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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소프트뱅크의 특허 폭탄, AI 시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지난 7월 14일 발표한 최신 생성형 인공지능(AI) 특허 동향 보고서는 한 가지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생성형 AI 특허 경쟁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WIPO에 따르면 전 세계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 공개 건수는 2024년 1만 8862건에서 2025년 3만 7808건으로 약 두 배 증가했다. 2024년과 2025년 두 해에만 5만 6000건이 넘는 새로운 특허 패밀리가 공개됐는데, 이는 2014~2023년 10년간 누적 공개량을 넘어서는 규모다. 2025년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는 전체 AI 특허 패밀리의 8.7%를 차지해 2023년 6.1%보다 크게 높아졌다. "생성형 AI 특허 경쟁속도 예상 상회" 더 눈에 띄는 것은 출원 주체 변화다. 중국계 기업과 기관이 여전히 압도적인 가운데, 단일 기업 기준으로 일본 소프트뱅크가 세계 최대 생성형 AI 특허 보유 주체로 올라섰다. WIPO가 집계한 소프트뱅크의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는 2014~2025년 누적 2985건이다. 사실상 대부분 2025년 공개됐다. 이는 소프트뱅크가 생성형 AI를 단순한 서비스 기술이 아니라 향후 AI 인프라와 사업 생태계 협상력을 좌우할 핵심 지식재산으로 보고, 관련 특허 포트폴리오를 선제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별로 보면 중국 규모는 더욱 압도적이다. 중국 소재 발명자가 2024~2025년 공개한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는 4만 3000건을 넘어, 중국이 2014~2023년 10년 동안 공개한 전체 규모보다도 많다. 다만 성장 속도에서는 일본과 미국 등이 빠르게 따라붙고 있다. 2023~2025년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의 연평균성장률(CAGR)은 일본 210%, 미국 92%, 중국 64%였다. 일본 성장률에는 소프트뱅크의 대규모 공개 물량 영향이 컸다. 더 중요한 것은 특허의 '양' 자체가 아니라 특허 생산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성형 AI는 기술개발뿐 아니라 특허명세서와 청구항 초안 작성, 선행기술 검색, 포트폴리오 분석 등 지식재산(IP) 업무의 상당 부분까지 자동화할 수 있다. 과거에는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 대규모 출원이 이제는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해졌다. 소프트뱅크 사례는 이러한 변화가 이미 현실의 특허 포트폴리오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는 소프트뱅크라는 특정 기업만의 이례적인 현상으로 보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특허 생산방식 변화 위협적"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심사 인프라 부담이다. 다만 한국 최근 상황은 과거보다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지식재산처에 따르면 2025년 특허 심사대기기간은 전체 평균 14.7개월로, 2024년 16.1개월보다 단축됐다. 우선심사는 약 2.1개월, 초고속심사는 1개월 이내 수준이다. 정부도 2026년 AI·사물인터넷(IoT)·컴퓨터 등 첨단 분야를 중심으로 심사관을 추가 채용하고, 수출 촉진 및 첨단기술 초고속심사를 확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정 기업이나 기술 분야에서 수만 건 단위 출원이 단기간에 집중되면, 심사관 업무량과 선행기술 검색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올해 개인이 AI를 활용해 대리인 없이 특허 출원하는 경향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AI가 다른 산업에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에서는 개별 기술들 간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넘어 산업간 경계가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 될 것이다. 더 실질적인 문제는 자유실시(FTO, Freedom to Operate) 리스크 증폭이다. 미국 특허청이 지난 2020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AI를 포함한 특허는 미국 특허청 기술 분류(subclass) 가운데 42%를 넘어섰다. '42%'라는 숫자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8년 통계다. AI가 이미 특정 기술에 머물지 않고 거의 전 산업 기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소프트뱅크처럼 AI 인프라부터 이미지 분석, 로봇·교통 제어 등 다양한 응용 영역을 포괄하는 대규모 특허 포트폴리오가 더해지면, AI 서비스를 하는 기업 뿐 아니라, AI 전환(AX) 전략을 구사하는 많은 제조업체도 자신의 제품과 제조 공정 및 서비스가 어떤 특허 청구항과 충돌하는지 훨씬 더 촘촘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개별 특허 권리범위가 넓지 않더라도 특허의 절대적 숫자가 늘면 FTO 분석과 회피설계 비용과 시간은 함께 증가하기 마련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대량의 특허가 향후 라이선스이나 소송 자산으로 전환될 가능성이다.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기업이라도 특정 사업부 특허 포트폴리오가 사업 방어를 넘어설 정도로 커지면 라이선스, 크로스 라이선스, 제3자 매각 등 다양한 수익화 수단을 검토할 수 있다. 소프트뱅크가 최근 2~3년 사이 특허 출원을 급격히 확대한 이면에는 당연히 이러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봐야 한다. 