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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의 헤디트] 디지털 헤리티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문화유산을 디지털로 기록하고 복원하는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정밀한 3차원 스캐닝과 실감형 영상,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까지 기술의 발전은 빠르다. 과거에는 남아 있는 유산을 어떻게 기록하고 복원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였다면, 이제는 그 성과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린 '2026 디지털헤리티지페스타 산업 컨퍼런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을 주제로 국악과 청동 문화유산, AI 영화, 문화유산 데이터, XR 교육, 체험콘텐츠, 플랫폼, 로컬관광, 사운드스케이프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필자는 이번 컨퍼런스의 기획을 맡았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많이 소개하느냐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문화유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 시선들이 만났을 때 어떤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산업과 지역의 가치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가 남긴 것은 기술의 우열보다 기술 이후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산의 가치를 모르면 기술도 방향을 잃는다 문화유산 콘텐츠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유산에 대한 이해다.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가 먼저다. 이날 국악인 최한이는 전통음악을 현대적인 디지털 내러티브로 확장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첨단기술의 사용 여부보다 국악이 지닌 의미와 표현의 고유성을 어떻게 새로운 경험으로 전달하느냐는 문제였다. 조준동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다뉴세문경에서 반가사유상에 이르는 청동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조명했다. 청동기술과 조형성, 역사적 맥락을 다시 살펴보는 발표는 디지털콘텐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오늘날 문화유산을 다루는 콘텐츠 제작에서는 화려한 시각적 표현이 먼저 제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유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장소의 맥락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으면 결과물은 익숙한 이미지의 반복에 머물 수 있다. 궁궐과 고분, 불상과 전통음악은 모두 문화유산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경험하도록 설계할 수는 없다. 각 유산의 특성에 따라 서사와 공간, 이미지와 소리가 달라져야 한다. AI가 읽을 수 있는 역사와 사람이 해석해야 할 역사 생성형 AI의 발전은 디지털 헤리티지 분야에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영상으로 구현하고, 소실된 건축물을 가상으로 재현하며, 문화유산의 내용을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하는 일의 기술적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AI가 문화유산을 그럴듯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승민 텍스트웨이 대표는 AI가 문화유산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었다. 역사적 사실과 추정, 문헌의 출처와 맥락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으면 AI가 내놓는 답변에도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기록된 정보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정리하고, 서로 다른 문헌의 관계를 연결하며, 확정된 사실과 학술적 해석을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AI 영화와 실감콘텐츠 제작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장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는 있지만, 그 장면이 역사적 사실인지 창작자의 상상인지는 구분돼야 한다. 문화유산 분야에서 AI를 활용한다는 것은 제작 속도를 높이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재현했는지, 어느 부분에 해석과 상상이 개입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고증과 해석의 책임은 더 중요해진다. 전시장을 떠난 콘텐츠는 어디에서 살아남을까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는 오랫동안 박물관과 전시관, 축제와 행사장을 중심으로 제작돼 왔다. 사업이 종료되면 상영과 운영도 함께 끝나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제작 이후의 유통과 지속적인 활용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경태 엘팩토리 대표는 디지털콘텐츠의 확산을 위해 하드웨어와 플랫폼, 콘텐츠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 구현된 콘텐츠가 가정과 일상으로 이동하려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서비스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애진 대표와 김군호 에이콘팩토리 대표가 소개한 AI·XR 교육과 체험콘텐츠 역시 경험의 설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콘텐츠의 성패를 기술의 완성도로만 판단하기보다 이용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산업화는 단순히 더 많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다. 한 번 제작한 콘텐츠가 교육 현장과 전시공간, 거실의 디지털 화면과 관광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유통과 운영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저작권과 이용권, 기술 유지관리, 플랫폼 운영, 콘텐츠의 지속적인 갱신 또한 중요한 과제가 된다. 관람객 수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행동이다 디지털 헤리티지가 지역관광과 만날 때 질문은 더욱 구체적이어야 한다. 박정숙 청주시정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와 지역관광 사례를 살펴보며 콘텐츠 관람 이후의 행동에 주목했다. 방문객이 한 장소에 도착해 영상을 관람하고 곧바로 돌아간다면 방문객 수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주변 골목과 상점, 음식점, 숙박시설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지역에 남기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완성도 높은 콘텐츠가 곧 성공적인 지역관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대표 문화유산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방문을 체류로, 체류를 지역 안에서의 소비와 재방문으로 확장하려면 유산 자체뿐 아니라 주변의 역사문화 자원과 골목, 상권, 생활공간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개별 장소들을 하나의 이야기와 동선으로 엮는 경험 설계가 필요한 이유다. 이때 미디어아트는 관광의 전부가 아니라, 문화유산에서 지역의 다양한 공간과 경험으로 발걸음을 이어주는 출발점이 된다. 지자체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문했는가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머물렀는지, 무엇을 경험했는지, 지역 안에서 어떤 이동과 소비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결국 지역 문화유산 사업의 다음 과제는 더 크고 화려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만 있지 않다. 문화유산을 매개로 사람들이 지역을 더 깊이 경험하고,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드는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데 있다. 전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도 사람이 필요하다 마지막 발표자인 이영재 만지작엔터테인먼트 대표는 AI와 국악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문제를 제시했다. AI가 전통음악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장단의 흐름과 시김새, 연주자의 호흡과 미묘한 표현까지 제대로 구현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는 기술의 한계를 말하는 동시에 새로운 창작의 조건을 보여준다. 전통문화의 정교한 표현을 담아낼 수 있는 자료를 축적하고, 그 자료를 해석할 전문인력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전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기술을 새로운 표현 도구로 사용할 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시각예술과 영상, 공간, 음악, 교육과 관광 등 여러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제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왜 만들어야 하는가 이번 공주 컨퍼런스가 남긴 것은 하나의 정답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제기된 질문들이었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가능성은 특정 기술이나 콘텐츠 형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서 출발해 창작과 기술 구현, 경험과 공간의 설계, 콘텐츠의 유통과 지역 연계까지 서로 다른 전문성이 연결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앞으로 기관과 지자체가 문화유산 디지털 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질문의 순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기술을 적용하고 무엇을 제작할 것인지에 앞서 왜 이 유산을 선택했는지, 누구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나아가 사업이 끝난 뒤 콘텐츠가 어디에서 다시 활용될 수 있는지, 그 경험이 지역과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는 콘텐츠 제작 단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방향과 예산의 우선순위, 기획과 발주, 운영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완성된 콘텐츠의 규모와 기술적 수준뿐 아니라 실제 활용과 지속 가능성까지 살피는 시각이 필요하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미래는 더 화려한 화면이나 정교한 기술에만 있지 않다. 오래된 유산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고, 이를 새로운 경험으로 전환하며, 그 경험이 산업과 지역의 지속적인 자산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데 있다. 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은 화면 속에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2026.10.21 16:00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전시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디지털로 재현된 문화유산은 어디로 갈까. 서버에 저장된 파일로 남는가. 박물관의 다음 전시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교실과 거실, 도시의 골목으로 건너가 누군가의 일상에 새로운 경험을 남기는가. 국가유산의 디지털 전환은 그동안 기록과 복원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왔다. 3차원 스캔과 고해상도 기록, 디지털 복원은 유산의 형상과 정보를 보존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기록이 곧 경험은 아니다. 디지털로 확보한 유산이 사람에게 도달하려면 해석과 창작, 그리고 활용의 과정이 필요하다. 오는 18일 국립공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2026 디지털헤리티지페스타 산업 컨퍼런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컨퍼런스의 총괄기획을 맡아 발표자료를 미리 살펴보면서 주목한 것은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하나의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어디에 놓고, 누구와 만나게 할 것인가. 첫 번째 세션에서는 최한이 국악 보컬리스트의 '디지털 내러티브, 국악', 조준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유산의 우수성 발굴', 신효정 K-CULTURE AI 국제영화제 창립자의 '헤리티지, AI 영화로 다시 태어나다'가 발표된다. 전통음악과 고대 문화유산, AI 영화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통해 유산의 해석과 창작 가능성을 살피는 자리다. 기술에서 콘텐츠로, 관람에서 체험으로 두 번째 세션은 콘텐츠가 실제 경험과 서비스로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유승민 텍스트웨이 대표는 'AI는 문화유산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애진 플로우디엑스 대표의 '책에서 현장으로'는 생성형 AI와 XR을 활용해 역사적 지식을 몸으로 경험하는 문화유산교육을 제안한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기술보다 체험 전후에 무엇을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설계하는가다. 김군호 에이콘팩토리 대표의 '박물관에서 만나는 AI 체험'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박물관을 새로운 체험공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룬다. 백제군사박물관 호국관의 전시설계 자료에는 백제의 역사적 소재를 활용한 초기 구상부터 AI 미래도시를 주제로 한 체험공간의 조정과 구축 과정이 담겨 있다. 전시기획이 콘텐츠의 의미와 이용자의 행동, 지역의 정책적 수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경태 엘팩토리 대표의 '기술과 예술 그리고 디지털 헤리티지의 확산'은 시선을 전시장 밖으로 옮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플랫폼, 콘텐츠를 결합해 복원된 유산을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만 화면의 보급만으로 문화적 경험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콘텐츠의 완성도와 저작권, 지속 가능한 유통구조가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예술과 장소, 지역으로 확장되는 유산 세 번째 세션에서는 이유경 백석문화대 교수의 'AI, 유산에 숨을 불어넣다'가 기록에서 경험으로 이동하는 미디어의 미학을 다룬다. AI가 역사적 자료에 새로운 감각과 서사를 부여할 수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 복원과 예술적 재창작은 구분돼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창작자의 해석과 고증, 윤리적 판단은 더욱 중요해진다. 박정숙 청주시정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빛으로 다시 읽는 지역 – 디지털 헤리티지와 로컬관광의 연결'은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를 지역관광과 연결하는 문제를 짚는다. 유산이라는 하나의 거점에서 골목과 상권, 숙박과 체류로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다. 관람객 수만큼 중요한 것은 행사가 끝난 뒤 지역 안에서 어떤 행동과 관계가 이어지는가다. 이영재 만지작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소리로 확장되는 디지털 헤리티지'는 유산을 경험하는 감각의 범위를 넓히는 주제로 이어진다. 시각 중심의 디지털콘텐츠를 넘어 소리와 공간, 감각의 관계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실과 박물관, 거실과 골목은 서로 다른 공간이다. 그러나 디지털 헤리티지의 관점에서 보면 기록한 것을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경험으로 만들며, 그 경험을 일상과 지역으로 확장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 창작의 문법 그렇다고 모든 유산을 같은 방식으로 콘텐츠화할 수는 없다. 고대 유물과 왕실 의례, 전통음악과 역사적 장소에는 저마다 다른 가치와 의미가 있다. 유산마다 다른 창작의 문법이 필요하다. 어떤 기술을 적용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이해시키고 어떤 경험을 남길 것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술기업과 콘텐츠 제작자, 연구자와 예술가, 공공기관과 지역사회는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문화유산의 기록과 해석, 콘텐츠 제작과 유통, 향유와 지역의 연결을 하나의 전문영역만으로 완성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전문성이 만나는 협력구조가 필요한 이유다. 이번 공주 산업 컨퍼런스가 모든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록과 복원을 넘어 교육과 예술, 콘텐츠와 산업, 장소와 지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질문을 공유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기록은 유산의 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해석과 창작은 그 시간이 오늘의 사람과 만나도록 하는 일이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은 기술이 완성한 화면이 아니라, 그 화면을 통해 유산을 새롭게 이해하고 경험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2026.10.16 09:46이창근 컬럼니스트

컬리, 한혜진 패션 브랜드 '헤디트' 단독 출시

컬리는 모델 한혜진이 만든 패션 브랜드 '헤디트'를 단독으로 선보인다고 12일 밝혔다. 헤디트는 한혜진이 20여 년간 세계 패션 무대에서 활동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 출시하는 브랜드다. 한혜진이 생각하는 '좋은 옷'의 기준을 반영했으며, 컬리와 함께 옷의 ▲형태 ▲소재 ▲마감 등을 고려한 일상복을 준비했다. 첫 출시 상품은 상의와 하의를 합쳐 총 8종이다. ▲집업 ▲재킷 ▲바지 ▲스커트 등 기본 의류로 구성했으며, 가벼운 외출부터 업무상 미팅까지 여러 상황에서 착용할 수 있도록 핏과 세부 디자인을 다듬었다. 주요 상품으로는 니트 소재에 후드 디자인을 결합한 '소프트 울 니트 후드집업'이 있다. 메리노 울을 사용한 '클래식 버튼 가디건'과 캐시미어 특유의 촉감을 살린 '니트 밴딩 팬츠'도 판매한다. 컬리는 헤디트 출시를 기념해 이날부터 7일 동안 전 고객을 대상으로 해당 브랜드 상품에 사용할 수 있는 20% 할인 쿠폰을 지급한다. 컬리는 고객이 목적과 상황에 맞는 의류를 선택하도록 돕는 '퍼스널 쇼퍼' 콘셉트의 패션 큐레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별도의 패션 탭을 개설했으며, 이후 ▲스타일노트 ▲트렌드픽 ▲브랜드파인더 등 상황에 따라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컬리 관계자는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모델의 노하우가 집약된 브랜드를 컬리에서 단독으로 제공할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고객의 일상을 빛낼 수 있는 차별화된 패션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2026.10.12 14:56박서린 기자

