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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AI의 빈칸, 문화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9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소 이례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인공(Artificial)'이라는 말에는 가짜 같은 느낌이 있다며, 앞으로 미국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이를 '슈퍼 인텔리전스(SI)'라는 더 정확한 용어로 바꾸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발언은 일주일 뒤 미국 빅테크 수장들이 나란히 배석한 자리에서 행정명령으로 공식화됐다. 그로부터 불과 보름여 뒤, 중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AI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10월 16일 중국 상무부와 과학기술부는 40개 기술을 수출통제 대상에 새로 추가하는 안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23개가 AI 관련 기술이었을 뿐 아니라 AI 모델의 가중치와 소스코드까지 통제 범위에 포함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한쪽은 이름을 새로 붙이는 방식으로, 다른 한쪽은 문을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두 장면이 가리키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AI를 무엇이라 부를지 정하는 일이 담론의 주도권과 맞닿아 있고 AI 모델이 국경을 넘나드는 전략 자산으로 다뤄지는 지금, AI는 더 이상 기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권력과 주권의 문제로 옮겨 가고 있다. 각국이 앞다투어 AI를 '우리 것'으로 확보하려는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최근 자주 회자되는 '소버린 AI(Sovereign AI)'라는 개념 역시 AI를 자국의 통제 아래 두려는 이러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GPU와 파라미터로는 채울 수 없는 것 소버린 AI는 한 국가가 자국의 인프라와 데이터, 인력을 기반으로 AI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킨다. 영국이 5억 파운드 규모의 소버린 AI 펀드를 조성하고, 칠레가 중남미의 언어와 문화를 반영한 오픈소스 모델을 개발하며, 대만이 자국 모델을 육성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민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데, 독일의 AI 기업 알레프 알파는 10월 초 '소버린'을 표방한 모델 '콜리브리(Kolibri)'를 공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다만 '소버린'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모델이 공개된 직후 해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모델의 성능보다 이 용어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이 더 오래 이어졌다고 하는데, 캐나다 기업과 합병을 추진 중인 회사의 모델을 과연 소버린이라 부를 수 있는지, 중국 모델보다 성능이 낮은데도 굳이 채택할 이유가 있는지가 주된 쟁점이었다. 무엇이 소버린인지는 물론, 그것이 비용을 감수할 만한 가치인지에 대해서조차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논쟁과는 별개로 소버린 AI를 향한 각국의 행보는 빨라지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서 SK텔레콤 컨소시엄은 5190억 개의 파라미터(AI가 학습을 통해 조정하는 내부 변수)를 갖춘 대규모 모델을 선보이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특성을 깊이 반영하겠다는 목표를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소버린 AI를 다룬 보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논의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확보한 GPU의 수량과 파라미터 규모, 투입 예산, 데이터센터의 전력 용량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정량 지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소버린 AI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때 안보와 산업 경쟁력 못지않게 자주 거론되는 근거는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AI'다. 그럼에도 정량 지표가 주도하는 논의 속에서 '문화'는 선언적 목표로 언급될 뿐 그 실체는 여전히 비어 있으며, 무엇을 우리 문화로 규정할 것인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지, AI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국가 차원의 의제로 다뤄지기보다 일부 연구자와 기관의 몫으로 남아 있다. 정부도 국가대표 AI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한국어 벤치마크(AI의 성능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평가하는 표준 문제 세트)를 구축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을 보면 맞춤법이나 방언과 같은 언어 능력 평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며, 문화적 이해의 깊이는 아직 독립된 평가 축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한국어를 잘하는 AI와 한국 이해하는 AI는 다르다 AI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해서 한국 문화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 간극은 이미 여러 조사와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올해 3월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는 주요 생성형 AI가 한국 문화를 어떻게 재현하는지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경복궁을 그려 달라는 요청에 어떤 AI는 황금색과 청록색으로 채색한 중국식 궁궐을 내놓았고 또 다른 AI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판소리 장면에는 중국 경극의 요소가 뒤섞이고 아리랑의 배경에는 일본식 홍등이 내걸렸다.