특허 포트폴리오의 전략적 가치가 기업 비즈니스 자체 가치와 별개로 커질 가능성은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특허심판 환경도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미국 특허청은 2025년부터 무효심판(IPR·PGR)의 재량적 거절(discretionary denial)을 별도로 다루는 절차를 운영하고 있다. 2026년에는 관련 결정들을 선례성 있는 판단으로 지정하는 등 재량적 판단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따라서 "특허 무효화가 어려워졌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실 침해소송과 병행 소송, 당사자들의 형성된 신뢰 또는 안정된 업계의 기대(settled expectations), 미국 내 제조·투자 등 여러 요소가 IPR 개시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특허를 대량 보유한 권리자와 이를 상대해야 하는 기업 모두 이러한 절차적 환경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FTO 분석을 상시 체계로 전환해야 과거에는 신제품 출시 직전에 한 차례 수행하는 이벤트성 작업으로 FTO 분석을 생각했다면, 이제는 개발 초기부터 출시 후까지 지속 관리하는 체계로 바꿔야 한다. AI 기반 선행기술 검색과 특허 모니터링 도구를 활용해 경쟁사의 신규 출원과 공개공보를 지속 추적하고, 제품·기술 로드맵과 연결해 위험 특허를 조기 선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AI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검토할 특허 범위를 줄이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대량 출원 주체가 등장한 지금, 모든 특허를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는 방식은 비용과 속도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2. 방어 특허 네트워크 적극 검토를 6300개 이상 회원사와 600만 건 이상 특허 자산을 보호하는 비영리 방어형 LOT 네트워크(LOT Network)나 비영리기업 특허를 공동 방어하기 위한 유니파이드 패턴트(Unified Patents) 같은 방어적 특허 네트워크는 개별 기업이 모든 특허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고, 일정 조건 아래 회원사 공동 방어 체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허관리전문기업(NPE) 등 제3자의 특허 공격 가능성이 커지는 환경에서 개별 기업이 수많은 NPE의 특허와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네트워크가 보완적 방어수단이 될 수 있다. 국내 기업도 단순히 가입 여부를 검토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사 주요 사업영역과 해외 시장, 특허분쟁 이력 등을 기준으로 실제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3. 방어적 공개(Defensive Publishing)도 방법 특허로 보호하기에는 진보성 확보가 불확실하거나, 굳이 독점권까지 확보할 필요가 없는 기술이라면 특허 대신 공개 문헌으로 남겨 선행기술화하는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소프트뱅크도 출원 중 상당수가 이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경쟁사나 제3자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생성형 AI가 특허 문서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한다면, 방어적 공개 역시 체계적으로 자동화할 수 있다. 공격 규모가 커지는 시대에는 방어의 속도도 함께 높여야 한다. 4. 양보다 질로 포트폴리오 전략을 재정비해야 대량 출원 시대일수록 자기 포트폴리오에서 불필요한 특허를 솎아내고, 실제 제품과 사업을 지키는 핵심 특허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경쟁사 출원 데이터를 단순한 감시 대상이 아니라 경쟁 정보로 활용해야 한다. 어떤 기술에 출원이 몰리는지, 특정 기업이 어느 국가에 집중 출원하는지, 기존 제품과 어떤 청구항이 연결되는지 분석하면 경쟁사 연구개발 방향과 사업전략을 상당 부분 앞서 읽을 수 있다. 결국 양적 경쟁에 그대로 맞서기보다 상대 출원 패턴을 정보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5. 크로스 라이선스와 특허 풀 참여 조기 검토를 특정 기업 포트폴리오가 압도적으로 커진 뒤에 협상을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량 출원 주체가 본격적인 라이선스 사업에 나서기 전에, 자사 핵심 특허와 상대방 포트폴리오를 비교하고 크로스 라이선스, 공동방어, 특허 풀 참여 등 다양한 선택지를 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표준필수특허(SEP)·프랜드(FRAND) 시장에서 오랫동안 확인된 교훈과도 맞닿아 있다. 협상은 상대방 패가 모두 갖춰진 후가 아닌, 협상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작하는 편이 유리하다. 6. 이사회·경영진 차원 조기 경보 체계 구축 지금까지 대응은 대부분 IP팀 차원 실무 과제로 다뤘다. 그러나 소프트뱅크 사례가 보여주듯 대량 출원은 단순한 IP 활동량 증가가 아니라 사업전략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 특정 경쟁사나 잠재적 분쟁 상대의 출원량이 갑자기 증가하거나, 특정 국가와 기술 영역에 집중되기 시작하면 이를 조기 포착해 경영진에 보고하고 적절한 대응전략을 수립하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경영진 또한 기존처럼 특허를 대하지 말고 전략자산으로 어떻게 활용하고 대응할지 전략을 전체 기업 비즈니스 전략과 일치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허가 실제 라이선스 요구서나 분쟁으로 번진 뒤 대응하면 이미 늦어 그만큼의 대가가 뒤따를 수 있다. 경쟁사의 출원 패턴 변화 단계에서 전략을 세우는 편이 효과적이다. 한국 기업들의 과제 WIPO 최신보고서 속 생성형 AI 특허 보유 주체 상위 10곳에 한국 기업은 없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이 생성형 AI를 발명하고 있다. 2023~2025년 특허 패밀리 증가율은 연평균 21%였다. 한국이 생성형 AI 특허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으며, 중국의 절대적인 규모와 미국·일본의 성장 속도를 감안하면 글로벌 경쟁 구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WIPO는 2025년 생성형 AI 국제 특허 패밀리를 3297건으로 집계했는데, 이는 전체 생성형 AI 특허 패밀리의 9%에 불과하다. 복수국가에서 공개된 특허 패밀리는 출원인이 상대적으로 상업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발명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경쟁은 단순히 '몇 건을 출원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발명을 어느 시장에서 권리화하고 실제 사업과 협상력으로 연결하느냐의 문제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많은 한국 기업도 한국에서만 특허를 취득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특허를 받을 만한 발명이라면, 해외에서도 특허를 받을 가치가 있는 기술이란 의식이 확산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에 생성형 AI가 빠르게 결합하고 있는 지금, 특허 경쟁 무대도 기존 산업별 경계를 넘어가고 있다. 