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알고리즘이 놓친 우리 동네, 누가 지킬 것인가
알고리즘은 우리 동네를 모른다.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알고 있고 어제 본 드라마를 기억하고 다음에 보고 싶은 콘텐츠까지 귀신같이 추천한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산불이 났을 때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우리 지역을 이끌 후보자가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는 누가 알려줄까. 지난 2022년 3월 울진·삼척 일대를 덮친 대형 산불 당시 LG헬로비전 지역채널은 15차례 뉴스특보와 130회 이상의 현장 연결을 진행했다. 산불 상황과 대응 요령은 영어와 중국어, 베트남어 자막으로도 전달됐다.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재난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적인 콘텐츠가 손안으로 쏟아지는 시대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제의 드라마가 아니라 집 앞의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일 수 있다. 미디어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콘텐츠를 보여주느냐뿐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역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케이블TV 지역채널들은 후보자 토론회와 공약 검증, 유권자 참여 프로그램을 잇달아 선보였다. CMB는 광역·기초의원 후보들의 무료 방송연설을 지원했고, JCN울산중앙방송은 후보자들에게 1분의 발언 기회를 제공했다.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 어려운 지역 후보들의 목소리까지 주민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지역의 일꾼을 뽑는 선거에서 정작 우리 동네 후보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빈틈이다. 지역채널은 그 빈틈을 메워 왔다. 전국 방송이 미처 다루지 못하는 지방의회의 결정과 골목의 문제, 주민들의 작은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도 지역채널의 몫이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내 삶에 필요한 정보는 부족한 시대. 정부가 제시한 '미디어 기본사회'는 바로 이러한 역설을 해소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미디어 기본사회는 단순히 더 많은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어디에 살든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나이와 경제적 형편에 관계없이 미디어를 이용하며, 새로운 기술의 혜택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다. 이런 관점에서 케이블TV가 오랫동안 지켜온 가치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편적 방송 접근권이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검색하고 여러 플랫폼을 넘나드는 일이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회원가입과 로그인부터 어려운 과정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익숙한 리모컨으로 방송을 시청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케이블TV의 8VSB 서비스는 별도의 디지털 셋톱박스 없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방송을 볼 수 있는 방식이다. 화려한 기능은 없지만 고령층과 디지털 취약계층에게는 중요한 선택지다. 케이블TV 업계가 이 서비스를 '모두의 TV'라는 공동 브랜드로 발전시키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AI가 일상으로 들어올수록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케이블TV는 지역 복지관과 노인대학, 주민센터 등과 협력해 '우리 동네 AI 교실'을 추진할 계획이다. 주민들이 AI를 생활 속에서 안전하고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지난 10월8일 케이블TV 업계는 '미디어 기본사회, 케이블TV가 잇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내놓았다. 지역의 알 권리를 지키고, 누구나 미디어를 누릴 수 있도록 하며, AI 시대에도 누구도 뒤처지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속하려면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케이블TV의 방송 수익은 감소하고 지역채널 제작 여건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재난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고, 선거 때마다 후보자와 유권자의 목소리를 담아야 하지만 이러한 공적 역할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은 충분하지 않다. 이제 지역채널의 법적 위상을 분명히 하고 공적 역할에 걸맞은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유료방송 시장의 변화에 맞지 않는 규제와 부담구조도 합리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케이블TV의 지속가능성은 특정 산업의 생존을 넘어 지역 주민의 알 권리와 미디어 접근권을 지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기본사회는 선언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산불 현장에서 대피정보를 전하고, 지역 후보자의 목소리를 알리고,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이 불편 없이 방송을 보는 것. 거창하지 않지만 바로 이런 일들이 미디어 기본사회의 출발점이다. 알고리즘은 수많은 콘텐츠 가운데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찾아준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 반드시 전해야 할 이야기는 누군가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세상을 연결하는 기술은 많다. 우리 동네를 잇는 방송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