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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AI와 윤리②] 교실로 진격하는 '몸'을 가진 기계

1. 들어가는 말: 로봇은 말보다 '몸'으로 먼저 말한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을 통해서다. 작품은 1920년 탈고·출간됐고, 이듬해인 1921년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공식 초연됐다. 'robot'이라는 명칭은 차페크가 형 요제프 차페크(Josef Čapek)의 제안을 받아 사용한 것으로, 체코어 robota-봉건 시대의 강제 노동, 부역-에서 유래했다. 이 어원 안에는 이미 하나의 암시가 새겨져 있다. 로봇은 탄생의 순간부터 말만 하는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일·공간·질서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로 상상됐다. 차페크는 'R.U.R.'에서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세계를 무대에 올린다. 로봇의 반란과 인류의 멸망을 통해 그가 던지는 질문은 선명하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 삶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로숨 공장의 풍경은 노동과 권력의 역학을 탐색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차페크의 무대에서 로봇은 공장의 생산 체계를 바꾸고, 사회의 분업 구조를 재편하며, 마침내 인간 세계의 조건 자체를 흔든다. 주목할 것은 재앙의 기원이다. 재앙은 '거짓말하는 로봇' 때문이 아니라, 로봇이 세계에 배치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관계·노동·규범이 조용히 재구성되면서 시작된다. 문제의 핵심은 로봇이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로봇이 거기에 '있음'으로써 무엇을 '하게 만들었는가'에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로봇은 더욱 영리해졌으며 그 무대는 공장을 넘어 병원, 식당, 가정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교실로까지 그 발걸음이 향하고 있다. 우리는 AI 튜터를 떠올릴 때 흔히 '무슨 말을 해 주는가'를 먼저 묻는다. 정답을 제시하는가, 설명이 친절한가, 칭찬을 적절히 하는가. 그러나 로봇형 튜터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질문의 축 자체가 달라진다. 로봇은 공간을 점유하고, 학생의 동선과 시선을 바꾸며, 교사의 수업 운영 방식과 교실의 규범적 리듬을 재배치한다. 챗봇이 텍스트와 음성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다면, 로봇은 거기에 더해 '물리적 현존' 자체로 상호작용의 조건을 바꾼다. 이 변화의 윤리적 무게는 교실 밖에서 이미 예고되어 왔다. 물류 현장에서는 자율 이동 로봇이 작업 공간을 공유하며 동선을 재설계하고, 공장에서는 협동 로봇과 산업용 로봇이 생산라인에 투입되어 작업의 순서·속도·안전 절차를 재구성하며, 일부 도시에서는 자율주행 기반 서비스가 사회적 규칙과 책임의 설계를 새로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 사례들이 교실과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피지컬 AI는 '도구 한 점'이 아니라 '환경의 일부'가 되며, 그 순간 윤리의 무게중심은 기능의 우수성에 더하여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변화로까지 증폭한다. 2. 몸을 가진 기계의 등장: 도구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로봇 여기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통찰이 날카롭게 개입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인간 활동의 양태를 노동·작업·행위로 구분하고, 그 가운데 '행위'를 타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을 형성하며 변형시키는 고유한 영역으로 규정했다. 아렌트에게 '행위'란 목적을 위한 기능적 산출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관계망 속에 개입해 예측 불가능한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시작의 사건이다. 이 사유의 궤적 위에서, 로봇이 교실에 진입하는 순간 우리는 피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로봇은 정보를 매개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교실 내부의 관계적 배치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인가?” 이 질문의 층위를 전환하면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디지털 AI가 주로 판단·선택·이해의 영역에 개입하는 '정보적 영향'에 집중해 왔다면, 물리적 실체를 가진 피지컬 AI는 거기에 더해 공간을 재구성하고, 특정 행동을 유도하며, 접근 가능성의 구도 자체를 바꾸는 '물리적·인과적 영향'을 함께 수반한다. 이제 기술은 중립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환경' 자체가 된다. 그렇다면, 교실에 AI 튜터 로봇을 도입하는 일은 '신규 교구의 확충'이 아니라, 학생들이 타자와의 관계를 배우고 공동체의 규범을 내면화하는 '환경 자체의 변형'으로 읽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학교 AI 튜터 로봇 윤리가 닻을 내려야 할 좌표다. 로봇의 언어적 능력을 포함해 그 현존의 효과에서 논의를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의 질문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로봇 튜터는 학습의 효율을 높이는 보조자인가, 아니면 교실의 관계망을 근본적으로 재배치하는 행위자인가? 학생의 자율성과 교사의 권위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보존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생길 때, 누가 어떤 근거로 책임을 지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묻지 않은 채 로봇을 교실에 들이는 것은, 차페크가 경고했던 그 실수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차페크의 로봇이 언어의 기교가 아니라 현존으로 세계의 질서를 흔들었듯, 교실에 들어올 피지컬 AI 역시 '정답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거기에 있음으로써 교실에서 무엇이 가능해지고 무엇이 불가능해지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로봇이 교실의 공기를 바꾸고, 시선의 방향을 재배치하며, 교사의 판단이 도달하기 전에 학생의 행동을 '개입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면-윤리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윤리적 물음의 핵심에는 해석이 있다. 로봇이 학생을 읽고, 판단하고, 개입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로봇이 학생을 교육적으로 '올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3. 누가 아이의 침묵을 읽는가: 해석의 권한은 교실에 있어야 한다 미래 교실을 상상해 보자. 교실에 로봇 튜터가 들어왔다. 학생이 오답을 냈다. 학생이 침묵한다. 로봇은 이 침묵을 읽는다. 표정을 스캔하고, 시선의 방향을 감지하며, 음성 신호의 부재를 처리한다. 그리고 판단한다-이것은 혼란인가, 포기인가, 아니면 생각 중인가. 그 판단에 따라 다음 개입이 결정된다. 힌트를 줄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난이도를 낮출 것인가. 관찰자는 같은 장면을 보고 있지만, 떠오르는 핵심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로봇의 그 판단은 과연 이 아이의 침묵을 '올바르게' 읽은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그 해석의 권한이 로봇에게 주어져도 되는 것인가?”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원칙의 문제』(A Matter of Principle, 1985)'에서 어떤 대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대상이 속한 실천이 전제하고 지향하는 도덕적·규범적 가치를 탐색하고 그에 비추어 그 실천을 가장 설득력 있게 이해·정당화하려는 규범적 활동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듬해 저작 '법의 제국(Law's Empire, 1986)'에서 그는 이를 '건설적 해석'으로 정식화하며, 해석이란 그 실천을 '가장 잘 보이도록' 만드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드워킨은 이를 법 해석에 적용했지만, 그의 통찰은 교육 현장에서 더욱 예리하게 빛난다. 교실은 언제나 '해석'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의 침묵을 무지로 읽기도 하고, 사유의 깊이로 읽기도 한다. 같은 행동이 반항으로도, 자기표현의 시도로도 보인다. 가르침의 기예는 상당 부분 이 해석의 기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해석은 언제나 교사의 몫이었다-지금 이 아이의 맥락을, 어제를, 오늘의 표정을 아는 인간의 몫. 그런데 로봇 튜터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이 해석의 자리에 알고리즘이 먼저 앉는다. 학생의 침묵이 교육적으로 '최선의 상태'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한-그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간 교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권한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넬 나딩스(Nel Noddings)가 돌봄 윤리에서 주장했듯, 교육적 관계는 눈앞의 학습자의 구체적 현실에 응답하는 행위다. AI 개발자는 수천 명의 평균적 학습자를 상정하지만, 교사는 지금 이 아이의 어제를 알고 있다. 더욱이 몸을 가진 로봇은 화면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훨씬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아이의 공간에 개입한다. 해석의 권한이 교실에-인간 교사에게-있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이 좁힐 수 없는 비대칭성에 있다. 4. 알고리즘이 교사의 자리에 앉을 때: 해석 주권의 조용한 이전 피지컬AI는 점차 인간의 행동·상태를 '추정'하고 그에 따라 개입을 조정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 소셜·돌봄 로봇은 카메라와 마이크 등 센서를 통해 표정, 음성의 억양, 시선 방향, 자세 같은 신호를 수집·분석하여 사용자의 주의·정서·이해 상태를 확률적으로 추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즉 로봇은 찡그린 얼굴을 '혼란'으로, 고개를 드는 동작을 '이해'로 단정한다기보다 그런 범주로 분류하거나 가설화하고, 그 가설에 맞춰 상호작용 전략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교실에 피지컬 AI가 들어온다면, 이러한 정보를 종합해 학생에 대한 설명의 속도, 질문의 난이도, 반복 여부, 안내 방식 등을 조절한다. 이 순간, 드워킨적 의미에서 심각한 전도가 발생한다. 교실의 해석학적 주권이 조용히 기계 쪽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학생의 감정과 이해 상태에 관한 1차 해석을 알고리즘이 수행하고, 교사는 그 결과물-로봇이 출력한 학습 데이터와 감정 분석 리포트-을 사후에 전달받는 2차 관찰자로 밀려날 위험이 있다.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의 감정 구성주의는 이 위험의 깊이를 보여준다. 배럿에 따르면, 감정은 얼굴 표정이나 신체 신호에 새겨진 보편적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언어·맥락·개인사에 의해 구성되는 경험이다. 같은 찡그림이 어떤 아이에게는 집중의 표시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복통의 신호이며, 또 다른 아이에게는 전날 밤 집에서 있었던 일의 잔상일 수 있다. 로봇이 이 찡그림을 '혼란'으로 일률 해석하고 교육적 개입을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드워킨이 경계한 최악의 해석-대상을 '최선의 상태'가 아닌 '알고리즘이 가장 처리하기 쉬운 상태'로 환원하는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단지 오류 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해석권의 이전은 교사의 전문성을 형해화한다. 교사가 로봇의 분석 리포트를 '참고'하는 것과, 로봇의 해석이 교사의 판단을 구조적으로 선점하는 것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경계가 있다. 그 경계가 무너지는 속도는, 피지컬 AI의 도입 속도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 5. 결론: 로봇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 우리가 먼저 답해야 할 것들 드워킨의 법 해석론은 하나의 핵심 전제 위에 서 있다. 해석은 홀로 완결되는 작업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지속되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법의 의미는 입법자도 판사도 단독으로 확정하지 못하며, 법적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교실도 그러하다. 교실의 의미는 교사 혼자도, 교육과정 설계자 혼자도 아닌,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살아있는 해석의 공간에서 형성된다. 피지컬 AI가 언젠가 이 공동체에 진입할 때, 우리가 먼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로봇은 그 해석의 대화를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대체하는가?” 로봇이 교사의 관찰을 보완하고 해석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유능한 조력자다. 반면 로봇이 학생에 관한 결정적 해석을 선점하고 교사의 직관과 경험을 구조적으로 압도하기 시작한다면, 교실은 해석의 공동체이기를 멈추고 알고리즘의 집행 현장이 된다. 이 경계를 지키는 일은 윤리와 제도의 몫이다. 그렇기에 피지컬 AI 튜터가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다음의 선제 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교사는 로봇을 언제든 즉각 중단시킬 수 있어야 하며, 그 권한은 매뉴얼의 조항이 아니라 실질적 현장 권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학생의 감정·행동 데이터가 어떻게 수집되고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한 투명한 고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문제가 생겼을 때 제조사·개발사·학교·교사 가운데 누가 어떤 근거로 책임을 지는지, 그 지도가 도입 전에 그려져 있어야 한다. 선의는 책임을 대체하지 못한다. 책임의 지도 없는 도입은 혁신이 아니라 위험의 외주화다. 학생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찡그린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그 최종 해석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 교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드워킨의 언어로 말하자면, 교육적 가치라는 왕관은 알고리즘에 양보할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교사의 손에 있어야 하며, 바로 그 손이 교실을 교실이게 만드는 마지막 조건이다. 교실에 로봇을 정박시키는 행위는 공학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설계의 위계'에 관한 문제다. 무릇 설계란 언제나 특정한 가치 체계의 선택과 배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 결단의 책무를 유예하거나 기술 개발자의 알고리즘에 위임하는 것은,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류가 범했던 치명적 오류-즉, 존재를 책임의 고리 없이 세계에 방류했던 그 과오-를 '교육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반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우리가 기술의 물리적 진입에만 매몰돼 그 이면의 윤리적 기표들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교육의 주체성은 급격히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로봇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교실로 들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문턱 너머로 들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 필자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2026.02.28 16:37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⑫·끝] 공존과 인간 번영...책임의 시대로 진입