특허는 더 이상 발명의 결과물이라는 수동적 자산에 머물지 않는다. 생성형 AI 시대에는 기술 방향을 선점하고, 경쟁사 진입을 견제하며, 향후 라이선스와 협상 카드를 미리 확보하는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변화의 중심으로, 혁신의 주체로 시장을 선도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국가 전체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제 기업 IP 전략도 '얼마나 많이 출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기술을 선점하고, 어디에서 권리를 확보하며, 경쟁사의 특허 폭증을 어떻게 조기 감지하고 대응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특허의 홍수가 시작됐다면, 기업에 필요한 것은 더 큰 우산이 아니라 홍수의 방향을 먼저 읽는 레이더이고, 그 이전에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과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2026.08.24 16:55박병욱 컬럼니스트

[기고] 특허전쟁의 새 전장(戰場)-독일·브라질·인도는 어떻게 승자가 됐나

전 세계 표준필수특허(SEP) 분쟁의 무대는 지난 201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텍사스, 독일, 영국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변화가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통합특허법원(UPC)이 출범 3년 만에 유럽 특허소송의 실질적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법원은 SEP 침해소송 건수가 2년 만에 다섯 배 가까이 늘며 새로운 전장이 됐다. 인도 델리 고등법원은 프랜드(FRAND) 로열티를 법원이 직접 산정하는 판례를 쌓으며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손해배상액 판결을 내놓고 있다. 독일과 UPC - 강자가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독일이 유럽 특허소송 중심이라는 사실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뒤셀도르프·뮌헨·만하임 지방법원은 오래 전부터 침해와 무효를 따로 심리하는 이원화 구조, 빠른 심리 속도, 특허권자에게 유리한 금지명령 관행으로 유럽 최다 특허소송 유치국 자리를 지켜왔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2023년 UPC 출범 후 이 구조가 더욱 강화됐다는 점이다. 지난해 다트-IP(Darts-ip) 데이터를 분석한 클래리베이트(Clarivate)의 UPC 2년 차 리포트를 보면, 독일 소재 지역부가 전체 침해소송의 77%를 차지했다. 뮌헨 지역부 한 곳만 초기 침해소송의 34~38%를 처리했다. 독일 국내 법원이 쌓아온 판례와 전문성에, UPC를 통해 얻은 범유럽 단위 금지명령 효력이 더해지면서, 독일은 국내 법원으로서 강점과 범유럽 집행력을 동시에 손에 쥔 셈이 됐다. 실제 UPC를 통한 예비적 금지명령 하나로 18개 회원국 전역에 효력이 미친다는 건, 나라마다 따로 소송을 걸어야 했던 예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2026년 들어서는 이 쏠림에 균열이 보인다. 지난 5월 특허소송 전문매체 'IP 프레이(ip fray)'는 독일 소재 디비전의 침해소송 점유율이 2025년 하반기 78%에서 2026년 4월 기준 50%대까지 떨어졌다고 집계했다. 네덜란드 헤이그 지역부가 신뢰할 만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고, 유럽특허변호사협회(EPLAW) 내부에서도 사건 쏠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UPC가 "독일이 곧 UPC"였던 초기를 지나, 진짜 범유럽 분산형 법원으로 성숙해가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 - 규제 공백을 기회로 바꾸다 브라질의 부상은 훨씬 극적이다. 브라질 로펌 '다니엘 로(Daniel Law)'가 지난 5월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리우데자네이루 상사법원의 SEP 침해소송 건수는 2023년과 2024년 각각 6건에 머물다 2025년 31건으로 크게 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성장이 정교한 SEP 전담 법리나 전문 재판부가 미리 갖춰져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브라질 지식재산법은 미국이 2006년 이베이(eBay) 판결 후 예비적 금지명령을 사실상 크게 제한해온 것과 반대로, 훨씬 빠르고 적극적인 가처분을 허용한다. SEP 보유자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쓰기 어려워진 지렛대, 즉 금지명령 위협을 통한 협상력을 브라질에서는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침해소송은 리우, 비침해 확인이나 로열티 산정은 상파울루로 역할이 사실상 나뉘는 이원 구조가 형성되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익숙했던 소송금지명령(anti-suit injunction)과 그 맞대응(anti-anti-suit injunction) 공방까지 브라질 무대에서 재현되고 있다. 지난해 초에는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출원한 4G 통신 SEP를 보유한 IP브리지(IP Bridge)가 중국 BYD를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시작해 커넥티드카 SEP 분쟁으로 전선이 넓어지는 중이다. 브라질 사례가 보여주는 건 명확하다. 오랜 판례 축적이나 정교한 SEP 법리가 없어도 소송 허브가 될 수 있다는 것. 예측 가능하고 빠른 잠정처분 하나만으로도, 다른 관할지에서 그 수단을 잃은 특허권자들을 흡수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 - 물량과 손해배상 규모가 함께 늘어나다 인도의 부상은 브라질과 결이 다르다. 인도 델리 법원은 지난 10여 년간 SEP·FRAND 분쟁에서 제조사의 '전략적 시간 끌기(hold-out)'를 방지하기 위한 예비적 공탁금(pro tem deposit), 잠정 로열티 명령 같은 독자적 절차 도구를 발전시켜왔다. 이 법원은 2023년 인텍스(Intex) v. 에릭슨(Ericsson) 판결에서 처음으로 FRAND에 대한 프로토콜을 확립한 이래, 법원이 인정한 손해배상액이 상징적 수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챔버스앤드파트너스(Chambers and Partners)의 2026년 인도 특허소송 가이드에 따르면, 라바(Lava) v. 