[이창근의 헤디트] 원주 강원감영의 밤, 봉래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원주 강원감영이 2027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사업 신규 대상지로 선정됐다. 주제는 '신선이 머무는 세계, 봉래를 걷다'다. 강원감영 후원에 조영된 신선세계를 모티브로 원주의 유·무형유산과 자연유산을 연계한 야간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다. '봉래를 걷다'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봉래를 보여주는 것과 봉래를 걷게 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관객이 공간을 지나며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원감영의 봉래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답을 찾으려면 먼저 이 유산이 가진 공간의 의미부터 읽어야 한다. 공간의 질서를 작품의 구조로 강원감영은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설치돼 1895년까지 약 500년 동안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 역할을 했던 장소다. 선화당을 비롯해 재은당과 포정루, 객사와 여러 부속건물이 자리했다. 2000년 발굴조사에서는 포정루에서 중삼문과 내삼문을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와 담장, 행각 등의 흔적도 확인됐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건물 하나하나보다 그 사이의 관계다. 강원감영은 문을 지나고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공간의 성격이 차례로 달라지는 유산이다. 밖과 안, 앞과 뒤가 구분되고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에 부여된 역할도 달라진다. 건축의 외형을 보는 것과 그 공간이 왜 그렇게 놓였는지를 읽는 것은 다른 일이다. 문은 출입구 이상의 의미를 갖고, 마당 또한 비어 있는 여백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들어와 무엇을 지나고 어디에 이르는가를 따라가다 보면 관아가 작동했던 기능과 위계가 드러난다. 헤리티지 미디어아트도 이 질서를 읽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오래된 공간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먼저 얹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장소에 남아 있는 관계와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유산을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보여줄 것인가보다 이 장소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를 먼저 결정하는 과정이다. 장소를 읽었다면 그다음은 그 해석을 작품의 구조로 옮기는 일이다. 강원감영에서는 문과 마당을 통과할 때마다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건물마다 콘텐츠를 하나씩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다른 공간이 어떻게 연결되고 하나의 작품으로 이어질 것인지까지 살펴야 한다. 콘텐츠를 공간에 배치하는 것과 공간의 질서를 장면의 순서로 번역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지만, 후자는 공간 자체를 창작의 재료로 본다. 연출은 여기서 시작된다. 영상과 소리, 공연과 디지털 기술은 각각의 기능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장소를 어떻게 읽었는지, 작품이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언어다. 헤리티지 미디어아트 현장에서도 새로운 기술이 먼저 주목받기 쉽지만, 어떤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가보다 왜 이 장소에서 그 기술이 필요한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해석과 작품의 방향이 선 뒤에 기술을 골라야 영상과 소리, 조명과 공연도 하나의 작품 안에서 제 역할을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창작자의 판단은 더 중요해진다. 관객이 기억해야 할 것은 적용된 기술의 목록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강원감영이기 때문이다. 봉래, 이미지에서 경험으로 '봉래'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신선이 머무는 환상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봉래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강원감영이라는 장소와의 관계가 약해질 수 있다. 봉래를 보여주는 것과 관객이 봉래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관객이 무엇을 보았는지만큼, 그 경험 이후 강원감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봉래라는 상상의 세계가 강원감영이 품어온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이곳에서만 가능한 작품이 된다. 그래서 '봉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앞서 '강원감영에서 봉래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그 답은 특정한 장치 하나보다 공간 전체를 어떻게 읽고 장면으로 조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유산을 새롭게 경험한다는 것도 과거를 화려하게 재현하는 일과는 다르다. 익숙했던 건축과 공간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동안 지나쳤던 시간과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만드는 일이다. 예술과 기술은 이때 제 역할을 한다. 유산 위를 덮는 장식이 아니라 그 장소 안에 이미 존재하던 의미를 오늘의 감각으로 드러내는 창작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기술보다 장소가 먼저 보이는 작품이어야 한다. 유산마다 다른 창작문법 같은 유산이라도 장소가 품은 시간과 공간은 서로 다르다. 관아에는 관아의 질서가 있고, 사찰에는 사찰의 시간이 있다. 성곽에는 길과 시선이 있고, 고분과 궁궐, 근대건축과 산업시설에도 각자의 구조와 기억이 남아 있다. 모든 유산에 같은 방식의 헤리티지 미디어아트를 적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어떤 장소에서는 공간의 질서가 중요하고, 어떤 장소에서는 시간과 기억이 중요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구조와 기능 자체가 작품의 출발점이 된다. 유산이 다르면 작품을 만드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강원감영에서는 관아를 이루는 문과 마당, 중심과 주변의 관계, 그 공간에 축적된 질서가 중요한 창작의 재료가 된다. 장소 밖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보다 그 장소 안에서 발견한 의미를 오늘의 작품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먼저다. 그래서 헤리티지 미디어아트의 출발점은 기술보다 해석에 가깝다. 유산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 그 가운데 무엇을 오늘의 관객에게 건넬 것인지 정해야 한다. 해석에서 예술적 상상이 나오고, 그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과 연출이 뒤따른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의 경쟁력도 결국 한국의 유산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첨단기술 자체가 한국다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관아와 궁궐, 사찰과 성곽, 근대건축과 산업유산이 품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문법을 찾아 오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 그 지점에서 K-헤리티지만의 콘텐츠가 시작될 수 있다. 강원감영도 그렇다. 봉래를 얼마나 화려하게 보여주느냐보다 강원감영을 얼마나 깊이 읽었는지가 작품의 차이를 만든다. 그 해석이 있어야 이곳에서만 가능한 장면이 생기고, 관객에게 남는 경험도 달라진다. 예술과 기술이 그 해석 안에서 제대로 만날 때 오래된 장소는 낯설게 다시 보이고, 익숙해서 지나쳤던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과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강원감영의 봉래는 결국 관객이 이 오래된 공간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열릴 것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2026.09.23 09:30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유산을 읽는 법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1981년 8월, 아직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다. 누군가는 종이 위에 먼저 프로야구의 모습을 그렸다. 어느 지역에 구단을 둘 것인지, 어떤 기업이 참여할지, 조직과 창단 일정은 어떻게 꾸릴 것인지가 손글씨로 적혔다. 수입과 지출 계획도 만들었다. 자료에는 후보 기업의 이름을 지우고 다시 고친 흔적까지 남아 있다. 지금 국민 스포츠가 된 한국 프로야구가 경기장보다 먼저 몇 권의 기획서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 '81년 한국프로야구 창립기획 관련 자료'가 국가유산청 제3회 예비문화유산 발굴 공모전에서 최우수 사례로 선정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위해 작성된 최초의 공식 마스터플랜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다. 다만 이번에 뽑힌 아홉 건이 곧바로 '예비문화유산'이 된 것은 아니다. 예비문화유산 발굴 공모전의 우수사례이며, 앞으로 별도의 신청과 국가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 여부가 검토된다. 이번 공모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현대자료 가운데 아홉 사례가 우수사례로 뽑혔다. 무엇이 선정됐는지만큼 눈여겨볼 것은 그 자료들이 한 시대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느냐다. 공통점은 단순히 오래됐다는 데 있지 않다. 한 시대가 만들어지고 움직였던 과정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유산의 가치는 물건의 나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물건이 누구의 삶과 어떤 장소, 어떤 산업과 문화를 지나왔는지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한 시대의 맥락이 드러난다. 결과보다 만들어지던 시간이 남았다 우리는 대개 결과를 기억한다. 완성된 글꼴을 읽고, 출판된 소설을 읽으며, 이미 만들어진 산업과 문화를 경험한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들은 그 결과가 나오기 전의 시간을 보여준다. 한글 디자이너 김진평의 원도에는 지금은 화면에서 손쉽게 선택하는 글자가 한때 모눈종이 위에서 획을 긋고 다듬으며 만들어졌던 과정이 남아 있다. 그의 원도와 친필자료를 들여다보면 한글 디자인이 전문적인 시각문화의 영역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간이 보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원본 친필원고에는 지우고 다시 쓴 문장과 교정의 흔적이 선명하다. 우리가 읽는 것은 완성된 소설이지만, 그 작품이 만들어지던 시간도 중요한 기록이다. 쓰고 지우고 다시 선택한 흔적 속에 창작자의 고민과 판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창립자료와 김진평의 원도, 『태백산맥』 친필원고는 서로 다른 분야의 자료다. 하지만 모두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들고 고쳐가던 시간을 보여준다. 계획서의 수정선과 모눈종이의 획, 원고지의 교정선은 완성된 결과만으로는 볼 수 없는 한 시대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부산 영도 '깡깡이 아지매'의 작업복과 작업도구에서는 또 다른 시간이 보인다. 낡은 안전모와 작업화, 장갑, 그라인더와 망치에는 실제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잘 보존된 유물에서는 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활유산에서는 오히려 그 마모가 기록이 된다. 누군가 그 도구를 들고 일했던 시간이 표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도 이 자료를 부산 여성들의 삶과 지역문화, 수리조선업의 역사와 현장을 보여주는 생활·산업유산으로 설명한다. 광주극장의 운영물품도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영사기뿐 아니라 영화표에 찍던 도장과 입간판, 각종 운영자료가 함께 남아 있다. 영화의 역사는 작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영화를 틀고, 표를 만들고, 간판을 그리고, 관객을 맞았던 기술과 노동도 대중문화의 역사다. 오래된 영화관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그 장소의 시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극장이 어떻게 운영됐고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시간을 보냈는지까지 함께 볼 때 비로소 문화공간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인잠수정 '해양250'도 완성된 기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잠수정과 함께 개발 과정에서 생산된 연구보고서와 연구노트가 남아 있다. 완제품만 보존한다면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고, 어떤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기술이 완성됐는지는 점차 흐려질 수 있다. 연구와 개발의 기록이 함께 남을 때 한 대의 잠수정은 우리 과학기술과 산업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던 과정까지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물건에서 맥락으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유산 현대유산을 읽는 시선은 물건 하나에서 사람과 기록, 장소와 행위로 넓어질 필요가 있다. 망치 하나만으로 깡깡이 아지매의 노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잠수정 한 척만으로 해양250의 개발사를 복원하기 어렵다. 영사기 한 대만 남겨서는 광주극장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문화공간으로 기능했는지 충분히 알 수 없다. 사람과 물건, 기록과 장소가 함께 남을 때 한 시대의 맥락이 살아난다. 현대유산을 발굴한다는 것은 과거의 물건을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 사라지면 다시 복원하기 어려운 사람의 기억과 장소의 경험, 흩어진 기록의 관계까지 함께 살피고 남기는 일이다. 이번 공모를 국가유산 행정의 한 사업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에는 산업과 시장, 생활문화의 기록이 있고 공공기관에는 정책과 사업을 만들어온 시간이 쌓여 있다. 기업에도 창업기의 문서와 제품, 설계도와 연구노트, 생산장비와 광고물, 브랜드와 디자인의 역사가 남는다. 한 지역이나 조직이 지나온 시간 안에 우리 산업과 문화의 한 장면이 함께 들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유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무엇이 그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지 읽어야 한다. 물건만 떼어놓지 않고 관련된 사람과 장소, 기록을 함께 살피면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난 뒤에야 오늘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지도 생각할 수 있다. 현대유산에서도 해석이 먼저이고 활용은 그다음이다. 이렇게 발견하고 기록한 현대유산은 오늘의 한국을 설명하는 K-헤리티지의 새로운 원천자원이 될 수 있다. 프로야구 창립자료에는 한국 프로스포츠 산업이 만들어진 과정이 있고, 김진평의 원도에는 한글 시각문화가 형성된 시간이 있다. 『태백산맥』 친필원고에는 한 작품이 태어나는 창작의 시간이, 광주극장에는 한국인이 영화를 향유해온 방식이, 깡깡이 아지매의 작업도구에는 산업도시를 일군 노동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의미를 제대로 기록하고 연구하며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다면 전시와 출판, 영화와 디자인, 관광과 디지털 경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모든 유산을 콘텐츠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기록은 온전히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제대로 남겨놓아야 다음 세대가 다시 읽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도 남는다. 지금 무엇을 남길 것인가 K-헤리티지는 뿌리다. 그 뿌리에서 K-콘텐츠라는 줄기가 자라고, 그것이 세계와 만나 K-컬처라는 꽃을 피운다. 여기서 K-헤리티지는 궁궐과 왕실문화, 전통공예와 오래된 건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포츠와 디자인, 산업과 노동, 문학과 영화, 과학기술의 시간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문화적 뿌리다. 앞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는 더 복잡한 문제가 된다. 이번 사례 대부분은 종이와 기계, 작업도구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다. 반면 오늘 우리가 만드는 기록의 상당수는 처음부터 디지털로 태어난다. 소프트웨어와 온라인 서비스, 게임과 디지털 디자인, 온라인 공동체의 기록은 서비스가 끝나거나 저장방식이 바뀌는 순간 함께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유산을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와 함께 '언제부터, 어떤 맥락과 함께 남길 것인가'를 일찍 물어야 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야만 유산의 가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아직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장소, 기록을 함께 살필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남길 수 있는 것도 있다. 손으로 고쳐 쓴 계획서와 모눈종이에 그린 글자, 작가의 수정선, 영화표에 찍던 도장, 녹슨 망치와 연구자의 노트에도 시대는 남는다. 모든 것을 보존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흔적 가운데 무엇이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지 읽고, 어떤 맥락과 함께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렇게 남은 기록은 훗날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을 만드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결국 미래의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흔적은 어떻게 유산이 되는가. 어쩌면 오래됐을 때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다음 세대가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남기기 시작할 때일 것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2026.09.22 10:45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태백 철암의 시간, 어떻게 작품이 되는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이 2027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태백시는 이를 근대산업유산을 대상으로 한 첫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라고 설명한다. 생산과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산업유산이 새로운 창작의 무대가 된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그 자체로 강렬한 장소다. 1935년 건립된 이곳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강재 트러스를 사용한 근대 산업시설로, 원탄 저장과 운반, 경석 선별과 파쇄·운반, 여러 단계의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 기계 공급과 수선 등 20개의 주요 시설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생산체계를 이뤘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근대 산업사를 상징하는 주요 시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암을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거대한 산업시설의 외형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일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석탄이 이동했던 공정이 있었고 그 공정을 움직였던 사람이 있었다. 광산과 철도를 따라 삶의 터전이 만들어졌고, 산업과 함께 움직였던 사람들의 시간이 철암이라는 장소의 풍경을 만들었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사업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은 보다 넓은 '헤리티지 미디어아트'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유산의 가치와 장소의 시간을 예술적으로 해석하고 동시대의 기술과 융화해 작품으로 구현해, 그 장소를 이전과 다르게 경험하게 하는 창작의 영역이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을 구현하는 언어다. 산업유산을 읽는 일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다. 원탄이 들어와 이동하고 선별되고 다시 나뉘어 나가는 과정이 여러 시설을 하나의 생산체계로 연결했다. 산업유산에서는 공간과 공정을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어느 시설에서 무엇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다음 과정과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읽어야 건축의 형태 뒤에 있던 장소의 시간이 보인다. 