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반도체 규제 해제 '속빈 강정'…韓 "대부분 국산화"
정부는 16일 일본 경제산업성과 국장급 '제9차 한일 수출관리 정책대화'를 개최해 반도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불화수소·불화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로 대립해온 한일 양국의 무역분쟁이 4년 만에 종식됐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이번 규제 해제로 우리 업계가 받을 수혜가 별로 없을 것으로 보고있다. 4년전 일본의 수출금지 위기 대 반도체 3대 소재 국산화를 상당 부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 때 수입선을 다변화하면서 일본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도 함께 누렸다. 오히려 일본 소재 업체들이 수출 감소에 영향을 받아 신뢰도 저하와 실적에 피해를 입었다. 업계는 이번 일본의 규제 해제는 한국이 사과받아야 한다며, 외교적 수사라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 일본 3대 수출규제, 국산화 촉진하는 계기…의존도 줄였다 일본은 한국이 2018년 10월 일본 피고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리자, 2019년 7월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불화폴리이미드 3개 품목 한국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에는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WTO에 제소하면서 지금껏 분쟁을 계속해 왔다. 2018년 기준 특별 규제 3개 품목의 국내의 일본 의존도는 포토레지스트(93.2%), 불화 폴리이미드(44.7%), 불화수소(41.9%) 순으로 꽤 높았다. 반도체 소재가 없으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의 핵심 소자 수출 금지 당시 한국이 위기에 봉착할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았다. 이후 정부와 산업계는 일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개발에 발 벗고 나섰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발표지 한달 뒤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마련하고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R&D 예산 2천485억원을 투입하며 지원에 나섰다. 그 결과 불화수소와 불화폴리이미드 국산화에 성공했다. 2020년 1월 솔브레인은 12나인 순도의 불화수소 대량생산 능력을 확보해 국내 수요의 70~80% 대응이 가능해졌다. 같은 해 6월 SK머티리얼즈도 2020년 초고순도 불화수소 가스 양산을 시작했으며 3년 뒤 국산화율 70%를 목표로 삼았다. 2021년 3월 동진쎄미켐은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아르곤 국산화에 성공했다. 그 밖에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램테크놀로지도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공급하고 있다. 해외 기업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일본의 수출금지 조치를 기회로 보고 한국에 소재 생산시설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 듀폰은 2020년 한국에 운영 중인 공장을 증설해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생산 라인을 구축했다. 반도체 3대 소재는 수입선 다변화에도 진전을 이뤘다. 불화수소는 대만 및 중국 수입으로 전환하며 공급망을 확보했다. 일부 기업들은 수출규제 이후 일본으로부터 직접 수입이 어려워지자 기존 일본 거래선의 벨기에 합작법인을 통해 우회적으로 포토레지스트 물량을 국내로 조달했다. 또 듀폰의 반도체 화학 소재 스타트업인 인프리아로부터 포토레지스트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이런 다방면의 노력 끝에 국내 반도체 업계는 약 3년 만에 반도체 소재 자급률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00대 소재·부품·장비 핵심전략기술 품목 가운데 일본 제품의 수입 비중(의존도)은 2018년 32.6%에서 지난해 21.9%로 10.7%p(포인트) 감소했다. 이 가운데 반도체 3대 소재 수출규제 품목인 포토레지스트의 일본산 의존도는 2018년 93.2%에서 2022년 77.4%로 내려갔다. 같은 기간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감소, 불화폴리이미드는 44.7%에서 33.3%로 떨어졌다. 무역협회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시행한 후 당초 우려와 다르게 규제품목에 대한 국산화와 수입 다변화를 위한 기업과 정부의 대응이 적극적으로 이뤄지면서 사실상 수출규제로 인한 수급 피해는 제한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 선진화연구회 회장은 "4년전 아베 정부의 반도체 3대 소재 수출 금지는 우리 국내 소재 부품 분야의 국산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며 "우리 업계는 위기를 전화위복 삼아 수입선 다변화를 이뤘고, 국내 투자가 늘어나면서 국내 반도체 기술이 향상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리노 인하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일본 수출 규제 해제 영향이 제한적일 것 같다"며 "그동안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을 아예 막았던 게 아니라 실무 절차를 복잡하게 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미 국산화될 부분은 됐고, 수요자인 소자 업체도 소재를 국산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오히려 일본 소재 업체가 피해...한국 고객 잃어 수익성 급감 반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로 일본 반도체 소재 업체는 한국 고객사를 잃게 되면서 실적이 급감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수출 규제 조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했다. 2020년 일본 스텔라케미카의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31.7% 급감했다. 스텔라케미카는 전세계 불화수소의 70% 이상을 공급하는 업체다. 포토레스트 전문 기업 일본 JSR 역시 2020년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27.4% 줄어들었다. 불화폴리이미드 전문 기업 스미토모화학도 영업이익이 2019년 1천426억 엔에서 2020년 1천277억 엔으로 10.5% 급감했다. 반면 솔브레인, 램테크놀로지,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등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빠르게 스텔라케미카의 불화수소를 국산화 또는 거래선을 대체한 덕분에 2020년 영업이익이 두 자릿수 이상 상승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소재 업체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 규제를 해제하더라도 언제든지 외교 분쟁이 또 일어날 수 있고, 다른 이유로 공급망 위기가 올 수 있기 때문에 당장 투자하기 부담스럽더라도 지속적으로 소재를 국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수출 규제 해지에 관련해 쓴 소리도 나온다. 노화욱 회장은 "한국이 수출하던 일본 기업의 실적이 나빠지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이번 수출 규제 조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했다"며 "지금 와서 일본이 크게 선심을 베풀듯 규제를 해제한다고 발표하는 것은 외교적 제스처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이런 규제를 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우리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고 꼬집었다.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9년 일본의 일방적 수출 규제 이후 우리나라의 대일 의존도가 줄어 일본 수출 규제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윤석열 정부의 일본 수출 규제 WTO 제소 중단은 굴욕 외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