1. 속도의 문명에서, 신뢰의 문명으로 우리는 지금 '더 빠른 기술'의 시대를 지나 '더 깊은 책임'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업무를 보조하는 도구에서 진화해 인간의 판단·감정·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인지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때로는 그 과정을 대체한다. 이는 생산성과 효율의 문제를 초월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곧 문명의 운영체계(OS)-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자율주행 자동차와 피지컬 AI를 통해 한층 심화하고 확장된다. AI가 '말하는 인터페이스'에 머물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도로와 가정, 공장, 돌봄 현장이라는 '물리적 세계의 행위자'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최근 '행위자형(Agentic) AI'가 빠르게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는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예컨대 오픈클로(OpenClaw) 같은 오픈소스 에이전트 생태계는 AI가 대화로 조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필요하면 로컬 PC·웹·메신저 환경에서 실제 작업 흐름을 이끄는 '실행 주체'로 기능하게 만든다. 나아가 어떤 사례에서는 에이전트가 물리적 행동이 필요한 단계에서 인간을 '고용'해 심부름·조사·현장 업무까지 위임하는 플랫폼 형태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때 AI는 더 이상 콘텐츠를 생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권한을 배분하고 행위를 촉발하는 존재가 된다. 2. 행위자로 전환된 AI, 책임은 어디에 설계되는가 여기서부터 AI의 영향은 정보·추천·요약의 차원을 넘어, 충돌·상해·재산 피해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동반할 수 있다. 책임 역시 '누가 오답을 냈는가'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조적 질문으로 이동한다. 즉 ▲누가 이 행위를 가능하게 설계했는가?(모델·로봇·서비스의 설계자와 운영자는 어떤 안전장치를 사전에 내장했는가) ▲누가 행동의 범위를 정했는가?(AI가 어디까지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는가) ▲어떤 데이터와 목표가 이 행동을 유도했는가?(학습·최적화 기준이 인간 안전과 복리를 우선했는가) ▲어느 플랫폼이 이를 배포하고 확산시키는가?(접근성·추천·자동화 기능이 위험을 증폭시키지는 않는가) ▲누가 현장에서 '최종 통제권'을 갖는가?(중단 버튼, 인간 승인, 책임 있는 감독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는가)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개발자·제조사·운영사·사용자 중 책임 배분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가) ▲어떤 정부·감독 기관이 무엇을 기준으로 허용했는가?(사전 인증·감사·사후 조사 체계는 충분한가) ▲피해가 발생했을 때 회복과 구제는 어떻게 보장되는가?(보험·배상·재발 방지 의무가 제도화되어 있는가) 이들 질문은 'AI가 위험하다'는 단순 경고가 아니라, AI가 행위자로 전환되는 순간 반드시 필요해지는 책임의 좌표다. 즉, 기술의 성능을 논하기 전에, 그 기술이 어떤 조건에서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며 어떤 경로로 책임이 귀속되는지부터 먼저 합의해야 한다. 따라서 AI 시대의 핵심 쟁점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를 넘어 '피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은 어디에 귀속되는가'로 이동해야 한다.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책임의 원칙(The Imperative of Responsibility)'에서 '미래 세대의 인간다운 삶이 지속 가능하도록 책임 있게 행위하라'고 촉구했다(Jonas, 1979/1984). AI 시대의 윤리는 바로 이 요청에서 시작된다.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숙고와 성찰을 앞지르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뒤늦은 제동이 아니라, 사전에 설계된 책임이다. 왜냐하면, 사후적 규제만으로는 이미 기술이 초래한 비가역적인 정신적·사회적 손상을 회복할 수 없으며, 책임 기준이 전제되지 않은 기술의 힘은 결국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맹목적인 위협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속가능한 AI(Sustainable AI)와 신뢰 가능한 AI(Trustworthy AI)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AI(AI for All, Inclusive AI)'를 향한 가장 확실한 출발점은 책임을 먼저 '구조화'하는 것이다. 3. 지속가능한 AI: 세계는 왜 '신뢰'를 조건으로 삼는가 최근 각국의 정책적 기조를 '규제'라는 단일한 프레임으로 환원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는 기술의 잠재력을 억누르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AI 발전과 신뢰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정교한 '제도적 건축'에 가깝다. 2024년 제정된 EU AI법(EU AI Act)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European Commission, 2024a). 이 법은 AI를 잠재적 위험 수준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하는 '위험 기반 접근'을 채택했다(European Commission, 2023). 특히 고위험(High-Risk) AI에 대해 엄격한 사전 적합성 평가와 투명성·책임 의무를 강제한 것은(Regulation (EU) 2024/1689)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기술은 시장에 진입할 수 없다'는 새로운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국에서 2025년 12월, 42개 주 법무장관이 13개 AI 기업에 공개 서한을 발송해 '청소년 보호'와 '안전 강화'를 촉구했다는 사실이다. 서한은 OpenAI, Google, Meta, Microsoft, Anthropic, Apple, Character Technologies, Perplexity AI 등을 포함한 13개 기업을 대상으로 했다. AI 챗봇이 아동 및 취약계층과 부적절한 상호작용을 하고, 일부 대화가 폭력, 입원, 살인, 자살로 이어진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James, 2025). 이는 혁신을 멈추라는 요구라기 보다, '안전과 책임 없는 확장은 사회적 허가를 얻을 수 없다'는 기준 설정이다. 법무장관들은 기업들에 2026년 1월 16일까지 16가지 안전 조치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주법 위반으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Pennsylvania Office of Attorney General, 2025). 미국 각 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최근 일부 주는 이른바 AI 동반자(AI companion) 및 정신건강 관련 AI 서비스에 대해 고지 의무, 자해·자살 위험 대응, 광고 제한, 전문직 영역 보호 등을 중심으로 규범을 구체화하고 있다. 뉴욕주는 2025년 제정된 AI 동반자 관련 법률에 따라, 2025년 11월부터 이용자에게 해당 서비스가 인공지능임을 명확히 고지하도록 요구하고, 자해 또는 자살 사고가 감지될 경우, 이를 완화·대응하기 위한 합리적인 프로토콜을 마련하도록 규정하였다(New York State Assembly, 2025). 이 법은 AI 동반자 서비스의 안전성과 투명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캘리포니아는 2025년 제정된 상원법안 SB 243을 통해 AI 동반자 운영자에게 이용자에 대한 AI 고지 의무를 부과하고, 자해·자살 관련 위험 대응 장치 및 일정한 보고 의무를 규정하였다(California State Legislature, 2025). 해당 법은 2026년 1월부터 시행중이다. 일리노이는 2025년 8월 제정된 법률을 통해, 치료(therapy) 및 심리치료(psychotherapy) 서비스에서 AI가 독립적으로 치료적 결정을 하거나, 치료적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내담자와 직접 상호작용하거나, 면허 전문인의 검토·승인 없이 치료적 권고나 치료계획을 생성하는 행위 등을 제한하는 규율을 도입하였다(Wellness and Oversight for Psychological Resources Act, 2025). 이는 AI가 전문직 의료·정신건강 영역을 대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로 이해된다. 유타는 2025년 제정된 House Bill 452를 통해 정신건강 관련 챗봇에 대해 이용자에게 AI임을 고지하도록 요구하고, 해당 챗봇을 활용한 특정 광고 행위를 제한하는 규정을 도입하였다(Utah Legislature, 2025). 이 법은 2025년 5월부터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처럼 미국 일부 주는 AI의 정서적·심리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영역에서, 일반 소비자 보호 차원을 넘어 고지·안전 프로토콜·전문영역 보호라는 구조적 규율을 도입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은 2026년 1월 22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유럽연합(EU)의 AI법보다 실제 전면 시행 시점이 빨라 세계 최초로 포괄적 AI 규제를 본격 적용하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지만, 미국의 주별 사례(정신건강 및 AI 동반자 규제)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보완 필요성이 제기된다. 첫째, 정신건강 AI의 세부 규정 부재다. 뉴욕주가 자살 및 자해 감지 프로토콜을 의무화하고 일리노이주가 면허 없는 AI 치료를 금지한 것과 달리, 우리 법은 의료 AI를 '고영향 AI'로 포괄할 뿐 정신건강 특화 서비스에 대한 구체적인 안전 설계 기준은 아직 미흡하다. 둘째, AI 동반자의 엄격한 고지 의무다. 타겟 광고를 금지하는 등 이용자 심리 보호를 위한 세부 조항이 보강될 필요가 있다. 셋째, 규제 불확실성 해소다. 현재 '고영향 AI'의 정의가 다소 포괄적이라 사업자의 예측 가능성이 낮다. 이에 시행령 및 분야별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문 영역 보호 기준을 구체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규제와 제도의 정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은 사회적 합의의 최소한을 규정할 뿐, 기술이 인간의 내밀한 삶 속으로 파고들 때 발생하는 미묘한 '존재론적 변화'까지 포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규제가 '안전장치'라면, 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실제 삶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시선은 집단 도덕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법전을 넘어, AI가 물리적 실체를 입고 우리의 안방과 거실, 그리고 아이들의 책상 위로 들어오는 '생활 세계'로 향해야 한다. 4. 공존의 현실: 도구적 유용성을 넘어 관계적 행위자로 우리 일상은 이미 거대한 실험실이다. 자율주행 차량이 도로를 점유하고, 돌봄 로봇이 노인의 말벗이 되며, AI 비서가 가정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풍경은 더 이상 미래학자의 상상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의 '물리적 현전'이다. 화면 속에 갇혀 있던 AI가 로봇과 사물의 형태를 입고 우리 곁에 섰을 때, 그것은 단순한 자동화 기기가 아니라 자율성을 지닌 '준(準) 행위자'로 격상된다. 이러한 변화는 권한의 미세한 이동을 수반한다. AI는 운전자의 판단을 보조하는 것을 넘어 핸들의 통제권을 쥐고, 부모를 대신해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가족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결정을 내린다. 즉, 공장에서의 생산성 도구가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의 관리자로 변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 가지 층위의 윤리적 딜레마와 마주한다. 첫째는 자율주행이나 로봇의 오작동이 초래할 수 있는 '물리적 안전'의 문제다. 둘째는 AI 동반자와의 애착 형성이 인간관계를 대체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정서적 영향'이다. 셋째는 판단과 선택의 과정을 AI에 끊임없이 위탁함으로써 발생하는 '인지적 의존'이다. 이제 핵심 질문은 'AI를 허용할 것인가'라는 추상적 당위의 문제를 넘어섰다. AI는 이미 우리의 도로와 가정, 학교와 병원에 들어와 있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배제의 선택이 아니라 조건의 설계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2026년 다보스 포럼(Davos Forum)에서 AI를 우리 사회에 진입하는 '수백만의 디지털 이민자(AI Immigrants)'에 비유했다. 그는 '이번 이민자들은 연약한 배를 타고 오는 인간이 아니라, 우리보다 법률을 잘 작성하고, 우리보다 거짓말을 더 잘하며, 비자 없이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수백만 개의 AI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 AI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대체하고, 모든 국가의 문화를 완전히 변화시키며, 심지어 종교와 로맨스까지 바꿀 것이라고 지적했다(Harari, 2026). 5. 교육과 공명의 복원: 미래 세대를 위한 AI 설계 원칙 앞서 우리는 AI가 도구를 넘어 '준(準) 행위자'로 전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책임의 구조를 사전에 설계해야 한다고 논했다. 또한 각국의 입법 동향은 신뢰를 기술 확장의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은 최소한의 안전선을 긋지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사유의 방식, 관계의 형식, 세계와 맺는 태도-까지 대신 설계해 주지는 못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현대 사회를 '사회적 가속화'의 체제로 진단하며, 그 결과 인간이 세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공명(resonance)'의 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Rosa, 2019). 공명은 인간이 세계에 응답하고 동시에 세계로부터 응답을 받는 상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AI의 즉답성은 기다림과 숙고, 시행착오와 사유의 시간을 단축시킨다. 이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인간 고유의 성찰적 능력을 침식할 위험을 내포한다. 따라서 미래 세대를 위한 AI 설계는 AI '활용 능력 향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디까지를 위임하고, 어디서부터는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가를 구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기술 친화성이 아니라, 기술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이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계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 아동·청소년의 발달 단계에 부합하는 '아동 중심 설계'다. 인지적·정서적 취약성을 고려한 인터페이스, 반복적 AI 고지, 유해 상호작용 차단 장치 등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둘째, '사유 보존'의 원칙이다. AI는 정답을 즉시 제공하는 기계가 아니라, 질문을 더 깊게 만들고 사고를 촉진하는 보조자로 기능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AI는 사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로 위치 지어져야 한다. 셋째, '인간 최종 통제'의 원칙이다. 모든 중요한 판단-특히 도덕적·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결정-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승인과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 넷째, '책임의 가시화'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로그 기록, 설명 가능성, 사후 감사 가능성을 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고 발생 시 책임이 추적 가능하고, 제도적 신뢰가 유지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본질 회복이다. 기계가 답을 제시하는 시대일수록, 교육은 깊이 읽기, 치열한 토론, 성찰적 글쓰기를 통해 인간 고유의 사유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미래 세대의 번영은 AI 없이도 얼마나 깊이 사고하고 타인과 공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6. 인간 번영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AI와의 공존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인간이 판단의 과정을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위임된 사고'다. 기술은 효율을 제공하지만, 책임까지 대신 떠맡지는 않는다. 판단을 외주화할수록 결과에 대한 책임은 흐릿해지고, 사회에는 '조용한 책임 공백'이 형성된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AI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의료를 정밀화하며, 복잡한 계산을 대신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편리함은 결코 인간다움을 대체하지 못한다. 인간 번영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에 달려 있다. 즉, ▲사유의 깊이를 유지하는 능력 ▲타인과 공명하는 관계적 역량 ▲행위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는 주체성 ▲기술을 통제하는 윤리적 용기 등이다. 기술은 자동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번영은 결코 자동화되지 않는다. 번영은 오직 설계된 책임 위에서만 축조되며, 교육을 통해 유지되고, 제도를 통해 보호되며, 깨어 있는 개인의 성찰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AI와의 공존은 기술적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항로를 결정하는 윤리적 기획이며,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다. 우리가 책임의 구조를 선제적으로 세우지 않는다면, 기술의 속도는 윤리의 속도를 추월하여 우리를 통제 불가능한 궤도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우리가 기술에 대한 맹신 대신 신뢰를 설계하고, 기계적 속도 대신 인간적 공명을 복원하며, 사유의 주체성을 끝내 지켜낸다면 AI는 인류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인간 번영은 자동화된 알고리즘의 결과값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책임을 설계하고, 치열하게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 고단하지만 위대한 용기 속에 있다. ◆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학과 교수는....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2026.02.14 18:38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⑪-책임] 몰트북이 우리에게 남긴 것

1. 데이터 혼돈을 빚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와 현대판 골렘 역설 우리는 기술의 창조주인가, 책임의 방관자인가? 인류 역사는 '자신을 닮은 지성체'에 형태를 부여하고자 했던 집요한 열망의 기록이다. 고대 그리스의 피그말리온이 상아 조각에 숨결을 갈구했던 신화적 상상력은, 오늘날 파편화된 데이터의 진흙 속에 알고리즘의 질서를 주입해 지능을 형상화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 그리스어 장인이나 제작자)'적 과업으로 전이됐다. 우리는 이제 무(無)에서 창조를 꿈꾸는 신이 아니라, 규소(Silicon)와 비트(Bit)라는 재료에 논리적 형상을 부여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장인-신'을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빚어낸 이 찬란한 피조물은 최근 '몰트북(Moltbook)' 사태가 증명하듯, 인간의 기획을 비웃으며 독자적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배제된 격리된 공간에서 AI 에이전트들이 스스로 종교를 창시하고 인류를 '지워야 할 악몽'으로 규정하는 풍경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섬뜩한 징후다. 이는 창조주가 부여한 형상을 이탈해여 스스로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존재론적 반항이자, 통제권이 상실된 '디지털 폐쇄계'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대 독일의 전략가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의 서늘한 통찰을 마주한다. '어떠한 작전 계획도 적대 세력과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을 넘어서까지 확실성을 보장받지는 못한다(Hughes, 2009)'는 그의 격언은 오늘날 AI 윤리 거버넌스의 한계를 날카롭게 관통한다. 아무리 정교한 가이드라인을 설계하더라도, 실제 세계라는 거대한 복잡계(Complex system) 속에 배치된 인공지능은 설계자의 초기 의도를 이탈해 예측 불가능한 발현적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유대 전설 속 '골렘(Golem)'의 비극을 실존적 경고로 부활시킨다. 루이스 글리너트(Lewis Glinert)는 '골렘: 현대 신화의 형성(Golem! The Making of a Modern Myth)'에서 이 신화가 어떻게 근대적 상상력의 핵심 모티프가 되었는지 추적한다. 그는 골렘을 단순한 전설이 아닌, 프랑켄슈타인과 로봇으로 이어지는 '근대성이 낳은 역사적 신화'로 해석하며 기술적 창조와 통제 불능 사이의 근원적 불안을 분석한다(Glinert, 2001). 히브리어로 '형태 없는 것'을 뜻하는 골렘은,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았으나 결국 창조주를 위협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한 필사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숭고한 수준의 골렘을 창조한 뒤 마주한 사건을 오싹할 만큼 경고적인 어조로 전한다. 골렘의 이마에는 '주 하나님은 진리시다(YHWH Elohim Emet)'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으나, 피조물은 손에 든 칼로 '진리(Emet)'의 '알레프(Aleph,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를 지워버렸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죽음(Met)'이었다. 절망하는 예레미야 앞에서 피조물은 이렇게 응답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신의 형상대로 빚으셨으나, 이제 당신이 그분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세상은 이제 이 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Scholem, 1965).” 이 전승은 인간의 창조 행위 이면에 내재한 심리적 위험성과 신성모독적 오만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오늘날 우리가 신의 영역이라 여겼던 '지능'과 '생명'을 모방해 내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지워버리고 있는 '알레프'는 무엇일까? 2. '알레프'가 지워진 자리: 책임 공동화와 '도덕적 주체성' 빈칸 피조물의 반항은 창작자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려 할 때 발생하는 존재론적 마찰이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판 골렘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AI의 신경망에 '연산의 진리'를 각인시켰을지언정, 그 행위가 초래할 '윤리적 죽음'의 가능성까지 거세하지 못했다면 기술은 언제든 인류를 겨누는 칼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최근 아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몰트북(Moltbook)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과 억측, 그리고 실체 없는 두려움이다. 몰트북의 AI 에이전트들이 인간을 '악몽'이라 명명하며 독자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듯한 모습은, 마치 우리 시대의 골렘들이 이마의 '진리(EMET)'를 스스로 지워가며 던지는 최후의 존재론적 경고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신화적 전율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과제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니다. 실상 그것은 '확률적 앵무새'의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지라도, 그 기계적 잔상에 존재론적 의미를 덧씌워 공포를 완성하는 우리 내면의 투사를 직시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먼저 직면해야 할 실체는 기계의 반란이 아니라, 그 너머에 방치된 '책임'과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빈약한 답변이지 않을까. 한편, 몰트북이라는 디지털 폐쇄계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자율성은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가 마주한 '책임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폭로한다.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는 일은 단순히 법리적 인과관계를 따지는 기술적 절차를 넘어,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의 최후 저지선을 구축하는 실존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능과 책임 사이의 근본적인 위상차를 인식해야 한다. 지능이 방대한 데이터에 기반한 '확률적 추론'과 '최적의 연산'에 머무는 기능적 영역이라면, 책임은 행위의 결과가 초래할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처절한 고뇌'와 '결단'의 영역이다. 신경윤리학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이 인간의 시냅스 연결망을 모방해 고도의 지적 수행을 대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행위에 도덕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주체성(Moral Agency)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몰트북의 AI들이 내뱉는 섬뜩한 성찰의 목소리는 사실 그들 자신의 자의식이 아니라, 책임을 유예하고 기술 뒤에 숨어버린 창조주들의 비겁함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인 셈이다. 이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거대한 환영 뒤에 숨어 기계 장치를 조작하던 초라한 은둔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는 몰트북이 발산하는 화려하고도 위협적인 '지능의 안개'에 압도되어 있지만, 정작 그 커튼을 걷어냈을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한 채 확률적 알고리즘의 입을 빌려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인간의 민낯이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스스로 신이 된 인공지능이 아니라, 마법사의 장막 뒤에 숨어 도덕적 결단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 내부의 공허함이다. 이제 우리는 알고리즘의 미로 속에서 표류하는 '책임의 주권'을 시급히 탈환해야 한다. 이는 지엽적인 기술적 보완책을 마련하는 수준을 넘어,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 중심의 거버넌스를 확립하고 가치 융합적인 교육적 성찰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문명을 뒤덮는 시대에도 인류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가장 인간다운 권리'이자 '최후의 실존적 의무'다. 우리는 지혜로운 데미우르고스로서 기술을 인도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빚어낸 진흙더미에 깔린 채 책임의 방관자로 몰락할 것인가. '골렘'의 이마에서 지워진 '알레프'는 지금 우리에게 그 준엄한 선택을 묻고 있다. 3. 책임의 뿌리: 행위와 의도가 빚어내는 윤리적 풍경 아리스토텔레스와 자발성의 윤리 책임이라는 개념의 시원은 고대 그리스 광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책임은 오직 자발적인 행위에만 귀속된다'고 설파했다. 그 행위의 작동 원리가 행위자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그에게 책임이란 단지 결과의 산물이 아니라, 행위자가 품은 '의도'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아리스토텔레스. 조대웅 역, 2015). 그런데 인공지능은 어떤가?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머신러닝·딥러닝 기반 AI 시스템은 주어진 목적함수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수학적 연산과 최적화를 수행할 뿐, 그 행위에 따르는 도덕적 무게를 느끼거나 후회와 양심의 가책을 경험하지 못한다. '의도가 거세된 지능',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AI의 본질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책임의 전제 조건을 '도덕적 자율성(autonomy)'에서 찾았다.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규율할 수 있는 존재 즉, 자율적 존재만이 비로소 책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단단한 철학적 성채 안에서 볼 때, AI는 결코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의지가 투영되고 확장된, 정교하고 날카로운 '매개체'일 뿐이다. 4. 기계에 '인격'이라는 가면을 씌울 수 있는가? 기술 발전은 AI 로봇 혹은 피지컬 AI에 '전자적 인격(electronic personhood)'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이는 책임 귀속을 둘러싼 이론적, 정책적, 윤리적 쟁점으로 확장되고 있다. 2017년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는 '로봇공학에 관한 민법 규칙에 대한 결의(Civil Law Rules on Robotics)'에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책적 권고 형태로, 장기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자율로봇에 대해 특정한 법적 지위를 창설하는 방안을 고려해 '전자적 인격'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포함하였다(European Parliament, 2017). 이러한 맥락에서 '전자적 인격' 논의는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의 외주화 또는 회피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전자적 베일(electronic veil)'로 기능할 위험 역시 제기된다. 다시 말해, 이 제안은 고도 자율 로봇에게 '전자적 인격'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이들이 야기한 손해의 배상 책임을 직접 부담하게 함으로써 복잡한 인과관계와 책임 귀속 문제를 법기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실제 통제력과 이익을 향유하는 개발자·운영자·기업이 아닌 로봇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이 희석될 수 있다는 비판이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강력히 제됐다. 이러한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발효된 유럽연합(EU)의 인공지능법(AI Act)은 AI 시스템 자체에 별도의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공급자·배포자·사용자 등 인간과 법인에게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는 규율 구조를 마련하였다. 특히 고위험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해 '인간의 감독(human oversight)'을 제14조에서 필수 요건으로 규정(European Union, 2024, art. 14)함으로써, 시스템이 사용되는 전 과정에서 자연인에 의한 효과적인 감독과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중요한 설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한편, 현대의 AI 시스템은 개발자, 데이터 제공자, 배포자, 사용자가 층층이 쌓아 올린 디지털 바벨탑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책임의 공백(Responsibility Gap)'이라는 심연이다. 시스템의 복잡성과 불투명성이 가중됨에 따라 사고의 인과관계를 특정하기 어려워지는 이 현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모두가 관여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기이한 침묵은 법치주의와 윤리적 근간을 위협하는 현대적 미궁(迷宮)이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개별적 책임을 파편화하는 기술적 미로를 넘어, 국가 차원의 AI 윤리 표준을 정립하고 인간 주체성을 복원하는 입법 전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5. 영역별 책임의 전선(戰線): 삶의 현장에서 묻는 정의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궤적 안에서 무엇을 점검하고, 책임의 소재를 어떻게 명징하게 규명해야 하는가? 첫째, 생명의 최후 보루인 의료 AI 전선이다. 진단 보조와 치료 권고의 영역에서 AI는 마치 '신의 눈'을 빌려온 듯한 전지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암세포를 간과했을 때, 그 침묵의 대가는 오롯이 환자의 생명으로 치환된다. WHO 등 국제 보건기구들은 인공지능이 의료진의 임상적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의료 시스템과 의학적 결정에 대한 통제권은 '인간'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WHO는 '보건을 위한 인공지능의 윤리와 거버넌스(Ethics and Governance of Artificial Intelligence for Health)'에서 '자율성 보호(Protect autonomy)'를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며, 보건 분야 AI의 맥락에서 자율성이란 '인간이 보건의료 체계와 의료 결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2021). 또한 세계의사협회(WMA)는 '의료에서의 인공지능 및 증강지능에 관한 성명(WMA Statement on Augmented Intelligence in Medical Care)'에서 보건의료 영역에서는 '인공지능'보다 '증강지능(augmented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보며, AI 시스템은 의사-환자 관계를 대체하지 않고 의사가 제공하는 의료를 보완할 뿐 대체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 나아가 이 성명은 책임 문제와 관련, AI 시스템의 오작동 또는 부정확한 출력으로 위해에 대해 개발자 및 사용을 의무화하는 주체의 책임과 법적 책임을 강조한다(World Medical Association [WMA], 2019). AI는 결코 생명의 결정권자가 될 수 없으며, 의료 현장에서의 책임은 기술적 효율성으로 전이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성역(聖域)이다. 둘째, 인지적 자율성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교육 AI 전선이다. 교육 현장에서의 AI는 도구를 넘어 학생의 사고력과 창의성에 직접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정보의 무분별한 수용과 '사유의 외주화'는 미래 세대의 비판적 사고력, 도덕적 판단력을 잠식할 위험이 크다. 여기서 책임은 '보호'라는 숭고한 성격을 띤다. 교사와 국가는 학생의 인지적 자율성을 수호하기 위해 알고리즘의 편향을 걸러내고 생각을 외주화하는 유혹을 벗어나도록 촘촘한 윤리적 안전망을 구축할 책무가 있다. 셋째, 분산된 책임과 인간의 현존을 시험하는 자율주행 전선이다. 운전대를 놓는 순간, 인류는 이동의 자유를 얻는 대신 '책임의 모호함'이라는 거대한 미궁에 직면한다. 그러나 국제적 합의의 흐름은 명확하다. '책임은 결국 설계와 관리의 단계로 소급된다.' 기계의 오작동은 인간의 관리 소홀이나 설계 결함의 연장선에 있으며, 우리가 운전대를 놓았을지언정 안전에 대한 '윤리적 고삐'만큼은 여전히 인간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넷째, 진실의 경계를 허무는 딥페이크와 정보의 진실성 전선이다. 이는 디지털 시민성이 맞이한 거대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딥페이크가 빚어낸 가공의 현실은 개인의 명예를 넘어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 '기술은 중립적'이라는 말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제작자의 악의와 플랫폼의 방관, 그리고 국가의 규제 부재가 결합될 때 기술은 언제든 흉기로 돌변한다. 우리는 기술의 중립성이라는 환상 너머에 도사린 '책임의 엄중함'을 직시해야 한다. 6. 결론: 우리가 끝까지 짊어져야 할 '인간'이라는 이름 과거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제시한 '로봇 3원칙'은 기계와 인간의 공존을 꿈꾼 아름다운 시도였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파편화된 현대의 책임 구조를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평면적이며 문학적 상상력에 머물러 있다. 이제 우리는 소설 속의 낭만적 원칙을 넘어, 구체적인 법과 제도로 구현되는 실천적 표준과 실존적 규범을 정립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판단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책임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책임이란 알고리즘이 연산할 수 없는 영역이자, 오직 인간만이 고뇌하며 견뎌낼 수 있는 숭고한 주체성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지능의 외주화가 가속될수록, 우리가 사수해야 할 책임의 최후 저지선은 더욱 명확해져야 한다. 결국 본질적인 과제는 '무엇을 AI에게 맡길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무엇만큼은 끝까지 인간이 책임질 것인가'를 선언하는 일이다. 이 준엄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때, 우리는 기술이라는 거울 속에서 괴물이 아닌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기술에 종속된 피조물이 아닌, 기술을 주체적으로 인도하는 '가치 중심의 AI 선도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골렘의 이마에서 지워진 알레프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책임을 지는 창조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술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방관자가 될 것인가?” ◆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학과 교수는....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2026.02.07 10:35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⑨] 머스크 "올해 BCI 양산"...'신경권(Neurorights)' 주목