지난 8월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에 대해 '건축을 스크린으로 쓰는 것과 건축을 읽어 화면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썼다. 철암에서는 그 질문을 조금 달리 던질 수 있다. 산업시설을 스크린으로 사용할 것인가, 산업시설이 움직였던 시간을 작품으로 만들 것인가. 미디어아트는 공간에 영상과 기술을 적용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철암이라는 장소가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였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를 읽는 과정이 먼저다. 그 해석에서 예술적 상상이 시작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기술을 선택할지도 결정된다. 기계가 움직인 공정, 사람이 만든 철암 공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람을 만나게 된다. 탄광의 역사는 시설과 생산량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현장의 노동이 있었고 그 하루를 함께 살아낸 가족이 있었다. 광업소와 철도를 따라 상점과 골목이 생겨났고, 그런 시간이 쌓여 철암이라는 마을의 삶을 이루었다. 그래서 산업유산에서 사람의 기억은 건축의 배경으로 밀려날 수 없다. 산업시설이 한 지역의 삶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철암이 창작자에게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거대한 산업시설의 구조와 스케일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못지않게, 그 시설을 움직인 사람의 시간을 작품 안에서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산업의 역사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포장할 필요도, 반대로 쇠락과 애환의 이미지에만 가둘 필요도 없다. 그곳에서 일하고 먹고 쉬고 기다렸던 평범한 하루까지 바라볼 때 산업유산은 과거의 생산시설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관람객에게 살아 있는 기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예술과 기술의 융화, 하나의 작품 헤리티지 미디어아트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기술을 사용하는가가 아니다. 유산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해석하며, 어떤 기술로 구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철암에는 이미 충분한 창작의 재료가 있다. 산업시설과 생산공정, 사진과 기록, 사람의 기억과 마을의 풍경이다. 없는 이야기를 새로 보태기보다 그 많은 시간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결하며 무엇을 덜어낼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다. 예술과 기술도 서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장소에서 발견한 이야기가 예술적 상상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기술이 작동할 때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관람객에게 남아야 할 것은 사용된 기술보다 그 작품을 통해 새롭게 만난 철암이다. 모든 공간이 관람객에게 같은 강도로 말을 걸 필요도 없다. 어떤 곳에서는 강렬한 영상과 소리가 필요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오래된 구조물과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깊은 경험을 만들 수도 있다. 좋은 연출은 무엇을 더 넣을지를 결정하는 일이면서, 어디에서 멈추고 무엇을 비워둘지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판단은 결국 현장에서 시작된다. 선탄시설의 높이와 깊이, 철길과 마을 사이의 거리, 관람객이 바라보는 방향과 걷는 속도, 낮과 밤에 달라지는 공간의 감각을 읽어야 한다. 같은 콘텐츠라도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경험은 달라진다. 철암에서는 장소를 먼저 걷고, 그곳에서 작품을 상상한 뒤, 그 작품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선택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순서가 뒤집히면 장소보다 기술이 먼저 보이기 쉽다. 반대로 장소에 대한 해석과 예술적 상상에서 출발하면 기술은 작품을 구현하는 창작의 언어가 된다. 기술을 덜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에 필요한 기술을 정확하게 선택하자는 것이다. 작품이 장소의 경험을 바꿀 때 철암의 이야기는 선탄시설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설 앞으로 철길이 지나고 그 너머로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마을의 시간이 이어진다. 생산의 공간과 생활의 공간이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도 철암이 가진 중요한 장소성이다. 좋은 작품은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은 작품을 본 뒤에도 사람을 움직인다. 다음 공간이 궁금해지고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어지며,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구조물과 골목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작품을 통해 장소를 이전과 다르게 경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헤리티지 미디어아트가 가질 수 있는 힘이다. 서로 다른 유산과 장소에서 이런 창작이 축적된다면 국가유산 미디어아트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질 것이다. 한국의 유산과 장소가 품은 고유한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해석하고 동시대의 기술과 융화해 새로운 작품과 경험으로 확장하는 흐름은 앞으로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라는 창작영역으로도 발전해볼 수 있다. 그 가능성은 기술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한 장소를 얼마나 깊이 읽고 그곳에서만 가능한 작품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철암에서 바라봐야 할 것도 과거만은 아니다. 산업의 현장이 국가유산이 되고 다시 오늘의 사람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장소로 변해가는 지금 역시 철암의 역사다. 그렇기에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시간과 오늘의 감각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철암에는 이미 작품이 될 시간이 충분히 쌓여 있다. 선탄시설과 생산공정, 기계와 노동, 사람과 마을의 기억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결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할 것인가다. 예술과 기술이 하나의 창작 안에서 만날 때 우리는 익숙했던 장소를 이전과 다르게 경험한다. 철암의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에서 만나고 싶은 것도 그런 작품이고, 그런 경험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디지털 경험 설계,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2026.09.21 09:06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예악, 천지인을 춤추다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무대가 밝아지자 뒤편에 펼쳐진 종묘 정전의 긴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붉은 복색의 일무원들이 줄과 열을 이루고 섰다. 한 사람의 몸보다 먼저 보인 것은 간격이었고, 개별 동작보다 먼저 읽힌 것은 질서였다. 춤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일무는 개인의 움직임보다 여러 몸 사이의 관계로 다가왔다. 지난 9월 12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의 일무 전장 '팔풍의 몸짓, 일무' 열한 번째 연작을 봤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공연은 전폐희문에 이어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의 전장을 펼쳐냈다. 공연을 앞두고 필자는 '전승의 완결성'과 '경험의 접근성'을 이야기했다. 일부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전장을 온전히 기억하고, 그렇게 지켜낸 춤을 오늘의 관객이 제대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 무대를 보고 나니 그 사이에 하나의 질문이 더 놓였다. 전승자의 몸에 기억된 전장은 어떻게 오늘의 공연언어가 되는가. 전장은 장면보다 시간 전장은 몇 개의 인상적인 춤사위를 골라 보여주는 방식과 다르다. 보태평과 정대업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 역시 긴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이던 몸의 움직임도 오래 바라보면 서로 다른 결을 드러낸다. 무구가 달라지고 몸을 돌리는 방향과 팔의 쓰임, 움직임과 정지의 호흡도 변한다. 일무는 서두르지 않았다. 빠른 장면 전환이나 극적인 움직임으로 시선을 붙들기보다 같은 질서를 오래 유지한다. 한 사람이 얼마나 돋보이는가보다 여러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앞에 놓인다. 반복되는 움직임을 따라가고 나서야 그 안의 작은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장을 본다는 것은 춤을 장면보다 시간으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날 연출과 해설을 맡은 종묘제례악 일무 전승교육사 김영숙은 그 시간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무대에서 직접 들려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71년 종묘제례가 다시 봉행되면서 제한된 행사 시간에 맞춰 절차가 조정됐고, 보태평과 정대업 가운데 일부만 연행되는 시기가 이어지면서 일무 전장의 맥도 끊길 위기에 놓였다. 김영숙 전승교육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1975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일무를 가르쳤다. 당시 보유자는 그에게 보태평과 정대업의 일무 전장을 모두 익혀 발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 뜻을 받아 오랜 시간 전장을 익힌 김 전승교육사는 1988년 마침내 보태평과 정대업 전장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에는 이수자들과 함께 전장을 외우고 연행하며 전승을 이어갔고, 2009년부터는 '팔풍의 몸짓, 일무'라는 이름으로 전장 발표를 계속해왔다. 그 시간이 쌓여 2025년 11월 29일에는 64인이 함께하는 전장 공연으로 이어졌다. 김 전승교육사는 오랜 세월 일무를 가르치면서도 여러 전수자가 보태평과 정대업 전장을 모두 외워 한 무대에 서는 날을 자신의 생전에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이날을 '평생의 꿈'이 이뤄진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한 사람이 지켜온 전장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몸으로 건너갔다. 다시 여러 세대가 같은 줄과 열에 서면서 개인의 기억은 공동의 기억이 됐고, 오래된 춤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전승이 됐다. 종묘는 뒤로 가고 몸은 앞으로 나왔다 예악당 무대 뒤편에는 종묘 정전이 펼쳐졌다. 조풍류 작가가 그린 종묘 정전 이미지와 붉은 색조의 무대, 일무원들의 붉은 복색이 겹쳤다. 정전의 긴 처마가 만든 수평선 아래 여러 몸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면서 건축의 질서와 일무의 질서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났다. 이 장면에서 배경 이미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일무가 비롯된 장소를 환기한 뒤 한걸음 물러섰다. 화려한 효과나 빠른 전환으로 시선을 끌기보다 무대 앞에 선 몸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으로 남았다. 공연 중 김영숙 전승교육사는 이 배경이 돌가루를 이용한 화풍으로 그린 조풍류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 선택은 일무를 보는 데 효과적이었다. 실제 종묘에서는 음악과 악장, 제례 절차와 제관의 움직임, 정전과 월대가 하나의 환경을 이룬다. 예악당에서는 그 복합적인 관계 속에 있던 일무를 앞으로 끌어내 몸의 배열과 움직임, 무구와 대형을 하나의 공연예술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연장은 종묘가 아니다. 한 장의 이미지는 춤이 비롯된 장소를 보여줄 수 있지만 종묘가 지닌 깊이와 거리, 월대의 높낮이와 제례의 복합적인 동선까지 옮겨오지는 못한다. 그것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다음 무대의 과제는 다른 데 있다. 종묘를 얼마나 닮게 보여줄 것인가보다 그곳에서 작동했던 공간과 질서를 공연장의 빛과 이미지, 몸의 관계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장소를 복제하는 일과 장소의 원리를 무대에 구현하는 일은 다르다. '일무 독립'에서 '일무 자립'으로 이번 프로그램북에는 국악방송 사장을 지낸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쓴 공연 후기 「일무(佾舞)의 새로운 지평을 보다 : '일무 독립'」이 실렸다. 제목에 등장하는 '일무 독립'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일무는 본래 홀로 존재하는 춤이 아니다. 음악과 악장, 제례의 절차와 공간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일무 독립'은 무엇을 뜻할까. 이번 무대를 보면서 그 말은 음악과 의례에서 떼어내는 독립이라기보다, 그 관계 속에서 태어난 춤이 공연장 무대에서 하나의 예술언어를 갖춰가는 과정으로 다가왔다. 몸의 배열과 줄과 열의 변화, 무구와 방향, 움직임과 멈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적 문법을 만들었다. 일무에서는 누군가가 더 크게 움직인다고 전체가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다른 몸과 거리를 맞출 때 전체의 형식이 나타난다. 개인의 표현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의 몸을 절제하며 다른 몸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무대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특정 무용수의 동작이 아니었다. 일무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 질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송혜진 교수가 프로그램북에서 제시한 '일무 독립'은 필자에게 단절보다 자립에 가까운 개념으로 다가왔다. 음악과 제례, 장소와 시간에서 비롯된 정신과 구조를 간직하면서도 무대 위에서는 하나의 공연언어로 읽힐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번 무대에서 확인한 일무의 자립이었다. 오래돼서가 아니라 이어지고 있어서 김영숙 전승교육사의 해설 가운데 오래 남은 것은 전통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는 전통이 오래된 것이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누군가가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날의 전장 발표 역시 옛 춤을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남긴 예악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전승의 약속'이라고 설명했다. 무형유산의 보전도 결국 그 약속을 이어가는 일이다. 지켜야 할 전형을 온전히 전하면서 다음 세대가 다시 배우고 연행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이어진 유산을 더 많은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전수교육과 공개행사가 국가무형유산 전승의 중요한 축으로 함께 놓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팔풍의 몸짓'에 대한 그의 설명도 같은 방향이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을 흔들며 존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몸짓은 작아도 여러 사람이 예를 갖춰 함께 움직이면 천지의 질서와 조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객석의 박수마저 전승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바람으로 받아들였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무대를 보니 줄과 열도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전승은 한 사람의 몸에 전통을 고정해 두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외우고 다른 사람이 배우며, 다시 여러 사람이 함께 맞추는 과정이었다. 지켜야 할 전통은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며 살아 있는 문화가 된다. 개인의 기억이 공동의 기억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이제는 '보는 법'을 설계할 차례다 이번 공연에서 해설이 중요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성격, 무구의 의미, 왜 전장을 다시 기억해야 했는지를 알고 난 뒤 관객의 시선은 달라진다. 전승자에게 익숙한 움직임이 관객에게도 저절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춤을 지켰다면 이제 더 많은 사람이 그 춤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길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전승이 전승자의 몸에 머물지 않고 관객의 경험으로 이어질 때 무형유산은 동시대의 문화가 된다. 여기서 기술은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장치보다 관객이 춤을 읽게 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악장과 동작을 함께 볼 수 있는 모바일 해설, 무구와 대형의 의미를 보여주는 짧은 영상과 도해, 세대별 전승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기록이 쌓인다면 전승은 보는 방식까지 넓어진다. 공연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무형유산의 움직임은 공연이 끝난 뒤 다시 사람의 몸과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을 꾸준히 촬영하고 축적한다면 기록은 홍보용 영상에 머물지 않는다. 다음 전승과 교육, 연구와 재공연을 위한 기록 자산이 된다. 기술은 여기에서 유산을 대신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지나간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한다. 전승해야 할 것은 춤만이 아니다. 그 춤을 읽는 방법도 함께 전해야 한다. 공연이 끝난 뒤 커튼콜에서도 일무원들은 줄과 열을 유지한 채 무대에 섰다. 중앙에는 연출과 해설을 맡은 김영숙 전승교육사가 섰고 그 뒤로 이날 무대를 함께한 일무원들이 자리했다. 붉던 무대가 푸른빛으로 넘어가며 공연의 긴장은 풀렸지만 몸들이 만든 질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연을 앞두고 쓴 글에서는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일무의 다음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 무대를 보고 난 뒤에는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됐다.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보여주고, 관객이 읽을 수 있게 하는 것. 전승자의 몸에 남아 있던 시간이 다음 전승자의 몸으로, 다시 관객의 기억으로 건너갈 때 무형유산은 오늘도 살아 있는 문화가 된다. 그날 예악당에 불었던 '팔풍'은 바로 그 시간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바람이었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14 08:29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빈 공간의 시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사람이 떠난 뒤에도 장소에는 시간이 남는다. 학교가 문을 닫아도 그곳에서 배우고 뛰놀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차가 멈춘 철교에는 사람들이 오가던 흔적이 남고, 한 작가가 오래 살며 글을 쓴 마을에는 작품 밖의 삶이 쌓여 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7월 선정한 '2026 지역수요맞춤지원 사업'을 다시 들여다봤다. 15개 사업 가운데 홍천 폐교와 안동 폐철교, 정선 민둥산역 일원처럼 쓰임이 줄거나 멈춘 공간을 다시 지역의 생활거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눈에 들어왔다. 