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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의 헤디트] 예악, 천지인을 춤추다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무대가 밝아지자 뒤편에 펼쳐진 종묘 정전의 긴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붉은 복색의 일무원들이 줄과 열을 이루고 섰다. 한 사람의 몸보다 먼저 보인 것은 간격이었고, 개별 동작보다 먼저 읽힌 것은 질서였다. 춤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일무는 개인의 움직임보다 여러 몸 사이의 관계로 다가왔다. 지난 9월 12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의 일무 전장 '팔풍의 몸짓, 일무' 열한 번째 연작을 봤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공연은 전폐희문에 이어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의 전장을 펼쳐냈다. 공연을 앞두고 필자는 '전승의 완결성'과 '경험의 접근성'을 이야기했다. 일부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전장을 온전히 기억하고, 그렇게 지켜낸 춤을 오늘의 관객이 제대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 무대를 보고 나니 그 사이에 하나의 질문이 더 놓였다. 전승자의 몸에 기억된 전장은 어떻게 오늘의 공연언어가 되는가. 전장은 장면보다 시간 전장은 몇 개의 인상적인 춤사위를 골라 보여주는 방식과 다르다. 보태평과 정대업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 역시 긴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이던 몸의 움직임도 오래 바라보면 서로 다른 결을 드러낸다. 무구가 달라지고 몸을 돌리는 방향과 팔의 쓰임, 움직임과 정지의 호흡도 변한다. 일무는 서두르지 않았다. 빠른 장면 전환이나 극적인 움직임으로 시선을 붙들기보다 같은 질서를 오래 유지한다. 한 사람이 얼마나 돋보이는가보다 여러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앞에 놓인다. 반복되는 움직임을 따라가고 나서야 그 안의 작은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장을 본다는 것은 춤을 장면보다 시간으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날 연출과 해설을 맡은 종묘제례악 일무 전승교육사 김영숙은 그 시간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무대에서 직접 들려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71년 종묘제례가 다시 봉행되면서 제한된 행사 시간에 맞춰 절차가 조정됐고, 보태평과 정대업 가운데 일부만 연행되는 시기가 이어지면서 일무 전장의 맥도 끊길 위기에 놓였다. 김영숙 전승교육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1975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일무를 가르쳤다. 당시 보유자는 그에게 보태평과 정대업의 일무 전장을 모두 익혀 발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 뜻을 받아 오랜 시간 전장을 익힌 김 전승교육사는 1988년 마침내 보태평과 정대업 전장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에는 이수자들과 함께 전장을 외우고 연행하며 전승을 이어갔고, 2009년부터는 '팔풍의 몸짓, 일무'라는 이름으로 전장 발표를 계속해왔다. 그 시간이 쌓여 2025년 11월 29일에는 64인이 함께하는 전장 공연으로 이어졌다. 김 전승교육사는 오랜 세월 일무를 가르치면서도 여러 전수자가 보태평과 정대업 전장을 모두 외워 한 무대에 서는 날을 자신의 생전에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이날을 '평생의 꿈'이 이뤄진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한 사람이 지켜온 전장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몸으로 건너갔다. 다시 여러 세대가 같은 줄과 열에 서면서 개인의 기억은 공동의 기억이 됐고, 오래된 춤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전승이 됐다. 종묘는 뒤로 가고 몸은 앞으로 나왔다 예악당 무대 뒤편에는 종묘 정전이 펼쳐졌다. 조풍류 작가가 그린 종묘 정전 이미지와 붉은 색조의 무대, 일무원들의 붉은 복색이 겹쳤다. 정전의 긴 처마가 만든 수평선 아래 여러 몸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이면서 건축의 질서와 일무의 질서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났다. 이 장면에서 배경 이미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일무가 비롯된 장소를 환기한 뒤 한걸음 물러섰다. 화려한 효과나 빠른 전환으로 시선을 끌기보다 무대 앞에 선 몸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으로 남았다. 공연 중 김영숙 전승교육사는 이 배경이 돌가루를 이용한 화풍으로 그린 조풍류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 선택은 일무를 보는 데 효과적이었다. 실제 종묘에서는 음악과 악장, 제례 절차와 제관의 움직임, 정전과 월대가 하나의 환경을 이룬다. 예악당에서는 그 복합적인 관계 속에 있던 일무를 앞으로 끌어내 몸의 배열과 움직임, 무구와 대형을 하나의 공연예술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연장은 종묘가 아니다. 한 장의 이미지는 춤이 비롯된 장소를 보여줄 수 있지만 종묘가 지닌 깊이와 거리, 월대의 높낮이와 제례의 복합적인 동선까지 옮겨오지는 못한다. 그것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다음 무대의 과제는 다른 데 있다. 종묘를 얼마나 닮게 보여줄 것인가보다 그곳에서 작동했던 공간과 질서를 공연장의 빛과 이미지, 몸의 관계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장소를 복제하는 일과 장소의 원리를 무대에 구현하는 일은 다르다. '일무 독립'에서 '일무 자립'으로 이번 프로그램북에는 국악방송 사장을 지낸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쓴 공연 후기 「일무(佾舞)의 새로운 지평을 보다 : '일무 독립'」이 실렸다. 제목에 등장하는 '일무 독립'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일무는 본래 홀로 존재하는 춤이 아니다. 음악과 악장, 제례의 절차와 공간 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일무 독립'은 무엇을 뜻할까. 