됐든 통신 서비스를 더 안전하고 빠르면서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이 통신사의 본질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6G 양자암호통신 등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에 몰두하는 게 가장 우선 아닌가. 통신 역사 4반세기를 잠깐 살펴본 것은 김영섭 KT 새 대표이사의 발언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취임사와 'M360 APAC' 콘퍼런스 강연 등에서 전임 대표의 '디지코 전략'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특히 “통신망부터 준비하는 '인프라 퍼스트' 접근이 아닌 고객 경험을 극대화하는 서비스를 선제적으로 발굴해 제시하는 '디지털 서비스 퍼스트'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인프라 퍼스트'가 아닌 '디지털 서비스 퍼스트'”가 '탈(脫)통신'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탈(脫)통신이란 구호가 통신사 대표들의 숙명처럼 된 현실이 안타깝다. 기업이 새로운 성장 아이템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KT는 실제로 본체와 수많은 계열사를 통해 다양한 아이템을 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핵심사업이고 지속 발전돼야 할 통신 분야가 구시대적인 유물 취급을 받는 듯해 안타까운 것이다. 김 대표도 지적했지만 “통신은 물이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그 가치가 쉽게 잊히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신 산업 종사자가 칭찬 받을 일이지 반성해야 할 일은 아니다. 반성해야 할 만큼 “안주한 게” 아니라 많은 노력 속에 고도화 안정화한 결과가 그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신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오히려 KT의 신사업 부족보다 통신장애와 같은 불안정한 서비스를 더 우려한다. 통신 인프라가 퍼스트냐 디지털 서비스가 퍼스트냐 하는 문제를 화두로 삼는 것은 그래서 걱정스럽다. 그보다 통신을 뿌리와 기둥으로 삼고, 할 수 있고 경쟁력 있는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가지로 삼아 풍성해지는 나무의 그림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게 더 현실적이고 탄탄하면서 통신 고객에게 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치도 곁들여 제공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