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배임죄 모호성, 기업 의사결정 위축 우려”
지난달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 상법이 시행된 가운데 이사의 경영판단 책임을 경감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한상공회의소는 19일 `배임죄 제도 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통해 “최근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 상법이 시행 중이나, 기업 현장에서는 주주에 대한 배임죄 성립 여부나 경영판단 원칙 적용 여부 등이 모호해 혼란이 있다”면서 “합리적 경영판단에 대한 면책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 등 이사회 의사결정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만큼 배임죄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법원행정처에서 발행하는 사법연감을 통해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형사사건의 무죄율을 분석한 결과, 배임·횡령죄의 무죄율은 평균 6.7%로 형법 전체범죄 평균 3.2%보다 2배 이상 높다고 밝혔다. 이는 배임죄 사건이 최종 판결까지 가봐야 유죄 여부를 알 수 있다는 세간의 인식을 증명한다. 보고서는 배임죄의 무죄율이 높은 이유로 ▲침해범 대신 위험범 적용 ▲미필적 고의 적용 등 추상적이고 모호한 구성요건을 꼽았다. 우선 형법상 배임죄 조문 중 `침해를 가한 때' 의미가 실제 침해가 발생한 경우인지 침해 위험이 있는 경우인지 모호한데, 법원은 손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경우에도 배임죄를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명확한 고의' 없이 결과가 발생해도 불가피하다는 생각, 즉 `미필적 고의'로 한 경우까지 배임죄를 적용하는 판례도 다수 있었다. 우리나라 배임죄 제도는 형법, 상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로 3원화된 구조다. 이론적으로는 기업 배임사건의 경우 특별법 우선 원칙에 따라 형법보다 상법 특별배임죄를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특경법상 가중처벌 전제가 되는 기본범죄에 상법 특별배임죄가 없어, 실무에서는 특경법 적용 위해 형법상 업무상배임죄를 기본범죄로 적용하며 이로 인해 상법상 특별배임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상황이다. 보고서는 배임죄 제도의 문제점을 모호한 구성요건 외에도 ▲특경법상 35년 전 가중처벌 기준 적용 ▲쉬운 고소·고발 ▲민사문제의 형사화 등 크게 3가지를 추가로 들었다. 우선 특경법 배임죄는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 가중처벌되는 이득액 기준은 1984년 제정 당시 `1억원·10억원'으로 1990년 법 개정을 통해 `5억원·50억원'으로 상향되었으나, 이후 35년 동안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CPI) 기준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1990년 당시 5억원·50억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15억원·150억원에 해당한다. 고소·고발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어 기업가 정신이 위축될 우려도 지적했다. 실제로 경영상 판단에 따른 투자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자가 배임죄로 고소당한 사례가 종종 있었으며, 이로 인해 모험적인 투자 의사결정이 위축되는 문제가 발생해 왔다. 특히 지난달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고 주주 이익 보호 의무가 신설됨에 따라 향후 고소·고발 사례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 배임죄가 주요국 중 가장 무겁게 처벌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가 없는 대신 사기죄로 규율하거나 주로 손해배상 등 민사적 수단으로 해결하고 있다. 독일·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이 형법 또는 상법에 배임죄를 규율하고 있으나 특별법을 통해 가중처벌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주요국 중 유일하게 특경법을 통해 가중처벌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주요국 대비 형량이 매우 높은 편이다. 특경법상 배임 통한 이득액이 5억원 이상인 경우 강도, 상해치사와 동일한 `3년 이상 징역'으로, 50억원 이상인 경우 살인죄와 유사한 형량인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처벌하고 있다. 보고서는 다른 나라에 없는 가중처벌규정(특경법 배임죄, 형법 업무상배임)과 이미 사문화된 상법 특별배임죄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특경법 폐지가 어렵다면 35년 전 설정된 이득액 기준을 현재 화폐가치에 맞게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판례에서 인정되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상법, 형법 등에 명문화해 검찰 기소단계에서부터 이사의 책임을 면책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근거로 주의의무 다해 경영상 결정을 내린 경우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의무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보고서는 경영판단 원칙 명문화시 주요 고려사항으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면책, ▲배임죄 면책 외 손해배상 면책 등을 꼽았다. 현재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하는 내용의 형법·상법·특경법 개정안이 국회에 다수 계류 중이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최근 이사 책임을 강화하는 법 개정이 이뤄진 만큼 경영판단 의사결정을 보호하는 제도가 균형있게 마련돼야 한다”면서 “최근 정부가 '경제형벌 합리화 TF'를 발족해 1년 내 전 부처의 경제형벌 규정 30%를 정비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정했는데 국회에서도 기업의 투자결정과 혁신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배임죄 제도개선 논의가 조속히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