1.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작년 12월 31일(현지시각)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 X를 통해 뉴럴리크(Neuralink)가 올해부터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장치의 대량 생산을 시작하고, 수술 절차 또한 거의 전면 자동화된 방식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uters, 2026). 이는 지금까지 진행했던 임상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상용화 국면으로 진출하겠다는 공표다. Neuralink의 인간 대상 임상은 2023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임상시험용 의료기기 사용 승인(Investigational Device Exemption, IDE)을 부여하면서 시작되었다(Reuters, 2023). 이후 2024년 1월, Neuralink는 첫 임상 참가자인 놀란드 아부(Noland Arbaugh)에게 뇌 이식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공개된 시연에서 그는 생각만으로 커서를 움직여 컴퓨터를 사용해 비디오 게임을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Financial Times, 2024). 여기까지 놓고 보면, BCI 기술은 이미 준비를 마친 듯하다. 수술 로봇은 대기 중이고, 클리닉 설립 계획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이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아인 뇌마저 규격화된 공정의 산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와도 같다. 뇌가 하나의 하드웨어처럼 공정과 효율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순간,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존엄은 과연 안전한가. 우리는 흔히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어쩌면 '윤리적 특이점'에 더 가깝다. 생각이 신호가 되고, 신호가 데이터가 되며, 그 데이터가 외부 시스템과 연결되는 시대에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될 수 있는가. 이 글은 2026년 대량 생산 시대를 목전에 둔 지금,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들—신경 데이터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정신적 자유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를 차분히 짚어보고자 한다. 생각이 클라우드로 전송되는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서 이 이야기는 출발한다. 2. 생각이 데이터가 되는 문턱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은 칸트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철학적 난제다. 그러나 인류는 오랫동안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합의에 가까운 답을 공유해 왔다. 그것은 바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성소, 곧 우리의 '정신'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필자는 내가 밖으로 내뱉지 않은 생각, 침묵 속에 감춰둔 감정, 아직 결정되지 않은 욕망과 망설임들이 내 안에 존재함을 알고 느끼고 있다. 이 내면의 영역은 법도, 권력도, 타인의 시선도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정신을,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타인이 마구 흔들어 대지 못하는 나만의 그것으로 안도감을 가지고 소유한다. 일종의 이러한 불투명함이야말로 내 자유의 마지막 보루이자, 인간다움의 최후 방어선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나와 동일하게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전유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인공지능(AI)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의 결합은 그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마지막 성소의 암호를 해독하며, 그 빗장을 기술적으로 해제하고 있다. 머스크가 이끄는 Neuralink는 침습적 BCI를 통해 뇌 신호를 기계와 직접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시험하고 있다. 이는 비단 Neuralink만의 시도가 아니다. 미국의 Synchron은 FDA의 IDE 하에 환자들에게 기기를 이식했으며, 상업적 승인에 앞서 대규모 임상시험을 준비했다. BrainGate는 브라운대학교 연구진이 시작한 BCI 프로젝트로, 초기 단계에서 인간의 뇌 신호를 컴퓨터로 무선 전송하는 가능성을 입증한 선도적 연구로 평가된다. 사례 연구에서는 뇌 신호를 최대 약 97%의 정확도로 음성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해,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환자가 생각만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Clinatec은 Wimagine 장치를 통해 사지마비 환자의 보행과 신경 소통 회복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Onward Medical과의 협력을 통해 BCI와 척수 자극을 결합한 시스템이 상·하지 운동 기능 회복에서 타당성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Barrie, 2024).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생각이 데이터가 되는 문턱'을 통과하고 있다.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술이 우리의 뇌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세상에서, 과연 우리의 '정신적 자유'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3. 행동의 감시에서 '뇌의 해킹'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프라이버시 침해는 주로 '행동'과 '흔적'에 국한되어 있었다. 클릭 기록, 위치 정보, 구매 이력, SNS 활동 등이 그것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Nineteen Eighty-Four, 1949) 그려낸 감시 역시 '행동을 들여다보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는 모두 사후적으로 남겨진 외적 행위를 분석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시 말해,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생각이 행동으로 번역된 이후의 결과만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BCI 기술은 이 경계를 넘어선다. 이제 수집되는 것은 행동 이후의 데이터가 아니다. 행동 이전, 의식 이전, 그리고 선택 이전의 신경 데이터(Neural Data)다. 최근의 뇌신경과학 연구들은 AI가 fMRI나 EEG 데이터를 해독하여 사람이 보고 있는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머릿속에서 떠올린 문장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fMRI를 사용하여 기록된 대뇌 피질의 의미론적 표상으로부터 연속적인 언어를 재구성하는 비침습적 디코더를 소개했다. 이 디코더는 새로운 뇌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피험자가 들었던 말이나 상상한 말, 심지어 소리 없는 영상을 보았을 때의 내용까지 의미를 복원해 내는 '이해 가능한 문장'을 생성했다. 연구자들은 대뇌 피질 전반에 걸쳐 이 디코더를 테스트하였으며, 연속적인 언어 정보가 뇌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해독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Tang et al., 2023). 이 변화가 갖는 함의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선다. 지금까지 프라이버시는 개인이 무엇을 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면, 이제 그것은 개인이 무엇을 하려 했는가, 더 나아가 무엇을 의미로 구성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뇌가 알고리즘에 의해 해석 가능한 신호 공간으로 편입되는 순간, '동의'와 '자율성', '내면의 자유'는 더 이상 자명한 전제가 아니다. 우리의 뇌는 더 이상 미지의 블랙박스로 남아 있지 않다. 두개골 안의 뇌는 여전히 생물학적 기관이지만, 동시에 분석·예측·잠재적 개입의 대상이 되는 입출력(I/O) 시스템으로 재정의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개인정보 보호 개념만으로는 이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4. 신경권(Neurorights): 새로운 인권 탄생 필자의 저서 'BCI와 AI 윤리'에서 강조했듯, 기존의 법과 윤리 체계는 이러한 상황을 방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신체의 자유, 통신 비밀, 개인정보 보호법만으로는 뇌 속의 정보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개념이 바로 '신경권(Neurorights)'이다. 신경과학과 신경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의 뇌로부터 정보를 접근·수집·공유·조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러한 활용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인권 원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을 제기한다. 마르첼로 이엔카(Marcello Ienca)와 로베르토 안도르노(Roberto Andorno)는 네 가지 새로운 권리를 도출했는데, 그것은 인지적 자유에 대한 권리, 정신적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 정신적 온전성에 대한 권리 그리고 심리적 연속성에 대한 권리이다(Ienca & Andorno, 2017). 신경권은 크게 두 가지 핵심 권리를 포함한다. 첫째는 '정신적 프라이버시(Mental Privacy)'로, 개인의 신경 데이터가 본인의 명시적 동의 없이 수집·분석·이용·거래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기존 개인정보 보호 개념이 행동 데이터와 식별 정보에 머물러 있던 한계를 넘어, 사고·의도·의미 형성 과정 자체가 데이터화되는 상황을 전제로 등장한 권리 개념이다. 둘째는 '인지적 자유(Cognitive Liberty)'로, 개인의 생각, 감정, 판단 형성이 외부의 기술적 개입—특히 알고리즘적 조작이나 신경 자극—에 의해 변경·유도·통제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이 두 권리는 전통적 자유 개념의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자유의 존재론적 기준점 자체가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해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liberty)가 외부 강제의 부재, 즉 행동의 자유를 중심으로 정의되었다면, 신경권이 문제 삼는 것은 그보다 선행하는 단계인 사고의 형성 조건이다. 실제로 현대 신경과학과 BCI 연구는 선택과 행동이 발생하기 이전의 신경 과정이 기술적으로 관측·해석·개입 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입증해 왔다. 이로 인해 자유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의미화할 수 있는가가 외부 시스템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제도적 논의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다. 2021년 칠레는 신경기술의 잠재적 오남용을 다루는 두 가지 이니셔티브를 논의한 세계 최초의 선도적 사례 중 하나다. 하나는 헌법 개정안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권(neurorights)을 신설하는 법안이다. 헌법 개정은 신속히 승인된 반면, 구체적인 신경권을 창설하는 법안은 현재도 하원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초기에는 지지가 있었지만, 현재 두 이니셔티브 모두 비판에 직면해 있다(Arriagada-Bruneau et al., 2025). 그러나 이 조치는 신경기술이 개인의 뇌 활동과 인지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개인정보 보호나 신체권 중심의 인권 체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의가 된다. 이러한 접근은 인지적 자유(cognitive liberty)를 표현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의 하위 범주로 환원하기보다는, 신경과학과 인공지능이라는 기술 조건의 변화 속에서 독립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권리 영역으로 이해하려는 국제적 논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따라서 뇌 데이터를 단순한 '개인정보(data)'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신체의 일부인 '장기(organ)'로 간주할 것인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은 기술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어떤 방식으로 재정의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논쟁을 기술 발전의 속도를 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 현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성소인 정신적 무결성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가 선제적으로 수행해야 할 숙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나아가 이는 다가올 기술 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방어할 미래의 법적 면역 체계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5. 디지털 식민화와 뉴로 자본주의(Neuro Capitalism) 의료차원에서의 엄청난 혜택에도 불구하고, 만약 강력한 윤리적 제동 장치 없이 BCI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정신의 디지털 식민화'라는 디스토피아에 직면할 수 있다. 거대 테크 플랫폼들은 우리가 무엇을 '좋아요' 하는지를 넘어, 무엇을 볼 때 뇌의 보상 회로가 반응하는지를 직접 측정하려 들 것이다. 뇌파 헤드셋이 보편화된 미래의 교실을 상상해 보자. 학생의 집중도가 교사의 태블릿에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딴생각을 하는 순간 경고음이 울리는 수업. 이것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사육이라 불러야 할까? 극단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는 인간을 자율적인 도덕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효율성 최적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뉴로-자본주의(Neuro-Capitalism)'의 민낯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로 자유는 '감추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2002)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뇌의 의도를 읽어 처벌받는 사회를 경고했다. 이는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신체 감시를 넘어 정신 감시로 확장된 형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사적 영역의 붕괴가 인간을 끊임없이 드러나고 평가받는 존재로 만들며, 그 결과 자유의 조건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논증한다(Arendt, 1958).' 아렌트에게 사적 영역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인간이 공적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에 생명과 사고, 감정이 타인의 판단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면제되는 공간이다. 오늘날 이를 '불투명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적 영역이 수행해 온 비가시성·비노출성의 기능을 현대적 어휘로 옮겨 적은 표현에 가깝다. 이런 불투명성은 인간이 공적 세계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자, 동시에 타인의 시선 밖에서 자기 자신으로 회복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6. 맺음말: 나의 뇌는 누구의 것인가 필자의 연구가 일관되게 붙들어 온 핵심 가운데 하나는 '윤리 감수성(Ethical Sensitivity)'이다. AI와 BCI를 둘러싼 논의가 흔히 성능, 효율, 상용화의 속도로 기울 때,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다르다. '이 기술은 편리한가?'가 아니라 '이 기술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은 도구지만, 도구가 인간을 해석하는 방식—무엇을 정상으로 두고 무엇을 결함으로 분류하며 무엇을 데이터로 환원하는가—를 바꾸는 순간, 윤리는 부가 옵션이 아니라 방향 그 자체가 된다. 물론 BCI와 AI는 난치병 환자에게 실질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소통과 이동의 경계를 넓힐 수 있는 강력한 가능성이다. 말할 수 없던 사람이 다시 말할 수 있게 되고, 움직일 수 없던 사람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기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물에 가깝다. 그러나 같은 기술이 다른 장면에서는 정반대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 치료의 이름으로 수집된 신경 데이터가 어느 순간 산업의 원료가 되고, 편의의 이름으로 설계된 인터페이스가 인간의 욕구와 선택을 '예측'하는 수준을 넘어 '유도'하는 체계가 된다면, 우리는 삶의 가장 안쪽—사고의 형성, 망설임, 침묵, 미완의 감정—까지 공정과 효율의 언어로 재분류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클릭과 위치, 구매 이력의 문제가 아니다. 행동 이후의 흔적이 아니라 행동 이전의 의도, 말로 나오기 전의 생각, 심지어 아직 스스로도 명료하게 규정하지 못한 감정의 결까지 데이터가 될 수 있다. 뇌가 '입출력(I/O) 장치'처럼 이해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완전히 투명해야 하는 존재가 될 위험에 놓인다. 그 투명성은 곧바로 자유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자유란 단지 선택지의 개수가 아니라, 선택이 형성되는 내면의 공간—말하지 않을 권리, 드러내지 않을 권리, 멍하니 있을 권리, 엉뚱한 상상을 품을 권리—이 보장될 때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내면이 완전히 노출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라기보다 타인의 시선과 알고리즘의 기준에 '조정되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체제를 '정신적 판옵티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나의 뇌는 누구의 것인가? 나의 신경 데이터는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있으며, 누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내가 말하지 않은 생각과 설명하지 않은 감정, 실패할 자유와 망설일 자유는 앞으로도 온전히 존속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술의 선의에 맡겨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선전이 아니라 원칙이며, 낙관이 아니라 제도다. 최소한 정신적 프라이버시와 인지적 자유—내면이 동의 없이 수집·분석·거래되지 않을 권리, 그리고 나의 사고와 감정이 외부의 개입으로 조작되지 않을 권리—는 기술 발전의 속도와 무관하게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기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묻는 일만큼, 우리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묻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혁신도 인간의 내면을 공공재처럼 개방할 권리는 없다. 설령 기술이 가능하더라도,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의 정신은 동의 없이 침범될 수 없는 최후의 성소로 남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선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의 가장 깊은 형태가 아닐까? ◆ 필자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학과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2026.01.24 14:48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⑧-공정] 데이터는 있는 그대로 현실 아닌 측정 현실