국토부도 올해는 기반시설 건설에 그치지 않고 주민이 실제로 이용하는 사업과 유휴자산 활용을 중점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정 사업들은 계획을 구체화한 뒤 202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간의 성격과 쓰임을 먼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 무엇을 넣을 것인가에 앞서 한 번쯤 물어야 한다. 그곳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비어 있어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휴공간 사업에서는 면적과 구조, 접근성, 사업비, 필요한 시설을 먼저 살핀다.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공간의 다음 쓰임을 정하려면 그곳이 지나온 시간도 함께 살펴야 한다. 누가 이곳을 사용했는지, 사람들은 어디로 드나들었는지, 주민들은 무엇을 기억하는지, 주변 마을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봐야 한다. 안동철교는 장기간 방치된 폐철교를 보행공간과 쉼터로 바꿔 단절된 생활권을 잇는 사업이다. 철교는 원래 사람과 물자가 건너던 시설이다. 철도는 멈췄지만 다시 사람이 걷는 길이 된다. 용도는 달라져도 '건너고 잇는 곳'이라는 장소의 성격은 남는다. 홍천에서는 폐교를 어린이·가족 중심의 예술·기술 융합 창작문화 플랫폼 'NEST'로 바꿀 계획이다. 어린이와 가족이 예술과 기술을 체험하고 창작하는 문화공간으로 폐교를 다시 쓰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서도 무엇을 설치할 것인가만큼 학교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교실과 복도, 운동장은 오랫동안 배움과 놀이가 일어나던 공간이다. 그 기억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문화시설을 만드는 것과, 일부를 남겨 새로운 창작 경험으로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든다. 유휴공간은 쓰임을 잃었을 뿐, 시간이 비어 있는 곳은 아니다. 새 기능에는 그 장소의 이유가 필요하다 유휴공간을 바꿀 때 카페와 전시장, 책방, 체험공간, 미디어아트 같은 기능이 자주 등장한다. 필요하면 넣을 수 있다. 다만 왜 그것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능은 옮길 수 있지만 장소는 옮길 수 없다. 정선 민둥산역 일원 사업은 유휴시설을 활용해 역과 마을, 민둥산을 잇는 사계절 관광거점과 주민 커뮤니티 허브를 조성하는 계획이다. 이 사업에서 눈여겨볼 것은 건물 하나보다 그 사이의 길이다. 역에서 내린 사람이 어느 길로 마을에 들어가고, 어디에서 쉬고, 어떻게 민둥산으로 향하는지에 따라 지역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장흥 안양 율산에서는 한승원 작가의 창작자산을 바탕으로 복합문화공간과 문학공원, 교육·문학 프로그램을 조성한다. 문화자원은 오래된 건축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보고 듣고 쓰며 살아온 시간도 장소를 설명하는 자산이 된다. 책방과 문학공원을 만드는 데서 끝날 일도 아니다. 어떤 풍경을 보며 걷게 할 것인지, 작품과 마을을 어디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할 것인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시설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재생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장소를 읽고 무엇을 남길지 정한 뒤 필요한 기능을 찾는 편이 낫다. 사람의 동선과 콘텐츠, 운영도 이때부터 함께 봐야 한다. 건축이 끝난 뒤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공간과 콘텐츠가 따로 놀기 쉽다. 다시 쓰이는 장소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새 공간의 개장식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다음의 평일이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주민이 그 길을 걷는지, 아이들이 다시 찾아오는지, 지역 사람들이 공간을 쓰고 프로그램을 이어가는지를 봐야 한다. 공간의 쓰임은 문을 여는 순간보다 그 이후의 일상에서 드러난다. 국토부가 이번 사업에서 주민의 실제 이용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과 주민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목표일 필요가 없다. 외지인에게는 찾아갈 이유가 있고, 지역 사람에게는 계속 사용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함께할 때 공간은 지역 안에 자리를 잡는다. 운영도 준공 뒤에 생각할 일은 아니다. 누가 공간을 맡을지, 어떤 프로그램을 지속할지, 주민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를 미리 살피면 공간설계도 달라진다. 결국 공간을 오래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시설 자체보다 그곳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내년부터 사업이 본격화되면 지금의 구상은 설계와 공사를 거쳐 실제 장소가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모습을 모두 남길 필요는 없다. 다만 폐교에는 학교였던 시간이 있고, 철교에는 사람들이 건너던 시간이 있다. 역에는 오고 간 시간이 있으며, 문학의 장소에는 한 사람이 보고 듣고 쓰며 살아온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빈 공간에도 시간이 남아 있다. 좋은 재생은 그 시간을 지우고 새것으로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을 오늘의 쓰임과 이어주는 일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11 09:01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의 다음 단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오는 9월 10일 경주에서 세계국가유산산업전이 개막한다. 올해로 10회를 맞는다. 올해 주제는 '유산에서 산업으로, 10년의 도약'이다. 보존과 수리·정비를 중심으로 해온 국가유산 산업에 3D와 XR, AI가 들어왔고 콘텐츠와 경험산업까지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1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리는 '헤리테크 2026'의 프로그램에 눈이 간다. 주제는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의 확산과 미래 전략'이다. 오전에는 '국가유산 디지털 정책 방향'(이태호·국가유산청)에 이어 '신라왕경 디지털 프로젝트의 구축 성과와 후속 활용 방향'(김지교·문화유산기술연구소)이 발표된다. 세계유산 증강현실 기술 적용과 역사도시의 디지털 헤리티지를 거쳐 '디지털 기억에서 살아있는 유산으로: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과 Living Archive'(김상현·상명대학교)로 논의가 이어진다. 오후에는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의 공간·체험과 해외 확산, 건축유산의 디지털 재건, 공간 기반 XR에서 소셜VR과 대화형 AI, 생성형 AI, 미디어아트와 AI 영상까지 범위가 넓어진다. 하루의 발표 순서를 따라가면 질문의 이동이 선명하다.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의 구축 성과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해, 재현된 자산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공간과 관객의 경험으로 번역하며 다른 콘텐츠와 산업으로 이어갈 것인가로 논의가 넓어진다. 결국 헤리테크가 향하는 곳은 재현 그 자체보다 재현 이후다. 필자가 이번 헤리테크에서 보고 싶은 것도 그 변화다. 디지털 재현 이후에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신라왕경, 재현 이후를 설계하다 신라왕경의 디지털 재현은 실물을 당장 다시 세우기 어려운 고대 도시의 공간과 건축을 발굴과 기록, 학술연구와 고증을 토대로 디지털 환경에서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도시지만 그 안에는 오랜 조사와 연구, 해석의 시간이 겹쳐 있다. 그래서 어느 시대와 자료를 기준으로 했는지, 확인된 사실과 추정한 부분은 무엇인지, 새로운 조사와 연구가 나왔을 때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도 함께 관리해야 한다. 디지털 재현은 사라진 공간을 보여주는 일이면서 그 장소를 둘러싼 연구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신라왕경 프로젝트의 구축 성과를 짚은 뒤 세계유산의 증강현실과 역사도시의 디지털 헤리티지를 살피고, 다시 리빙아카이브로 논의가 이동하는 프로그램의 순서가 흥미롭다. 특히 '디지털 기억에서 살아있는 유산으로: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과 Living Archive'(김상현·상명대학교)라는 발표에는 이번 헤리테크의 한 축이 압축돼 있다. 리빙아카이브를 자료를 모아놓는 저장소로만 이해하면 부족하다. 디지털 재현이 계속 연구와 콘텐츠의 기반으로 쓰이려면 원천자료와 재현 근거, 데이터 버전, 고증과 검수, 제작·가공 이력을 함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발굴과 연구에 따라 재현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그 변화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만든 왕경의 모습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와 해석의 변화에 대응하는 디지털자산으로 관리하는 일이다. 그래야 재현 결과도 다음 연구와 콘텐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XR·AI, 재현을 경험으로 바꾸다 오후로 가면 질문은 공간과 경험으로 이동한다. '가상융합기술 기반 건축유산 디지털 재건과 콘텐츠 활용 방안'(유정민·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공간 기반 XR 헤리티지 개발 사례와 콘텐츠 적용 시사점: 「이순신, 한산의 바다」를 중심으로'(전우열·벤타엑스)가 이어진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기술의 이름보다 디지털자산이 실제 경험으로 옮겨가는 방식이다. 정교한 3D 모델이 있다고 XR 콘텐츠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관객이 어디를 바라보고 어떻게 움직일지, 무엇과 상호작용하며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할지 다시 설계해야 한다. 전시와 관광이라면 동선과 장면, 빛과 소리, 관람시간과 운영환경도 콘텐츠의 일부다. 이어지는 '디지털 복원에서 문화유산 해석으로: 소셜 VR과 대화형 AI를 활용한 참여형 문화유산 경험 디자인'(권오양·한국전통문화대학교)은 질문을 '해석'과 '참여형 경험'으로 옮긴다. 기술의 초점이 결과물을 만드는 데서 관객이 유산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것인가로 이동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오래된 장소는 형태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곳에 쌓인 시간과 사람의 흔적, 이야기가 전달될 때 장소는 경험이 된다. 신라왕경 역시 건축물을 다시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당시 도시와 장소의 의미를 오늘의 관객이 어떻게 읽게 할 것인지까지 이어져야 콘텐츠가 된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전승 문화유산의 디지털 재현·아카이빙'(김인경·국립문화유산연구원)을 비롯해 문화유산 이미지의 재감각화와 미디어아트, KBS 역사스페셜의 AI 재현 사례, 헤리티지 AI 시네마에 관한 발표도 예정돼 있다. 여기에서는 기술적 새로움만큼 고증과 창작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자료를 근거로 만들었는지, 확인된 사실과 추정은 어디에서 갈리는지, 창작적 해석은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 것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화면이 그럴듯해질수록 이미지가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떤 해석을 거쳤는지를 설명하는 정보도 중요해진다. 기술은 유산을 대신하지 않는다. 같은 3D와 XR, AI를 사용하더라도 유산을 어떤 시선으로 읽고 어떤 장면과 경험으로 만들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기술의 완성도가 관객의 경험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해석과 콘텐츠 설계가 있어야 한다. '확산'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이번 헤리테크의 제목에는 '확산과 미래 전략'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한국 디지털 헤리티지와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 모델의 해외 확산 가능성-아세안 국가를 중심으로'(김시은·아세안랩)는 재현 기술과 자산이 다른 국가와 도시로 이동할 가능성을 다룬다. 확산은 디지털 재현물을 해외에서 한 번 보여주거나 콘텐츠 하나를 수출하는 것으로 끝나기 어렵다. 다른 도시와 기관, 제작사가 자산을 사용하고 현지 환경에 맞는 콘텐츠와 서비스를 만들며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의 규격과 이용조건, 고증 정보와 제작이력, 유통방식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올해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원천자원 사업에서도 산업 수요를 먼저 확인하고 실제 제작환경의 요구를 구축 대상과 품질, 포맷에 반영하려는 변화가 보인다. 앞서 필자가 국가유산 3D 원천자원을 두고 '누가 어떻게 쓰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그 쓰임이 다음 제작과 유통으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봐야 할 시점이다. 세계국가유산산업전에는 국내외 바이어 상담회도 마련된다. 개별 전시에서도 기록과 데이터의 범위를 콘텐츠와 이용자 경험으로 넓히려는 시도가 보인다. 참가기업 위프코는 국가유산 원형 데이터를 바탕으로 3D 에셋 콘텐츠와 생성형 AI 서비스, 베리어프리 체험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 번 쓰이고 한 번 거래되는 것으로 산업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수요에 맞는 기술과 콘텐츠가 제작되고 유통과 시장을 거쳐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져야 한다. 연구자와 기술기업, 콘텐츠 제작자와 공간 운영자, 수요기관이 다시 만나는 구조가 필요하다. 헤리테크의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과제도 보인다. 신라왕경을 더 정교하게 재현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산을 살아있는 아카이브로 관리하고, 공간과 관객의 경험으로 바꾸며, 다른 콘텐츠로 확장하는 일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연구와 고증, 기술과 창작, 공간과 관객, 제작과 유통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세계국가유산산업전은 사흘이고 헤리테크는 하루다. 그 자리에서 제시된 논의와 기술이 다음 콘텐츠와 공간,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질 때 '유산에서 산업으로'라는 올해 산업전의 주제도 비로소 구체적인 경로를 갖게 된다. 디지털 재현의 다음 장면은 더 정교한 화면이 아니라, 재현된 유산이 오늘의 공간과 사람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방식이어야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08 10:00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갈라진 시선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로봇은 움직이다 멈췄다. 무용수의 몸은 철제 구조 사이에서 늘어나고 비틀렸으며, 기울어진 화면은 그 몸을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 장면은 두 무대에서 동시에 흘렀다. 한쪽을 보는 동안 다른 쪽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월 30일 서울 중구 CKL스테이지(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의 'BUILD UP'을 봤다.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 창작산실 선정작으로, 백연이 예술감독과 안무·연출을 맡았다. 여덟 명의 무용수와 건축, 영상, 로봇은 완전한 몸을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췄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공연의 세 개 플롯은 두 무대에서 다른 순서로 전개됐다. 관객이 어느 공간을 선택했는가에 따라 작품의 순서와 기억도 달라졌다. 'BUILD UP'의 독자성은 몸과 로봇의 움직임뿐 아니라 관객의 시선까지 안무한 데서 선명해졌다. 로봇이 멈춘 자리 공연 초반 인간은 자꾸 멈추는 로봇에게 이유를 묻는다. 로봇은 균형을 잡기 위해 멈춘다. 인간은 원하는 동작에 도달하기 위해 손상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몸을 움직인다. 멈추는 기계와 멈추지 못하는 인간이 마주 서자 로봇은 미래의 완전한 신체보다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또 하나의 몸으로 다가왔다. 프로그램북에서 백연은 중학생 때 척추측만증 진단을 받고 보조기를 착용했다고 밝혔다. 바른 자세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발레는 약 35년 동안 몸을 늘이고 비틀고 누르고 접는 훈련으로 이어졌다. 곧게 선 몸은 처음부터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오랜 훈련이 만든 결과였다. 그 과정에는 성취와 손상이 함께 남았다. 발레 의상인 튀튀와 토슈즈는 발레가 추구해온 균형과 직선을 환기했다. 탄성 밴드는 몸을 당기고 지지하면서, 반복되는 훈련이 손상의 감각을 어떻게 가리는지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헤리티지는 발레의 정형보다 한 사람의 몸에 축적된 훈련의 시간에 가까웠다. 몸의 흔적은 지워야 할 결함으로만 남지 않고, 그 몸이 무엇을 욕망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됐다. 장치가 몸과 시선을 움직였다 완성되지 않은 건물을 연상시키는 철제 구조는 배경이 아니었다. 무용수가 기대고 통과하며 넘어야 할 물리적 조건이었다. 기울어진 영상면은 몸의 이미지를 분절했고, 서로 다른 로봇은 인간과 다른 속도와 움직임으로 공간을 차지했다. 이원석의 건축설계와 장주희의 영상디자인, 서상봉·홍지현이 맡은 로봇 운용은 작품의 질문을 무대 환경으로 확장했다. 장치들이 제대로 맞물린 순간에는 몸의 흔들림과 기계의 멈춤, 영상 속 왜곡이 한 장면 안에서 서로를 설명했다. 기술은 미래의 신체를 과시하기보다 지금 여기 있는 인간의 취약성을 비추는 매체로 작동했다. 그 관계가 항상 고르게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일부 장면에서는 구조물의 규모와 로봇의 낯섦이 무용수의 세밀한 움직임보다 먼저 들어왔다. 관객의 주의가 여러 매체로 분산되면서 정작 몸의 호흡을 따라가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융합의 완성도는 기술의 수보다 관객의 주의를 어떻게 배치했는가에서 갈린다. 어느 순간에 몸이 중심이 되고, 언제 영상과 로봇이 앞으로 나서며, 언제 다시 물러날지를 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BUILD UP'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장면 전환과 매체 사이의 관계를 더욱 세밀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몸과 기술의 관계도 한층 선명해질 것이다. 두 무대 사이의 시선 두 무대의 장면은 동시에 진행됐다. 관객이 한쪽을 바라보는 동안 다른 쪽의 움직임은 시야 밖으로 지나갔다. 같은 공연을 보더라도 좌석과 시선의 방향에 따라 접한 장면의 순서와 비중은 달라졌다. 이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라기보다 두 무대라는 형식이 만든 관람 조건에 가까웠다. 그 조건은 작품이 다룬 불완전한 몸과 겹쳐 보였다. 무용수가 몸의 균형과 한계를 마주했듯 관객도 공연 전체를 한눈에 소유하지 못한 채 일부를 보고 나머지를 놓쳤다. 몸에 관한 질문을 관객의 시선과 경험까지 이어간 점은 'BUILD UP'의 성취였다. 다만 두 무대의 관계가 모든 순간 선명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다. 공간 사이의 연결이 약해지는 장면에서는 관객의 시선이 선택됐다기보다 분산됐고, 보지 못한 장면도 의도된 여백보다 정보의 손실로 남을 수 있었다. 양쪽의 장면을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른 무대에서도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소리와 빛, 장면 전환의 리듬으로 유지한다면 두 공간의 관계는 더 또렷해질 것이다. 이 구조는 공연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과제도 남긴다. 한 방향에서 촬영한 영상은 어느 한쪽을 중심에 두는 순간 다른 무대의 흐름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두 공간을 각각 기록하면서 동시성과 시선의 이동까지 보여줄 수 있는 화면 구성이 필요하다. 멀티뷰나 분할 화면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다. 기록은 공연 후의 홍보자료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공간 구조를 보존하는 아카이브가 돼야 한다. 그래야 이번 시도가 재공연과 연구, 후속 유통에서도 제대로 읽힐 수 있다. 'BUILD UP'이 남긴 질문은 인간과 로봇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완전한가보다 흔들리고 멈추는 존재가 어떻게 다시 움직이는가에 가까웠다. 