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석 칼럼] 바다 밑에서 다시 시작된 인프라 경쟁
"해저케이블 확장의 성패는 발표된 투자액보다, 계획한 시점에 완공할 수 있는지와 내륙 통신망까지 안정적으로 연결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해저케이블은 대륙 간 통신을 떠받치는 기반 시설입니다. ITU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 트래픽의 99% 이상이 해저케이블을 지납니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투자 규모로 보면 2000~2001년 이후 드문 호황기를 맞고 있습니다. 왜 지금 다시 바다인가 지금 투자가 집중되는 이유는 AI 하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네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 수요 증가: 국제 인터넷 대역폭은 2026년 2,259Tb/s로 1년 새 23% 늘었습니다. 10월 NANOG 98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추가로 필요한 용량은 현재 약 2Pb/s에서 2035년 10Pb/s 이상으로 커질 전망입니다. · 노후 교체: 해저케이블의 수명은 통상 25년입니다. 전 세계 케이블 길이의 약 4분의 1이 2030년까지 퇴역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경로 다변화: 홍해는 분쟁으로 수리 허가조차 받기 어려운 구간이 됐습니다. 신규 경로는 남중국해 같은 민감 해역을 피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쪽으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 원가 절감: 대용량 신규 케이블은 기존 케이블보다 단위 용량당 비용이 낮습니다. 주요 경로의 사용률이 최근에야 50%를 넘었는데도 투자가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수요의 주체도 달라졌습니다. 2025년 사용된 국제 대역폭의 약 75%를 콘텐츠·클라우드 사업자가 차지했습니다. 통신사 간 회선 거래 중심이던 시장이 대형 사업자의 내부 트래픽 중심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AI는 분명한 수요 요인이지만, 규모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인도네시아 통신사 TELIN의 CEO는 페타비트 단위의 용량 요청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NEC 임원은 AI 수요가 학습 데이터센터의 입지와 데이터 규제에 달려 있다고 봤습니다. 25년을 쓰는 자산을 불확실한 수요에 맞춰 지금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 이번 투자의 특징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이고, 어디까지 왔는가 이 수치는 그대로 집행될 금액이 아닙니다. 건설비만 집계한 것으로, 증설 비용과 운영비는 빠져 있습니다. 계획된 케이블이 모두 건설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TeleGeography는 지난해 11월 증언에서 2025~2027년 완공 예정 사업 일부가 1~3년 늦어지고, 일부는 자금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시간표를 보면 흐름이 더 분명합니다. 대양 횡단 케이블은 경로 설계부터 개통까지 통상 약 30개월이 걸리며, 이 중 인허가만 6~12개월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공급 병목이 겹치면 기간은 더 길어집니다. 올해와 내년의 계약과 착공이 2028~2029년 개통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아시아에 투자가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데이터센터 거점이 늘고, 기존 경로를 대체할 우회로 수요도 큽니다. 미국 직결 수요와 역내 연결 수요가 동시에 커지면서, 주요 진행 사업 대부분이 아시아·태평양을 지납니다. 한국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누가 투자하는가 가장 큰 변화는 소유 구조입니다. 과거에는 통신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비용과 용량을 나눴습니다. 지금은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이 전체 투자의 38%를 자사 전용 케이블에 쓰고, 25%는 컨소시엄 참여로 집행합니다. 빅테크가 참여하지 않는 투자는 37%입니다. 대서양 횡단 구간은 민간 빅테크 투자 비중이 85%에 이릅니다. 배경은 경제성입니다. 특정 경로의 최대 사용자라면 회선을 빌리기보다 직접 소유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컨소시엄 입장에서도 부담이 있습니다. 