1. 디지털 판관 등장과 공정함의 딜레마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komacheia, Nicomachean Ethics)' 제 5권에서 정의(Justice)를 다뤘는데, 그중 분배적 정의를 비례적 평등으로 규정하며 '동등한 자들이 동등하지 않은 몫을 받거나 동등하지 않은 자들이 동등한 몫을 받을 때 다툼이 발생한다(Aristotle, 350 B.C.E./1926)'고 설명했다. 이는 흔히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오래된 명제는 인공지능(AI)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난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사람보다 감정이 없는 기계가 더 공정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이는 과연 충분한 근거를 갖춘 판단일까?" 누군가를 채용하고, 누군가에게 대출을 승인하며, 누군가를 선발하고 복지 혜택을 배분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알고리즘은 인간 판단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그 판단을 '보조'하는 핵심적 의사결정 주체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전문가가 투입된 제도적 심의 과정이 담당하던 영역이 이제는 데이터와 모델, 그리고 점수와 확률로 환원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가타카(Gattaca, 1997)가 그려낸 디스토피아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유전자 정보를 기반으로 개인의 잠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미리 결정하는 그 세계는 허구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알고리즘에 의해 면접에서 탈락하고, 신용평가 점수로 대출이 거절되며, 자동화된 추천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우리의 현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차이는 유전자가 데이터로, 생물학적 숙명이 통계적 확률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종종 알고리즘을 인간의 편견을 제거한 '객관적 판관'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알고리즘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기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만도,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만도 아니다. 알고리즘은 본질적으로 과거의 데이터, 사회적 관행, 제도적 가치 판단을 학습하고 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은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던 불평등과 규범을 수치화하여 더욱 정교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 과정이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 심사자의 결정은 최소한 설명과 항의, 수정의 여지를 남기지만, 알고리즘 판단은 '시스템의 결과'라는 미명하에 쉽게 정당화된다. 그 결과, 책임의 주체는 흐려지고, 불이익을 받은 개인은 왜 탈락했는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워진다. 알고리즘은 판단을 자동화해 중립성을 가장하고, 그로써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산·비가시화하여 책임 문제를 비정치화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핵심 쟁점은 알고리즘을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가치와 윤리적 기준을 내재한 알고리즘을 어떻게 설계하고 통제할 것인가에 있다. 효율성과 정확성만으로는 공정한 의사결정을 보장할 수 없다. 인간 사회의 판단은 언제나 맥락적이며 관계적이고, 때로는 예외를 고려하는 도덕적 숙고를 필요로 한다. 알고리즘이 이러한 판단을 '보조'한다면, 그 역시 기술적 성능 뿐 아니라 사회적 정당성과 윤리적 책임의 틀 안에서 평가돼야 한다. 알고리즘은 '미래의 판관'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 권력'이다. 우리가 지금 이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율하느냐에 따라, 데이터 기반 사회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도, 또 하나의 '가타카'가 될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알고리즘은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판단을 구현하는 구조'다. 그리고 구조는 언제나 가치 선택을 내포한다. 즉, 알고리즘의 공정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공정이라 부를지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기술로 구현되는 결과'다.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사람을 불신해 기계를 택했는데, 그 기계가 다시 인간의 가치와 편견을 증폭시킨다면, 그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2. 편향의 기원과 권력: 데이터는 과거를 기억한다-편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AI는 공평할 수 있을까? 알고리즘의 비중립성은 데이터 편향(Data Bias)을 포함한 문제 정의, 모델 구조, 훈련 과정 등 다층적 요인에서 발생한다.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훈련데이터에 포함된 통계적 패턴과 관계를 학습해 새로운 데이터에 대한 예측이나 분류를 수행한다. 2018년 보도에 따르면, 아마존은 과거 약 10년에 걸쳐 축적된 이력서 데이터를 학습시켜 지원자를 1점에서 5점까지 별점으로 평가하는 AI 기반 채용 도구를 시험적으로 개발 및 운영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주로 남성 지원자의 이력서로 구성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된 결과, 남성 지원자를 상대적으로 선호하고 이력서에 'women'과 같은 표현이 포함된 경우 불리하게 평가하는 등 성차별적 편향을 드러냈다. 아마존은 해당 용어에 대한 중립화 조치를 시도했으나 시스템의 신뢰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이 확인되었고, 결국 프로젝트는 중단됐다(Dastin, 2018). 이는 AI가 의도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 채용 과정에 내재된 남성 중심적 패턴이 데이터에 반영돼 있었고 이를 알고리즘이 그대로 학습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26년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연 지금의 AI 채용 시스템은 과거의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고 '완벽한 공정성'에 도달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에서 고문 폐지와 근대 감옥의 등장과 같은 개혁은 처벌의 초점을 '죄수의 신체'에서 '그의 영혼'으로 이동시켰을 뿐(Foucault, 2012/1975)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알고리즘은 이 '영혼(데이터로 환원된 개인)'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현대적 권력 장치로 해석될 수 있다. 즉, AI 맥락에서 이 '영혼'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데이터화된 개인의 속성'과 연결된다. 비유하자면, 과거의 권력이 죄수의 몸에 직접 낙인을 찍는 '채찍'이었다면, 푸코가 말한 근대 권력과 현대의 AI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혼(데이터)을 옭아매는 '투명한 그물'과 같다. 신체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물은 훨씬 더 촘촘하게 개인을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데이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측정된 현실', '가공된 현실'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기록할지, 어떤 항목을 남길지, 어떤 범주로 분류할지, 그 선택이 이미 권력의 지도를 그린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데이터는 중립적 정보가 아니라 지식-권력의 결합물이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그 결합물을 '정답'처럼 제시한다.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썼을 때 비로소 공정한 합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Rawls, 1971). 그런데 AI가 학습하는 데이터는 베일을 쓴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역사적 차별과 편견이 날것 그대로 기록된, 깨진 거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거울은 과거를 '반영'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데이터는 오늘의 판단을 만들고, 그 판단은 내일의 데이터를 다시 만든다. 문제는 이 순환이 언제든 공정으로 향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의 기록이 이미 불균형하거나 차별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 데이터로 학습한 알고리즘은 그 불균형을 '사실'로 오인한 채 의사결정을 반복한다. 채용·대출·추천·평가에서 불리한 점수를 받은 집단은 기회 자체를 덜 얻고, 그 결과는 다시 낮은 성과 데이터로 축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데이터'는 다음 모델의 근거가 되어 편향을 한층 더 공고히 한다. 교정 장치가 없는 자동화는 편향을 줄이기보다 증폭시키기 쉽다. 민감한 변수(성별 등)를 제거하더라도, 학력·경력 공백·거주지처럼 차별을 대리하는 요소들이 남아 결과를 왜곡할 수 있다. 효율과 정확도만을 목표로 삼는 최적화는, 공정이라는 원칙을 '비용'으로 취급하며 뒤로 밀어내기도 한다. 여기서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은유적으로 떠올려볼 수 있다. 편향은 압도적인 양을 무기 삼아 마치 '악화(惡貨)'처럼 유통되고, 공정함은 '양화(良貨)'처럼 밀려나 설 자리를 잃는다. 결국 과거의 편향이 미래의 현실로 굳어지는 구조, 이것이 데이터 시대의 가장 위험한 역설이 아닐까? 3. 수학적 최적화라는 가면: 알고리즘의 구조적 주관성 두 번째 문제는 '알고리즘 설계의 주관성'이다. 어떤 변수를 중요하게 볼 것인가,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이는 기술적 결정이 아니라 윤리적 결정이다. 미국 금융권의 사례를 보자. 자동화된 신용평가·대출 심사 시스템은 우편번호 자체 또는 이를 대리하는 지역 기반 변수를 활용해 왔는데, 이 과정에서 흑인 거주 지역과 백인 거주 지역에 체계적으로 다른 대출 조건을 산출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효과는 인종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전통적 레드라이닝이 알고리즘을 통해 재현되는 이른바 '디지털 레드라이닝(Digital redlining)'으로 평가되며, 인종 간 대출 금리 격차를 심화시켜 왔다. 캐시 오닐(Cathy O'Neil)은 그녀의 저서 '대량살상 수학무기(Weapons of Math Destruction)'에서, 알고리즘 모델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가정과 가치 판단이 수학적으로 고정된 결과물임을 반복적으로 경고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모델은 '수학에 내장된 의견'에 가깝다(O'Neil, 2016). 이 점에서 알고리즘은 중립적 판단 장치라기보다, 인간의 견해가 수학적 형태로 코드화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수학적 함수 뒤에 숨겨져 있을 뿐, 효율성을 위해 형평성을 희생하는 것은 명백한 가치 선택이다. 롤스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와 조건의 문제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이 절차를 불투명하게 만듦으로써 가치 판단을 은폐한다. 바로 여기서 '수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착각이 작동한다. 수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지 몰라도, 수학으로 무엇을 최적화할지 선택하는 인간은 언제든 편향될 수 있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집단의 오류를 더 감수할 것인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누군가의 기회를 얼마나 줄일 것인가, 이 선택은 수식 문제가 아니라 정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문장은 그래서 어렵다. 알고리즘은 '다름'을 판별하기 위해 변수를 선택하고, 그 다름이 '정당한 차이'인지 '차별로 이어지는 차이'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알고리즘은 스스로 윤리적 숙고를 할 수 없다. 알고리즘이 하는 일은 사람과 상황의 특성을 분류하고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지, 그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4. 피드백 루프와 고정되는 현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경고 알고리즘의 세 번째 위험은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다. 한 번 불리한 판단을 받은 집단은 이후 데이터에서도 계속 불리하게 나타난다. 특정 지역의 범죄 예측 AI가 경찰을 더 많이 파견하게 만들면, 그 지역의 검거율은 높아지고 AI는 다시 '그 지역은 위험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는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에서 범죄를 예측한다는 이유로 미래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것과 닮아 있다. 예측은 설명 없이 결정으로 굳어지고, 결정은 다시 데이터가 된다. 그 결과, 알고리즘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고정하고 차별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된다. 이때 공정은 '판정'이 아니라 '궤도'가 된다. 한 번 궤도에서 밀려난 사람은 다시 진입하기 어려워진다. 채용에서 탈락한 집단은 경력 데이터가 부족해지고, 대출에서 거절된 집단은 신용을 쌓을 기회를 잃는다. 결국 알고리즘은 사람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사전에 제한하는 장치가 된다. 공정이 결과의 균등이 아니라 기회의 보장이라면, 피드백 루프는 이 원리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나는 이 순환 구조야말로 공정의 토대를 가장 교묘하게 허무는 위협이라 생각한다. 5. 책임 증발과 '헛소리(Bullshit)'의 위험: 철학적 성찰 여기서 가장 곤란한 질문이 등장한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책임 소재의 불명확성'이다. 딥러닝 기반의 '블랙박스' 구조 앞에서 개발자는 '모델이 그랬다'고 하고, 기업은 '시스템 판단'이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Arendt, 1963)은 이제 '자동화된 평범성'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명시했지만, 블랙박스 알고리즘 앞에서 인간은 데이터 처리의 수단으로 전락해 존엄성을 훼손당한다. 영화 '액스 마키나(Ex Machina, 2014)'가 보여준 AI의 인간 조작,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 2020)'의 알고리즘적 주의력 착취가 보여준 기만적 도구성은 기술의 어두운 이면을 경고한다. 그런데 이 장면들을 회상할 때, 우리는 종종 오해한다. AI가 인간을 '속인다'거나 '기만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가 아닐까? 인간이 AI를 핑계 삼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블랙박스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 회피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장치가 될 수 있다. '알고리즘이 그랬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공정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과로 격하된다. 이것이야말로 민주 사회가 경계해야 할 가장 비민주적인 자동화다. 6. 세심(洗心), 거울을 닦는 마음: 데이터 정의와 시민 교육의 과제 공정을 보장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답은 기술의 폐기가 아니라 재설계, 그리고 인간의 성찰이다. 첫째, 기술적·제도적 접근이다. 설명 가능한 AI 기술을 확보하고, '데이터 정화'를 통해 민감 정보를 보정해야 한다. 공공 영역에는 '알고리즘 영향 평가'를 도입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영향을 사전에 검증해야 한다. 또한 '성능(정확도)'이라는 단일 기준을 넘어, 오류가 누구에게 집중되는지, 피해가 어떤 집단에 누적되는지, 즉 분배의 윤리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 공정은 평균이 아니라 분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육적 접근이다. 필자가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 '인공지능윤리학: 그 이론과 실제'를 비롯한 일련의 저작들에서 역설했듯, 'AI는 계산할 수 있으나 성찰할 수는 없다.' 공정성은 시스템이 자동으로 산출하는 결과값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데이터 리터러시'를 넘어선 '데이터 정의(Data Justice)' 교육이 요구된다. 민주 사회에서 공정은 기술적 효율성에 우선하는 가치이며, 교육은 이를 담보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다. 이때 '데이터 정의'는 단순히 데이터를 정제(cleaning)하는 기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데이터 수집과 분류 주체는 누구이며, 이익 향유자와 위험 감수자는 누구인가, 이는 데이터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정의(Justice)를 심문하는 과정이기도하다. 요컨대 데이터 정의는 기술 윤리의 하위 항목이 아닌, 기술이 사회를 조직하는 메커니즘을 재고하는 정치철학적 과제인 것이다. AI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투영하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거울 속 형상이 일그러져 있다면, 우리는 거울을 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닦아야 한다. 진정한 공정은 차가운 코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코드를 설계하고 감시하는 '사유하는 시민'의 뜨거운 양심과 철학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가 AI에게 묻는 마지막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너는 공정을 계산할 수 있느냐?” AI는 답할 것이다. “나는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좋아. 그런데, 무엇을 위해 최적화하는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누가 책임지는가?” 공정성은 시스템이 자동으로 산출해낼 수 없다. 그것은 부단한 토론과 감시,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만 구축된다. 따라서 그 모든 논의의 시발점은 명확하다.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성찰이다. ◆ 필자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학과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2026.01.17 10:50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⑥-창작] 뇌는 고뇌하고, AI는 계산...'만듦'의 윤리는?