에릭슨(Ericsson) 사건에서 델리 고등법원은 FRAND 로열티 산정 방법론을 적용해 300억원대 손해배상을 인정했고, 뒤이은 커뮤니케이션 컴포넌트 안테나(Communication Components Antenna) v. 모비 안테나(Mobi Antenna) (2024) 사건에서도 수백억원대 손해배상액이 나왔다. 소송 물량 자체가 특정 로펌에 쏠리는 현상도 뚜렷하다. 같은 챔버스(Chambers) 자료는 뉴델리에 본사를 둔 '사이크리슈나&어소시에이츠(Saikrishna&Associates)'가 인도에서 제기된 SEP 소송 57건 가운데 36건에 관여했다고 집계한다. 소수 전문가 집단이 판례와 절차적 관행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SEP 소송이면 인도, 인도면 이 로펌"이라는 신뢰가 형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UPC 초기 뮌헨에서, 소수 로펌이 절반 이상의 사건을 처리하며 절차적 관행을 사실상 주도했던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이 이들을 허브로 만드는가 세 지역의 부상 경로는 저마다 다르지만 요인은 몇 가지로 수렴한다. 신속하고 예측 가능한 잠정처분이 첫 번째다. 브라질과 인도 모두 본안 판결까지 가지 않아도 실질적 압박 수단을 제공한다. 특허권자에게는 협상 레버리지가, 소송대리인에게는 사건을 유치할 명분이 생긴다. 전문 재판부와 전문가 집단이 초기에 몰리면서 생기는 경로의존성도 빼놓을 수 없다. UPC의 뮌헨, 인도의 사이크리슈나(Saikrishna) 사례처럼 소수 주체가 초기 사건을 빠르게 처리하고 판례를 축적하면, 이후 사건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리는 자기강화 구조가 만들어진다. 실질적인 손해배상 규모 역시 핵심이다. 상징적 수준의 배상액만으로는 매력적인 관할지가 될 수 없다. 사업적으로 의미 있는 금액이 나와야 특허권자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 관할지를 고른다. 제도적 유연성도 있다. UPC는 전체 소송의 70%가 넘는 비중이 영어로 진행될 만큼 비독일어권 당사자에게 열려 있다. 이는 어쩌다 생긴 결과가 아니라 애초에 국제 이용자를 겨냥한 설계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관통하는 건 "유치하겠다"는 적극적인 제도 설계다. UPC는 처음부터 범유럽 통합 집행력을 표방했고, 델리 고등법원은 SEP 사건을 전담하다시피 하며 독자적 법리를 쌓아왔다. 우연히 특허소송의 허브가 된 곳은 없다. 한국은 왜 이 흐름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한국은 지난 2016년 특허법원에 침해소송 항소심 전속관할을 부여하면서 특허 전담 항소법원 체제를 갖췄고, 2024년에는 고의 침해에 대해 최대 5배까지 배상액을 늘릴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특허법 제128조 제8항)도 도입했다. 제도만 놓고 보면 부족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국제 특허권자들이 한국을 소송지로 적극 선택하는 사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손해배상의 실질적 규모다. 특허청이 2021년 실시한 연구용역 「특허침해 판례분석을 통한 중소벤처기업 침해소송 대응전략 연구」에 따르면, 2016~2020년 특허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는 평균 6억 2829만원을 청구했지만 실제 인용액 중간값은 1억원 수준에 그쳤다. 같은 연구는 미국의 손해배상액 중간값(1997~2016년 기준)을 65억 7000만원이다. 양국 국내총생산(GDP) 차이를 감안해 보정해도 한국의 손해배상 수준이 미국의 7분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승소해도 청구액의 3분의 1 남짓만 인정받는 게 평균적이라는 것을 통계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자신의 특허가 침해된 걸 알면서도 소송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왜 흔한지 짐작이 간다. 하물며 해외 특허권자 입장에서 한국을 소송지로 택할 이유는 더더욱 찾기 어렵다. 5배 징벌배상 제도가 생겼다고는 해도, 아직 그 제도가 실제로 인도 라바(Lava) v. 에릭슨(Ericsson)급 판결로 이어진 사례가 축적되지 않은 이상, 제도의 존재만으로 국제적 신뢰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잠정처분·금지명령 활용에 소극적인 것도 걸림돌이다. 브라질처럼 신속하고 예측 가능한 예비적 금지명령 관행이 자리잡지 않으면, 협상 레버리지를 원하는 특허권자에게 한국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한국이 실질적인 특허소송 허브로 발돋움하려면 개별 제도 하나를 손보는 수준을 넘어서는 전환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상징적 판결의 축적이다. 5배 징벌배상 제도가 실제로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규모로 적용된 판례가 나와야, "한국에서 소송하면 실질적 보상이 나온다"는 신호가 해외 실무자 커뮤니티에도 전달된다. 제도의 존재보다 제도의 실행 사례가 훨씬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라는 점은, 우리 법원이 어떤 방향으로 제도와 판례를 바꿔야 하는지 알려준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역시, 소송비용의 막대한 부담으로 권리의 행사를 포기하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을 적절히 지원하고 소송의 진행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제도로 정교하게 설계된다면, 손해액 산정의 근거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재 구조를 바꾸는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신속한 가처분 실무도 정비해야 한다. 미국의 금지명령 억제 기조와 대비되는 브라질식 신속 잠정처분 모델을 참고해, 최소한 SEP·FRAND 분쟁에서는 예측 가능한 심리 기준과 신속 처리 트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법원의 변화 의지는 소극적으로 보인다. 국내 전문 인력과 로펌의 국제 사건 수행 역량을 키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사이크리슈나(Saikrishna) 사례가 보여주듯 결국 소송 허브는 몇몇 핵심 전문가 집단이 만든다. 국내 로펌이 SEP·FRAND 국제 사건을 실제로 수행한 트랙레코드와 네트워크를 쌓도록 지원하는 정책적 유인이 필요하다. 지식재산처 등 정책 당국 무게중심도 출원 지원에서 소송·라이선싱 인프라 구축으로 옮겨가야 한다. 