관객 또한 모든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본 장면과 놓친 움직임 사이에서 작품을 기억하게 됐다. 다음 무대의 과제는 장치를 더 늘리는 데 있지 않다. 몸과 기술의 비중, 두 공간을 잇는 신호, 관객의 시선이 움직이는 시점을 더욱 세밀하게 조율하는 일이다. 몸이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기술이 관객의 감각을 넓힐 때, 두 무대는 작품의 형식으로 더 강한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07 09:57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게임도 국가유산이 되는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1996년 4월 5일, 넥슨의 '바람의나라'가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넥슨이 공개한 30주년 기록에 따르면 서비스 첫날 접속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컴퓨터와 인터넷 환경이 바뀌었고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 방식도 여러 번 달라졌다. 수많은 온라인게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람의나라'는 지금도 접속할 수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그 30년이 지금 어디에 남아 있는가다. 처음의 화면과 캐릭터, 맵과 음악, 개발자의 기획과 기술, 수없이 이어진 업데이트,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놀았던 시간은 얼마나 기록돼 있을까. 마침 국가유산 정책도 오래된 것만 바라보지 않기 시작했다. 국가유산청은 2025년 제작·형성된 지 50년 미만인 '우리시대' 유산을 적극 발굴하겠다고 밝히면서 '디지털·정보화 유산'을 중점 분야로 제시했다. 그 예시에는 PC통신과 한글 워드, 온라인게임도 들어 있다. 2026년 주요업무계획에서도 50년 미만 '우리시대' 유산을 선제적으로 발굴·관리한다는 방향은 이어졌다. 이와 별도로 예비문화유산 제도는 제작·형성된 지 50년 미만인 근현대 유산을 미리 찾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기도 전에 사라지거나 훼손되는 일을 막자는 취지다. 다만 첫 공모는 회화와 공예품, 문서와 서적, 생활용품, 기계와 도구 같은 동산유물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중요한 것은 당장 어느 게임이 국가유산이 될지를 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50년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이 사라질 수 있는가. 게임의 원형은 무엇인가 온라인게임을 유산의 눈으로 바라보면 곧 난감한 문제가 생긴다. 무엇을 남겨야 할까. 최초 클라이언트인가. 서버와 데이터인가. 캐릭터와 맵, 원화와 음악인가. 기획서와 개발 기록인가. 30년 동안 쌓인 업데이트와 패치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24년 예비문화유산 첫 공모의 세부 기준에는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와 함께 '원형유지 및 희소성'이 있었다. 그런데 온라인게임의 원형은 간단하지 않다. 1996년의 '바람의나라'와 2026년의 '바람의나라'는 같은 게임이지만 같은 모습은 아니다. 그래픽과 시스템이 바뀌었고 새로운 지역과 이야기가 더해졌다. 접속환경도 사람들이 게임 안에서 움직이고 관계 맺는 방식도 달라졌다. 처음 버전만 남기면 그 뒤의 30년이 빠진다. 현재 버전만 남기면 시작점과 그 사이의 시간이 사라진다. 나는 온라인게임의 원형을 어느 한순간의 화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변해온 시간을 함께 기록해야 한 게임의 역사가 보인다. '바람의나라'에는 이미 흥미로운 전례가 있다. NXC와 넥슨컴퓨터박물관(현 넥슨뮤지엄)은 2014년 '바람의나라 1996'을 복원해 공개했다. 1996년 클라이언트 버전을 당시 개발환경에 맞춰 되살리고 그래픽과 사운드, 명령어를 입력하던 텍스트 머드 기반 게임방식까지 구현했다. 당시 NXC는 이 복원을 온라인게임의 역사적 보존과 연구를 위한 디지털 아카이빙 작업으로 설명했다. 12년이 지난 지금 이 복원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과거 게임의 스크린샷과 영상을 보관하는 것과 실제로 다시 작동시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무엇을 원형으로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훗날 다시 실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까지 간다. 국가유산 정책이 온라인게임까지 시야를 넓힌 만큼 기록 방법에 대한 논의도 뒤따라야 한다. 동산유물을 중심으로 출발한 기존의 방식만으로 서버에서 움직이고 계속 업데이트되는 게임을 온전히 기록하기는 어렵다. 어느 버전을 남길지, 실행환경과 변화의 이력을 어떤 단위로 기록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온라인게임이 '우리시대 유산'의 시야에 들어왔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게임에 맞는 기록의 방법이다. 게임의 역사는 플레이의 역사다 게임의 역사는 개발사가 만든 프로그램 안에만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접속하고 캐릭터를 키웠다. 길드를 만들고 친구를 만났다. 그들만의 말과 놀이법도 생겼다. '바람의나라'의 오래된 일화 하나가 이를 잘 보여준다. 2005년 무료화 이후 이용자가 크게 늘자 초보 사냥터에서는 몬스터인 다람쥐를 잡기도 어려워졌다. 이용자들은 채팅창에서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를 외쳤고, 이 말은 오랫동안 기억되는 게임 속 유행어가 됐다. 프로그램 파일만 들여다봐서는 알기 어려운 역사다. 온라인게임의 역사는 개발의 역사인 동시에 플레이의 역사라는 부분을 기억해야한다. 올해 넥슨컴퓨터박물관이 넥슨뮤지엄으로 개편되면서 공개한 전시 구성도 이 점에서 눈에 띈다. PC 패키지와 매뉴얼, 게임잡지 같은 자료를 아카이빙하고 '바람의나라' 원화와 2014년 복원 프로젝트 자료를 전시에 담았다. 관람객이 자신의 넥슨 계정을 연동하면 과거 플레이 이력이 관람 경험의 일부가 되도록 설계했다. 넥슨뮤지엄은 기업이 구축한 아카이브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게임을 만든 기록에서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의 기억으로 시선을 넓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게임의 문화사는 개발실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의나라'가 게임 밖에서 다른 문화와 만나온 시간도 있다. OST는 국악으로 다시 연주됐고, 넥슨재단의 '보더리스-Craft판'에서는 '바람의나라'를 비롯한 게임 IP가 무형유산 전승자와 현대공예가의 작업으로 옮겨졌다. 올해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함께 '바람의나라' 30주년을 계기로 신진 전통공예 예술가의 창작을 지원했고, 9월 9일부터는 그 흐름을 잇는 《이립의 바람, 전통을 잇다》 전시가 경복궁 계조당에서 열린다. 이 흐름을 거꾸로 바라보면 흥미롭다. 오래된 전통을 게임의 언어로 불러왔다면, 이제 오래 살아온 게임의 시간도 문화의 기록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게임사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어떻게 놀았고 무엇을 기억하는지도 함께 남겨야 하는 이유다. 오늘의 게임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국가유산 정책에서는 반대 방향의 흐름도 진행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의 원형데이터와 3D 에셋을 축적하고 이를 게임·드라마·OTT 등 문화콘텐츠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나는 지난 8월 이 지면에서 「국가유산 3D, 누가 어떻게 쓰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얼마나 많이 구축했느냐보다 창작자와 기업이 실제로 어떻게 꺼내 쓰고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로 이어가는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그 방향을 반대로 돌려본다. 어제의 유산이 오늘의 게임을 만들고, 오늘의 게임은 내일의 유산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을 남기는 일도 파일을 보관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수십 년 뒤 '바람의나라'의 이미지를 보는 것과 초기 버전을 직접 열어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화면은 어떤 속도로 움직였는지, 다른 이용자를 어떻게 만났는지는 작동하는 게임 안에서 더 잘 드러난다. 초기 클라이언트와 주요 버전, 개발기록과 패치 이력, 실행환경을 남기는 일에 플레이어의 기억과 커뮤니티 기록도 더해져야 한다. 기업의 지식재산과 영업정보, 이용자의 개인정보와 저작권을 어디까지 보존하고 공개할지도 풀어야 한다. 국가가 모든 자료를 직접 가져와 보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사와 박물관, 연구자와 공공기관이 무엇을 남길지 기준을 만들고, 자료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바람의나라 1996' 복원은 민간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의 사례다. 넥슨뮤지엄이 플레이어의 기록까지 전시의 언어로 가져온 것은 그다음 장면이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이제 온라인게임을 '우리시대 유산'의 발굴 분야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바람의나라'의 서른 살을 한국 온라인게임이 이제 산업의 성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본다. 매출과 이용자 수, 기술적 성취가 산업사를 기록한다면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만나고 놀고 기억한 시간은 문화사를 만든다. 게임산업은 늘 다음 업데이트와 다음 작품을 향해 달려왔다. 그 속도가 한국 게임산업을 키웠다. 이제 지나온 시간도 챙길 때다. 오래됐다고 모두 유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시대의 기억은 남겨놓지 않으면 훗날 그 가치를 판단할 기회조차 없다. '바람의나라'의 서른 살은 그 질문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03 11:01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미술이 도시를 움직이려면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8월 31일 저녁 7시 서울아트위크가 을지로에서 첫 오프닝나잇으로 문을 연다. 오래된 공구상가와 산업·노동의 시간이 남아 있는 을지로에서 20개 시각예술공간이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전시와 퍼포먼스, 아티스트 토크를 이어간다. 9월 6일까지 미술관과 박물관, 갤러리와 대안·신생공간에서 전시와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같은 주 코엑스에서는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도 열린다. 미술이 전시장 밖으로 이어지면 관람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날까. 작품 앞에 서는 순간뿐 아니라 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 그 사이 마주치는 골목과 건물의 표정까지 관람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번 서울아트위크에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도 전시의 숫자보다 미술을 따라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미술을 보러 가는 길도 관람이다 미술을 보러 갈 때는 대개 목적지가 분명하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도착해 전시장을 돌고 작품을 본 뒤 건물을 나온다. 관람의 시작과 끝도 자연스럽게 전시장 안에 놓인다. 그러나 미술이 도시 곳곳으로 이어지면 작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시간까지 관람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다. 서울아트위크의 레지던시 투어가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관람객은 코엑스에서 출발해 서서울미술관을 거쳐 금천예술공장으로 이동하고, 다른 날에는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작가 작업공간을 찾아간다. 완성된 작품을 보는 시간과 작품이 만들어지는 장소를 만나는 시간이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진다. 큰 행사에 사람을 모으는 것과 그 사람을 다시 도시 안의 다른 문화공간으로 보내는 일은 경험의 구조가 다르다. 후자에서는 목적지 사이의 시간도 의미를 갖는다. 어디에서 내려 어떤 거리를 걷는지, 어떤 동네를 지나 어떤 건물의 문을 여는지가 작품과 함께 기억된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미술행사라면 공간을 많이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에게 다음 장소로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좋은 동선은 가장 짧은 길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음 장소가 궁금해지는 길일 수도 있다. 미술을 보러 가는 길도 이미 관람의 일부다. 도시를 움직이려면 때로 멈춰야 한다 첫날 뉴스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의 제목은 꽤 길다. 《장시간 정체 구간을 주행 중입니다. 안전을 위해 가까운 휴게소에서 쉬어가세요.》 10명의 작가가 참여해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 '쉼'과 '멈춤'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 전시가 을지로에서 열리는 점도 흥미롭다. 오래된 산업과 노동의 흔적, 계속되는 도시의 변화, 사람들의 기억과 새롭게 자리 잡은 미술공간이 한 동네 안에 함께 존재한다. 빠르게 지나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을 잠시 멈춰 섰을 때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전시의 문제의식은 을지로라는 장소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문화행사는 사람을 움직인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게 하고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한다. 그러나 예술은 사람의 걸음을 늦추는 방식으로도 도시를 다르게 보게 한다. 매일 지나던 골목에서 잠시 멈추고, 오래된 건물의 표면을 다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던 작은 공간의 문을 처음 열게 할 수도 있다. 문화가 도시를 움직이는 방식에는 이동뿐 아니라 멈춤도 있다. 무엇을 더 많이 보여줄 것인가만큼 어디에서 사람의 걸음을 늦추게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잠시 멈춘 순간에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장소가 비로소 하나의 장면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장소가 달라지면 미술의 기억도 달라진다 을지로에는 을지로의 시간이 있고, 신당과 금천에도 저마다 다른 도시의 표정이 있다. 미술관의 화이트큐브에서 작품을 만나는 경험과 오래된 골목을 걷다가 작은 전시공간의 문을 열고 작품을 만나는 경험은 같지 않다. 우리는 작품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걸었던 길과 건물의 표정, 사람들이 오가던 풍경, 우연히 들었던 소리와 잠시 머물렀던 시간도 함께 기억된다. 작품을 만나기 전과 작품을 보고 난 뒤의 시간까지 관람 경험에 들어온다. 서울아트위크가 오프닝 당일 을지로 일대를 순환하는 버스를 운영하고, 갤러리와 함께 독립서점·카페 등의 정보를 담은 '을지美지도'를 마련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전시공간만 가리키기보다 그 주변을 함께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장치다. 도시는 문화행사의 배경이 아니라 관람 경험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작품을 어디에 놓는지만큼 사람이 그곳에 어떻게 도착하고, 무엇을 지나며, 어디에서 멈추는지도 중요하다. 장소가 작품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작품을 본 기억에는 그날 걸었던 도시의 시간도 함께 남는다. 서울아트위크가 어떤 성과를 남길지는 일주일이 지나야 알 수 있다. 다만 이번 기획에서 지켜볼 것은 미술의 공간을 넓히는 것만큼 그 공간 사이를 걷는 사람의 경험이다. 처음 가본 골목 하나, 다시 들어가 보고 싶은 작은 공간 하나, 우연히 알게 된 작가 한 사람, 잠시 멈춰 바라본 풍경 하나가 남는다면 그것 역시 아트위크가 만든 변화로 남을 수 있다. 도시의 문화적 매력은 모든 것을 한곳에 모은다고 생기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길을 걷게 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잠시 멈춰 서게 하며, 늘 보던 도시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게 하는 경험이 쌓일 때 그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미술이 도시를 움직이려면, 먼저 사람이 도시를 이전과 다르게 걷게 해야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31 09:33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밤은 빛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야간경관을 보러 가면 사람들은 먼저 빛을 본다. 수목을 비추는 경관조명, 길 위의 빛 조형물, 건축과 자연에 투사되는 영상이 낮과 다른 풍경을 만든다. 그런데 오래 기억되는 밤에는 소리도 함께 남는다.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가 걸음을 이끌고, 등 뒤에서 번지는 낮은 울림이 몸을 돌리게 한다. 어느 지점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면 사람은 잠시 멈춘다. 음악이 사라진 뒤 다시 들려오는 바람과 발걸음도 그날의 장면이 된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움직이며, 공간의 크기와 거리를 느끼게 한다. 빛이 밤의 모습을 만든다면 소리는 그 장면에 방향과 움직임, 호흡을 더한다. 사운드는 그래서 영상 뒤에 붙이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과 동선, 머무는 시간을 함께 설계하는 연출 요소에 가깝다. 야간경관은 결국 무엇을 얼마나 밝힐 것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보게 하고, 어디로 걷게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장면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까지 함께 설계할 때 비로소 하나의 경험이 된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움직인다 빛이 시선을 붙잡는다면, 소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곳으로도 사람을 이끌 수 있다. 길의 입구에서 멀리 하나의 소리가 들리고, 걸음을 옮길수록 조금씩 가까워진다고 생각해보자. 한 장면을 지나면 그 소리는 등 뒤로 멀어지고, 다음 공간에서는 새로운 소리가 앞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소리의 방향과 거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공간음향은 바로 이런 관계를 다룬다. 단순히 소리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되고, 얼마나 가까이 느껴지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언제 사라질지를 설계한다. 입체음향과 이머시브 사운드는 앞뒤와 좌우, 높이와 거리까지 활용해 소리의 위치와 움직임을 공간 안에서 몸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 사운드의 기능은 분명하다.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거나 늦추며, 특정 지점에 머물게 한다. 서로 떨어진 장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영상이 장면을 보여준다면 공간음향은 그 장면 사이를 걷게 한다. 말하자면 사운드로 동선을 쓰는 것이다. 장소특정적 야간경관이라면 공간음향 역시 콘텐츠가 거의 완성된 뒤 덧붙이는 요소가 아니라, 장면과 관람 동선을 정하는 단계부터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좋은 소리는 장소를 먼저 듣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야외 공간에 더 많은 음악과 효과음을 넣자는 뜻은 아니다. 좋은 사운드 연출은 무엇을 새로 들려줄지 정하기 전에, 지금 이 장소에서 무엇이 들리는지부터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수변에는 물과 바람이 있고, 숲에는 나뭇잎과 풀벌레, 사람의 발걸음이 있다. 오래된 철길에는 한때 오가던 기적과 레일의 마찰음이 기억으로 남아 있고, 옛 포구에는 물결과 배, 사람들의 삶이 남긴 소리가 있다. 건축물과 지형이 만들어내는 울림도 장소마다 다르다. 이런 소리환경을 '사운드스케이프'라고 한다. 하지만 용어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들리는 소리, 그 장소의 기억 속에 남은 소리, 오늘 새롭게 만든 소리를 어떻게 관계 맺게 할 것인가다. 특히 역사문화공간에서는 실제 기록에 근거한 소리인지,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인지, 오늘의 창작자가 새로 만든 것인지도 구분돼야 한다. 