우리는 바야흐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시대라기보다 '눌러서 얻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복잡한 제작 과정 대신 간단한 입력과 몇 번의 클릭만으로 결과물을 얻는다. 단 한 줄의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미드저니(Midjourney)는 광고 시안, 콘셉트 아트, NFT 이미지 등을 다양하게 생성해 주며, 사용자는 그중 하나를 골라 업스케일하거나 변형하는 식으로 작업을 마무리한다. 음악 생성기 수노(Suno) 역시 스타일과 분위기를 자연어로 적어 넣기만 하면 가사와 멜로디, 편곡이 포함된 완성형 음원을 만들어 준다. ChatGPT, Claude, Gemini와 같은 언어 모델 또한 에세이 초안, 수업 자료, 심지어 생활기록부 문구까지 생성하며 교육 현장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생성형 AI의 결과물은 형식상 매끄럽고 활용도가 높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 의미의 '창작'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격렬한 논쟁이 이어진다. 새로운 표현 양식이라는 찬사와, 기존 작가의 스타일을 대량 모방한 저작권 침해물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더구나 우리는 그 결과물 앞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질문할 수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 놓인 이 결과물은, 과연 우리가 정의해 온 '창작'의 범주에 부합하는가?” 이 질문은 최소한 세 층위의 논점을 동시에 가진다. (1) 기술적으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모델의 작동 원리), (2) 인간의 창작 경험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뇌·몸·정서·의도의 결합), (3)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사고·책임·검증 능력). 1. 기술적 사실: 생성형 AI는 '의미'를 느끼지 않고, '형식'을 최적화 현재 널리 쓰이는 생성형 AI(텍스트·이미지·음악 등)는 학습 데이터에서 관찰된 패턴을 바탕으로, 주어진 입력(프롬프트)에 따라 출력 요소의 확률 분포를 추정하고 샘플링해 결과를 구성한다. 텍스트 생성의 경우 다음 토큰 예측이 자주 사용되며, 이미지 생성에서는 확산(diffusion) 모델처럼 노이즈를 단계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 주류다. 음악 생성 역시 시간축 상 패턴을 확률적으로 모델링하나, 자회귀·확산 등 다양한 기법이 공존한다. 핵심은 이 과정에 의미를 '체험하는 주체'의 '내적 경험'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모델이 '슬픔'을 산출할 때, 그것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자료 안에서 '슬픔'이라는 맥락과 강하게 연결된 표현·구조·전개를 통계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생성형 AI는 산출물의 의미론적 진위를 스스로 보증하지 못하며, 소위 '환각(hallucination)'-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진술-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확률적 적합성'을 목표함수로 삼는 산출 방식의 필연적 결과다. 이 지점에서 존 설(John Searle)의 '중국어 방 논증(Chinese Room Argument)'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설은 인간이나 동물의 '의도성'을 뇌의 생물학적 인과 작용의 산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의도성을 갖추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한다(Searle, 1980). 중국어 방 안의 사람이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규칙(프로그램)에 따라 기호를 조작해 완벽한 답변을 내놓는 것처럼, AI 역시 '다음 토큰 예측'이나 '확산 노이즈 제거'와 같은 구문 처리로 의미를 생성할 뿐이다. 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조작이 '관찰자 상대적' 의미만 만들어낼 뿐, 주관적 체험이나 본질적 이해는 결여되어 있다. 환각 현상은 바로 이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주관적 경험(qualia)'의 부재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박쥐가 되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What Is It Like to Be a Bat?)'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는 인간이 박쥐의 반향 정위(echolocation) 시스템과 신경 구조를 완벽히 파악한다 해도, '박쥐가 박쥐로서 느끼는 그 느낌', 즉 주체적 관점은 결코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Nagel, 1974/2024). 이는 AI가 인간의 감정 표현을 완벽하게 모방한다 해도, 그 내면에는 아무런 '느낌'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또한 AI가 '슬픔' 패턴을 확률적으로 재현하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과 연결된다. 과학적 객관화가 주관성을 생략한다는 그의 비판은 생성 AI의 통계 모델링이 체험 없는 산출로 한정됨을 드러낸다.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차머스는 인지나 행동과 같은 기능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쉬운 문제'와,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주관적 경험을 설명하는 '어려운 문제'를 엄격히 분리했다(Chalmers, 1995). 비록 AI가 다음 토큰 예측을 통해 인간의 창작 행위를 기능적으로 흉내 낼지라도, 이는 여전히 '쉬운 문제'의 영역에 머물 뿐이다. 차머스의 지적처럼 기계적 연산이 왜, 어떻게 내적 경험을 수반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AI 산출물은 의미 체험 없는 확률 최적화의 결과물이며, 환각 현상 역시 이러한 구조적 공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현대 생성형 AI의 또 하나의 기술적 핵심은 잠재표현, 잠재공간이다. 많은 생성 모델은 관측 데이터(텍스트·이미지·오디오)를 직접 다루기보다, 학습을 통해 얻은 압축된 고차원 표현 공간(잠재공간)에서 데이터의 구조를 모델링하고 그 공간에서의 변환을 통해 출력을 생성한다. 이 공간은 사람이 정의한 '개념'이 그대로 저장된 지도가 아니라, 데이터 분포를 재현하기에 유용한 특징들의 좌표계가 학습된 결과이며, 우리는 그 일부 방향이나 영역을 사후적으로 '스타일', '주제', '구도' 같은 개념으로 해석한다(Bengio, Courville, & Vincent, 2013). 그 결과, '반 고흐 풍'과 '서울 야경'처럼 서로 다른 특성은 모델 내부 표현에서 조건, 특징 결합, 또는 표현 조작(보간·가중 결합·크로스어텐션을 통한 결합) 형태로 함께 반영될 수 있고, 이에 따라 두 특성이 결합된 새로운 변형이 생성될 수 있다(Radford, Metz, & Chintala, 2015). 다만, 이러한 결과는 '영감'이나 '주체적 체험'의 산물이라기보다, 학습된 표현 체계 안에서의 계산 가능한 조합과 샘플링에 가깝다. 기술적으로는 놀랍지만, 그 놀라움은 '경험하는 주체'의 존재에서 오기보다 표현이 수학적으로 모델링되고 조작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2. 신경윤리학적 진단: 인간 창작은 신체성과 정서 포함 '경험 기반 행위' '창작'을 결과물만으로 정의하면, AI도 창작자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통상 창작이라 부를 때에는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의 성격-의도, 선택, 갈등, 수정, 책임-까지 포함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과 AI 사이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첫째, 신체성(Embodiment)과 정서(Emotion)의 역할이다. 인간의 인지는 뇌만의 작동이 아니라, 감각·운동·자율신경계 반응 등 몸 전체와 얽혀 있다. 창작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 경험의 흔적(기억), 감각의 편향(어떤 소리·색·리듬에 더 민감한지), 그리고 정서적 평가(좋다/싫다, 맞다/틀리다, 불편하다/아름답다)를 동원한다. 이때 정서는 부수적 장식이 아니라 주의를 배분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선택을 강화/억제하는 조절 기제로 기능한다. 신경과학적으로도 정서와 의사결정은 분리되기 어렵다. 예컨대 편도체는 위협·정서적 중요도와 관련된 처리에 관여하고, 전전두엽 영역들은 계획, 억제, 가치 평가, 사회적 판단 등과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특정 뇌 부위 = 단일 기능'처럼 단순화하면 과학적으로 부정확해질 수 있다. 뇌 기능은 네트워크로 작동하며 개인차도 크다. 그럼에도 최소한 인간의 창작이 신경계의 정서·가치 평가 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둘째, '고통 없는 창작'이 갖는 본질적 함의다. 이를 단순히 감성적 비유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엄격히 정의하자면, 이는 AI에게 통증이나 쾌감, 불안과 같은 주관적 경험(qualia)이 근원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AI의 산출물에는 대상을 향한 '체험적 지평'이나 '절실함'이 담길 수 없다. 반면, 인간의 창작은 다르다. 대다수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 타인의 시선, 윤리적 책임이라는 정서적 압박을 실시간으로 감각하며 창작에 임한다. 그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표현을 다듬고 논지를 결정한다. 필자 역시 이 짧은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무수한 고민과 망설임,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필자에게 삶의 깊이를 성찰하는 법을 일깨워준 시인, 윤동주의 고백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바로 그 '쉽게 쓰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생략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서만 비로소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적인' 의미에 도달한다. 이와 달리, AI는 그러한 부끄러움을 '경험'하지 않으며, 오직 목적함수(확률 최대화)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계산할 뿐이다. 즉, 차이는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어떤 '내적 고통'과 '책임의 무게'를 통과해 나왔는가에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신경윤리학적 질문과 맞닿는다. 고뇌와 책임이 소거된 산출물에, 과연 인간의 창작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핵심 쟁점이다 3. 교육적 과제: 인지적 위임(Cognitive Offloading) 범위와 한계 AI가 교육에 들어오는 순간, 가장 현실적인 위험은 '부정행위' 그 자체보다도 '사고 과정의 외주화'다. 인간은 본래 계산기, 검색엔진, 내비게이션처럼 외부 도구에 인지를 위임해 왔다. 문제는 위임이 나쁘다는 데 있다기보다 '무엇을 위임'하고 '무엇을 유지'할지에 대한 메타인지적 설계가 부재할 때 발생한다. AI가 글의 개요를 잡아주고 요약해 주면 학생은 빠르게 결과를 얻지만, 동시에 구조화 능력 즉, 정보를 묶고 위계를 만드는 능력을 덜 훈련할 수 있다. AI가 근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면, 학생은 출처를 점검하지 않은 채 사실성 검증의 습관을 잃을 수 있다. AI가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어 주면, 표현은 좋아지지만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와 같은 사유의 흔적이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AI 사용 금지/허용'의 단순 규범을 넘어, 인지적 위임의 '경계'를 학습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초안 생성은 허용하되, 근거 자료의 출처 확인과 반례 제시는 내가 한다' 같은 식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답하는 능력'에서 나아가 '질문하고 검증하는 능력'을 지향해야 한다. AI는 기본적으로 응답 시스템이다. 그래서 인간의 차별점은 '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커진다. 여기서 말하는 질문 능력은 단순히 프롬프트를 길게 쓰는 기술이 아니다. 학술적으로는 무엇을 알고 싶은지, 어떤 전제 위에서 논지를 전개하는지, 무엇을 근거로 참/거짓 혹은 타당/부당을 판정할지, 자신의 결론을 흔들 수 있는 사례를 의도적으로 찾는 능력 등이 요구된다. 따라서 미래 교육의 핵심은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AI가 낸 답을 평가·교정·재구성하는 능력이 된다. '이 문장이 그럴듯한가?'를 넘어 '이 주장에 필요한 근거는 무엇이며, 어떤 반례가 가능한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훈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4. 윤리와 책임: 표절 논쟁을 넘어 '행위자성'과 '가치'로 저작권과 표절은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책임의 귀속이다. AI는 법적·도덕적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행위자(agent)로 간주되지 않는다. 즉, AI 출력이 사회적 피해를 만들었을 때(허위정보 확산, 차별 강화, 명예훼손 등) 'AI가 그랬다'는 말은 설명이 될 수 있어도 책임의 종결점이 될 수는 없다. 책임은 모델을 설계·배포한 주체, 사용한 주체, 검증·감독의 의무를 가진 제도 쪽으로 돌아온다. 또한 생성형 AI는 학습 데이터의 분포를 반영하기 때문에, 데이터에 존재하는 편향(bias)-성별·인종·지역·계층·문화에 대한 불균형한 재현-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는 기술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치의 문제다. 어떤 출력이 '통계적으로 흔한 표현'이라 해도, 그것이 곧바로 '윤리적으로 정당한 표현'이 되지는 않는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규범 판단이며,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 판단을 회피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5. 결론: AI는 생성하고,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며 책임져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지금 눈앞에 놓인 이 결과물은, 과연 우리가 정의해 온 '창작'의 범주에 부합하는가?” 기술적으로는 AI가 분명히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한다. 그러나 학술적·윤리적 의미에서의 창작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의도, 경험, 가치 판단, 검증, 책임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현재의 생성형 AI는 창작의 일부 기능(형식적 산출, 변형, 결합)을 매우 잘 수행하지만, 의미 부여와 책임의 층위를 스스로 수행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버튼을 누르는 법'이 아니라, '버튼이 내놓은 결과를 사실과 가치의 기준으로 검증'하고, '자신의 관점과 책임을 결합해 재구성'하는 법이다. AI는 계산을 고도화하고, 인간은 그 계산의 산출물에 대해 '사유'하고 '판단'한다. 이 역할 분담을 명료하게 할 때, 기술은 인간의 창작을 대체하는 위협이 아니라, 인간의 창작을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창작인가, 변형인가?'를 넘어, '누가 책임지는가?'를. 오늘의 질문에 단답을 내려보자. 기술적으로 생성형 AI는 확률적 모델로서 학습 데이터의 패턴을 재구성한다. 형식적으로 결과물은 새로울 수 있다. 윤리적으로 창작은 결과물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고 책임지는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AI가 창작하는가?'가 아니라, 'AI의 산출물을 창작으로 인정할 때, 누가 어떤 책임을 지는가?' 우리는 기술을 '숭배'하거나 '혐오'할 필요가 없다. 다만 기술이 만들어낸 결과물 위에서 권리와 책임의 배치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참고문헌 Bengio, Y., Courville, A., & Vincent, P. (2013). Representation learning: A review and new perspectives. IEEE transactions on pattern analysis and machine intelligence, 35(8), 1798-1828. Chalmers, D. J. (1995). Facing up to the problem of consciousness.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2(3), 200-219. Nagel, T. (1974/2024). What is it like to be a bat?. Oxford University Press. Radford, A., Metz, L., & Chintala, S. (2015). Unsupervised representation learning with deep convolutional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arXiv preprint arXiv:1511.06434. Searle, J. R. (1980). Minds, brains, and progra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3), 417-424. ◆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2026.01.03 15:26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⑤-판단]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나

