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운 닷밀 대표 "AI도 직접 체험하는 재미는 대체 못 해"
인공지능(AI)이 콘텐츠 제작과 소비 방식을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닷밀은 오히려 오프라인 경험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온라인에서 대체 가능한 콘텐츠는 늘어나지만, 사람이 특정 장소를 찾아 직접 보고, 걷고, 만지고, 몰입하는 경험은 쉽게 대체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정해운 닷밀 대표는 사업 방향을 “본질적으로는 재미있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테마파크, 로케이션 베이스 엔터테인먼트(LBE) 등으로 부를 수 있지만 핵심은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데 있다는 의미다. 정 대표는 “AI를 봤을 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대체'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며 “AI가 무엇을 대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오프라인에서 사람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재미는 대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사람의 감각을 다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이 오프라인 경험 사업을 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닷밀이 최근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는 성장 축은 글로벌 IP와 해외 진출이다. 정 대표는 글로벌 IP를 활용해 새로운 공간과 즐길 거리를 만드는 것을 올해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시장으로는 일본과 북미를 우선 검토하고 있으며 이후 홍콩과 싱가포르 등으로 확장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가 IP 제휴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닷밀이 자체 콘텐츠와 IP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대중이 처음부터 이를 알고 찾아오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이미 팬덤과 인지도를 가진 글로벌 IP를 닷밀의 공간 연출 방식과 결합하면 IP 보유사와 닷밀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 대표는 “자체적으로 만드는 콘텐츠와 IP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닷밀의 IP를 아는 것은 아니다”라며 “유명한 글로벌 IP를 우리가 가진 표현 방식에 붙이면 IP 홀더도 우리도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IP 전시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과거에는 캐릭터 이미지나 등신대를 세워두고 관람객이 사진을 찍는 방식이 많았다면, 이제는 관람객이 작품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경험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대표 사례는 7월 4일 개막 예정인 원피스 IP를 활용한 전시다. 닷밀은 이 전시를 일반 전시장이 아니라 기존에 운영 중인 워터월드 공간에서 선보인다. 워터월드는 실내 워터파크였던 공간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전시 공간으로, 파도풀과 유수풀 등 물의 요소가 남아 있다. 닷밀은 유수풀의 수위를 발목 높이로 낮춰 관람객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과 접촉하며 전시를 경험하도록 설계했다. 정 대표는 “비어 있는 전시장에 원피스 속 해적선이 놓여 있는 것과 파도풀이 있는 공간에서 실제 물을 맞으며 이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라며 “원피스가 해적들의 이야기인 만큼 물과 결합했을 때 몰입감이 훨씬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닷밀이 IP 제휴를 단순한 유명세 활용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IP의 인지도를 활용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해당 IP를 좋아하는 관람객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는 것이다. 정해운 대표는 “유명세에 올라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IP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서 최상의 만족을 느꼈으면 한다. 그게 가장 큰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IP 보유사 입장에서 닷밀과 협업할 때 얻는 강점이 무엇일지를 묻자 즉시 “우리가 만든 것은 다르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존 전시 공식에 맞춰 캐릭터 이미지를 붙이고 포토존을 설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간의 특성과 IP 세계관을 결합해 관람객이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는 설명이다. 닷밀이 협업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IP 분야는 애니메이션과 영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 대표는 식품 브랜드, 지역 특산물, K팝 등도 모두 IP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기존 해외 전시를 수입해오는 것도 하겠지만 직접 이를 만든다면 공간 특성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선보이는 공간들은 해외 진출을 위한 쇼케이스 성격도 갖는다. 정 대표는 “한국 시장에 만드는 것들도 전 세계를 향한 쇼케이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검증된 공간 연출과 IP 결합 모델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에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지역 관광지로 사업 무대를 넓히는 것도 닷밀의 주요 전략이다. 수도권이나 대형 상업시설이 아니더라도, 지역에는 고유한 이야기와 장소성이 있고 지자체 역시 관광객을 끌어올 새로운 콘텐츠를 필요로 한다. 