최근 지식재산처가 "특허로 돈 버는 시대"를 표방하며 IP 수익화 생태계 조성에 나선 흐름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이 국내 기업이나 특허관리전문기업(NPE)의 라이선싱 지원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해외의 특허권자들이 실제로 선택하는 소송지로 만드는 데까지 이어지려면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인 법원의 태도, 과감한 제도의 설계와 대외 홍보가 뒤따라야 한다. 지역 내 경쟁구도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싱가포르와 중국, 일본은 이미 각자 방식으로 아시아 IP 분쟁해결 허브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이 이 경쟁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들 세 나라와 차별화되는 강점, 이를테면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처럼 한국 산업이 강한 기술 분야 전문성을 살린 특화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 한국은 출원 강국이라는 훌륭한 출발점을 갖고 있지만, 그 특허를 실제로 행사할 무대로서 매력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또 하나의 제도 개정이 아니라, 국제 특허권자들의 실질적 선택을 이끌 종합적 전환이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2026.07.28 15:31박병욱 컬럼니스트

[기고] 똑같은 '삼성-ZTE' 특허소송...중국이 영국을 무시한 날

2026년 5월 1일 영국 런던과 중국 충칭에서 같은 날 판결이 동시에 나왔다. 같은 특허에 같은 내용의 소송이었지만 영국 법원은 삼성전자가 ZTE에 4300억 원을 내면 된다고 했고, 중국 법원은 8100억 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같은 사건인데 같은 날, 두 배 가까이 다른 결론이 나온 것이다. 특허실시료 협상이 결렬되다 스마트폰을 만들려면 통신 기술이 필요하다. 4G LTE, 5G 같은 기술 말이다. 그런데 이 기술들은 각각 수많은 특허로 보호돼 있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회사라면 누구나 이 특허를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내야 한다. 지난 2021년 삼성전자와 ZTE는 각각 자신의 특허를 상호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특허 상호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스마트폰을 더 많이 파는 삼성이 ZTE에 돈을 더 내는 구조였다. 이 계약이 2023년 말 만료됐는데, 새로운 협상에서 합의가 결렬됐다. 그러자, 두 회사는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나라의 법원으로 달려갔다. 2024년 12월 19일 삼성이 먼저 영국 법원에 소를 제기했고, 나흘 뒤 ZTE는 중국 충칭 법원에 맞소송을 냈다. - 2021. / 삼성전자-ZTE, 특허 교환 계약 체결 (2023년 말 만료) - 2024.12.19 / 삼성, 영국 법원에 먼저 소송 제기 - 2024.12.23 / ZTE, 중국 충칭 법원에 맞소송 - 2025.01 / ZTE, 브라질에서 삼성 제품 판매금지 명령 획득 - 2025.02 / 양측, 독일·UPC(유럽 공동 특허법원)에도 소송 교차 제기 - 2025.06 / 영국 1심 법원, 삼성 승소 - 2025.10 / 영국 항소심, 1심 법원 판결을 뒤집음 - 2026.05.01 / 영국 법원 4300억원 배상 판결, 중국 법원 8100억원 배상 판결 영국법원 "제재 압박 고려해야" vs 중국법원 "ZTE 요구금액이 맞다" 영국 법원은 삼성이 ZTE에 지급해야 할 돈이 4300억 원이라고 했다. 판사는 ZTE가 2020년 미국의 무역제재를 받던 시절, 돈이 급해서 애플과 낮은 금액으로 계약한 사례를 기준으로 삼았다. 대신 당시는 ZTE에 비정상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므로, 금액을 올려 보정했다. 판사의 논리는 '그때의 계약 조건은 정상이 아니었으니, 그것보다는 높게 쳐야 공정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의 판결과 같은 날 충칭 법원은 정반대 결론을 냈다. ZTE가 요구한 8100억 원 그대로가 공정한 금액이라는 것이었다. 독일과 브라질 법원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중국·독일·브라질 법원이 ZTE 편, 영국 법원만 삼성 편을 든 모양새다. 영국 항소심 판결을 내린 고등법원의 미드(Meade) 판사 판결문에는 "이처럼 여러 나라 법원에서 소송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의 증거다. 근본 문제는 분쟁을 해결해 줄 단일한 국제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판사가 자신이 진행한 재판의 구조 자체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사건에서 같은 날 두 나라 법원이 내놓은 금액이이 두 배 가까이 다르다면, 어느 쪽 기준이 '글로벌 기준'인지 아무도 모르게 된다. 글로벌한 표준특허의 원칙인 프랜드(FRAND) 의무는 동일하지만, 그렇다면 프랜드 원칙에 따라 판단되는 로열티 금액은 나라마다, 법원마다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각국 법원이 표준특허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프랜드 원칙에 따른 로열티 금액을 통일적으로 계산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ZTE, 국가별로 다른 목적으로 소송 설계 그렇다면,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로, 표준특허 소송에서 '먼저 소송했다'고 유리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은 영국에서 나흘 먼저 소송을 냈다. 그런데 그것이 ZTE의 충칭 소송을 막지 못했으며, 독일과 브라질에서의 역공도 막지 못했다. 먼저 법원 문을 두드린 것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 법원에서 무엇을 노리는가다. 영국에서는 유리한 특허 사용료 기준을 정하고, 독일에서는 상대방 제품 판매를 막고, 중국에서는 맞소송 카드를 꺼내는 식의 전략적 설계가 없으면 여러 나라 법정 싸움은 비용만 증가시키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임이 불보듯 뻔하다. 두번째는, '임시 라이선스'라는 카드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영국 1심 법원은 2025년 6월 삼성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항소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내가 원하는 나라 법원에서 소송하겠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항소법원의 판단이었다. 이 판결 후 임시 라이선스는 쓰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삼성이 믿었던 카드 하나가 줄어든 셈이다. 