용량 대부분을 쓰는 단일 고객이 빠지면 케이블 전체의 수익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공급이 크게 늘어도 가격 붕괴를 예상하지 않는 이유 역시 상당 부분이 판매용이 아니라 자체 사용 용량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려도 있습니다. 일부 정부는 핵심 국제 통신로가 외국 민간 기업의 소유로 집중되는 상황을 경계합니다. 수리 선박과 유지보수 체계에 대한 통제권도 함께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통신사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글로벌 통신사 협의체 GLF는 10월 통신사들의 향후 수요가 20만km를 넘는다고 집계했습니다. 동시에 제한된 생산능력이 특정 수요자에게 편중되면 통신사 수요가 밀려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통신사가 맡을 수 있는 영역도 분명합니다. 육양국 운영, 지역 지선 투자, 국내 구간 연결, 빅테크 주도 컨소시엄 참여 등이 대표적입니다. 저궤도 위성과의 관계도 짚어 볼 만합니다. NANOG 98 발표를 정리한 분석은 위성이 도서·오지의 가입자 접속을, 해저케이블이 대용량 기간 전송을 맡는 보완 관계로 봤습니다. 위성이 해저케이블을 대체한다기보다, 서로 다른 시장을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전달망 기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번 확장은 케이블을 더 까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해저 구간의 설계 방식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광전송 관점에서 눈여겨볼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물리적 한계는 분명합니다. 육상에서는 전력을 쉽게 공급해 수천 쌍의 광섬유도 가능합니다. 해저에서는 증폭기 전력을 육지에서 보내야 하므로 케이블당 약 24쌍이 현실적인 상한으로 꼽힙니다. 용량을 더 확보하려면 결국 케이블을 추가로 깔아야 하고, 이는 다시 제조와 선박 문제로 이어집니다. 판매 단위도 달라집니다. 대형 사용자는 파장 단위 회선보다 광섬유 쌍이나 스펙트럼을 통째로 확보하려 합니다. 국내 사업자에게는 시사점이 있습니다. 해저 구간의 전송 설계와 내륙 데이터센터까지의 광 전달망을 하나의 구간처럼 설계하고 운용할 역량이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대역을 재판매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무엇이 발목을 잡는가 선박 문제는 공급사의 수익성에도 영향을 줍니다. NEC는 해저케이블 사업이 2년 연속 적자였고, 원인의 약 70%가 해양 공사였다고 밝혔습니다. 자체 선박 확보도 검토 중입니다. 시장이 커지는데도 공급사가 쉽게 돈을 벌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생산능력이 빠르게 늘기 어렵다는 신호로도 읽힙니다. 운영 중인 케이블의 복구도 부담입니다. ITU 보고서를 인용한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평균 수리 착수 시간은 2012년 20일 미만에서 2024년 50일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다만 3053건의 기록을 보면 중앙값은 8.0일, 평균은 22.7일로 지역과 사례별 편차가 큽니다. 고장의 80% 이상은 어업과 닻 때문입니다. 수리선이 현장에 도착하는 데만 8일이 걸린 사례도 있습니다. 건설 수요가 선박을 끌어가면 복구 여력이 줄어드는 만큼, 신규 구축과 유지보수는 함께 봐야 합니다. 공통점은 해저케이블을 민간 통신 설비가 아니라 국가 기반 시설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선박, 수리 장비, 인허가처럼 시장만으로 풀기 어려운 영역에 정부가 나서고 있습니다. 국내 통신망의 과제 한국은 북한을 통과하는 통신망이 없어 디지털 연결 측면에서 사실상 섬나라와 같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만큼 해저케이블 의존도가 높습니다. 과기정통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운영 중인 국제 해저케이블은 9개이며, 일부는 2001~2002년에 개통돼 설계 수명 25년에 가까워졌습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본(43개)이나 싱가포르(34개)와 격차가 큽니다. 건설 중인 케이블을 포함한 공급 용량은 약 200Tb/s입니다. KT는 정부의 2035년 18.4GW 데이터센터 목표를 전제로 1500Tb/s 이상의 추가 용량이 필요하다고 추산합니다. 사업자 추정치이지만 방향을 가늠하는 데는 참고할 만합니다. 전달망 관점에서 보면 국내 과제는 케이블 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네 가지를 함께 다뤄야 합니다. ·육양국 분산: 육양국은 해저케이블을 육상 통신망과 연결하는 시설입니다. 현재 케이블은 부산 6개, 거제 1개, 태안 1개로 동남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제주와 새만금은 이 편중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강원 동해의 2.4GW 데이터센터 구상과 해저케이블을 연계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내륙 전달망 연계: 해저 구간 용량이 늘어도 육양국과 데이터센터 사이가 막히면 효과가 제한됩니다. 