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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적 오디세이, '까만 인절미'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2026년 여름, 나는 아주 흥미로운 두 작품을 마주했다. 하나는 거대한 바다를 가르며 귀환하는 고대 영웅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한 여인이 순교를 통해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한쪽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강원도립극단의 우리소리극 《까만 인절미》가 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순간, 뜻밖의 접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대도 세계도 다른 두 이야기가 놀랍도록 닮은 방식으로 긴 여정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한 시대의 기억을 건네던 사람. 바로 '음유시인'의 목소리로 말이다. 오래전 사람들이 아직 책을 갖지 못했던 시절 이야기는 글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한 사람이 노래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 다음 세대가 다시 노래했다. 영웅의 모험과 전쟁, 사랑과 죽음, 인간의 운명은 그렇게 공동체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역시 그런 구전의 세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지만, 그 뿌리에는 이야기를 노래로 전하던 음유시인이 있었다. 한국에도 이러한 음유시인이 있다. 바로 소리꾼이다. 소리꾼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자가 아니다. 서술자이면서 등장인물이 되고, 때로는 시대를 바라보는 증인이 된다. 자신의 목소리와 몸짓, 고수의 북과 추임새를 통해 한과 신명을 전달하며 기나긴 이야기와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사람들이다. 《까만 인절미》가 불러내는 인물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한가운데 놓인 여인 이성례다. 남편의 순교와 연이은 어린 자식의 죽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배교(背敎),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고통과 죄책감이 그녀의 삶을 관통한다.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이제, 나란히 선 두 음유시인의 소리를 따라 긴 여정에 올라 보자. 《오디세이》의 음유시인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몇 개의 단어만으로 거대한 여정의 좌표를 찍는다. 이제 그 음유시인의 방식처럼, 몇 개의 키워드를 따라 《까만 인절미》의 새로운 풍경을 펼쳐보려 한다. SONG - 이야기를 여는 소리 《오디세이》의 시작을 기억하는가. “A Face. A Fleet. A War. A Man. A Thought. A Trick.”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음유시인은 이 여섯 개의 단어를 차례로 던진다. 짧고 강렬한 음성과 고대 그리스의 6음보 운율을 현대적인 리듬으로 풀어낸 방식은, 오래된 서사시가 소리로 먼저 존재했음을 일깨운다. 《까만 인절미》의 시작 역시 소리다.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주기도문이다. 판소리의 어법으로 작창(作唱)된 주기도문은 힘 있는 중모리장단을 타고 흐르며 뜻밖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나아가 주기도문과 함께 울리는 열두 대의 북소리는 마치 《오디세이》 속 음유시인의 노래가 지팡이의 두드림을 만나 힘을 얻듯, 목소리에 물리적인 울림을 더한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느 순간 하나의 경건한 의식으로 확장된다. 그 순간, 낯선 종교의 언어는 한국의 소리가 된다. 이 주기도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모두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삶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기도로, 작품의 세계관을 여는 서곡이 된다. 두 번째는 자식을 잃은 여인의 모성이 신앙과 충돌하며, 한맺힌 절규로 점철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기도는 비로소 귀향의 노래가 된다. 삶의 고통과 갈등을 지나 죽음 너머 본향으로 향하는 순간, 주기도문은 교리가 아니라 소리가 되고, 소리는 모두를 진동시키는 울림이 된다. 세 번의 주기도문은 그렇게 이성례의 긴 여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SONG'은 단순히 노래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기억을 불러내고, 고통을 토해내며, 마침내 한 인간을 귀향으로 이끄는 하나의 긴 여정인 것이다. SEA - 폭풍을 건너는 두 개의 오디세이 《오디세이》에는 바다가 있다.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는 폭풍과 괴물, 유혹을 통과하며 이타카를 향한다. 눈에 보이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귀환의 길이다. 그런데 《오디세이》라는 렌즈를 통해 《까만 인절미》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성례가 건너는 바다는 실제의 바다가 아니라 마음속의 폭풍이다. 그녀에게는 남편 최경환의 죽음이 있고, 어린 막내의 죽음이 있다. 살아남은 자식들이 있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신앙을 부정했던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 뒤에 따라온 죄책감과 고통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외부의 바다를 건넌다면, 이성례는 내면의 바다를 건넌다. 이렇게 바라보는 순간, '오디세이'는 더 이상 특정한 영웅의 모험담에 머물지 않는다. 한 인간이 겪어내는 긴 여정,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오디세이는 《까만 인절미》에서 '귀향'이라는 한국적 정서로 이어진다. 한(恨). 혼(魂). 해원(解冤).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한국의 정서에서 돌아감은 흩어진 혼을 거두고 오래된 한을 풀어내는 해원에 가깝다. 