셋째로, ZTE는 나라마다 다른 목적으로 소송을 설계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ZTE는 단순히 많은 나라에서 소송을 제기한 게 아니었다. 브라질과 독일에서는 삼성 제품 판매를 막는 소송, 영국에서는 임시 라이선스를 거부하는 방어, 충칭에서는 자국에서 유리한 특허 사용료 기준을 정하는 소송을 동시에 진행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글로벌 특허분쟁에서 중국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업들도 진지하게 살펴볼 전략이다. 네번째로, 영국도 중국도 모두 자신의 나라가 글로벌한 표준특허의 로열티 산정의 기준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삼성과 ZTE 간 소송에 대한 판결은, 각 나라의 법원 간 패권 싸움이다. 영국은 자기 법원에서 전 세계 기준을 정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 법원이 전 세계 기준이 되길 원한다. 우리 기업이 혼자 이 싸움을 감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는 특허를 많이 갖고 있는 쪽이기도 하고, 동시에 남의 특허를 사용하는 쪽이기도 하다. 이번 소송에서 삼성은 ZTE의 특허를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영국과 중국에서 나온 다른 결론, 우리는 여기에서 표준특허에 대한, 글로벌 소송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하겠다. "국가별로 다른 판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 증거" 그렇다면 이제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글로벌 소송에서는 여러 나라에 동시에 소송이 진행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월드컵 축구에서도 상대 팀에 따라 전술을 달리 준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소송 목적과 전략을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나라별로 사법제도도, 법률 규정도, 법원 성향도 다를 수 있다. 글로벌 소송 격전지를 선택할 때는 반드시 소송의 목적과 전략을 치밀하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소송보다는 협상이 훨씬 싸고 빠르다는 것이다. ZTE가 삼성에 주장한 금액은 8100억원이었는데, 만일 중국법원의 판결에 따른다면 결국 삼성은 막대한 소송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 셈이다. 사전에 협상 과정에서 합의했다면 지금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17건의 엄청난 소송 비용을 절약했을 수도 있다. 세 번째, 우리 기업들은 표준특허 사용자일 수도 있고, 표준특허 소유자일 수도 있다. 물론 삼성전자와 같이 두 가지 면을 다 가지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현대차기아 같은 자동차회사는 표준특허 사용이 많은 기업이다. 자동차가 커넥티드카로 변하면서 통신 표준특허 사용은 피할 수 없다. 자동차 분야뿐 아니라 여러 기술 분야에서 통신은 필수로 사용해야 하는 기술이 된지 오래다. 표준특허 전쟁은 이제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고 있으므로, 기존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기업들도 이제는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네 번째로, 표준특허는 비아 라이선싱(Via Licensing)이나 아반시(Avanci) 등의 표준특허 풀(pool)이 있고, 이러한 풀에 가입하면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줄여 불필요한 비용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 물론 풀에 가입한다고 분쟁을 모두 예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급해야 할 로열티가 크게 감소하는 것도 아니지만, 분쟁 리스크를 줄이고 안정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표준특허 풀에 가입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한 전략일 수 있다. 다섯 번째로, 표준특허 풀에 라이선시(실시권자)로 가입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기업들과 연구기관, 대학 등에서 표준특허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도 많은 기업들이 표준특허 풀에 자신의 표준특허를 넣어 놓고 있지만, 이는 삼성전자, LG전자, ETRI와 몇 개 대학 등에 의한 것이고 우리 중소중견기업들에는 먼 이야기이다. 우리 중소중견기업들에 표준특허 창출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표준특허 창출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여섯 째로, 지금은 주로 통신표준을 중심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나, 표준이라는 것은 모든 산업의 문제이다. 국제표준을 선점하는 것이 바로 시장에서의 결정적인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표준에 대한 전문가 양성 및 국제표준화기구에서의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국제표준화기구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중 한국의 전문가는 중국의 전문가에 비해 10배 이상 적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술이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되기는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표준특허는 그 기술이 글로벌 표준으로 제정돼야 가치가 있다. 표준경쟁에서 뒤지면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 한다. 일곱 번째, 표준특허가 문제되는 업종(자동차, 전자, 통신, 인공지능 등)을 중심으로 역량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들은 힘을 합쳐 공동대응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예전에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공동대응을 위한 협의체가 운영된 바 있고, 시스벨(SISVEL)의 특허공세에 대응해 경고장을 받은 기업들이 모여 공동대응을 논의한 적도 있었다. 