새 관문마다 내륙 구간의 용량과 함께 서로 다른 물리 경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관문이 늘수록 내륙 전달망의 구조도 동남권 중심에서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안은 뒤에서 살펴봅니다. ·연안 복구 체계: 고장의 74%는 수심 200m 이하에서 발생합니다. 얕은 연안 구간의 선박과 인력을 미리 확보한 SK브로드밴드 협약은 참고할 만한 사례입니다. ITU 보고서를 인용한 분석에서도 대기 선박을 미리 배치한 지역의 대응이 빨랐습니다. ·정책 지원: 해저케이블은 중요 통신 설비로 보호받지만, 신규 구축을 위한 별도 투자 지원은 없고 국가전략기술 지원 대상에도 빠져 있습니다. 정부는 연계 방안을 논의한다는 입장이며, 8월 출범한 민관협의체도 투자 촉진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기업 고객은 특히 이중화의 실질을 확인해야 합니다. 국제 전용회선을 이중화했더라도 두 회선이 같은 케이블이나 같은 육양국을 지나면 실질적인 이중화가 아닙니다. 신규 케이블 개통이 2028년 이후에 몰려 있으므로, 그 전에 필요한 국제 대역은 기존 경로에서 어떻게 확보할지도 미리 따져 봐야 합니다. 육양국 이후의 해법, 개방형 광 선로 시스템(OLS) 해저 구간의 용량은 육양국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데이터센터와 기업 고객까지 이어져야 쓸모가 있습니다. 해저 구간 경쟁이 커질수록 이 육상 구간을 어떤 구조로 만들지가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그 대안으로 살펴볼 만한 것이 OLS(Open Line system)입니다.OLS는 광 증폭기, 다중화 필터, ROADM(파장 경로 전환 장치)으로 이뤄진 선로 구간을 단국장치와 분리한 구조입니다. 개방형 인터페이스로 관리하며, 여러 제조사의 파장을 함께 전송할 수 있습니다. 한 제조사의 단국장치와 선로 장비를 묶어 쓰는 기존 방식과 다른 점입니다. 시장 신호도 있습니다. Cignal AI는 분산 AI 데이터센터 연결(Scale-Across) 시장에서 선로 시스템의 매출 비중이 2026년 29%에서 2030년 57%로 커지고, 2028년에는 플러거블 지출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합니다. 데이터센터 연결 시장의 전망이고 개방형만 집계한 수치는 아니지만, 광 전달망 투자의 무게가 선로 구간으로 옮겨 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육상과 해저의 경계도 조금씩 낮아지고 있습니다. 육양국에서 신호를 변환하지 않고 데이터센터까지 곧바로 연결하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해저 시험에서는 800G 플러거블이 2841km 구간에서 파장당 600Gb/s를 전송했습니다. 육상과 해저에 같은 모듈을 쓰면 운용이 단순해진다는 제조사의 설명도 있습니다. 다만 1만 5000km 이상의 장거리 구간과 광섬유당 최대 용량이 필요한 경우에는 여전히 고성능 내장형 광학 장비가 필요합니다. OLS가 만능인 것은 아닙니다. 개방형 구조에서는 전 구간 성능 검증과 상호운용성 시험의 책임이 사업자에게 넘어옵니다. 장애가 나면 라우터, 광 선로, 단국장치 중 어디가 원인인지 가려내기도 어렵습니다. 부품 공급도 살펴야 합니다. 일부 라만 증폭용 레이저는 납기가 18개월 이상입니다. 도입 전에 다음 항목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실적인 출발점은 새로 만드는 구간입니다. 신규 육양국과 데이터센터를 잇는 구간은 기존 장비의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여기서 운용 역량과 시험 체계를 쌓은 뒤 기존 망으로 넓혀 가면, 전환 부담과 장기 소유 비용을 함께 따져 볼 수 있습니다. 맺음말 해저케이블 투자는 실제로 크게 늘고 있습니다. 다만 발표 금액이 곧 개통 일정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생산능력과 선박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먼저 계약하고 생산 일정을 확보한 사업자가 유리합니다. 시장의 주도권이 빅테크로 옮겨 가는 것도 분명한 흐름입니다. 그렇다고 통신사의 자리가 줄어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저 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육양국과 내륙 전달망, 그리고 장애에 대응하는 운용 역량은 여전히 통신사가 강점을 가진 영역입니다. 국내에는 2028~2029년 신규 케이블 개통에 앞서 준비할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에 육양국 분산, OLS를 포함한 내륙 전달망 구조, 복구 체계, 정책 지원을 하나의 계획으로 묶어야 합니다. 바다 위의 숫자보다 육지까지 이어지는 연결을 함께 설계할 때, 해저케이블 투자는 국내 통신망의 실질적인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