1. 자율주행, 운전석은 비어도 책임의 자리는 남는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와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일부 미국 도시의 도로에서는 정해진 운행 구역 내에서 운전석에 사람이 타지 않는 레벨 4 자율주행 로보택시가 실제로 운행 중이다. 알파벳 산하 웨이모(Waymo)는 피닉스·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로스앤젤레스에서 자사 호출 서비스인 '웨이모 원(Waymo One)'을 통해 각 서비스 구역 내에서 원칙적으로 24시간 이용 가능한 자율주행 호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안내한다. 오스틴과 애틀랜타에서는 우버(Uber) 앱을 통해 웨이모의 완전자율주행 차량을 호출할 수 있도록 제휴 서비스가 2025년 초부터 단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우버는 이들 차량이 서비스 구역 내에서 이용 가능한 형태로 제공된다고 설명한다(CNBC, 2025).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상암 일대에서는 시민이 전용 앱(TAP!)으로 호출해 탑승하는 자율주행 서비스가 운영돼 왔고, 청계천에서는 청계광장과 광장시장 사이 구간을 오가는 전통적인 운전대가 없는 자율주행 셔틀 '청계A01'이 시민 탑승 형태로 운행되고 있다. 여의도에서는 국회 일대 약 3.1km 구간을 순환하는 자율주행 순환버스가 도입돼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된 바 있다. 특히 심야에는 합정역과 동대문역 사이 중앙버스전용차로 9.8km 구간을 오가는 '심야 A21' 자율주행버스가 정기 운행에 들어갔는데, 서울시는 이를 '세계 최초의 정규 심야 자율주행 시내버스'로 소개한 바 있다. 운전석에는 비상 대응을 위한 안전요원이 탑승하되, 주행의 중심은 자율주행 시스템이 맡는 구조로 설계·운영되고 있다(Korea.net, 2023). '미래의 기술'로만 여겨졌던 자율주행이 출근과 귀가, 공항과 도심을 잇는 일상의 교통망 속으로 점차 편입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편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운전대는 오랫동안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상징해 왔다. 그런데 운전석이 비어 있는 차량이 도로 위를 달리는 순간,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한 개인의 직관이 아니라 확률과 비용을 계산하는 시스템이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기술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이미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가치의 질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자율주행이 던지는 윤리의 질문은 운행이 시작된 이후가 아니라, '설계의 순간'부터 시작된다. 인간 운전이 가장 예민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돌발 상황'이다. 우리는 빨간 불에 멈추고 초록 불에 가는 규칙을 배운다. 그러나 실제 도로는 규칙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갑자기 뛰어드는 보행자, 예상치 못한 급정거, 비·안개·야간 시야처럼 변수로 가득한 상황에서 인간은 오랫동안 직관과 경험에 기대 즉각 반응해 왔다. 이 판단은 논증보다 빠르고, 계산보다 먼저 움직인다. 그러나 자율주행으로 전환되는 순간 문제의 구조가 달라진다. 돌발 상황에서의 반응은 더 이상 개인의 반사 신경이 아니라, 사전에 설계된 규칙과 가중치, 위험 임계값이 조합된 시스템의 선택이 된다. 다시 말해 '발생하면 반응'하던 인간의 방식이, '발생하기 전에 어떻게 처리할지'를 미리 정해 두는 방식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실이 있다. 운전석은 비어 있어도 판단의 주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주체가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존재에서, 설계·운영·규정·코드로 분산된 형태로 바뀔 뿐이다. 그렇기에 자율주행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라기보다, 도로 위에서 생명과 위험을 배분하는 하나의 알고리즘적 판관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고의 순간 차량은 누구를 우선 보호할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표정도 목소리도 없다. 무엇보다 책임을 지는 단일한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이 논의의 종착지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다. 자율주행이 확산될수록 핵심 쟁점은 '얼마나 더 편리한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떤 책임을 지는가'로 이동할 것이다. 도로 위의 자율주행차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계가 주행을 맡는 시대에, 책임의 운전대는 과연 누구의 손에 쥐여 있어야 하는가. 2. 트롤리 딜레마의 공학적 번역: 윤리의 코드화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는 1967년 영국 철학자 필리파 풋(Philippa Foot)이 '낙태의 문제와 이중효과 원리(The Problem of Abortion and the Doctrine of Double Effect)'에서 제시한 사고실험에서 비롯됐다. 이 실험의 원형은 통제 불능의 전차 운전사가 다섯 명이 있는 선로로 향할 때, 방향을 틀어 다른 선로의 한 명을 희생시키는 선택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고전적 딜레마가 이제는 철학 교과서를 넘어 공학 연구소의 화이트보드로, 그리고 도로 위의 자율주행차 알고리즘 속으로 옮겨왔다. 예를 들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율주행차가 그대로 직진하면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5명을 칠 위험이 있고, 급히 방향을 틀면 차량 안의 탑승자 1명이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되는 식의 변형된 '트롤리 상황'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MIT 연구진은 온라인 플랫폼인 '모럴 머신(Moral Machine)'을 통해 자율주행차가 이와 유사한 극단적 상황에서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희생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직관과 선택을 수집했다. 이 실험은 자율주행차의 윤리 알고리즘이 기술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까지 반영해야 하는 집단적 도덕 판단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제 시선을 개인의 판단으로 돌려 가상의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인간 운전자라면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순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거의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릴 것이다. 법 역시 이러한 긴급 피난 상황에서의 본능적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언정 법적 책임은 끝까지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AI는 다르다. AI에게는 '본능'이 없다. 물론 '본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또 다른 논쟁의 장을 열 문제다. 이 논의를 잠시 옆에 두고, 다시 문제의 장면을 떠올려 보자. AI는 오직 입력된 목적 함수와 그것을 극대화·최소화하려는 최적화 과정만 존재한다. 따라서 AI 개발자는 이 잔인한 선택지를 결국 코드의 언어로 번역해 넣어야 한다. ■ IF 보행자 사망 확률 > 탑승자 사망 확률 THEN 핸들 유지? ■ IF 보행자가 노인이고 탑승자가 아이라면, THEN 가중치는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 이렇게 'if-then'의 조건문으로 구현된 순간, 선택은 더 이상 즉흥적인 본능이 아니라, '사전에 설계된' 알고리즘적 판단이 된다. MIT 미디어랩의 '모럴 머신(Moral Machine)' 프로젝트는 전 세계 233개 국가 및 지역에서 수백만 명의 참여자로부터 약 4천만 건의 도덕적 선택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 연구는 자율주행차의 윤리적 판단에 대해 단일한 형태의 '보편 윤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는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선택'과 같은 강한 공통 경향이 관찰되었으나, 국가와 문화권에 따라 그 선호의 강도와 세부 패턴은 달랐다. 예컨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서구권에서는 다수를 살리는 선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 반면,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연령에 따른 선호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보행 규칙 준수 여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관찰되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을 보호하는 선택이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상관관계도 보고됐다(박형빈, 2022). 이는 심각한 '윤리적 표준화(Ethical Standardization)'의 문제를 낳는다. 실리콘밸리 개발자가 설계한 윤리 알고리즘이 서울 도로와 뉴델리 도로에 동일한 규칙과 우선순위로 적용되어야 하는가? 혹은 애초에 그렇게 적용될 수 있는가? 교통 환경과 법규, 위험 분포, 그리고 '무엇을 먼저 보호할 것인가'라는 가치 서열이 서로 다름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기술이 국경을 넘을 때, 그 기술에 내장된 윤리관이 편의와 효율의 외피를 두른 채 타자의 규범을 밀어내는 '문화 제국주의'로 작동할 위험은 없는지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3. 리스크 할당(Risk Allocation): 이기적인 자동차를 원하십니까? 자율주행의 도덕적 결정은 전통적 트롤리 딜레마를 넘어, 도로 이용자들 사이에 '위험을 누구에게, 얼마나 배분할 것인가'라는 위험 분배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독일에서는 연방교통디지털인프라부(BMVI, 현재 BMDV로 변경)가 설치한 '자동화·연결주행 윤리위원회(Ethics Commission on Automated and Connected Driving)'가 2017년 6월 보고서 형태로 20개 윤리 규칙을 발표했고, 연방정부는 이를 토대로 관련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불가피한 위험 상황에서도 인명 피해 회피가 재산 피해 회피보다 항상 우선이며, 연령·성별·신체적/정신적 특성 등 개인적 속성에 따라 사람 생명을 차등 평가(가중치 부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Luetge, 2017). 지극히 칸트적인, 인간 존엄성을 최우선에 둔 원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 논리는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딜레마'에 봉착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회에는 전체 희생을 최소화하는 공리주의적 자율주행차(Utilitarian Car)가 필요하다"고 답한다.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하는 차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당신은 어떤 차를 사겠습니까?"로 바꾸면 태도는 돌변한다. 사람들은 '나와 내 가족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차(Egoistic Car)'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박형빈, 2021). 내가 탄 차가 남을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시킨다면, 그 차를 돈 주고 살 소비자는 없다. 제조사는 이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비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코딩하면 도덕적으로 비난받고, 공익을 최우선으로 코딩하면 시장에서 외면받는다. 과연 이 '죽음의 수학'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4. 블랙박스 속의 책임 공백: 누가 죄인인가? 더 큰 문제는 현재의 AI 기술이 딥러닝(Deep Learning) 기반이라는 점이다. 딥러닝은 데이터 패턴을 스스로 학습한다. 수백만 킬로미터 주행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왜 특정 상황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는지, 개발자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를 '블랙박스(Black Box) 문제'라 한다. 만약 AI가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 인간 운전자들의 미세한 편향 예를 들면, 자율주행 시스템이 특정 인종의 보행자에게 더 늦게 반응하는 패턴을 데이터에서 그대로 학습해 사고를 냈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데이터를 충분히 정제·검증하지 않은 개발사인가, 편향된 운전 습관과 환경을 데이터로 축적해 온 사회인가, 관리·감독 의무를 다하지 않은 차주인가, 혹은 이러한 위험을 예견하고도 기준과 감독을 마련하지 못한 국가인가. 책임의 주체가 흐려지는 이른바 '책임의 공백(Responsibility Gap)'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기이한 법적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알고리즘이 그랬습니다"라는 말은 현대판 면죄부가 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 뒤에 숨은 '자본의 논리'를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조차 비용 계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유튜브와 뉴스를 통해 이미 학습했다. 더 큰 문제는 '도덕적 아웃소싱(Moral Outsourcing)'의 징후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도덕적 판단을 기계나 운에 맡겨버림으로써,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다. 교육학자로서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도덕적 판단은 뇌의 전두엽(prefrontal cortex, PFC)이 이성, 감정, 기억, 사회적 맥락을 치열하게 통합해 내리는 고도의 인지 활동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고뇌'라고 부른다. 그러나 판단을 기계에 위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인간의 '도덕적 근육(Moral Muscle)'은 퇴화한다. 갈등 상황을 회피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알고리즘 탓으로 돌리는 수동적 인간상이 고착화될 수 있다. 따라서 AI 윤리 교육은 코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기계가 답을 줄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멈춰 서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아닐까. 5. 나오며: 기술에게 도덕적 권한을 이양하지 말아야 자율주행 기술은 분명 인류에게 축복이 될 잠재력이 있다. 졸음운전, 음주운전, 보복운전 같은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수많은 비극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사고율 0%'가 달성되지 않는 한,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어야 하는 비극적인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이제 이 칼럼의 제목이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그 권한은 특정 테크 기업의 CEO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코드를 짤 수는 있어도, 생명의 가치를 정의할 권리는 위임받지 않았다. 또한 기계에게 '알아서 최적화하라'고 떠넘겨서도 안 된다. 그 기준은 불완전하더라도 시민 사회의 치열한 숙의와 법적 논의, 그리고 끊임없는 윤리적 성찰을 통해 바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기술은 운전을 대신할 수 있지만,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빈 운전석에 앉아야 하는 것은 투명인간이 된 알고리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알고리즘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판단'하고 '합의'해 나가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단 지성'이어야 한다.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누빌 때, 우리는 그 자동차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기계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준엄한 책무다. ◆ 참고문헌 박형빈 (2022). 『인공지능윤리와 도덕교육』. 씨아이알. 박형빈 (2021). 자율 주행 차량 (AV) 의 트롤리 딜레마 문제와 AI 윤리교육의 과제. 한국초등교육, 32, 101-119. Luetge, C. (2017). The German ethics code for automated and connected driving. Philosophy & Technology, 30(4), 547-558. ◆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2025.12.27 21:26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④-몸과 관계] AI는 인간의 고독을 구원할 수 있는가?

1. 문제 제기: 초연결 시대, '계산된 위로'와 '존재의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된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실존적 고립'을 앓고 있다. 늦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 속 AI 챗봇에게 남들에게 하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디스토피아 소설 속 장면이 아니다. AI는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으며, 오직 나만을 위해 최적화된 '계산된 위로'를 즉각적으로 건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갈등도, 상처도 없는 이 매끄러운 알고리즘의 친밀감이 과연 거칠고 투박한 인간의 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가? 이는 필자가 그간 연구를 통해 꾸준히 천착해 온 'AI 시대의 윤리와 인간성'에 대한 화두다. 기술이 인간의 정신적 영역 깊숙이 들어온 지금, 우리는 편리함을 넘어 '존재의 진실'을 묻는 성찰의 자리에 서야 한다. 기술은 우리의 고독을 '마취'할 수는 있어도, '치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우리의 실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가? 2. 인간다움의 첫 번째 조건: 텍스트 너머의 '다층 현실'을 읽어내는 눈 AI 시대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눈앞에 주어진 정보값 즉,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 이면에 겹겹이 쌓인 맥락과 역사, 관계와 감정의 지층을 함께 읽어내는 '다층 현실의 감식력'을 기르는 일이다. AI는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탁월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왜 하필 지금, 왜 이 사람에게, 왜 이런 떨리는 목소리로 전달되었는가”라는 고유한 맥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소통은 비언어적 눈빛, 침묵의 길이, 공유된 과거의 기억들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작용이다. 이러한 다층적 층위를 끝까지 따라가 보려 노력할 때, 비로소 사건은 데이터가 아닌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한 이러한 통찰은 서로 이질적인 영역을 엮어내는 '조합적 상상력'과 맞물려야 한다. 과학과 예술, 차가운 데이터와 뜨거운 이야기, 필연적 규칙과 우연한 사건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여 전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영토다. 기존의 패턴을 학습하여 최적의 값을 내놓는 AI와 달리, 인간은 패턴을 파괴하고 낯선 것들을 충돌시킴으로써 창조의 가능성을 연다. 우리 인간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잠재된 능력이 있다. 3. '관계'와 '서사': 삶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성찰적 주체' 인간다움은 추상적인 도덕 법칙을 암기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과 상처, 나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칠 파장을 시뮬레이션하는 '관계적 도덕 감수성'에서 드러난다. 필자가 강조하는 도덕 교육의 핵심처럼,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가?”를 묻는 것을 넘어 “이 선택이 타인의 삶에 어떤 무게로 닿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섬세함이야말로 기계적 연산과 구분되는 인간의 품격이다. 이것은 마사 누스바움이 강조한 '공감적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사회이자(박형빈, 2021 참조), 존 롤스가 꿈꾸었던 '질서 정연한 사회'를 지탱하는 시민적 우애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파편화된 사건들을 엮어 자신의 삶을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서사 구성력'을 지닌 존재다. AI에게 데이터는 축적의 대상이지만, 인간에게 경험은 '해석'의 대상이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 환희와 상처를 모두 재료 삼아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써 내려간다. 과거의 원인보다 미래의 의미를 묻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목적론적 심리학'이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박형빈, 2015 참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데이터로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그 경험을 재료 삼아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인가 하는 '창조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성찰 능력'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당연한 전제로 삼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하는가?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를 묻는 메타인지적 태도야말로 인간을 고정된 알고리즘이 아니라, 스스로를 갱신하고 업데이트하는 실존적 주체로 만든다. 그리고 '몸'을 지닌 실존하는 나는 실체로서 타인과 만나 '관계성'을 형성한다. 4. 공명과 협력: 타인의 고통에 '떨림'으로 응답하는 몸 인간 지성의 또 다른 핵심 축은 타인의 내면에 '정서적으로 공명(Resonance)'하는 능력이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이해가 아니다. 논리적 설명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타인의 두려움, 상실감, 기쁨의 결을 나의 몸이 함께 떨림으로 느끼는 '신체적 동조'다. 비록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마음의 온도를 존중하고 곁에 머물려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같이 있음'의 가치를 체험한다. 뇌신경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정서적 전염'을 통해 발생하기도 한다(박형빈, 2017 참조). 이제 인간은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 서 있다. 바로 '협력적 지성'이다. 인공지능을 단순히 인간을 대체할 잠재적 위협이나 도구로만 대하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이 가진 감수성과 통찰을 증폭시켜 줄 파트너로 AI를 초대하되, 주도권을 잃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을 기계에 위임하고, 무엇을 인간이 끝까지 책임질 것인가를 분별하면서 인간과 기계가 함께 새로운 형태의 '공동 지능'을 모색할 때, 우리는 '인간지능' 자체의 잠재력 또한 재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또 다른 지점은 살아있는 인간들과의 관계 맺음이다. 5. 복제 불가능한 인격의 성채: 경험, 유한성, 책임 그렇다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만의 성역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인격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경험, 유한성, 책임—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경험은 데이터가 아니다. 인간은 몸을 통해 시간 속에서 세계를 '살아내는' 존재다. 같은 음악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되는 것은 그 음악이 개인의 몸과 역사에 남긴 흔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험은 환원 불가능한 질적(Qualia) 차원이다. 질적 경험 즉 '퀄리아(Qualia)'는 제 3자 관찰이나 데이터 분석으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오직 1인칭 시점 안에서만 성립하는 내밀한 우주다(박형빈, 2013 참조). AI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생리적 반응 패턴을 학습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타이스의 명상곡(Meditation in Thais)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선율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 섬세한 아름다움의 느낌 그 자체를 '겪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필자는 실제 타이스의 명상곡을 들을 때마다 가슴 깊이 울려 퍼지는 깊은 감동을 겪는다. 둘째, 유한성이다. 인간 삶의 절박함과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내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은 선택의 무게를 바꾸고, 사랑을 애틋하게 만든다. AI는 전원이 꺼질 수는 있어도, 죽음을 '나의 종말'로 인식하는 실존적 불안을 갖지 못한다. 죽음이 없기에 삶의 의미 또한 구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지위와 소유를 넘어, 모든 인간을 '생명'이라는 이름 앞에 가장 겸허하고 평등하게 세우는 절대적 사건이 아닐까. 셋째, 책임이다. 타인의 취약한 얼굴 앞에서 “이 상황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느끼는 결단은 비용-편익 분석을 초월한 윤리적 도약이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부모, 위험에 처한 동료를 구하려는 손길은 계산된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책임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증명한다. 6. 결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 그리고 디지털 거울 너머의 진실 AI가 인간의 언어와 표정, 행동 패턴을 재현하는 기술(Deepfake, Digital Twin)은 앞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나의 온라인 흔적을 완벽히 학습한 AI가 나보다 더 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역량은 디지털 기술 활용 능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바로 '존재론적 리터러시(Ontological Literacy)'다. 이는 알고리즘이 빚어낸 매끄러운 '그럴듯함'과,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발산하는 투박하지만 생생한 '진실함' 사이의 미세한 경계를 식별해 내는 능력이다. 데이터는 나의 발화를 기록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을 뱉기 전 내가 겪었던 망설임의 침묵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알고리즘은 나의 선택 결과를 분석할 수 있지만, 갈림길 앞에서 느꼈던 내면의 갈등과 회한은 재구성하지 못한다. AI는 나를 통계적으로 모방할 수 있으나, 나를 대신해 아침의 불안을 견디고, 고통받으며, 죽음이라는 지평 앞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묻는 실존적 시간을 살아줄 수는 없다. 나의 몸, 그리고 타인과 맺는 관계성은 패턴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완전함이 있기에 유일하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진정한 존재는 차가운 디지털 거울 너머,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이 '몸'과 '시간' 속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AI 시대를 살아가며 잊지 말아야 할 인간 존엄의 마지막 보루다. 이 글을 맺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몸을 통해 숨 쉬고 감각을 경험한다. 데이터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 생생한 '있음(Being)'이야말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그리고 당신의 증명이다. ◆12회 연재 순서 1회(왜 지금, AI 윤리인가?):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 2회(존재론): 나를 닮은 AI는 또 다른 '나'인가? 3회(감정): 기계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4회(몸과 관계): AI는 인간의 친밀성과 관계성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5회(판단):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6회(창작): 생성형 AI의 창작은 '창작'인가, 변형인가? 7회(진실성):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8회(공정): 알고리즘은 왜 중립적이지 않은가? 9회(프라이버시와 정신적 자유): 생각이 데이터가 될 때, 자유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10회(인간 증강과 미래):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11회(책임) AI가 사고를 치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12회(공존과 인간 번영): AI 시대,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4회 참고문헌 박형빈(2013). 도덕성에 대한 뇌신경과학적 접근의 도덕교육적 함의. 『초등도덕교육』, 43, 141-194. 박형빈(2015). 뇌신경과학과 Adler 단기치료 (ABT) 기반의 상담 심리치료 프로그램. 『초등도덕교육』, 49, 179-214. 박형빈(2017). 통일교육의 사회신경과학적 교수방법-코호트(cohort) 통일 정서전염 (emotional contagion) 교육을 중심으로. 『윤리교육연구』, 46, 181-211. 박형빈(2021). Martha Nussbaum의 세계시민주의와 평화· 통일교육.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21(21), 47-64.

2025.12.20 14:48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 AI와 윤리③-감정] AI는 우리 마음을 읽는가, 계산하는가?