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저마다의 고유한 모습으로 구분하지 못한 채 막연한 '동양풍'으로 뭉뚱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계는 시각적 재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어로 묻고 답하는 텍스트의 영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국 문화 맥락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한 'KULTURE Bench' 연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한국어 특화 모델조차 관용 표현 문제의 정답률이 69% 수준에 머물렀고, 시(詩) 문제에서는 최고 점수도 46%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한국의 미신을 소재로 AI의 문화 추론 능력을 평가한 '눈치 벤치(Nunchi-Bench)' 연구 역시, AI가 미신의 내용은 대체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실제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한국어 문장을 매끄럽게 생성하는 능력과 그 말에 담긴 역사와 정서, 상황의 결을 읽어 내는 능력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시아 9개 언어의 문화 편향을 측정한 'Camellia' 연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결과가 나왔다. 비교 대상이 된 다국어 모델 가운데 한국 문화 맥락에 가장 잘 적응한 모델은 메타나 구글 같은 서구 빅테크의 모델이 아니라 중국 기업 알리바바가 만든 큐원(Qwen)이었는데, 이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기업의 규모나 명성보다 무엇을 어떻게 학습했느냐에 좌우된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소버린 AI를 통해 우리가 지키려는 것이 모델의 국적인지, 아니면 그 안에 담길 문화의 맥락인지를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물음은 유네스코가 제기해 온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유네스코는 AI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학습되며 활용되느냐에 따라 특정 문화의 서사와 표현 양식이 지배적 위치를 거듭 재생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 살펴본 '동양풍'의 혼동 역시 단순한 기술적 오류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가 풍부한 문화가 그렇지 못한 문화를 대신해 말하게 되는 구조적 문제의 한 단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보다, 그 데이터에 어떤 맥락을 담아 설계하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몇몇 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국악원은 국악 음원에 장르와 악기, 장단, 표현 기법 같은 전문 정보와 문화적 맥락을 덧붙이는 가공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데이터는 오는 12월 공공데이터포털을 통해 AI 학습용으로 처음 개방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반크와 함께 청년들로 구성된 '글로벌 AI 문화유산 홍보대사'를 운영하며, 생성형 AI가 만들어 낸 문화유산의 오류를 찾아내고 이를 바로잡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두 사례는 각각 데이터에 맥락을 입히는 일과 AI의 결과물을 문화의 눈으로 검증하는 일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제기한 물음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아직 일부 분야와 개별 기관의 차원에 머물러 있으며, 소버린 AI를 개발하는 국가 사업과 어떻게 맞물릴지는 분명하지 않다. 빈칸을 채우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지난 9월 국내 한 관광단지의 미디어월에서는 중국을 소개하는 화면 속 중국풍 복장에 '한복(HANBOK)'이라는 설명이 붙어 논란이 일었다. 운영 기관은 시운전 과정에서 발생한 송출 오류라고 해명했지만, 온라인에서는 AI로 제작한 콘텐츠를 검수 없이 내보낸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이 장면은 AI가 문화를 다룰 때 어디서 빈틈이 생기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는 AI를 만드는 단계로, 처음부터 우리 문화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AI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틀린 결과를 내놓기 마련이다. 다른 하나는 AI의 결과물을 쓰는 단계로, 그 결과물이 우리 문화에 부합하는지를 가려낼 눈이 없다면 오류는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공개되고 만다. 두 빈틈 가운데 이번 사례에서 먼저 드러난 것은 쓰는 단계의 빈틈이다. 오류가 세상에 나가기 직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은 결과물을 검토하는 사람의 눈이다. AI가 그려 준 경복궁이 정말 경복궁인지, 한복이 정말 한복인지를 판단하는 안목은 어떤 모델도 대신 길러 주지 않는다. 그 눈은 결국 사람이 길러야 한다. 다만 사람의 눈만으로 모든 오류를 걸러 낼 수는 없다. AI가 쏟아 내는 방대한 결과물을 일일이 확인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더 근본적인 해법은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함께하는 데 있다. 이처럼 어느 한 단계만으로는 빈틈을 온전히 메울 수 없는 만큼, 소버린 AI의 빈칸을 채우려면 만드는 단계와 쓰는 단계 모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하는데, 앞의 두 가지는 만드는 단계에, 마지막 하나는 쓰는 단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첫째, 소버린 AI를 평가할 때 '문화 이해'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소버린 AI를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모델의 규모와 성능 순위에 쏠려 있지만, AI가 한국어의 관용 표현과 시, 역사적 맥락을 얼마나 정확히 읽어 내는지, 그리고 한국 문화를 다른 나라의 것과 혼동하지 않는지는 이러한 지표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를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문화 이해 지표'를 평가의 한 축으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자원은 이미 적지 않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함께 평가하는 CLIcK, 앞서 살펴본 KULTURE Bench와 같은 연구용 벤치마크가 나와 있고, 반크의 보고서는 AI가 그린 한국 문화를 구성 요소의 정확성, 문화적 고유성과 비혼동성, 역사·시대 맥락의 적합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점수화해 비교한 바 있다. 정부가 구축하고 있는 국가대표 AI 평가 기준에서도 문화 이해가 한국어 능력의 일부로 다뤄지는 데 머물지 않고, 독립된 평가 항목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둘째, 문화 현장의 사람들이 AI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국악 음원에 장단과 표현 기법 정보를 덧붙이는 작업에서 보듯, 데이터에 문화적 맥락을 입히는 일은 엔지니어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며 반드시 그 분야를 깊이 아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같은 음이라도 떨고 꺾고 흘려 내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시김새는 악보에 온전히 담기지 않으며, 이를 듣고 가려 기록하는 일은 오랜 시간 국악을 익혀 온 귀가 있어야 가능하다. 