장소의 시간을 다룰수록 사실과 해석, 창작의 경계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어떤 수변에서는 별도의 음악보다 빛과 실제 물소리만으로 장면이 완성될 수 있다. 다른 장소에서는 빛 조형물에 가까워질수록 멀리 있던 소리가 다가오고, 프로젝션 영상이 끝난 뒤 인공적인 사운드가 사라지면서 실제 바람과 물소리가 다음 장면을 이어갈 수도 있다. 사운드는 공간을 채우는 장식이 아니다. 장소가 가진 시간과 기억, 사람의 움직임을 서로 이어주는 연출의 언어다. 빛과 소리가 한 호흡이 될 때 작품으로 다가온다 야간경관 현장에서는 경관조명과 빛 조형물, 미디어콘텐츠와 음향이 서로 다른 기술과 공정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 공간을 걷는 사람에게는 따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밤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기술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서로 언제 만나고, 언제 물러날지를 정하는 일이다. 빛이 먼저 시선을 열고 소리가 그곳으로 사람을 이끈다. 빛과 영상이 하나의 장면을 만들면 소리가 거리와 깊이를 더한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때는 빛과 소리가 함께 호흡을 낮추고 다시 새로운 장면을 준비한다. 나는 이것을 빛과 소리의 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본다. 서로 다른 기술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 되도록 조율하는 일이다. 장비와 기술이 의식되지 않고 장면만 남을 때 야간경관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빛과 소리로 채울 필요는 없다. 야외에는 이미 어둠이 있고 바람과 물, 사람과 자연의 소리가 있다. 어느 순간에는 빛이 낮아지고 소리도 멎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장소가 들린다. 빛에는 어둠이 필요하고 소리에는 침묵이 필요하다. 그 대비와 여백이 있어야 다음 장면의 빛과 소리가 다시 살아난다. 결국 연출은 무엇을 더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야간경관은 빛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은 밤을 눈으로만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장면을 만들고 소리가 거리와 방향, 움직임과 호흡을 더할 때 관람객에게 남는 것은 장비가 아니라 경험이다. 좋은 사운드 연출의 끝에는 스피커가 아니라 장소가 남아야 한다. 빛과 소리가 한 호흡으로 움직이고 기술이 뒤로 물러난 뒤에도 그날의 밤이 기억에 남는다면, 야간경관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26 10:52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AI영화보다 '영화의 AI화'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영화는 언제부터 영화가 되는가. 카메라로 촬영하고 배우가 직접 연기해야 영화일까. 아니면 이미지가 움직이고 이야기가 흐르며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순간 영화가 되는 것일까.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영화 제작방식을 바꾸면서 이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제 몇 줄의 문장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과 사라진 도시, 실제 촬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까지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 AI영화는 영화제와 극장으로 들어왔고 제작사와 VFX 기업들도 제작공정에 AI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질문은 'AI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다. 'AI'라는 이름을 떼어내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인가. 기존 영화와 다른 자기만의 영상문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AI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과 AI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제작은 쉬워졌지만 영화까지 쉬워진 것은 아니다 AI가 가져온 가장 분명한 변화는 비용과 시간의 장벽을 낮춘 것이다. 과거라면 많은 인력과 자본이 필요했던 장면을 작은 제작팀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되면 이미지의 희소성은 낮아진다. 만드는 능력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하는 힘이 중요해진다.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AI영화를 제작해온 박진호 카이스트(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교수의 작업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박 교수는 올해 1월 서울 강남에서 열린 K헤리티지산업포럼 신년 세미나에서 자신의 작업영역을 '헤리티지 AI영화'로 제시하고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 등 역사와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소개했다. AI는 정답을 내놓기보다 수많은 가능성을 빠르게 제시한다. 그래서 감독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다. 무엇을 만들고 버릴지, 어떤 장면과 감정을 남길지 결정해야 한다. 프롬프트를 다루는 능력만으로 감독의 역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에는 선택과 편집, 리듬 그리고 작품 전체를 책임지는 판단이 있다. 지난해 국립공주박물관이 제작한 단편영화 '한성 475'를 보며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했다. 475년 한성 함락을 다뤘지만 전쟁의 규모보다 인간의 마음을 따라갔다. 배우의 눈빛과 호흡, 침묵이 스펙터클보다 오래 남았다. 그때 주목한 것은 실사 자체가 아니었다. 기술을 얼마나 사용했느냐보다 서사가 사람에게 어떻게 도달했느냐였다. 나는 콘트라스트와 미장센을 감독의 시선과 철학이 화면에 남는 방식이라고 본다. 무엇을 밝히고 무엇을 어둠에 남길지, 인물과 공간을 어떻게 관계 맺게 할지. 그 선택이 장면의 감정과 의미를 만든다. AI영화도 다르지 않다. 화려한 이미지를 많이 생성했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는 생성할 수 있지만 장면의 의미는 연출해야 한다. AI는 제작비를 낮출 수 있지만 취향과 안목, 서사와 세계관까지 자동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비용의 민주화'가 '완성도의 민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상업성 역시 기술이 아니라 관객이 증명한다. AI영화보다 먼저 오는 영화의 AI화 실제 상업영화 제작현장에서 더 빠르게 진행되는 것은 '100% AI영화'보다 기존 영화 제작공정의 AI화다. 실사 배우와 촬영을 유지하면서 프리비주얼과 VFX, 배경 확장, 합성, 특수효과와 후반작업에 AI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이같은 방향은 더 빠르게 자리 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좋은 CG를 보면서 관객이 CG를 계속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AI도 결국 굳이 AI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제작기술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AI영화의 미래'만큼 '영화의 AI화'에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먼저 AI영화를 만들었느냐보다 누가 AI를 이용해 더 좋은 영화를 만들었느냐로 옮겨갈 것이다. 그렇다고 AI영화의 장르 가능성을 닫을 필요는 없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만으로 예술사조나 장르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반복되는 작품과 고유한 미학, 이를 공유하는 창작자와 관객의 감각이 축적될 때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기술은 출발점을 만들 수 있지만 하나의 사조와 장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작품의 축적과 시대의 선택이다. 그런 점에서 AI영화는 아직 새로운 영상문법을 시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생성형 AI 특유의 이미지 변형과 공간의 유동성,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표현이 고유한 미학과 서사로 축적된다면 새로운 영상예술의 흐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AI만이 만들 수 있는 영상문법은 무엇인가.' 이 가운데 '헤리티지 AI영화(Heritage AI Cinema)'의 다른 가능성도 엿봤다. 단순히 문화유산을 소재로 AI 영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고증을 바탕으로 사라진 시간과 공간을 다시 시각화하고, 이를 오늘의 관객이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는 서사로 전환하는 영역이다. 특히 역사와 문화유산은 AI가 표현의 한계를 넓힐 수 있는 분야다. 박진호 교수도 당시 발표에서 고려 개성 만월대에 도착한 마르코 폴로처럼 실제 촬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역사적 상황을 AI로 연출한 사례를 소개했다. AI의 의미는 기록으로 남은 시간과 장소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성 475'와 헤리티지 AI영화는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다. 하나는 배우의 실연과 고증으로 인간의 감정을 되살리고, 다른 하나는 사라진 공간과 사건을 새롭게 시각화한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종류가 아니라 역사의 기록을 오늘의 경험과 기억으로 어떻게 전환하느냐다. 다만 헤리티지를 다룰수록 기준은 더 엄격해야 한다. 복원과 추정, 예술적 상상은 구분돼야 한다. 무엇이 기록에 근거했고 어디까지가 학술적 추정이며 어디서부터 창작자의 상상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생성형 AI가 아무리 사실적인 장면을 만들어도 그것만으로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AI는 사라진 과거를 상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을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주는 기술은 아니다. 결국 영화가 남기는 것은 감정과 기억이다 지난해 '한성 475'를 보며 나는 역사문화 콘텐츠의 미래를 '감정의 복원'에서 찾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AI가 영화를 만드는 지금 더 중요해졌다. 관객은 픽셀의 정확성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한 인물의 눈빛과 선택, 한 장면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작품이 끝난 뒤 남은 감정을 기억한다. AI는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 창작수단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질문은 더 중요해진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왜 AI를 사용하는가. 그리고 작품이 끝난 뒤 무엇을 남길 것인가. 'AI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AI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라면 이야기가 살아 있고 관객의 감정을 붙잡아야 한다. 동시에 AI만이 만들 수 있는 영상문법과 미학도 찾아야 한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AI로 만들었다'고 설명해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AI를 잘 사용하는 좋은 영화일 것이다. 기술은 가능성을 만든다. 서사는 그 가능성에 이유를 만들고 미장센은 이야기를 장면으로 조직한다. 콘트라스트는 감정의 깊이를 만들고 그 감정은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 영화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AI라는 이름이 아니다. 사람에게 남는 이야기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21 08:48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국가유산 3D, 누가 어떻게 쓰게 할 것인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국가유산을 3D로 만드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궁궐과 사찰, 성곽과 고분, 유물과 공예품까지 다양한 국가유산이 디지털 원천자원으로 축적돼 왔다. 그동안의 성과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누가 꺼내 쓰고 어떤 제작공정에 넣으며 무엇으로 다시 만들 것인가. 이제 국가유산 3D 원천자원 정책은 구축의 규모와 함께 실제 쓰임을 물어야 한다. 지난 8월 7일 열린 「2026년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원천자원 제작·보급」 수요조사 설명회에서도 이런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제시된 사업 방향은 산업 수요를 반영해 구축 대상을 정하고 3D 에셋 제작과 최적화, 패키징, 국내외 플랫폼 보급까지 연결하는 것이었다. 제작 건수와 함께 실제 창작자와 기업이 얼마나 활용했고 그 데이터가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로 이어졌는지까지 살펴볼 때다. 좋은 데이터와 잘 쓰이는 데이터는 다르다 정밀한 3D 데이터라고 해서 곧바로 제작현장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 개발사가 원하는 자료와 영화 VFX 제작사가 필요로 하는 자료는 다르다. 실시간 게임에서는 폴리곤 최적화와 리깅, 엔진 호환성이 중요하다. 영화는 형상의 정밀도와 텍스처 품질을 중시한다. XR은 구동성능과 데이터 용량을 함께 봐야 하고 디지털전시는 역사적 정보와 문화적 맥락까지 필요하다. 좋은 데이터의 기준을 공급자의 기술만으로 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어떤 국가유산에 수요가 있는지, 어느 산업에서 사용할 것인지, 어느 수준의 품질과 경량화가 필요한지부터 살펴야 한다. 제작환경에 맞는 포맷인지, 2차 가공이 가능한지, 실시간 3D 엔진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결국 제작 이전에 쓰임을 먼저 묻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번 사업도 수요조사를 거쳐 후보목록을 정하고 활용 가능성과 제작 난이도를 살핀 뒤 에셋 제작과 최적화, 패키징, 국내외 플랫폼 보급으로 이어지는 방향을 제시했다. 고품질 원본은 보존하면서 제작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경량화 자료와 패키지 에셋을 함께 마련하려는 접근도 눈에 띈다. 여기서 산업화는 공공자산을 단순히 상품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국가가 구축한 디지털 원천자원이 게임과 영상, VFX와 XR, 전시와 교육 같은 실제 제작공정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콘텐츠의 재료로 쓰이게 하는 일에 가깝다. 수요를 먼저 묻고 제작 이후의 활용까지 살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유산의 성격에 따라 에셋도 달라야 한다 국가유산 디지털 원천자원이라고 하면 건축물이나 유물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무형유산도 콘텐츠 제작자산이 될 수 있다. 전통춤의 움직임을 모션데이터로 구축하고 디지털 캐릭터와 복식, 무구와 소품, 음원과 관련 정보를 함께 구성하면 게임과 영상, VFX, XR, 디지털전시와 교육까지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유산의 성격이 다르면 필요한 에셋의 방식도 달라진다. 건축유산은 공간과 구조가 중요하고 유물과 공예품은 형상과 재질이 중요하다. 무형유산은 움직임과 복식, 소리와 시간의 흐름을 함께 다뤄야 한다. 모든 국가유산을 같은 방식으로 3D화하기보다 무엇을 기록하고 어떤 단위로 묶어 제공할 것인지 대상별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정밀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맥락이다. 어느 시대의 모습을 기준으로 했는지, 어떤 자료를 근거로 제작했는지, 현재 상태를 기록한 것인지 재구성한 것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출처와 고증, 제작·가공 이력, 이용조건과 라이선스가 함께 관리돼야 제작자도 데이터를 믿고 쓸 수 있다. 국가유산 3D 원천자원은 콘텐츠 제작용 에셋을 넘어 앞으로 AI 학습과 검증의 기준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형상정보만 축적할 것이 아니라 출처와 고증, 제작·가공 이력, 이용조건까지 함께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AI 활용이 넓어질수록 국가유산 데이터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몇 건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이 만들어졌는가 공공이 모든 콘텐츠를 직접 만들 필요는 없다. 공공은 믿고 쓸 수 있는 원천자원과 메타데이터를 구축하고 활용하기 쉬운 규격과 이용조건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는다. 민간은 그 자원을 가져가 게임과 영화, XR과 전시, 교육과 디자인 등 새로운 콘텐츠와 서비스로 확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플랫폼 등록 이후다. 어떤 산업에서 활용됐는지, 어떤 기업과 창작자가 사용했는지, 제작 과정에서 어떤 불편이 있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 결과가 다음 구축대상과 제작기준에 반영돼야 공공 데이터와 제작현장 사이의 거리도 줄어든다. 제작 건수와 플랫폼 등록 수, 다운로드 수는 필요한 지표다. 여기에 실제 프로젝트 적용과 재사용 사례까지 함께 봐야 한다. 국가유산 3D 원천자원의 가치는 파일의 숫자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그 자료가 게임의 공간이 되고 영화의 한 장면이 되며 새로운 전시와 교육 콘텐츠로 이어질 때 비로소 활용의 성과가 보인다. 이제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정책은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와 함께 누가 어떻게 쓰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제작 전에는 수요를 살피고 제작 과정에서는 품질과 활용성을 확보하며 보급 이후에는 실제 사용 결과를 다시 확인하는 흐름이 필요하다. 국가유산 3D 원천자원의 성과는 플랫폼에 몇 건이 올라갔는가뿐 아니라 그 데이터로 무엇이 만들어졌는가까지 함께 확인돼야 한다. 기록과 보존을 위해 축적한 원천자원이 산업과 창작 현장에서 다시 쓰이고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의 가치도 결국 그 쓰임에서 완성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20 13:58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몸이 지나간 자리, 움직임은 남는다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좋은 동시대 예술은 완성된 뒤에도 계속 움직인다. 관람자가 가까이 다가가고 한 걸음 물러서는 사이 작품은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전시장을 떠난 뒤에는 몸과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지난주 성남큐브미술관에서 만난 유지민의 '잔류하는 움직임'이 그랬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발이 먼저 보였다. 몸을 웅크린 인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을 누르는 발과 몸을 붙든 손이 화면의 중심에 남았다. 인물의 표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관절과 근육이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이 몸이 얼마나 오래 그 자세를 버텼는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이 전시에서 본 것은 요가의 자세가 아니었다. 움직임이 몸을 지나 재료에 머무는 방식이었다. 전시설명에 따르면 유지민은 오랫동안 요가를 수련하며 몸의 움직임과 감각을 회화와 조형에 담아왔다.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동작을 되풀이하는 수련은 그리는 행위와 만나 '집념'으로 이어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집념은 극한의 의지나 완벽한 자세와 거리가 있었다. 같은 일을 다시 하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차이를 알아차리는 태도였다. 몸은 같은 동작을 반복해도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 사이에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생긴다. 한쪽 벽에는 작은 신체 드로잉이 여러 줄로 걸려 있다. 검은 몸은 접히고 펴지며 서고 눕는다. 멀리서 보면 움직임을 기록한 악보처럼 이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자세마다 번짐의 농도와 선의 흔들림이 다르다. 비슷한 형상이 반복되지만 완전히 같은 몸은 하나도 없다. 