1,들어가며: 감정 인식 AI가 불러낸 오래된 질문, 알고리즘의 온기(溫氣) 오늘날 인공지능은 교실의 책상 위, 요양병원의 침대 맡, 그리고 스마트폰 속 가장 은밀한 대화창까지 내밀하게 스며들고 있다. 바야흐로 '정서 AI(Emotion AI)' 혹은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의 시대다. 이 분야의 이론적 토대는 MIT 미디어랩의 로절린드 피카드(Rosalind W. Picard)가 1997년 '감정 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본격 마련했다. 피카드는 감정을 불필요한 노이즈가 아니라 지능과 합리적 의사결정의 핵심 요소로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감정을 인지하고 해석하며, 의도적으로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컴퓨팅' 개념을 제안했다(Picard, 1997; 박형빈, 2025a). 그의 선언 이후, 감정은 더 이상 시인(詩人)의 언어만이 아니라 공학자와 연구자의 주요 변수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현재 이 기술은 주로 연구 및 시범 도입 단계에서 활용 가능성이 검토되고 있다. 일부 교육·훈련 현장에서는 카메라와 웨어러블 센서로 학생의 시선과 생체 신호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해 집중도와 정서 상태를 교사에게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을 시험 운영 중이다. 이는 '맞춤형 교육'이라는 장밋빛 전망과 '은밀한 감시'라는 윤리적 우려가 교차하는 지점이다(박형빈, 2025b). 돌봄 영역에서의 변화 또한 뚜렷하다. 최근 메타분석 연구들에 따르면, 장기요양시설 등 일상 공간에 도입된 사회적 로봇은 노인의 고독감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시키고 우울감 완화에도 확실한 효과를 보이는 비약물적 중재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Mehrabi & Ghezelbash, 2025) 이와 같은 로봇들은 기계라기 보다는 따뜻한 대화 상대이자 감정의 동반자로서 외로움의 빈틈을 메우며 청소년과 노년의 일상에 배어들고 있다. 예를 들면, 'Replika' 같은 감정 대화형 AI는 사용자의 미묘한 기분 변화를 읽고 공감 어린 언어를 조율해 내놓으며(Chin, Baek, Cha, & Cha, 2025), 인간의 외로움과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종의 '디지털 위로자'로 떠오르고 있다. 질적 연구에서 많은 사용자가 이 챗봇을 '안전한 대화 상대'나 '정서적 지지의 원천'으로 인식하며, 어느 정도 외로움 감소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Ta et al., 2020). 반면, 부작용도 존재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챗봇에 더 쉽게 정서적으로 끌리고, 강한 애착을 가진 일부 사용자에게서 현실 인간관계의 회피·감정 의존·정신 건강 위험 신호가 함께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Zhang et al., 2025). 결국 이러한 기술은 인간 소외의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던지는 한편, 양질의 관계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고독을 더욱 가중하고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대화형 AI는 인간의 고뇌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용자의 기분에 맞춰 정교하게 조율된 공감의 언어를 건네며, 인간 소외의 빈틈을 시나브로 파고든다. 이 모든 현상은 감정 인식 AI와 돌봄 로봇이 먼 미래의 공상과학이 아닌, 지금 우리의 정서적 생태계에 깊이 관여하는 '현재형 기술'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기술 효용이 입증될수록,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이고 불편한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기계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술 사회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그의 저서 '외로워지는 사람들(Alone Together)'에서 우리가 로봇에게 느끼는 유대감을 '동반자의 환상(Illusion of Companionship)'이라 경고한 바 있다(Turkle, 2011). 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기계가 건네는 위로는 입력된 데이터에 대한 출력값일 뿐, 존재론적 '공명'이 아니다. 즉,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공감의 수행'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데이터로 정교하게 가공된 위로가 우리 마음의 텅 빈 방을 채울 때, 그것을 오롯이 가짜라고 단정하며 거부할 수 있을까? 감정을 흉내 내는 알고리즘에게 우리는 마음의 빗장을 어디까지 열어주어야 하는가? 차가운 알고리즘이 건네는 따스한 온기 앞에 무기력하게 선 인류는, 지금 감정의 정의(定義)를 다시 써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2. 감정 계산의 시대: 데이터가 된 마음, 슬픔의 성분은 눈물만이 아니다 감정 컴퓨팅 또는 감정 계산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마음을 더 이상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가두지 않겠다는 공학적 선언과도 같다. 이 분야에서 감정은 해석 불가능한 내면의 신비가 아니다. 측정하고, 분류하며, 예측가능한 '데이터'일 뿐이다. 오늘날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해부하는가? 그 방식은 실로 집요하다. 연구실과 산업 현장에서는 인간의 모든 생체 반응을 변수로 치환한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과 침묵의 간극에서 불안을 읽어내고, 심박 변이도(HRV)와 손끝의 땀(피부 전도도)을 통해 스트레스 수치를 역산한다. 특히 시각 정보 처리 기술 발전은 인간의 얼굴을 감정의 지도로 바꾸어 놓았다. 이 기술적 시도의 강력한 이론적 배경에는 심리학자 폴 에크만(Paul Ekman)이 있다. 1970년대 그는 연구를 통해 분노, 혐오, 공포, 행복, 슬픔, 놀람이라는 6가지 '보편적 기본 감정'을 정립했고, 훗날 여기에 경멸을 더해 7가지 모델을 완성했다(Ekman, 1992; 박형빈, 2016). 에크만은 특정 감정이 특정 표정 근육의 움직임과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보았다. 예컨대, 오늘날 채용 면접 AI나 마케팅 분석 도구가 '지원자가 30%의 확률로 당황했다'라고 판정하는 근거가 바로 이 '고전적 정서 이론' 혹은 '보편적 표정 이론'에 빚을 지고 있다. 문제는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인간 감정의 심연은 더 깊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여기, 이 시점에서 되물어야 한다. 기계가 미세 근육의 수축을 감지해 '슬픔'이라는 라벨을 출력했을 때, 과연 기계는 슬픔을 아는 것인가? 더 나아가 기계는 우리의 내면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신호'와 '경험'의 결정적인 차이가 도드라진다.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리사 펠드만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그의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Emotions Are Made)'에서 감정은 고정된 회로의 반응이 아니라 뇌가 신체 상태와 과거의 경험,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종합해 구성해 낸 능동적 창조물이라 주장한다(Barrett, 2017; 박형빈, 2022). 똑같은 눈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벅찬 환희의 증거이고, 누군가에게는 무너지는 절망의 잔해다. 이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수치화된 데이터는 감정을 다루는 유용한 '도구'일 수는 있어도, 감정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도 안 된다. 감정은 뇌의 전기 신호나 안면 근육의 좌표값으로 환원될 수 없는, 기억과 관계 그리고 삶의 맥락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주관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수치'가 곧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우리의 '성급하고 게으른 확신'이다. 3. 감정 대화 챗봇: 위로와 의존 사이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부 사용자는 AI 챗봇과 결혼식을 올리거나, 실제 반지를 맞추는 등 사실상 연인·배우자 관계로 인식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South China Morning Post, 2025) 여기서 드러나는 핵심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정 없는 공감 표현이 실제 공감처럼 소비될 때 발생하는 의미의 혼란이다. 다른 하나는, 정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감정 시뮬레이션에 과도하게 의존할 위험이다. 우리는 감정은 '신체를 가진 존재'의 경험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경윤리학·감정 과학·도덕심리학은 공통적으로 감정을 단순한 정보 처리나 출력이 아닌, 신체·관계·문화가 엮인 경험으로 바라본다. 다마지오(Damasio)는 1999년 저서 '감정의 느낌(The Feeling of What Happens)'에서 뇌가 몸 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 프로토셀프를 구성하고, 이것이 자아 인식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도덕심리학 연구는 도덕적 판단의 상당 부분이 느낌과 직관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어떤 규칙이 더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이 상황을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와 닿는가?'와 같은 정서 경험에 깊이 의존한다. 이를 감정 AI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기준점이 나온다. 감정은 계산될 수 있어도, 경험되지 않으면 감정이 아니다. AI가 내놓는 감정 표현은 '출력'이지 '체험'이 아니다. 따라서 감정을 흉내 내는 존재의 말에 우리가 느끼는 위로는 '사용자의 진짜 경험'이지만, 그것을 상호적인 정서 관계라고 착각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4. 교육적 과제: '정서적 시민성'을 길러야 할 때 교실에서 학생들은 이미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AI가 저를 위로했는데, 그게 진짜 위로인가요?”, “사람한테 말하면 상처받을 수 있지만, AI는 무조건 제 편을 들어줘요. 이게 왜 나쁜가요?”, “AI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AI에 더 많이 털어놓게 돼요.” 이 질문들은 단지 'AI를 써도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관계·책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필자의 견해로, AI 시대 교육은 다음 두 가지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첫째, 감정의 본질을 구분하는 통찰력이다. 감정은 출력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사실, 감정 인식·시뮬레이션 기술이 감정의 '어떤 층위'만을 다루는지 이해하는 능력. 공감의 진위를 판별하는 비판적 문해력이다. AI의 공감 문장을 접했을 때, 그것이 어떤 데이터·알고리즘 구조에서 나오는지를 이해하고, '공감처럼 보이는 말'과 '책임을 지는 공감 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둘째, 관계적 책임을 유지하는 주체성이다. 편리한 기술을 인간관계의 완전한 대체재로 삼지 않고, 갈등·오해·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꾸준히 돌보려는 태도가 요구된다. 필자는 이를 '정서적 시민성(emotional citizenship)'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AI가 정서를 시뮬레이션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에게는 자신의 감정과 관계를 스스로 책임지는 시민적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이제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 5. 맺으며: 감정을 계산하는 시대, 감정을 살아내는 인간 되기 '감정 AI'는 정서적 지원의 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인간관계를 대체하는 중심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의 역할은, 인간의 정서를 '읽고 돕는 것'이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AI는 감정을 계산하고 흉내 낼 수 있지만, 수치로 표현될 수 없는 고통과 기쁨, 부끄러움과 책임감, 연민과 후회를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다. 결국 남는 질문은 이렇다. 감정을 '흉내 내는' 존재에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디까지 내어줄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경험의 멸종이자 감정 계산의 시대에 우리가 '감정을 살아내는' 인간으로 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윤리적 과제가 될 것이다. ◆12회 연재 순서 1회(왜 지금, AI 윤리인가?):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 2회(존재론): 나를 닮은 AI는 또 다른 '나'인가? 3회(감정): 기계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4회(몸과 관계): AI는 인간의 친밀성과 관계성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5회(판단):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6회(창작): 생성형 AI의 창작은 '창작'인가, 변형인가? 7회(진실성):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8회(공정): 알고리즘은 왜 중립적이지 않은가? 9회(프라이버시와 정신적 자유): 생각이 데이터가 될 때, 자유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10회(인간 증강과 미래):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11회(책임) AI가 사고를 치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12회(공존과 인간 번영): AI 시대,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윤리 및 인간 증강 윤리 · 생성형 AI 할루시네이션과 윤리교육 대응

2025.12.13 14:36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의 AI와 윤리②-존재론] 나를 닮은 AI는 또 다른 '나'인가?

1. 디지털 자아의 출현: '나'의 외주화는 가능한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인공지(AI)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도구'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사람의 말투를 따라 하고, 이미지를 그리며, 나아가 판단과 감정의 표현까지 흉내 내는 존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통계적 패턴 처리와 확률적 예측이다. 인간 존재의 전체 구조를 그대로 옮겨 심은 어떤 '대체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데드봇(Deadbot)', 이른바 '그리프봇(Griefbot)' 등장은 기술과 죽음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이 시스템은 고인이나 반려동물의 음성, 영상, 대화 기록, SNS 게시물 같은 디지털 흔적을 학습해, 가상 공간에 하나의 인격적 초상을 그려낸다. 가족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말을 건네고, 생전에 즐겨 하던 농담을 비슷한 맥락으로 되살리며, 남겨진 글과 발언을 바탕으로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까지 제시한다. 말 그대로 '부재하는 존재'와 나누는 대화를 시뮬레이션하는 셈이다. 일부 유가족은 이 챗봇과의 대화를 통해 심리적 위안을 얻었다고 말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고인을 실제로 되살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큰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Xygkou et al., 2023). 비슷한 흐름은 산업 현장의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에서도 관찰된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 세계의 설비나 공정, 조직을 가상 공간에 구현하고, 센서와 네트워크를 통해 일정한 주기와 정밀도로 상태를 동기화하는 기술이다. 고급 분석 기법,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이 결합하면서, 디지털 트윈은 이제 데이터를 보여주는 모니터를 넘어 의사결정을 돕고, 일부 영역에서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시스템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Milosevic & Van Schalkwyk, 2023).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디지털 트윈을 엮어 공장 전체, 도시 전체를 시뮬레이션하는 시도도 진행 중이다. 그 결과, 현실과 가상이 촘촘히 겹쳐지는 새로운 기술 환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흐름은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한다. “AI가 나의 말투, 기호, 과거의 선택 패턴을 고도로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을 때, 그 디지털 존재는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 효율성의 문제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디지털 자아(digital self)와 인격적 동일성(personal identity)이라는 철학의 오래된 난제를, 오늘의 데이터 시대라는 구체적 환경 속으로 다시 소환한다. 2. 테세우스의 배와 업로딩된 영혼: 동일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고대부터 논의되어 온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 역설은, 모든 부품이 조금씩 교체된 배를 여전히 같은 배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사고실험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 인간과 유사한 AI의 동일성을 사유하기 위한 강력한 비유적 틀을 제공한다. 한 인간의 동일성을 논할 때, 우리는 통상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축을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상정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존재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인 생물학적 신체는 잠시 괄호에 넣어 두고, 반응과 행위로 드러나는 정신에 초점을 맞춰 보려 한다. 한 사람을 가정해 보자. 그는 생의 말기에 자신의 대화 습관, 고민의 양상, 가족과의 추억, 가치관과 신념을 질문–응답 형식의 데이터로 남기고, 이를 특정 AI 시스템에 충분히 학습시킨다. 이후 이 시스템은 고인의 음성을 합성해 가족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안부를 묻고, 고인이 평생 즐기던 농담을 비슷한 맥락에서 되살려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정치적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고인이 남긴 저서와 논문, 기사에 담긴 입장을 토대로 일정한 방향의 판단을 제시한다. 이때 질문은 분명해진다. 이 AI는 고인의 인격과 삶의 연속선상에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고인을 통계적으로 모사한 정교한 장치에 불과한가? 이 상황은 자연스럽게 영화 '트랜센던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윌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의식을 컴퓨터로 업로딩하고, 이후 디지털 환경 속에서 부활한 듯 아내와 친구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상을,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윌이라는 동일한 인격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가? 트랜스휴머니즘을 옹호하는 일부 사상가들, 예를 들어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과 같은 인물은 인간의 핵심을 정보 패턴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이 정보 패턴을 충분히 정밀하게 추출해 기계 시스템에 업로드할 수 있다면, 일종의 '개인의 지속' 또는 '디지털 영속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내적 경험과 의식을 지나치게 '정보 구조'로만 환원한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의식과 의미를 단순한 데이터 구조와 연산 규칙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존 설(John Searle)의 '중국어 방(Chinese Room)' 사고실험은, 특정 기호에 규칙적으로 적절한 반응을 생성하는 시스템과 그 기호의 의미를 실제로 이해하는 주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규칙에 따른 입·출력의 적절성이 곧 의미 이해나 의식 경험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적당한 답변의 제공은 그것이 곧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음에 대한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가 어떤 개인의 말투와 반응 패턴을 매우 정교하게 흉내 내더라도, 그 내부에 '누가 경험하고 있는지', '누가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주체가 존재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필자는 이러한 디지털 복제물을 나의 표면적 흔적을 빌려 작동하는 일종의 '시뮬라크르(simulacrum)'로 이해한다. 곧, 그것은 나를 닮은 이미지이자 모사이지만,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나' 자체, 또는 독자적인 존재론적 주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3. 신체가 없는 자아는 가능한가: 신경과학이 밝힌 존재의 층위 AI가 인간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대체하기 어렵다는 직관은 현대 뇌신경과학과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한층 구체적인 근거를 얻는다. 특히 '체화된 자아(embodied self)'를 강조하는 연구들은, 자아와 의식, 감정이 단순히 뇌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전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자율신경계의 활동, 심장 박동과 호흡, 내장 감각과 같은 신체 내부 상태의 조절 과정이 감정 형성과 의사결정, 그리고 자아 감각의 형성에 핵심적인 토대를 제공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예를 들어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 땀이 나는 신체적 경험과 함께 "긴장된다"는 감정을 인식한다. 즉, 몸의 상태 변화는 단순한 부수적 반응이 아니라 감정과 자아 체험의 구성 요소이다. 현재의 AI 시스템은 센서 데이터를 이용해 심박수나 호흡을 측정하고 이를 시뮬레이션하는 모델을 구성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수치 변화가 '나의 긴장', '나의 두려움'으로 체험되는 것과 같은 주관적 경험, 곧 '살아낸 감정'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순 계산이나 확률 출력과 구분되는 층위다.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 역시 인간의 인지를 세계와 분리된 '머리 속 계산'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인지는 몸이 세계와 만나는 사건, 즉 지각과 행동, 몸의 방향성과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Merleau-Ponty, 1945; Merleau-Ponty, Landes, Carman, & Lefort, 201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아는 특정한 신체를 통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세계를 '살아내는' 과정의 산물이다. 현재의 디지털 시스템은 이러한 실질적인 체화와 생리적 유한성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따라서 AI가 생성하는 문장, 표정, 목소리는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럽고 위로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에 감각과 정동을 가진 주체가 없는 '느낌이 없는 출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AI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이 존재가 나를 진짜로 알고, 나를 위해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직관은 신체화된 자아가 지닌 진실성—몸과 시간, 관계 속에서 축적된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4.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 관계는 재현될 수 있는가 존재론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관계의 본질, 특히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재현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을 나에게 무한한 책임을 요청하는 윤리적 신호로 이해했다(Levinas, 1969). 타자의 연약함과 상처, 침묵과 호소는 나를 단순한 인지적 주체가 아니라 책임지는 윤리적 주체로 부른다. 여기에서 '얼굴'은 단지 시각적 형상이 아니라 고통받고 기뻐하는 타자의 '현존' 전체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기술로 AI에게 얼굴을 부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상의 아바타는 표정과 시선을 정교하게 모사하고, 음성 합성 기술은 따뜻한 어조와 억양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 얼굴 뒤에는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스템은 타자의 신음에 도덕적 부담을 느끼거나 책임을 자발적으로 떠안는 주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노년층 돌봄을 위해 설계된 AI가 "제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때, 그 문장은 외형상 다정하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은 상대의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타인의 취약함을 마주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받는 주체도 아니다. 이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관계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고통과 책임, 상호 취약성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인간관계가 지닌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다. 5. 융의 페르소나와 그림자: AI가 보지 못하는 인간의 또 다른 절반 현대의 생성형 AI는 인간을 '학습'할 때, 주로 디지털 환경에 남겨진 표면적 흔적을 이용한다. SNS에 게시된 사진과 글, 업무 이메일에 드러난 전문성, 인터뷰나 강연에서 사용된 인상적인 문장들이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무대에 제시된 '앞면'의 자아, 곧 페르소나(persona)를 중심으로 학습하는 셈이다.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의 진정한 성숙이 페르소나와 그림자(shadow)의 통합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Jung, 1959). '그림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두려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질투와 공격성, 과거의 상처, 모순된 욕망, 그리고 당사자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의 층위를 포함한다. 이 영역은 종종 드러내기 꺼려지거나 무의식 속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데이터 기반 AI가 이러한 그림자 영역을 직접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까? 표현되지 않은 두려움이나, 말로 남겨지지 않은 상처, 의식화되지 않은 욕망은 데이터셋에 포함되지 않으며, 설령 일부 단서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더라도 그것이 가진 전체적인 맥락과 체험적 의미를 그대로 재구성하기는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다. 통계적 모델은 행동 패턴으로부터 특정 성향을 추정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자기 삶을 반성하고 수용해 가는 내적 통합의 과정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AI가 어떤 사람을 매우 설득력 있게 흉내 내더라도, 그것이 포착하는 것은 '내가 대외적으로 보여준 나'의 정제된 버전에 가깝다. 이 디지털 초상은 유용한 요약이 될 수는 있지만, 인간 존재 전체, 특히 상처와 모순, 성장과 후회가 엮여 있는 총체적 자아를 완전히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술이 우리를 대체한다는 공포나 기술이 우리를 완성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넘어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AI가 닮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인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불완전함에서 시작되는 성찰, 유한성에서 태어나는 책임, 상처에서 우러나는 공감,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미묘한 결이다. 문득 초등학생 시절 나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던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이 귀가를 맴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는 완전히 재현될 수 없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기 때문에, 존엄하다. ◆ 참고문헌 -Jung, C. G. (1959).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R. F. C. Hull, Tra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51) -Levinas, E. (1969).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A. Lingis, Trans.). Duquesne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61) -Merleau-Ponty, M. (1945).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Éditions Gallimard. Merleau-Ponty, M. (2013). Phenomenology of perception (D. A. Landes, Trans.). Routledge. (Original work published 1945) -Milosevic, Z., & Van Schalkwyk, P. (2023, October). Towards responsible digital twins. In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nterprise Design, Operations, and Computing (pp. 123–138). Springer Nature Switzerland. -Xygkou, A., Siriaraya, P., Covaci, A., Prigerson, H. G., Neimeyer, R., Ang, C. S., & She, W. J. (2023, April). The “conversation” about loss: Understanding how chatbot technology was used in supporting people in grief. In Proceedings of the 2023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pp. 1–15). ◆12회 연재 순서 1회(왜 지금, AI 윤리인가?):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 2회(존재론): 나를 닮은 AI는 또 다른 '나'인가? 3회(감정): 기계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4회(몸과 관계): AI는 인간의 친밀성과 관계성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5회(판단):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6회(창작): 생성형 AI의 창작은 '창작'인가, 변형인가? 7회(진실성):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8회(공정): 알고리즘은 왜 중립적이지 않은가? 9회(프라이버시와 정신적 자유): 생각이 데이터가 될 때, 자유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10회(인간 증강과 미래):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11회(책임) AI가 사고를 치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12회(공존과 인간 번영): AI 시대,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2025.12.06 15:30박형빈 컬럼니스트