어떤 장단이 정확하고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를 가르는 기준은 결국 문화 현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이 국악에서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오류들이 이미 말해 준다. 경복궁이 중국식 궁궐로 그려지고 중국풍 복장에 '한복'이라는 설명이 붙은 것은 각각 문화유산과 전통 복식 분야의 전문가라면 한눈에 가려낼 수 있는 오류다. 시 문제의 정답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결과는 행간의 정서와 시대적 맥락을 읽어 내는 문학 연구자의 해석이 학습 데이터에 충분히 담기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미신이나 관용 표현처럼 일상의 맥락에 깃든 지식 역시 민속학자나 국어학자처럼 우리의 풍습과 말을 오래 연구해 온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확한 학습 데이터로 거듭나기 어렵다. 분야마다 오류의 모양이 다른 만큼, 그 오류를 바로잡을 기준도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같은 국가 사업에도 기술 인력과 함께 이들 분야별 전문가가 처음부터 자리를 갖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며, 문화 현장이 AI의 '사용자'에 머물지 않고 '설계자'로 들어설 때 비로소 빈칸을 채울 기준이 생겨난다. 셋째, AI 리터러시를 문화 리터러시로 넓혀야 한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소버린 AI라도 틀린 답을 내놓을 수 있으며, 그 답을 쓰는 사람이 오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잘못된 내용은 그대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AI를 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져야 하지만, 지금의 AI 교육은 여전히 도구 사용법을 익히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 AI가 그린 경복궁 앞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프롬프트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보다, 그 그림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적 안목이다. 이러한 안목을 기르는 교육의 필요성은 국제 사회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꾸린 전문가 그룹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각국이 국가 AI 전략에 문화를 포함하고, 기술 역량과 비판적 사고를 함께 기르는 '문화적 AI 리터러시'에 투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 소개한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반크의 '글로벌 AI 문화유산 홍보대사' 활동은 참여자들이 AI가 만들어 낸 문화유산의 오류를 직접 찾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문화적 안목을 기른다는 점에서, 이러한 교육의 국내 단초로 볼 만하다. 다만 이는 청년 참여자 중심의 단기 활동에 머물러 있어, 누구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교육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더욱이 AI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퍼뜨리는 이들은 이보다 훨씬 넓은 곳에 있다. 교사는 수업 자료를, 공무원은 홍보물과 안내문을 AI로 만드는 일이 점차 일상이 되어 가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관광단지 미디어월의 사례처럼 공공의 공간에 내걸린 콘텐츠의 오류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신뢰를 업고 전달된다. 학교에서 잘못 전해진 내용이 학생들의 인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파급력은 더욱 크다. 따라서 교사와 공무원을 위한 연수에 'AI의 답을 우리 문화의 눈으로 검증하는 역량'을 정식으로 포함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잘못된 내용이 그대로 세상에 나갈 틈은 그만큼 좁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제안, 곧 평가의 기준을 세우는 일과 데이터에 맥락을 입히는 일, 그리고 결과물을 가려낼 안목을 기르는 일은 서로 다른 층위의 과제처럼 보이지만, AI가 우리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지를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지점에서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AI라는 이름부터 바꾸려 했다. 무엇을 무엇이라 부를지 정하는 일은 곧 주권의 문제이며, 바다 하나의 이름을 두고 '동해'와 '일본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다퉈 온 우리는 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그 다툼의 무대가 AI로 옮겨 오고 있다. AI가 무엇을 '한국'이라 부르고 무엇을 '한복'이라 부를지를 우리가 정하고 확인하지 못한다면, 국산 모델을 몇 개 보유하든 온전한 주권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GPU는 사들일 수 있고 파라미터는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 문화인지를 가르는 기준은 해외에서 사 올 수 없으며, 그 기준을 지켜 낼 사람 또한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AI를 만드는 자리에는 문화를 깊이 아는 전문가가, AI를 쓰는 자리에는 그 결과물을 문화의 눈으로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버린 AI의 빈칸을 채우는 것은 문화이며, 그 빈칸에 문화를 온전히 새겨 넣을 수 있는 이는 바로 그 문화를 오래 익히고 지켜 온 사람들이다. 필자 이애진 이애진은 생성형 AI 교육과 조직의 AX를 설계하는 AI 에듀케이터다. 서울대학교에서 정보문화학(ICT)과 음악학을, 경인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컴퓨터교육을 전공했다. 현재 구글 공식 PD 파트너사 플로우디엑스(FlowDX) 대표이자 구글 공인 트레이너로 교육기관과 공공기관, 연구기관 및 기업을 대상으로 생성형 AI 교육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성형 AI 환경에서 정보와 콘텐츠가 발견·활용되는 방식과 생성형 엔진 최적화(GEO)로 관심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에서는 AI와 문화예술, 콘텐츠산업, 교육, 공공·기업의 AI 전환을 중심으로 기술이 현장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펴본다.

2026.10.28 09:41이애진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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