그렇게 이성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자 오래된 한이 비로소 풀리는 해원의 순간이 된다. LOVE - 마지막에 남는 사랑 그렇다면 긴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폭풍과 죽음의 위협을 지나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했을 때,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오래된 개 아르고스다. 오랜 세월 주인을 기다린 아르고스는 그의 귀환을 알아본 뒤, 더 이상 그를 맞이할 힘조차 남기지 못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둔다. 거대한 전쟁과 신들의 분노, 수많은 모험으로 가득했던 서사의 마지막이 한 생명과 한 인간 사이에 남아 있던 사랑으로 수렴하는 순간이다. 《까만 인절미》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이성례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사건들. 박해와 순교, 신앙과 배교, 모성과 죄책감.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가 마지막에 모이는 곳은 의외로 까만 인절미 한 조각이다. 아이의 손때가 묻은 그 인절미는 거대한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끝내 놓지 못했는지를 조용히 품고 있다. 거대한 전쟁과 신들의 분노로 가득했던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늙은 개 한 마리의 눈빛으로 남듯, 《까만 인절미》의 박해와 순교라는 거대한 역사 역시 마지막에는 한 조각의 인절미가 품은 사랑으로 압축된다. 아르고스와 까만 인절미.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놓인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사물이지만, 두 작품은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긴 여정의 끝에서 인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거대한 업적이 아니라, 끝까지 남겨진 사랑이라는 것. BARD -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 그렇다면 이 긴 여정은 어떻게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도착했을까. 답은 다시 소리다. 《오디세이》의 음유시인을 연기한 래퍼 트래비스 스캇은 2026년의 음악적 언어와 새로운 운율로 오래된 영웅의 이야기를 다시 노래한다. 《까만 인절미》의 소리꾼 박애리 역시 오래된 순교의 역사를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작창의 소리로 오늘의 무대 위에 다시 세운다. 고전과 역사 속에 머물 뻔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각자의 시대가 가진 언어와 감각을 입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 결과 《까만 인절미》에서 이성례는 더 이상 기록 속에 남겨진 순교자의 이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과 모성 사이에서 신음하고, 사랑 앞에서 흔들리며, 끝내 본향길에 오른 한 인간의 얼굴로 오늘 우리 앞에 선다. 효율과 실리를 좇는 시대에, 이성례의 선택은 어쩌면 지나치게 미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미련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오래 바라보아야 할 인간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그렇게 지나가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끝까지 지켜냈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는가. 이런 이야기가 오래도록 불리고 회자될 때, 비로소 우리의 여정에도 한 줄기 사유가 남을 것이다. 필자 최한이 최한이는 전통과 현대를 노래하는 국악 보컬리스트다. 초등학생 시절 판소리에 재능을 보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발탁됐고, 국립국악중·고를 거쳐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2012년 창작국악 신진 등용문인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켜켜이 쌓인 전통의 숨결을 바탕으로, 크로스오버와 월드뮤직, 방송과 무대를 넘나들며 판소리의 동시대성과 문화적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MBN , tvN , KBS 등에 출연했으며, 2025년 12월부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판소리와 창작국악, 한류를 음악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한다.

2026.09.09 10:08최한이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새해 여는 소리, 판소리 엔진

'문화엔진'은 우리 문화의 가치 재창출을 위해 칼럼니스트의 비평적 시각과 기자의 보도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는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와 지디넷코리아 기자가 함께 집필하며, 독자에게 문화정책·콘텐츠산업·예술현장에 대한 새 소식을 전하고 인사이트를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K-컬처가 미래산업의 엔진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천개우주 하늘이요 지개조축 땅생길제 국태민안 신년 새해 맞이하여 건구 건명 여러분들 만사가 대길하고 백사가 여일하고 마음과 뜻과 잡순 대로 소원 성취 발원이라. - 비나리 中 - 연말연시(年末年始).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고유의 소리로 복을 빌고 액을 막았다. 마을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소리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되었다. 2025년 을사년의 마지막, 푸른 뱀이 동면을 준비하는 이때. 과거의 소리에서 미래의 답을 찾아본다. 600년 도읍 서울은 진산인 북한산을 시작으로 북쪽에 백악산, 남쪽에 목멱산 좌청룡 낙산과 우청룡 인왕산으로 내(內)닫음하는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이렇듯 명산이 많은 우리나라 산세를 흥미롭게 담아낸 소리가 있는데, 바로 판소리 춘향가 중 '산세타령'이다. 판소리는 창자가 고수의 북 장단과 추임새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고, '발림'을 곁들여 풀어내는 1인 음악극이다.