반복은 같음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차이를 쌓는 시간이다. 대형 인체 회화 앞에서는 그 차이가 무게로 다가온다. '수련의 잔상-파사사나3' 속 신체는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웅크리고 있다. 무릎과 팔이 겹치고 손은 발목을 붙든다. 몸의 일부가 화면 밖으로 잘리면서 자세의 압력은 더 커진다. 가까이 다가서면 목탄의 흔적이 보인다. 검게 눌린 자리와 손으로 문질러 희미해진 자리가 맞물려 있다. 선은 신체의 외곽을 매끈하게 가두지 않는다. 번지고 지워진 자국이 몸의 부피를 만든다. 화면 속 몸이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화면 밖에서는 그리는 사람의 손과 팔이 움직였다. 수련하는 몸과 그리는 몸이 한 화면에 포개진다. 작품이 살아 있는 듯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시는 평면에서 조형으로 이어진다. 비스듬히 세운 가벽에는 신작 '100겹의 수련'을 이루는 100개의 검은 조형물이 놓여 있다. 정면에서 보면 검은 기호의 집합처럼 보인다. 옆으로 걸으면 각각의 돌출과 간격이 나타난다. 100은 완성을 알리는 숫자보다 몸이 지나온 시간을 세는 단위로 읽힌다. 한 번의 움직임은 사라지지만 되풀이된 움직임은 형태를 얻는다. 측면의 '집념의 형상화' 연작에서는 사람의 몸이 거의 사라진다. 중첩된 검은 덩어리가 화면 밖으로 솟아 있다. 작품을 제대로 보려면 관람객도 움직여야 한다. 정면에서 보고 옆으로 몸을 틀고 다시 몇 걸음 물러나야 깊이가 드러난다. 작가의 몸에서 출발한 움직임이 관람객의 걸음으로 이어진다. 내가 컨템포러리 예술에서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다. 동시대 예술은 지금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과 관람자가 계속 관계를 맺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현재의 예술이 된다. 작품은 벽에 걸려 있지만 감상은 벽에 머물지 않는다. 아쉬움도 있다. 얼굴을 지우고 흑백으로 제한한 선택은 인물의 서사를 열어두는 동시에 작품 사이의 감정 차이를 좁힌다. 웅크린 몸이 계속되면서 비슷한 긴장이 반복되는 대목도 있다. 개별 작품의 감정이 조금 더 선명하게 갈라졌다면 전시의 호흡은 한층 풍부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시가 평평해지지 않는 것은 크기와 재료, 공간의 흐름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은 드로잉에서 대형 회화로 이동하고 다시 조형물이 놓인 좁은 통로로 들어간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물러서고 정면에서 보다가 옆으로 걷는다. 관람자의 몸이 움직일 때 작품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K-아트의 힘도 이런 개별 창작자의 오래된 수련에서 나온다고 본다. 예술의 뿌리는 거대한 구호보다 한 사람의 몸과 일상에 가깝다. 그 안에서 길어 올린 감각이 동시대 예술로 구현될 때 로컬의 작업은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넓어진다. 2026 성남작가조명전의 성과도 작가의 이름을 한 번 알리는 데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축적된 작업을 충분한 공간에서 펼치고 관객과 비평을 만나게 해야 한다. 한 번의 전시가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는 길도 필요하다. 지역 미술관은 그 연결이 시작되는 장소다. 전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월 19일까지 격주 토요일에는 'Morning Sequence-작가와 함께하는 아침 요가'가 이어진다. 화면에서 보았던 압력과 호흡을 자신의 몸으로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성남큐브미술관 상설전시실에서 계속된다. 작품 앞에서 서두르지 않았으면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고 한 걸음 물러서 보고 좁은 통로를 천천히 걸어볼 것. 화면 속 몸은 멈춰 있지만 움직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이 지나간 자리에는 움직임이 남는다. 살아 있는 예술은 그 움직임을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시작하게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12 09:16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부채 이전의 바람, 파티 이후의 몸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몸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미디어다. 생각을 움직임으로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감각을 공간에 남긴다. 내게 컨템포러리 댄스는 몸이 동시대의 기술과 환경, 관계를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새로워 보이는 동작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몸과 공간, 매체로 어떻게 구성했느냐다. 1997년 시작해 올해로 29회를 맞은 크리틱스초이스(Critics' Choice)는 '평론가의 선택'을 창작의 기회로 전환해온 춤축제다. 월간 댄스포럼이 주최·주관하며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의 경계를 넘어 청년 안무가에게 대극장 신작 초연의 기회를 제공한다. 2026년에는 서울문화재단 서울예술축제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모든 작품을 규모 있는 군무로 제작해 국내외 예술제로 유통될 기반을 만든다는 점에서 특화돼 있다. 올해는 ▲김원영 '교차' ▲우지영 '지진: 러브웨이브' ▲장두익 '스태프 온리' ▲박민지 '체리피커' ▲김다애 '게팅옐로우'가 처음 선정됐다. 여기에 기존 수상자인 ▲이해니 '에그.jpg' ▲강요찬 'Büchae' ▲박수윤 '무제: 쿠쿠'가 다시 초청됐다. 무용평론가이자 월간 춤 편집장을 거쳐 월간 댄스포럼을 이끌어온 김경애 발행인은 크리틱스초이스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윤대성 편집장은 기록과 감독을 맡아 축제의 현재를 주도한다. 안무가를 선택하고 작품을 제작하며 평가와 재초청으로 성장을 확인하는 구조는 단순한 공연기획이 아니다. 창작자를 발견해 콘텐츠로 성장시키는 예술경영의 플랫폼이다. 지난 9일 월간 댄스포럼의 독자로 초대받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두 작품을 봤다. 나는 안무의 기법 자체를 논평하기보다 몸과 미디어, 공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관객 경험을 만드는지에 주목했다. 강요찬 Büchae, 부채를 지우자 바람이 보였다 'Büchae'는 부채춤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다. 강요찬 안무가(前 독일 비츠토크 도세 파크 아트 레지던시 상주예술가, 前 이탈리아 볼로냐 아트팩토리 인터내셔널 트레이너)는 부채춤의 화려한 외형을 재현하는 대신 부채가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돌아갔다. 인간은 바람을 만났고 바람을 필요로 했으며 마침내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부채는 전통의 상징이기 전에 기술이고 매체이며 몸의 감각을 확장하는 인터페이스로 읽혔다. 황토색의 접힌 종이 오브제는 종이학이나 아직 펼쳐지지 않은 부채를 떠올리게 했다. 무용수들은 그 사이를 이동하며 바람의 방향과 밀도를 몸으로 그려냈다. 내레이션과 입체적인 사운드는 작품의 질문을 따라갈 생각의 길을 열었다. 조명과 포그는 무대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까지 감각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꿨다. 미디어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조명과 포그는 춤을 꾸미는 효과에 머물지 않았다. 몸에서 시작된 움직임을 공간 전체로 확장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을 관객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매체로 작동했다. 빛이 무용수의 몸을 통과해 포그 속에서 흩어질 때 바람은 잠시 만질 수 있는 물질처럼 다가왔다. 기술이 감각을 드러내고 몸이 그 기술에 생명을 부여한 순간이었다. 다만 내레이션이 의미를 먼저 설명할 때는 몸이 스스로 말할 여백이 줄어드는 듯했다. 강한 조명과 포그가 만든 이미지가 무용수의 세밀한 호흡보다 앞서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기술은 몸을 확대할 때 힘을 얻지만 몸을 대신하는 순간 작품의 중심을 흔들 수 있다. 그럼에도 강요찬은 전통의 외형을 반복하지 않고 전통이 태어난 원리를 탐구했다. 그가 지운 것은 부채가 아니라 부채춤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Büchae〉는 헤리티지가 완성된 형식의 보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몸과 기술을 통해 거듭 해석되고 감각되는 것임을 보여줬다. 한국무용의 뿌리를 동시대의 무대 언어로 다시 사유한 한국적 컨템포러리 댄스였다. 박수윤 무제: 쿠쿠, 파티 이후의 몸을 묻다 인터미션의 공기가 채 가라앉기 전에 공연이 스며들었다. 무대 위 사람들이 뒤섞이고 음악과 움직임이 번지면서 관객은 어느 순간 파티장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시작을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은 연출은 관객을 안전한 관찰자에서 작품의 환경을 구성하는 외부 자극으로 바꿨다. 프로그램북이 설명한 '쿠쿠'는 단순한 광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는 몸이 타인과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며 흔들리고 다시 배열되는 상태였다. 강렬한 전자음악과 라이브 사운드는 관객의 감각을 압박했다. 동시대의 일상복을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은 빠르게 충돌하고 흩어졌다. 무대 양쪽의 구조물과 대형 팬, 공간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빛은 불안정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음향과 조명, 구조물은 춤을 담는 배경이 아니었다. 몸의 선택을 바꾸는 능동적인 매체이자 또 다른 외부 조건으로 작동했다. 몸과 미디어, 공간은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감각적 환경을 형성했다. 박수윤 안무가(국립무용단 상임단원, 댄스필름 쑤컴 대표)는 한국무용의 전형적인 춤사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한국무용을 수련한 몸으로 동시대 도시인의 속도와 흥분, 피로를 포착했다. 한국적인 것은 특정 동작이나 의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몸에 축적된 호흡과 관계의 감각이 오늘의 환경을 만날 때 새로운 한국적 컨템포러리가 태어난다. 마지막에 등장한 침대는 내게 파티 뒤의 단순한 휴식처로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극받은 몸이 마침내 도착한 욕망과 소진의 장소로 읽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과연 스스로 멈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됐다. 다만 음악과 장면의 강도가 계속 높게 유지되면서 몸과 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변화가 감각의 파고에 묻히기도 했다. 내게는 자극이 잠시 비워지는 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마지막에 남은 몸과 호흡이 더욱 깊은 잔상을 만들었을 듯하다. 초연을 넘어, 다음 시대의 춤으로 크리틱스초이스의 가치는 수상자를 가리는 데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춤의 기반에서 출발한 안무가를 발견하고 대극장 신작으로 제작하며 평가와 재초청으로 성장을 확인하는 데 있다. 모든 작품을 신작으로, 규모 있는 군무로 초연하는 원칙은 창작자의 발상을 유통 가능한 공연콘텐츠로 성장시키는 제작 시스템이다. 이제 다음 과제는 초연 작품을 국내외 예술제와 재공연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안무가의 생각과 창작 과정, 무대기술의 설계 그리고 관객 반응도 디지털 아카이브로 축적해야 한다. 공연은 막이 내리면 사라지지만 그 과정이 기록되고 다시 경험될 때 지속 가능한 문화자산이 된다. 강요찬과 박수윤의 무대는 한국적 컨템포러리가 전통의 표면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한국무용을 수련한 몸에 축적된 호흡과 리듬과 관계의 감각은 K-헤리티지의 원천이 된다. 그 감각이 동시대의 질문과 미디어, 공간을 만나 새로운 관객 경험으로 창작될 때 K-콘텐츠가 된다. 세계의 관객과 감각을 나눌 때 비로소 K-컬처로 확장된다. 그 모든 확장의 출발점에는 오랜 시간 몸을 단련해 무대에 선 무용수들이 있다. 크리틱스초이스가 30년을 앞두고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장르의 문법이 아니다. 서로 다른 춤의 뿌리를 존중하면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움직임을 발견하고 창작자가 다음 무대로 나아갈 길을 여는 일이다. 평론가의 선택은 작품을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선택이 창작자를 다음 무대로 보내는 힘이 될 때 축제의 의미도 완성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11 10:43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성남물빛정원, 미디어아트 특화거리로 완성될까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성남물빛정원에 새로운 밤이 열린다. 성남시 시정소식지 「비전성남」 7월호는 8월 중 뮤직홀 외벽에 프로젝션 매핑 기반의 미디어파사드를 선보이고, 옛 하수처리장 구조물 일원에는 미디어터널과 포토존을 조성한다고 알렸다. 외벽 콘텐츠의 주제는 '고요한 탄천의 밤, 동물들의 음악회가 시작된다'이다. 성남시 문화관광과 관광팀에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스토리의 중심에는 탄천의 수달이 있고, 여러 동물이 함께 등장한다. 공개를 앞둔 현장을 찾았을 때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영상보다 그 영상이 펼쳐질 장소였다. 높이가 다른 뮤직홀의 백색 매스와 돌출·후퇴한 입면, 반복되는 수직선, 잔디광장의 관람축, 침전지의 거친 골조와 깊은 어둠이었다. 지난 2019년부터 분당에 살고 있는 성남시민으로서 물빛정원의 변화는 야간 콘텐츠 하나를 더하는 일 이상으로 다가온다. 장기간 닫혀 있던 옛 하수처리장을 시민의 산책과 음악, 휴식이 머무는 공간으로 되살리고, 다시 시민의 일상과 도시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달은 캐릭터가 아니라 탄천 회복의 증거다 수달은 가족 관람객에게 친근한 존재다. 그러나 물빛정원의 주인공으로 우연히 선택된 동물은 아니다. 탄천과 동막천 일대에서는 수달의 서식 흔적이 확인됐다. 수달은 상상 속 캐릭터가 아니라 탄천에 돌아온 생명이고, 도시의 물길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콘텐츠 속 수달은 악기를 연주하는 귀여운 등장인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탄천의 물길과 옛 하수처리장의 기억, 시민에게 돌아온 정원을 잇는 안내자가 돼야 한다. 고요한 탄천의 밤, 작은 생명의 기척이 나타나고 수달의 움직임을 따라 오랫동안 멈춰 있던 공간이 물과 빛, 음악으로 깨어난다면 생태 회복과 공간재생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반대로 동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연주하는 데 그친다면 즐거운 애니메이션은 될 수 있어도, 물빛정원에서만 성립하는 콘텐츠가 되기는 어렵다.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은 제작이다. 그 캐릭터가 장소의 시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연출이다. 생태를 소재로 삼은 만큼 조도와 음량, 운영시간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생태 회복을 이야기하는 콘텐츠가 탄천의 야간 생태와 주변 주민의 생활환경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프로젝션 매핑은 건축을 움직여야 한다 물빛정원에는 이미 선명한 대비가 있다. 옛 하수처리시설과 오늘의 시민공간, 거친 콘크리트와 디지털 영상, 정지된 건축과 움직이는 빛, 탄천의 자연과 미디어 기술이 한 장소에 공존한다. 연출은 이 차이를 지우기보다 드러내야 한다. 오래된 구조를 영상으로 덮기보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설명하게 해야 한다. 모든 면을 밝히기보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어둠 속에 남길지를 선택해야 한다. 어둠도 장소의 깊이와 다음 장면을 만드는 연출 자원이다. 뮤직홀 외벽은 하나의 평면이 아니다. 높이가 다른 건축 매스와 돌출·후퇴한 입면, 반복되는 수직 리브와 모서리, 창과 유리면이 중첩돼 있다. 이는 제작의 장애물이 아니라 공간 연출의 자원이다. 높은 매스는 프롤로그로, 중앙의 긴 입면은 주 무대로 활용할 수 있다. 측면과 모서리, 수직 리브에도 물길과 음악의 흐름에 맞는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여기서 3D 미장센은 입체효과를 많이 넣는다는 뜻이 아니다. 건축의 매스와 단차, 모서리와 창호, 관람자의 시점을 하나의 장면 구조로 설계하는 일이다. 물결과 빛이 면과 모서리를 넘나들며 건축의 깊이를 새롭게 드러내야 한다. 모든 면에 같은 영상을 펼쳐 놓으면 화면은 넓어질 수 있지만 건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프로젝션 매핑은 영상을 건물 크기에 맞춰 확대하는 기술이 아니라, 건축의 매스와 입면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공간 연출이다. 콘텐츠 공개까지 남은 시간은 효과를 더하기보다 연출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쓰여야 한다. 주관부서인 성남시 문화관광과는 제작 결과를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야간 현장 시연과 반복 보정 과정을 끝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는 제작실에서 만들어지지만, 공간 경험은 현장에서 완성된다. 외벽과 침전지는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옛 하수처리장의 침전지는 어둠 자체가 중요한 연출 자원이다. 반복되는 기둥과 보, 오래된 배관과 거친 골조 사이로 빛이 흐르면 물의 유입과 침전, 정화와 방류의 흔적이 드러난다. 멈춰 있던 시설이 시민에게 다시 열린 시간도 그 안에 포개질 수 있다. 외벽이 탄천의 생명과 음악으로 깨어나는 현재를 보여준다면, 침전지는 물이 흐르고 머물렀던 산업시설의 기억을 드러내야 한다. 외벽이 여러 시민이 함께 바라보는 개방적인 장면이라면, 침전지는 장소의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내밀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두 공간은 하나의 관람동선과 이야기로 이어져야 한다. 뮤직홀 외벽을 본 시민이 어떤 흐름으로 침전지에 이르고, 어디에서 머물며,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가 분명해야 한다. 공간 콘텐츠의 성패는 개별 장면보다 시민의 발견과 체류, 이동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서 갈린다. 특화거리는 준공이 아니라 운영에서 완성된다 성남물빛정원은 민선 8기 신상진 시정이 장기간 닫혀 있던 옛 하수처리장을 시민에게 돌려준 의미 있는 성과다. 2026년 7월 1일 출범한 민선 9기는 민선 8기에 시작한 공간재생의 성과를 성남의 지속 가능한 문화자산으로 완성해야 하는 시기다. 이제 두물길과 뮤직홀, 미디어파사드와 침전지, 지하공간과 미래 미술관 구상을 하나의 장소 철학 아래 연결해야 한다. 이번 야간콘텐츠도 독립된 사업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시민이 어디에 머물고 어떻게 이동하는지, 빛과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 향후 공간정책의 근거로 축적해야 한다. 첫 공개 후 한 달은 실제 야간 환경과 시민 반응을 점검하는 초기 안정화 기간이어야 한다. 화면의 정합과 밝기, 음향과 관람동선, 야간 생태와 주변 주민의 생활환경을 점검하고 발견된 문제는 곧바로 보완해야 한다. 준공은 행정의 종료일 수 있지만, 상설 콘텐츠에는 운영의 시작일일 뿐이다. 신상진 시장이 내건 '대한민국 기준, 성남'을 문화정책에서도 증명하려면 첫 공개의 박수나 장비의 사양만으로 성과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 이곳에서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지, 시민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미디어아트가 남겨야 할 것은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본 뒤 달라진 장소의 인상이다. 민선 8기가 물빛정원을 열었다면 민선 9기의 평가는 이를 성남의 지속 가능한 문화자산으로 어떻게 완성하느냐에서 시작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03 10:39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디지털 헤리티지, 구축을 넘어 경험으로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국가유산은 과거에 머무는 기억이 아니다.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야 할 시간의 축적이다. 오래된 궁궐과 사찰, 왕경과 성곽, 의례와 기록은 단지 보존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이해하고, 걷고, 머물고, 경험해야 할 공공의 자산이다. 디지털 헤리티지는 바로 그 접점에 있다. 