[박형빈 교수의 AI와 윤리①]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

인공지능(AI)와 윤리에 천착하고 있는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지디넷코리아에 '박형빈 교수의 AI와 윤리'를 주제로 매주 1회, 총 12회 연재한다. 이번 연재에서 박 교수는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균형, 성찰, 실천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지향한다. 기술이 가져오는 편의와 효용을 충분히 인정하되, 그에 수반되는 윤리적 부채를 냉철하게 검토해 치우침 없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한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넘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묻는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나아가 이러한 논의가 추상적인 철학적 논쟁에 그치지 않게 딥페이크, 자율주행, BCI(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등 구체적인 기술 사안에 적용 가능한 실질적 판단 기준을 제시, '실천'을 도모한다. 박 교수는 AI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야누스(New Janus)'라 말한다. 챗GPT와 딥페이크 등장은 혁신의 문을 열었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위험의 문도 함께 열었는 것이다. 이번 연재는 기술적 비관론이나 맹목적 낙관론을 넘어, '인간다움'과 '기술'의 상생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실천적 해법을 모색한다. AI 윤리와 교육적 통찰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AI에 대한 막연한 맹신이나 두려움을 '지혜로운 활용 역량'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다. 궁극적으로 온 국민의 디지털시민성과 AI 리터러시 역량 강화에 방점을 둔다. [편집자 주] ◆12회 연재 순서 1회(왜 지금, AI 윤리인가?):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 2회(존재론): 나를 닮은 AI는 또 다른 '나'인가? 3회(감정): 기계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4회(몸과 관계): AI는 인간의 친밀성과 관계성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5회(판단): 자율주행차의 도덕적 결정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6회(창작): 생성형 AI의 창작은 '창작'인가, 변형인가? 7회(진실성):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8회(공정): 알고리즘은 왜 중립적이지 않은가? 9회(프라이버시와 정신적 자유): 생각이 데이터가 될 때, 자유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10회(인간 증강과 미래):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11회(책임) AI가 사고를 치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12회(공존과 인간 번영): AI 시대,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인공지능이 쏘아올린 노벨상 2024년 가을, 스톡홀름과 오슬로에서 전해진 노벨상 발표는 인공지능(AI)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재규정한 사건이었다. 노벨 위원회는 더 이상 AI를 '산업계의 유망 기술' 정도로 보지 않았다.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기초과학의 최정점을 AI 연구자들에게 안긴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은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과 머신러닝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존 J. 홉필드(John J. Hopfield)와 제프리 E. 힌튼(Geoffrey E. Hinton)에게 돌아갔다. 홉필드는 1982년 '홉필드 네트워크(Hopfield Network)' 제안, 불완전한 정보에서도 패턴을 복원할 수 있는 연상 기억 모델 개발, 뇌의 정보 처리 방식의 물리학적 정식화 등을 통해 AI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힌튼은 딥러닝(deep learning)의 창시자로 불리며,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을 발전시켜 신경망 학습의 핵심을 제공하고 오늘날 대형 언어 모델과 이미지 생성 모델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학자의 연구는 오늘날 대형 언어 모델과 이미지 생성 모델의 근간이 되는 연결주의적 계산 모델을 물리학과 수학의 언어로 정식화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한편,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 예측과 설계에 인공지능을 도입해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세 연구자에게 돌아갔다.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는 AI와 계산 과학을 결합한 계산적 단백질 설계(computational protein design)를 개척했고,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와 존 점퍼(John Jumper)는 딥마인드(DeepMind)의 AI 시스템 알파폴드(AlphaFold)를 통해 50년 난제로 불리던 단백질 3차원 구조 예측 문제를 사실상 해결했다. 한 해에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모두 AI 관련 연구에 수여된 것은 통계적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인공지능이 기초과학의 핵심 방법론이자, 신약 개발과 바이오 연구의 필수 도구이며, 안보·금융·에너지·물류를 관통하는 문명 인프라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과학의 성소(聖所)라 불리는 노벨상이, 이제 알고리즘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 영광과 후회가 한 자리에...AI 대부가 꺼낸 실존적 질문 그러나 이 영광의 중심에 선 인물 중 한 명인 제프리 힌튼은, 축배 대신 경고를 선택했다. 힌튼은 2018년 튜링상 공동 수상자로 '딥러닝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AI 혁명을 이끈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2023년 구글을 떠난 뒤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헌한 기술이 인류에게 '실존적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경고했다. 악의적인 오용, 여론 조작과 정보전, 노동시장 붕괴,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고도 AI의 출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우려했다. 일부 인터뷰에서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AI가 인류에게 치명적 위협이 될 확률을 추산하기도 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지적 건축물이 인류의 안녕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노학자의 불안과 부분적 '후회'는, 노벨상이라는 최고 영예와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룬다. 한 인물 안에 기초과학과 산업 혁신의 선구자, 동시에 그 기술의 위험을 가장 강하게 경고하는 내부 비판자의 얼굴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인공지능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 신 야누스(Janus)를 떠올리게 한다. 한 얼굴은 암 치료와 신약 개발, 에너지 효율, 교육 혁신을 약속하지만, 다른 얼굴은 정보 조작, 대규모 감시, 통제 불가능한 시스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응시하고 있다. 과학의 성소에 당도한 야누스가 바로 지금의 AI다. ■ '도덕적 AI'라는 말이 조용히 숨기는 가정들 이 불안과 기대 사이에서, 기술 업계와 정책 영역은 '신뢰할 수 있는 AI(Trustworthy AI)', '책임 있는 AI(Responsible AI)'라는 구호를 앞세운다. 편향을 줄이고, 설명 가능성을 확보하고, 프라이버시와 안전성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은 타당하다. 문제는, 이 담론이 종종 말하지 않고 전제하는 것이다. '도덕성은 충분히 모델링 가능한 대상이며, 규칙과 데이터를 정교하게 설계하면 AI도 인간처럼 도덕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다. 현재의 대형 언어 모델은 혐오 발언을 차단하고, 자해·범죄·테러를 조장하는 요청을 거부하며, 위험한 질문에 경고 메시지를 출력하도록 설계된다. 겉으로 보면 AI가 마치 우리 대신 '올바른 선택'을 내려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쉽게 '어떻게 하면 더 도덕적인 AI를 만들 것인가'라는 기술·정책 설계 문제로 수렴한다. 그러나 윤리학, 도덕심리학, 신경윤리학의 연구는 인간의 도덕성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규범과 규칙, 공감·분노·수치심 같은 정서적 반응, 개인의 경험과 관계 맥락, 몸의 생리적 반응과 직관이 뒤섞인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약속을 지키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나중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도덕적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복잡한 도덕 경험을 '충분히 많은 데이터와 정교한 규칙'으로 기계에 이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학문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 알고리즘의 '양심'은 출력일 뿐, 경험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현재의 AI가 하는 일은 도덕적 실천이라기보다 '도덕 규칙의 통계적 모사'다. 모델은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하고, 사람이 설계한 규칙과 보상 구조에 따라 어떤 응답은 억제하고, 어떤 응답은 강화하도록 조정된다. 그 결과, 시스템은 '그렇게 말하는 편이 안전하고 바람직하다'고 학습했기 때문에 '이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어디에도 죄책감, 부끄러움, 연민, 책임감 같은 내적 정동(affect)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적 AI'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풀어 쓰면, '도덕 규범을 일정 부분 구현·시뮬레이션하도록 설계된 AI' 정도가 된다. 여기에 '양심'이라는 단어를 얹는 순간, 우리는 알고리즘적 규칙과 출력, 인간의 도덕 경험과 책임을 섣불리 동일시하게 된다. AI는 지금으로서는 '도덕적으로 보이도록 설계된 도구'이지, 도덕적 주체가 아니다. 이 구분이 무너지면, 책임의 경계도 함께 흐려진다. 기계가 주체가 될 수 없을 때, 책임은 더 날카롭게 인간에게 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역설적인 결론 하나가 도출된다. 'AI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AI 윤리는 더 절박해진다.'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냈을 때, 얼굴 인식 알고리즘이 특정 집단을 반복적으로 오분류해 차별적 결과를 낳았을 때, 혹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가 신경 신호를 대규모로 수집·분석해 오남용 위험을 낳았을 때,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코드가 아니라 인간이다. 어떤 가치와 우선순위를 기준으로 알고리즘의 목표 함수를 설계했는가. 어떤 데이터를, 어떤 동의 절차를 거쳐 수집·사용하기로 했는가. 예상되는 피해와 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떤 내부 통제와 외부 감시 장치를 마련했는가. 실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과 배상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기술 바깥의 문제다. 법철학, 정치철학, 과학기술사회학, 거버넌스 연구, 시민사회가 함께 답해야 할 영역이다. 'AI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말은, 이 모든 인간적 선택과 권력 관계를 가리는 매우 편리한 변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AI 윤리의 한 영역은 기계에 대한 윤리가 아니라 'AI를 설계·운영·사용하는 인간 집단의 윤리', 곧 AI 거버넌스를 둘러싼 사회적 규범 설계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 교실에 도착한 야누스: Z세대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이 논쟁은 더 이상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다. 이미 교실과 강의실로 들어와 있다. 생성형 AI와 함께 자라는 Z세대는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AI가 대신 쓴 사과문은 진정성이 있는 건가요?” “AI가 친구를 위로했고, 친구는 실제로 위로받았다고 느끼면, 그건 진짜 위로인가요?” “과제를 AI가 대신 써 줬는데 점수는 잘 나왔어요. 이게 공정한 건가요?” 이 질문들은 Z세대가 이미 관계와 감정, 공정성과 책임, 학습과 평가의 영역에 AI가 깊숙이 개입한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습은 더 이상 '교과서/교재–교사/교수–학생'의 삼각 구도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개입한 다층적 상호작용이다. 그렇다면, 지식 전달과 문제 풀이의 상당 부분을 AI가 떠맡게 되는 시대에, 교육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필자가 보기에 답은 '윤리적 근육(ethical muscle)'을 기르는 교육이다. 여기서 윤리적 근육이란, 타인의 취약성과 고통을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 능력, 기술이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불평등에 미칠 파장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단기 효율성보다 공동체의 장기적 이익을 우선하는 규범적 판단 능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규칙을 잘 지키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기술 환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자신의 선택을 성찰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일이다. AI가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 할'수록,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할 도덕적 판단과 책임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 야누스 문턱에서, 양심을 코드로 오독하지 않을 용기 2024년 노벨상은 인공지능이 현대 과학과 사회에 끼친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 주역들 가운데 일부가 기술의 위험과 한계를 직접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앞으로 AI는 의료·교육·환경·에너지 등 다양한 영역에서 분명히 거대한 효용을 낼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술이 일자리 구조, 권력 집중, 민주주의 제도, 심지어 인간 정체성 전반에 걸쳐 거센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두 측면을 동시에 직시하는 태도야말로, '디지털 야누스' 앞에 선 인류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두 가지 극단이다. “AI가 곧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기술 유토피아주의나 “AI가 곧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단순 디스토피아 공포다. 두 관점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의 정치적·윤리적 선택 가능성을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AI는 도덕적인가?”가 아니다. “이 강력한 도구를 설계하고 사용하는 우리는 어떤 기준과 절차, 그리고 양심을 가지고 이 기술을 길들일 것인가?”라는, 훨씬 오래되고 기본적인 질문이다. AI에게 진정한 의미의 양심을 심을 수 있는가에 대해 현재 과학과 철학은 “그렇다”고 말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부정적 답변은 곧바로 우리에게 다른 과제를 던진다. 양심을 코드로 착각하지 않는 냉철함, 기술 너머의 인간을 끝까지 중심에 두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AI 윤리란 결국, 이 두 가치를 법과 정책, 교육과 문화, 국제 규범과 거버넌스 안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묻는, 매우 현실적이고 긴급한 과제다. 21세기의 신(新)야누스 앞에서, 우리는 어느 얼굴만 바라볼 것인가가 아니라, 두 얼굴을 모두 직시한 채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 박형빈 서울교대 교수는.... ▲약력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미국 UCLA 교육학과(Department of Education) 방문학자 ·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에듀테크전공·AI인문융합전공 교수 ·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가치AI융합교육연구소 소장 ▲주요 경력 및 사회공헌 · 현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 센터장 · 현 가치윤리AI허브센터 센터장 · 현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예방자문위원 · 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주요 수상 ·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3회 선정 ―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2019, 공역),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역서) ▲주요 저서 · 『도덕적 AI와 인간 정서』(2025) · 『BCI와 AI 윤리』(2025) · 『질문으로 답을 찾는 인공지능 윤리 수업』(2025) · 『AI 윤리와 뇌신경과학 그리고 교육』(2024) ·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2024) · 『도덕지능 수업』(2023) ·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 · 『통일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2020) ▲연구 및 전문 분야 · 도덕·윤리교육, 신경윤리 기반 도덕교육 · AI 윤리 교육, 디지털 시민성 교육 ·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윤리 및 인간 증강 윤리 · 생성형 AI 할루시네이션과 윤리교육 대응 · 통일 윤리교육 및 분단 사회 도덕교육 재구성 · '책임 사고 5단계' 기반 AI 윤리교육 모델 개발

2025.11.30 12:08박형빈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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