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갈림길, 골든타임] 지역서 신경과 환자 돌볼 전공의 배정 개선해야
지디넷코리아는 '생사 갈림길, 골든타임' 연재를 시작합니다. 관련 국내 전문가들이 직접 필자로 참여해 우리나라 응급심뇌혈관 치료 시스템의 문제와 분석,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최근 30년 넘게 근무하던 서울아산병원 신경과를 은퇴하고 강릉아산병원 신경과로 발령받아 강릉으로 내려왔다. 강릉은 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수려한 곳이고 병원은 깨끗하고 훌륭했다. 게다가 성격 좋은 여러 교수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의사들끼리 진행하는 '컨퍼런스(conference)' 가 없었다. 그저 교수들이 조용히 아침에 와서 각자 입원환자 회진을 돌고 외래 환자를 진찰하러 내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강릉아산병원은 3차 병원, 즉 대학병원이다. 작은 2차 병원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2차 병원처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병원이 신경과 전공의를 한 번도 배당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생각했다. 대학병원에서는 컨퍼런스를 자주한다. 증례를 보고하고 저널 리뷰를 하며 연구모임을 갖는다. 서울아산병원에서는 사실상 매일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강릉아산병원은 이를 준비할 전공의가 없어 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가정의학과에서 파견 나온 전공의나 인턴을 교육시켜 이런 모임을 열 수는 있다. 하지만 신경과에 대한 기본 지식과 관심이 없는 전공의, 게다가 1달~2달 만에 매번 바뀌는 전공의들을 교육시켜 수준 높은 회의를 진행하기는 불가능하다. 신경과 자체에 관심이 있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실력이 늘어가는 '신경과' 전공의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도 여러 명이 있어야 한다.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당직이었다. 강릉아산병원은 850병상이나 되는 영동지역에서 가장 큰 3차 병원으로, 권역별 응급 체계를 갖추고 있다. 강릉뿐만 아니라 고성·속초·삼척·동해는 물론이고 경북 울진에서도 환자가 온다. 유명한 의사가 있다고 더 멀리서 환자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병원에 신경과 전공의가 단 한 명도 없다. 뇌졸중과 같이 초급성으로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전공의가 충분한 신경외과에서 담당한다. 신경외과에서 담당해 주니 고맙지만 문제가 있었다. 뇌졸중은 혈관이 막혀 생기는 뇌경색과 혈관이 터져 생기는 뇌출혈이 있다. 내가 전공의로 일하던 1980년경에는 뇌출혈이 더 많았다. 그러나 고혈압 같은 위험인자를 훨씬 더 잘 조절하는 요즘에는 점점 뇌출혈이 줄어들어 뇌경색이 뇌출혈 보다 4배 정도 더 많다. 신경외과는 뇌를 수술하는 분야로, 뇌출혈의 한 종류인 지주막하 출혈 환자는 수술적으로 치료해야 하므로 신경외과에서 담당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주막하 출혈은 전체 뇌졸중의 7%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일반적인 뇌출혈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약을 사용해 치료하며, 증상이 매우 심해지거나 생명이 위독해 질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감압술 등 수술치료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는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뇌졸중 환자 중 가장 많은 뇌경색의 경우 환자의 증상과 영상 소견 등을 분석해서 다양한 발병 기전을 찾아내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이에 맞춰 적절한 약물 치료를 시행해야 한다. 대부분의 환자에서 수술은 필요하지 않으므로 신경과에서 가장 먼저 진료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경과 학회에서는 80명 정도로 고정된 전공의 수를 늘려달라고 행정당국에 여러 차례 요구해 왔고 최근에는 이런 문제가 받아들여져 소위 '정책 전공의'를 약간은 늘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강릉아산병원이나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는 몇몇 대형병원에는 여전히 전공의가 한 명도 배정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전공의가 추가로 배정된 병원들을 살펴보니 사립병원 보다는 주로 국립대 병원에 추가된 전공의가 배정된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도 정부에서는 국립대 병원은 사립병원처럼 재단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해 우선적으로 국립대 병원을 고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적은 전공의 수를 여러 병원에 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립병원에 우선적으로 배정 한다면 상대적으로 사립병원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을 생각해 봤는지 모르겠다. 또 사립병원이 재단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재단이 '전공의'를 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이 시각에도 영동 지방의 유일한 3차 병원인 강릉아산병원에는 고성·삼척·울진 등 먼 곳에서 환자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럼에도 신경과 전공의를 단 한 명도 배정받지 못해 무너져가는 응급의료 체제를 생각하면 한심하다. 적절한 전공의 배정 정책을 통해 환자들이 최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