사라진 시간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만나게 하고, 잘 보이지 않던 시간의 결을 데이터와 콘텐츠, 경험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기술은 오래된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유산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앞에 서기보다 의미를 받쳐야 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완성도는 기술의 새로움보다, 그 기술이 유산의 맥락을 얼마나 깊게 살리고 국민의 경험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이 지면에서 디지털 헤리티지를 K-컬처 소프트파워의 관점에서 짚은 바 있다. 당시의 질문이 디지털 헤리티지가 왜 K-컬처의 새로운 소프트파워인가에 있었다면, 지금의 질문은 그 소프트파워가 실제 사업 안에서 어떤 구조로 축적되고 확산되는가에 있다. 디지털 헤리티지는 실제 사업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구축된 데이터와 콘텐츠는 어떻게 국민의 경험으로 이어지는가. 국가유산 디지털 사업의 성과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최근 주목해야 할 흐름은 세 가지다. 「2026년 국가유산 원형 정보자원 통합DB 구축」(엔디에스 컨소시엄: 에프아이솔루션, 엠티데이타, 솔브케이), 「2026년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원천자원 제작 보급」(문화유산기술연구소 컨소시엄: 피씨엔), 그리고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사업」(문화유산기술연구소 컨소시엄: 위프코, 경북연구원, 스코넥엔터테인먼트, 덱스터스튜디오)이다. 얼핏 보면 각각 다른 사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원형DB는 뿌리이고, 원천자원은 줄기이며,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꽃에 가깝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자라고, 줄기가 살아 있어야 꽃이 피어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첫 질문은 결국 '무엇을 얼마나 만들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다. 데이터는 해설과 교육으로 이어져야 하고, 콘텐츠는 전시와 관광, 산업 활용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디지털로 구축된 국가유산은 화면 속에 저장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민이 이해하고 체험하고 다시 사용하는 공공 자산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가유산 원형DB, 보이지 않는 신뢰를 세우는 일 디지털 원형데이터 통합 DB 구축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조용한 사업이다. 화려한 영상이나 실감형 체험처럼 즉각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디지털 헤리티지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공사다. 원형DB는 앞으로 만들어질 국가유산 AI 해설, 실감형 콘텐츠, 디지털박물관, 교육자료, 산업 활용의 기준점이 된다. 국가유산을 디지털로 다루는 일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자료의 양이 아니다. 형태와 구조, 맥락과 출처, 고증과 용어, 메타데이터와 활용 기준이 함께 정리되어야 한다. 많이 쌓아둔 데이터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데이터다. 어디에서 왔고, 어떤 기준으로 정리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올해 원형 정보자원 통합DB 사업은 3차원 정밀 원형데이터 구축에 그치지 않는다. 분산된 원형자원 자료를 수집·정리해 데이터 세트로 구축하고, 메타데이터 표준을 보강하며, 기구축 원형자원을 AI 학습용 데이터로 가공하는 시범 작업까지 포함한다. 원형DB가 단순한 기록 저장소가 아니라 국가유산 AI 서비스와 디지털 행정, 콘텐츠산업의 기반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다. 원형DB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디지털콘텐츠는 결국 데이터 위에서 만들어진다. 데이터의 신뢰가 흔들리면 해설도 흔들리고, 전시도 흔들리며, 산업 활용도 함께 흔들린다. 반대로 기초 데이터가 탄탄하면 이후의 콘텐츠는 훨씬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디지털 원형DB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K-디지털헤리티지의 수준을 결정한다. 원형DB는 보존의 기록이면서 활용의 출발점이고, 확산의 기준이다. 그래서 데이터의 품질은 곧 디지털 헤리티지의 공공성과 산업성을 함께 결정한다. 원형이 흔들리면 활용도 흔들린다. 반대로 원형이 단단하면 콘텐츠는 더 멀리, 더 오래 갈 수 있다. 특히 국가유산은 일반적인 문화콘텐츠와 다르다. 상상력만으로 다룰 수 없고, 기술만으로 완성될 수도 없다. 기록과 고증, 장소성과 역사성, 공공성과 활용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원형DB 구축은 단순한 기술 과업이 아니다. 국가유산을 미래 세대가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원천자원과 신라왕경, 만들어진 것이 쓰이게 하는 일 디지털콘텐츠 원천자원 제작·보급 사업은 구축과 활용 사이에 놓인 다리다. 원천자원은 개별 사업자가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공공형 디지털 자산이다. 교육 콘텐츠, 전시 영상, 실감형 체험, 관광 홍보, 게임과 영상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시 쓰일 수 있다. 핵심은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쓰이게 하는 것'이다. 특히 원천자원 제작·보급 사업은 산업계 수요조사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게임·영화·교육·디자인 분야의 수요를 확인하고, 수요기관 풀을 조성하며, 제작된 3D 에셋을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와 유니티 에셋 스토어, Fab 같은 글로벌 콘텐츠 마켓에 등록하는 구조다. 원천자원은 공공이 만든 자료이지만, 실제 생명력은 민간 창작자가 다시 쓰는 순간 생긴다. 3D 에셋, 고해상도 이미지, 메타데이터, 라이브러리, 유통 채널이 함께 갖춰질 때 원천자원은 단순 자료가 아니라 창작자가 다시 조립하고 응용할 수 있는 공공형 제작 기반이 된다. 잘 만들어진 원천자원은 하나의 완성품이 아니라 여러 콘텐츠로 뻗어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원천자원은 만들어졌을 때보다 실제 현장에서 쓰일 때 정책적 의미가 커진다. 좋은 원천자원은 공공기관의 서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역의 전시관에서, 학교의 교육 현장에서, 콘텐츠 기업의 제작 과정에서, 관광객이 만나는 체험 공간에서 다시 살아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성과는 바로 이런 활용의 장면에서 확인된다.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사업은 이러한 흐름이 국민 체감형 사업으로 확장되는 대표 사례다. 신라왕경은 한국 고대문명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러나 오늘의 경주에서 신라왕경의 위용을 온전히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유산은 터로 남아 있고, 사라진 건축과 도시 구조는 기록과 발굴 성과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올해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사업의 범위에는 황룡사지, 대릉원, 불국사, 석굴암이 포함되어 있다. 사업은 자료수집과 고증, 스토리 기획, 주요 건축물과 유물의 원천오브젝트 제작, 디스커버리·VR 콘텐츠, 공간체험형 디지털콘텐츠, 국내외 전시·홍보·보급까지 이어진다.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은 하나의 영상 제작이 아니라 자료, 고증, 스토리, 공간체험, 보급확산이 결합된 종합형 디지털 헤리티지 사업이다. 디지털 재현은 이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다. 사라진 건축물을 임의로 다시 세우는 일이 아니다. 기록과 고증, 발굴 성과와 학술 연구, 3D 데이터와 실감형 기술을 결합해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정교함만이 아니다. 국민이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경주는 어떤 도시 경험을 얻게 되는가, 학생과 관광객과 산업계는 무엇을 활용하게 되는가가 함께 물어져야 한다. 신라왕경의 디지털 재현은 화면 속 복원이 아니라, 경주라는 도시를 다시 걷게 만드는 경험의 설계여야 한다. 신라왕경을 디지털로 재현한다는 것은 과거의 도시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경주를 다시 읽게 하는 일이다. 기술은 시간을 복원하고, 콘텐츠는 기억을 움직이며, 경험은 장소의 의미를 다시 만든다. 디지털 헤리티지 사업은 이 질문까지 품을 때 결과물을 넘어 경험이 된다. 구축 이후에 드러나는 디지털 헤리티지의 성과 디지털 헤리티지 사업은 구축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구축 이후에 진짜 성과가 드러난다. 얼마나 만들었는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얼마나 쓰였는가, 얼마나 이해되었는가, 누구에게 어떻게 닿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국가유산의 디지털 전환은 결과물의 생산이 아니라 공공 경험의 확장으로 완성된다. 이 지점에서 보급확산은 부수적인 홍보가 아니다. 사업이 끝난 뒤 붙이는 설명 문구도 아니다. 디지털로 구축된 국가유산이 국민 경험, 지역 자산, 산업 가능성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마지막 설계다. 원형DB가 신뢰의 기반이라면, 원천자원은 활용의 자산이고,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은 국민이 체감하는 대표 경험이 되어야 한다. 보급확산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구축된 데이터와 콘텐츠가 다음 전시, 다음 교육, 다음 지역, 다음 산업 활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명 체계와 활용 경로를 남기는 일이다. 성과가 기록되고 분류되고 다시 쓰일 수 있을 때, 디지털 헤리티지는 일회성 결과물이 아니라 다음 사업의 기반이 된다. 세 사업의 성과가 서로 다른 언어로만 설명되면 결과물은 남지만 흐름은 약해진다. 반대로 하나의 방향으로 읽히면 K-디지털헤리티지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데이터가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전시와 교육과 관광으로 이어지며, 지역과 산업이 다시 그 자산을 활용하는 구조가 생긴다. 이때 디지털 헤리티지는 단일 사업을 넘어 국가유산의 미래 전략이 된다. 결국 질문은 단순하다. 사업이 끝난 뒤 무엇이 남을 것인가. 데이터가 남고, 콘텐츠가 남고, 다시 활용될 구조가 남을 때 디지털 헤리티지는 일회성 성과를 넘어 공공 자산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적 수사가 아니다. 기술은 이미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국가유산의 맥락을 어떻게 존중하고, 국민의 경험을 어떻게 설계하며, 지역과 산업의 활용으로 어떻게 확장되는가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성패는 기술의 화려함보다 연결의 완성도에서 갈린다. 국가유산은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만나는 방식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디지털 헤리티지는 데이터를 만들고 콘텐츠를 구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구축에서 활용으로, 활용에서 확산으로, 결과물에서 경험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공공 자산이 된다. 그리고 그때 K-디지털헤리티지는 K-컬처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이 될 수 있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신기술 융합을 바탕으로 지역문화자원을 경험 콘텐츠로 구현하고, 이를 장소의 명소화로 확장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미다스북스에서 펴낸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7.01 14:39이창근 컬럼니스트

[이창근의 헤디트] AI와 창의도시의 융화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산업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AI가 도시의 새로운 언어가 되고 있다. 행정도 AI를 말하고 산업도 AI를 말한다. 문화예술 현장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공예 및 민속예술도 AI라는 시대적 흐름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살펴야 할 대목이 있다. 도시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힘은 기술 그 자체인가. 아니면 오래전부터 도시 안에 쌓여 온 창의성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어가느냐에 있는가. 지난 12일 진주시청 시민홀에서 열린 제11회 유네스코 창의도시 국제학술토론회는 이 화두를 나누는 자리였다. 주제는 'AI와 창의도시'였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AI 시대 민속예술은 어떻게 창의도시의 미래 자산이 되는가'를 발표했다. 발표를 준비하며 오래 붙잡은 생각은 하나였다.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이어지게 할 것인가. AI 시대라고 해서 공예 및 민속예술의 미래가 기술 자체에 달려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래된 예술을 어떻게 기록하고 설명하며 시민과 다시 만나게 할 것인가다. 그리고 그것을 도시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할 것인가다. 기술보다 먼저 전승을 살펴야 한다. 진주는 축적을 가진 도시다 진주는 유네스코 공예 및 민속예술 창의도시다. 이 이름은 단순한 도시 홍보 문구가 아니다. 진주가 자기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언이다. 진주는 국제학술토론회와 국제저널, 공예·민속예술 비엔날레와 보급사업, 창의도시 간 국제교류를 이어 왔다. 포럼은 담론을 남겼고 저널은 도시의 고민을 기록했다. 비엔날레는 창작과 전시의 장을 만들었고 보급사업은 현장 확산의 기반이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쌓인 성과를 연결하고 운영의 체계로 바꾸는 일이다. 창의도시는 행사를 계속 더하는 도시가 아니다. 축적된 자산을 시민의 경험과 도시의 미래로 다시 쓰는 도시다. 진주는 지금 하늘과 땅을 함께 보는 도시가 되고 있다. 한쪽에는 우주항공과 AI라는 미래산업의 축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남강과 진주성, 원도심, 공예 및 민속예술이라는 오래된 시간의 축이 있다. 하나는 도시의 속도를 만들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표정을 만든다. 미래도시는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높이 오르는 힘과 오래 머무는 힘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주항공과 AI가 진주의 속도라면 공예 및 민속예술은 진주의 표정이다. 속도만 있는 도시는 스쳐 지나가고 표정만 있는 도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진주가 더 강해지려면 두 힘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AI는 전통의 쓰임을 넓히는 도구다 진주의 AI는 미래산업의 언어에만 머물 필요가 없다. 우주항공과 첨단산업을 밀어 올리는 기술의 언어가 있다면 창의도시 안에서 공예 및 민속예술을 기록하고 해설하며 시민 경험으로 이어주는 방식도 있어야 한다. 기술을 먼저 앞세우고 전통을 뒤에 붙이면 오래가지 못한다. 전승의 필요를 먼저 보고 그 필요를 돕는 자리에 AI를 두어야 한다. 공예의 제작 과정, 도구의 쓰임, 재료의 차이, 장인의 손동작, 민속예술의 장단과 동선, 구술과 공연 맥락은 흩어지기 쉽다. 이를 영상과 음성, 사진과 문서, 3차원 자료로 축적하고 AI가 찾기와 분류를 도우면 자료는 다음 쓰임을 얻는다. 장인의 말 한마디, 전승자의 동작 하나가 다음 세대의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 해설도 달라질 수 있다. 공예품 하나를 보더라도 시민은 재료와 기법, 문양과 쓰임을 알기 어렵다. 민속예술도 마찬가지다. 장단의 변화, 손끝의 방향, 의상과 동선의 의미는 설명이 있어야 보인다. AI는 어린이에게는 이야기로, 관광객에게는 짧은 안내로, 연구자에게는 자료 기반 설명으로 풀어낼 수 있다. 체험도 넓어질 수 있다. 공예는 손으로 배우는 예술이고 민속예술은 몸으로 이어지는 예술이다. AI가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민이 더 쉽게 다가가도록 도울 수는 있다. 공예 및 민속예술의 위기는 AI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반복 재현 중심의 전승 구조, 젊은 세대와의 접점 약화, 공연과 축제에 한정된 활용, 전승자와 장인 개인에게 집중된 책임은 오래전부터 현장에 있던 문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기술 도입의 선언이 아니라 전승 구조의 재설계다. 2006년 당시 진주검무를 비롯한 중요무형문화재 모션캡처 기록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형의 몸짓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그 화두는 지금도 유효하다. 기록은 보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의 쓰임이 설계될 때 비로소 도시 자산이 된다. 창의도시는 장면을 설계하는 도시다 창의도시는 새것만 만드는 도시가 아니다. 오래된 것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도시다. 공예 및 민속예술도 무대나 전시장에서만 머물면 오래 남기 어렵다. 도시의 공간과 만나고 시민의 걸음과 맞물릴 때 더 오래 기억된다. 진주의 경우 진주성, 남강, 원도심, 야간관광 동선은 중요한 기반이다. 공예 및 민속예술이 이 동선과 만날 때 그것은 프로그램을 넘어 도시 경험이 된다. 이 지점에서 공간콘텐츠의 관점이 필요하다. 전통예술을 무대에 올리고 공예품을 전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디에서 만나게 할지, 어떤 길로 걷게 할지, 어떤 장면으로 기억하게 할지 설계해야 한다. 도시의 공간은 배경이 아니라 콘텐츠의 일부다. 진주의 원도심은 앞으로 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이다. 청년이 머물고 문화가 흐르고 시장과 골목이 다시 살아나려면 시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안에 진주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공예 및 민속예술은 원도심을 다시 걷게 하는 가장 진주다운 언어가 될 수 있다. 진주의 문화산업은 외부에서 새롭게 가져오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진주 안에 있는 자산을 어떻게 오늘의 콘텐츠로 다시 쓰느냐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예는 물건이 아니라 손의 기억이다. 민속예술은 공연이 아니라 공동체의 몸짓이다. 이것을 잘 기록하고 해설하고 도시 공간 안에 배치하면 교육이 되고 관광이 되고 축제가 되고 산업이 된다. 문화산업 생태계는 거대한 시설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은 장면들이 이어질 때 만들어진다. AI는 도구이고 도시는 운영이다 진주의 과제는 분명하다. 보존에서 관리와 활용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전승자 개인에서 전승 생태계로 나아가야 한다. 행사에서 연중 운영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예 및 민속예술, 진주의 역사 경험을 도시 브랜드의 앞줄에 세워야 한다. 자료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설을 어떻게 갱신하며 학교 교육과 관광 동선, 국제교류에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지도 함께 설계해야 한다. 이미 가진 자산이 시민의 배움과 관광객의 체류, 국제교류 속에서 반복적으로 쓰이게 해야 한다. AI는 답이 아니다. 도구다. 창의도시의 미래는 기술의 양보다 도시가 자기 문화를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지속시키는 제도에 달려 있다. 진주의 미래는 하늘로만 열리지 않는다. 하늘을 여는 산업이 있고 땅을 다시 걷게 하는 문화가 있으며 밤을 머물게 하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 우주항공과 AI가 진주의 성장축을 만든다면 유네스코 창의도시 '공예 및 민속예술'은 진주의 정체성과 체류의 이유를 만든다. 도시 발전의 힘은 거창한 구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자산을 알아보고 그것을 시민의 경험으로 만들고 산업과 교육, 관광으로 연결하는 실행에서 나온다. 창의성은 도시의 장식이 아니라 도시를 움직이는 방법론이어야 한다. 진주의 공예 및 민속예술 그리고 오래된 장소의 기억이 도시의 이야기로 다시 쓰이고 시민의 걸음으로 되살아날 때, 창의도시 진주는 자기 이름에 걸맞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공간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 지역문화자원을 경험 콘텐츠와 디지털 공간으로 구현하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는 경관연구소 아랑과 함께 도시장면 설계팀 '명경(名景)'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2026.06.17 10:08이창근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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