정 대표는 지방 사업이 늘어나는 이유로 지자체의 수요를 꼽았다. 그는 “지자체에서 러브콜이 많다”며 “사람을 더 끌어오고 싶어 하고, 지역의 색을 살린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싶어 하는 요청이 많다”고 말했다. 닷밀이 지역 콘텐츠를 기획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통영 디피랑은 동피랑 벽화마을과 연결된 스토리텔링에서 출발했다. 동피랑의 벽화가 2년마다 새로 그려진다는 점에 착안해, 지워진 벽화가 밤이 되면 디피랑으로 넘어온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빛을 들고 지워진 벽화를 디피랑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맡는다. 강화도에 선보일 예정인 대형 베이커리 카페 '강화호미'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단순한 베이커리 카페가 아니라 강화도와 연결된 단군신화에서 출발한 스토리텔링형 공간으로 기획됐다. 사람이 되지 못하고 뛰쳐나간 호랑이가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다 빵집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공간 콘셉트로 삼고, 여기에 캐릭터와 미디어아트 요소를 더했다. 정해운 대표는 “강화호미는 빵을 먹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캐릭터와 이야기가 담긴 대형 베이커리 카페다”라며 “안에는 미디어아트와 여러 기술이 들어가 있어 먹는 것에 더해 재미있는 요소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천 시립박물관에 조성한 오삼아지트 역시 지역 캐릭터와 공공시설을 결합한 사례다. 박물관이 문을 닫은 뒤 버튼을 누르면 벽이 내려오고 장비가 켜지면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는 구조다. 김천의 반달가슴곰 캐릭터 '오삼이'를 활용해, 오삼이가 숨겨둔 김천의 보물을 찾는다는 콘셉트로 구성했다. 정 대표는 개장 당시 어린이날 주간에 하루 3000~4000명이 찾을 정도로 반응이 컸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지역의 설화부터 전체를 리서치하고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짧게는 6개월, 길면 1년 정도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닷밀은 지역 사업에서 단순 미디어파사드보다 한 단계 발전한 야간 관광 콘텐츠를 강조한다. 건물 외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만으로는 유의미한 관광 상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닷밀이 지자체에 제안하는 대표 프로그램은 나이트워크와 애프터 아워즈다. 나이트워크는 저녁이 되면 발길이 뜸해지는 공원, 숲길, 식물원 등에 야외형 미디어아트를 조성해 관람객이 티켓을 끊고 들어가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대표 사례는 통영 디피랑이다. 디피랑은 개장 이후 대한민국 관광대상을 받았고, 통영의 저녁 시간대 상권과 숙박에도 영향을 줬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강릉 하슬라는 나이트워크에서 한 단계 진화한 나이트스테이지 성격의 프로젝트다. 단순히 걷고 감상하는 방식보다 무대와 쇼의 느낌을 강조한 형태다. 애프터 아워즈는 낮에 운영을 마친 기존 공공시설을 밤 시간대에 새로운 콘텐츠 공간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지역 사업에서 중요한 또 다른 목표는 체류형 관광이다. 낮에 잠시 보고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밤까지 머물고 지역 상권과 숙박으로 이어지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정 대표는 닷밀이 국내 체류형 관광과 야간 관광의 가능성을 보여준 선도 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체류형 관광과 야간 관광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 닷밀이라고 생각한다”며 “디피랑이 실제 효과를 보는 것을 지자체들이 봤고, 지금은 많은 지자체가 디피랑을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아둘 콘텐츠를 계속 생각하고 시도하고 있다”며 “이 분야에서는 우리가 파이오니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이야기와 공간 조건을 콘텐츠로 바꾸는 작업은 기획과 제작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닷밀이 AI를 기회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가 온라인 콘텐츠를 대체하는 흐름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공간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 대표는 “AI가 발전해서 오히려 혜택을 보는 회사가 닷밀이다”라며 “AI가 발전할수록 우리가 공간을 만드는 비용은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여러 명이 며칠 동안 렌더링해야 했던 작업도 지금은 스토리와 스크립트를 잘 짜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활용은 제작 효율화에 그치지 않는다.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각자 원하는 룩과 콘셉트를 빠르게 뽑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빠르게 시뮬레이션하며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됐다. 정 대표는 “기획자들에게 비서가 하나씩 붙은 것과 같다”며 “기획자들의 폼도 훨씬 올라왔고, 리서치나 문서 작업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던 일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정해운 대표가 보는 닷밀의 경쟁력은 기술 자체보다 기술을 활용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에 있다. AI로 제작 과정은 더 효율화하고, 글로벌 IP와 지역의 장소성은 오프라인 공간 안에서 더 강한 경험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다. 온라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닷밀이 오히려 오프라인 경험의 프리미엄을 말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