이번 무대를 보면서 그 말은 음악과 의례에서 떼어내는 독립이라기보다, 그 관계 속에서 태어난 춤이 공연장 무대에서 하나의 예술언어를 갖춰가는 과정으로 다가왔다. 몸의 배열과 줄과 열의 변화, 무구와 방향, 움직임과 멈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적 문법을 만들었다. 일무에서는 누군가가 더 크게 움직인다고 전체가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다른 몸과 거리를 맞출 때 전체의 형식이 나타난다. 개인의 표현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의 몸을 절제하며 다른 몸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무대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특정 무용수의 동작이 아니었다. 일무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 질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송혜진 교수가 프로그램북에서 제시한 '일무 독립'은 필자에게 단절보다 자립에 가까운 개념으로 다가왔다. 음악과 제례, 장소와 시간에서 비롯된 정신과 구조를 간직하면서도 무대 위에서는 하나의 공연언어로 읽힐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번 무대에서 확인한 일무의 자립이었다. 오래돼서가 아니라 이어지고 있어서 김영숙 전승교육사의 해설 가운데 오래 남은 것은 전통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는 전통이 오래된 것이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누군가가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날의 전장 발표 역시 옛 춤을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남긴 예악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전승의 약속'이라고 설명했다. 무형유산의 보전도 결국 그 약속을 이어가는 일이다. 지켜야 할 전형을 온전히 전하면서 다음 세대가 다시 배우고 연행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이어진 유산을 더 많은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전수교육과 공개행사가 국가무형유산 전승의 중요한 축으로 함께 놓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팔풍의 몸짓'에 대한 그의 설명도 같은 방향이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을 흔들며 존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몸짓은 작아도 여러 사람이 예를 갖춰 함께 움직이면 천지의 질서와 조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객석의 박수마저 전승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바람으로 받아들였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무대를 보니 줄과 열도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전승은 한 사람의 몸에 전통을 고정해 두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외우고 다른 사람이 배우며, 다시 여러 사람이 함께 맞추는 과정이었다. 지켜야 할 전통은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며 살아 있는 문화가 된다. 개인의 기억이 공동의 기억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이제는 '보는 법'을 설계할 차례다 이번 공연에서 해설이 중요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성격, 무구의 의미, 왜 전장을 다시 기억해야 했는지를 알고 난 뒤 관객의 시선은 달라진다. 전승자에게 익숙한 움직임이 관객에게도 저절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춤을 지켰다면 이제 더 많은 사람이 그 춤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길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전승이 전승자의 몸에 머물지 않고 관객의 경험으로 이어질 때 무형유산은 동시대의 문화가 된다. 여기서 기술은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장치보다 관객이 춤을 읽게 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악장과 동작을 함께 볼 수 있는 모바일 해설, 무구와 대형의 의미를 보여주는 짧은 영상과 도해, 세대별 전승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기록이 쌓인다면 전승은 보는 방식까지 넓어진다. 공연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무형유산의 움직임은 공연이 끝난 뒤 다시 사람의 몸과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을 꾸준히 촬영하고 축적한다면 기록은 홍보용 영상에 머물지 않는다. 다음 전승과 교육, 연구와 재공연을 위한 기록 자산이 된다. 기술은 여기에서 유산을 대신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지나간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한다. 전승해야 할 것은 춤만이 아니다. 그 춤을 읽는 방법도 함께 전해야 한다. 공연이 끝난 뒤 커튼콜에서도 일무원들은 줄과 열을 유지한 채 무대에 섰다. 중앙에는 연출과 해설을 맡은 김영숙 전승교육사가 섰고 그 뒤로 이날 무대를 함께한 일무원들이 자리했다. 붉던 무대가 푸른빛으로 넘어가며 공연의 긴장은 풀렸지만 몸들이 만든 질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연을 앞두고 쓴 글에서는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일무의 다음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 무대를 보고 난 뒤에는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됐다.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보여주고, 관객이 읽을 수 있게 하는 것. 전승자의 몸에 남아 있던 시간이 다음 전승자의 몸으로, 다시 관객의 기억으로 건너갈 때 무형유산은 오늘도 살아 있는 문화가 된다. 그날 예악당에 불었던 '팔풍'은 바로 그 시간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바람이었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9.14 08:29이창근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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