표준특허는 수많은 사용자가 있는 만큼 더더욱 공동대응을 위한 협력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재산처에 표준특허 전담조직 만들어야"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날로 치열해지는 국가간 패권전쟁과 특허전쟁, 표준전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식재산처 역할도 매우 중요한데,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지식재산처 내에 표준특허 전담조직을 제대로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표준특허를 담당하는 팀이 있지만, 현재 조직 수준으로는 삼성-ZTE 같은 대형 분쟁을 뒷받침하기는 버겁다. 특허 출원을 도와주는 것을 넘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 국가별로, 기술 분야별로 분쟁전략과 어떻게 협상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까지 연구하고 조사하고 지원하는 한편, 현재 하고 있는 단기 강의나 특강 방식이 아닌 진짜 표준특허 전문가를 양성하고 전담할 조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국가기술표준원이 하고 있는 표준대학원 프로그램 같은 방식으로 석박사를 양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법원 입장에서 보면, 다른 특허와는 달리 표준특허는 한국 법원을 국제 특허 분쟁의 선택지로 만들 수 있다. 일반 특허소송은 시장이 작은 한국 법원이 특허권자 입장에서 선택할 이유가 별로 없지만, 표준특허는 좀 성격이 다르다. 이번 분쟁에서 삼성은 런던으로, ZTE는 충칭으로 갔다. 서울은 선택지에 없었다. 만일 한국 법원이 적극적으로 국제 분쟁을 유치하려면 표준특허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특허권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많아지고, 판결까지 이르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면 표준특허의 특허권자 입장에서 한국 법원이 매력적인 법원이 될 수 있다. 영국 법원은 전 세계에서 통하는 특허 사용료를 정해주는 역량을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왔다. 한국 특허법원도 이런 역량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해 판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과 벤치마킹이 돼야 하겠다. 소송의 속도면에서 독일은 9~10개월 안에 판결을 내리고 있는데, 한국 법원도 판사를 더 확충하고 전문성을 높이고, 신속재판을 위한 제도정비를 하여 독일만큼 빠른 선택지가 돼야 하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판결의 예측 가능성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독일 뮌헨 법원 판사가 이번 삼성-ZTE 사건에서 자기 법원의 해석 기준을 공개 발표한 것은, '우리 법원은 이렇게 판단한다'를 미리 알려준 것이다. 한국 법원도 특허 분쟁의 주요 쟁점에 대한 입장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세 번째로, 국제기구에서 우리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한다. 2025년 7월 세계무역기구(WTO)가 중국의 '소송금지명령(한 나라 법원이 다른 나라에서 소송을 못 하게 막는 명령)' 관행이 국제무역규범 위반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 판정을 이끈 것은 유럽연합(EU)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 핵심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삼성-에릭슨 분쟁이었다. 우리 기업이 직접 피해를 입은 사건인데, 한국 정부는 거의 역할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지식재산위원회가 본연 목적에 맞춰, 지식재산처, 외교부, 산업부, 중기부 등 정부 부처가 모두 힘을 합쳐서 WTO뿐 아니라, WIPO, ISO, IEC, ITU 같은 국제기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네 번째로, 표준은 기술과 시장이 성숙되기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기술과 시장을 선도하기도 한다. 차세대 기술에 대한 표준을 선점하고 표준특허로 무장하는 것은 신속히 준비해야 할 부분이다. 예를 들어 6G(차세대 이동통신) 특허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선점하는 것이 필요하다. 6G는 2030년 상용화가 예상된다. 5G에서 퀄컴·에릭슨 같은 회사들이 매년 수조 원의 특허 사용료를 버는 것처럼, 6G에서도 핵심 특허를 먼저 확보한 회사가 막대한 수익을 가져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어떤 특허를 출원하느냐가 2030년 협상 테이블을 결정한다. 이러한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규칙 없는 게임에서 이기는 법 영국 판사는 자신이 진행한 재판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시스템 안에서, 규칙이 합의되지 않은 게임에서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6G가 상용화되고 자동차·가전·의료기기에도 특허분쟁이 번지면, 이 복잡한 싸움은 더 많은 한국 기업에 닥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엄청난 기회가 있다. 이 게임에서 이기는 전략은, 기업과 법원과 정부가 한 몸이 되어 전략적으로 움직일 때 가능하다. 개별 기업만으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정부는 각 부처에 산재돼 있는 표준과 표준특허에 대한 전략을 통일해 일사불란한 역할 분담과 필요하다면 부처간 업무를 새롭게 조정해 효율적 체계를 갖추면 어떨까 한다. 또한 법원이 현재 어디에 집중해서 미래를 준비하는가에 따라 많은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고 아무런 변화와 발전이 없을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를 통해 글로벌한 사법의 중심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표준특허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일사불란한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준비한 자에게, 미래는 승리의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2026.07.08 08:56박병욱 컬럼니스트