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8시간에 걸친 완창(完唱)은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바 있다. 숏폼(short-form)의 시대다. 오늘은 대목 하나를 짚어 함축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판소리 춘향가 中 산세타령 [아니리]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사람도 산세 따라 나는 법이다. 내가 이를 터이니 들어보아라. [자진모리] 산세(山勢)를 이를게 네 들어라, 산세를 이를게 네 들어. 경상도 산세는 산이 웅장허기로 사람이 나면은 정직허고, 전라도 산세는 산이 촉(矗) 사람이 나면 재주 있고, 충청도 산세는 산이 순순(順順) 사람이 나면 인정 있고, 경기도를 올라 한양 터 보면 경운동 높고, 백운산 떴다. 삼각산 세 가지 북주가 되고, 삼각산이 떨어져 인왕산이 주산이요, 종남산(終南山. 남산)이 안산(案山)인디, 동작이 수구(水口)를 막기로, 사람이 나면 선할 디 선하고, 악하기로 들면 별악지상(別惡之象)이라. 양반 근본을 니 들어라. 부원군 대감이 자기 외삼촌이요 이조판서가 동성 조부님이요 시직(時直) 남원 부사가 당신 어르신이라 네가 만일 아니 가고보면 내일 아침 조사(朝仕) 끝에 너희 노모를 잡어다 책방 단장(短墻) 아래 난장형벌에 주릿대 방맹이 굵은 뼈 부러지고 잔뼈 으스러져 얼게미 채궁이 진가리 새듯, 아주 살살 샐 것이니 갈테면은 가고 말테면 마라 떨떨거리고 나는 간다 화창한 봄날, 남원 광한루에 나온 이도령은 그네 타는 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산란한 마음에 방자에게 속히 춘향을 데려오라 분부하고 방자는 총총 건너가 이를 전한다. 그러나 도도한 춘향이 쉽게 따라갈 리 만무하니 조급해진 방자는 팔도의 산세와 풍수를 이르며 따라갈 것을 종용한다. 이 대목은 극 중 명품 조연에 해당하는 방자의 소리로, 초반부 눈대목으로 꼽힌다. '인걸은 지령'. 좋은 땅에 훌륭한 인물이 난다는 복선적 '아니리'로 대목이 시작된다. 시작된 소리는 자진모리 장단에 매우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자진모리는 주로 방대한 사설을 촘촘히 엮거나 재치와 해학의 긴장감을 조성할 때 사용되는데, 중모리, 진양조와 같은 여유 있는 흐름과 대비된다. 여기서 장단(長短)이란 서양음악의 박자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4/4, 6/8 같은 수학적 의미를 넘어 잦게, 빠르게 몰아간다는 직관적 악상(樂想)을 내포한다. 아니리와 소리의 요소가 갖춰졌으니, 이제 본 사설을 살펴보자. '산세타령'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방자표 풍수(風水)이다. 춘향을 겁주기 위해 지역의 산세를 설명하며 이를 인물됨으로 비유하는데, 경상도는 그 산세가 웅장하여 사람이 태어나면 매우 정직하고 전라도는 산이 뾰족하니 재주 있는 사람이 많으며 충청도는 산이 온순함에 사람이 나면 인정이 넘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경기도에 올라 바라본 한양은 어떠한가?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가 높이 솟아 그 줄기가 주산으로 이어지니 앞 남산까지 기세가 등등하고 동작이 수구를 막아 명당을 이루니 그야말로 선악이 공존하는 지세. 이에 사람이 나면 선할 때 선하나 악하기로 들면 끝을 알 수 없는 별악지상의 땅이라. 경상·전라·충청을 향한 칭찬 일색의 흐름 속에서, 서울의 산세는 유독 급발진한다. 이어지는 장황한 이도령 집안 내력은, 따라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종용(慫慂)의 정점을 이룬다. 방자는 왜 이도령의 고향도 아닌 서울을 종용의 장치로 사용하였을까? 춘향전 속 이도령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나, 남원 부사를 지낸 부친과 함께 남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후 급제해 암행어사가 된 그는, 유년기의 경상도, 소년기의 전라도, 입신한 청년기의 한양을 오가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통과했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혼란의 시기를 지낸 방자의 사설을 따라 서울을 다시 바라보니, 남산 아래 인왕산 줄기가 마치 용의 형상한 진짜 별악지상의 땅이 보였다. 바로 용산(龍山). 용산은 이도령이 태어난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생을 마감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군 지휘소로, 그리고 강점기 조건총독부와 일본군의 본진이 자리한 치열한 곳이다. 동시에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춘향을 보러 내려간 길목이기도 하며, 흥보가 속 제비가 박씨를 물고 지나간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방자는 종용을 말미암아 시류를 담은 풍수로 해학을 전한 것 아닐까. 이처럼 우리 소리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사유와 유희가 담겨 있다. 판소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물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관통하는 문화의 엔진이다. 새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별악지상이 아닌 선한 서울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2026 병오년 붉은 말의 해, 산세타령의 힘찬 자진모리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글 = 최한이 국악 보컬리스트 필자 최한이: 전통과 현대를 노래하는 국악 보컬리스트다. 초등학생 시절 판소리에 재능을 보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발탁됐고, 국립국악중·고를 거쳐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2012년 창작국악 신진 등용문인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켜켜이 쌓인 전통의 숨결을 바탕으로, 크로스오버와 월드뮤직, 방송과 무대를 넘나들며 판소리의 동시대성과 문화적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MBN , tvN , KBS 등에 출연했으며, 2025년 12월부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판소리와 창작국악, 한류를 음악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한다.

2025.12.29 10:18최한이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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