[기고] '세계 IP 허브'? 아직 활주로도 없다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산하 '세계 IP 허브국가 추진 특별전문위원회'(아래 특별위원회) 출범은 최근 한국 지식재산(IP) 정책 흐름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다. 특별위원회는 'IP를 가진 나라에서 IP를 움직이는 나라로'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창작의 허브 ▲비즈니스의 허브 ▲분쟁해결의 허브라는 3대 축 아래 12대 핵심과제와 3단계 로드맵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S&P500 기업 자산의 92%가 무형자산으로 구성돼 있고, 글로벌 IP 금융시장이 156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한국 역시 이제 단순 제조국가를 넘어 IP 중심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특허출원 세계 최상위권 국가이며,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등은 글로벌 특허 보유량 기준 세계 최고 수준 기업군에 속한다. 콘텐츠 산업 수출 역시 이미 140억 달러를 넘어섰다. 기술과 콘텐츠 양 측면에서 한국의 IP 창출 역량 자체는 분명 세계적 수준이다. 그러나 특별위원회가 지적했듯, 정작 한국의 지식재산권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만성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허는 많고 콘텐츠 경쟁력도 높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로열티와 라이선스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약하다. 한국은행 국제수지 통계에서도 한국은 지속적으로 기술료 지급이 수입보다 큰 구조를 보여왔다. 다시 말해 한국은 'IP를 많이 만드는 나라'이지만, 아직 'IP로 돈을 버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글로벌 IP 허브, 시장·제도·자본·분쟁 축적 후 형성" 문제의식 자체는 정확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과연 지금 국가지식재산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 '세계 IP 허브국가'라는 거대한 비전을 선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특별위원회는 ▲1단계 국내 IP 생태계 혁신 ▲2단계 아시아 IP 중심지 안착 ▲3단계 세계 IP 허브국가 도약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2단계와 3단계는 현재 한국의 시장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목표다. IP 허브는 정부가 선언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글로벌 IP 허브들은 모두 오랜 시간에 걸쳐 시장과 제도, 자본과 분쟁이 축적되면서 형성됐다. 대표 사례가 미국이다. 미국은 단순히 특허출원이 많아서 허브가 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특허 소송 시장, 라이선싱 시장, 투자 시장, 소송금융(litigation finance), 특허관리전문기업(NPE)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텍사스동부연방법원과 델라웨어연방법원은 글로벌 특허분쟁 중심지이며, 미국 특허소송 시장 규모는 연간 수십조원 수준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퀄컴(Qualcomm)은 특허 라이선스 사업만으로 매년 막대한 영업이익(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창출해 왔고, 인터디지털(InterDigital) 역시 통신 표준특허를 기반으로 연간 수천억원 규모 라이선스 수익을 거두고 있다. 과거 파산한 노텔(Nortel Networks)의 특허 포트폴리오는 45억 달러에 매각됐다. 미국은 특허를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거래 가능한 금융자산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국 역시 최근 가장 빠르게 부상하는 IP 허브 중 하나다. 화웨이(Huawei)는 최근 연간 5억~6억 달러 규모 특허 라이선스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중국은 단순히 특허출원만 늘린 것이 아니라, 베이징·상하이·선전 등을 중심으로 전문 IP 법원과 대규모 기술거래 시장을 육성했다. 특히 최근 삼성전자-ZTE 사건 등 표준필수특허(SEP) 사건에서 중국 법원은 글로벌 프랜드(FRAND) 요율 산정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소송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실제 분쟁 규모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싱가포르 사례도 자주 언급된다. 싱가포르는 단순히 '허브 국가'를 선언해서 IP 허브가 된 것이 아니다. 싱가포르는 국제중재센터 육성, 세제 혜택, 글로벌 로펌 유치, 영어 기반 법률 시스템, 국제금융 기능을 수십 년간 정교하게 결합했다. 또한 해외 기업이 IP를 싱가포르에 이전하거나 관리할 경우 세제상 이점을 제공했고, 국제중재 사건을 적극 유치했다. 결국 기업과 자본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허브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독일은 오랜 기간 특허침해소송 친화적 구조를 통해 글로벌 특허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뮌헨·뒤셀도르프·만하임 법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허소송 법원으로 자리잡았다. 독일은 소송 속도가 빠르고 침해 인정 가능성이 높아 권리자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결국 글로벌 기업들이 독일 소송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 허브 기능이 형성됐다. 최근 출범한 유럽의 통합특허법원(UPC:Unified Patent Court) 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유럽은 단순히 '특허 허브'를 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유럽 단일 특허체계와 통합법원을 구축해 기업들이 여러 국가에서 개별 소송을 해야 하는 비효율을 줄였다. 즉 시장 참여자들에게 실제 경제적 효율성을 제공했기 때문에 제도가 빠르게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공통점은 명확하다. 어느 나라든 IP 허브는 '비전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실제 거래와 분쟁, 자본과 전문인력, 기업 수요가 축적되면서 가능했다. "거대담론보다 시장 기초체력 중요" 반면 한국은 아직 그 단계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특허출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IP 거래 시장에서 존재감은 미미하다. 국내 특허 거래 규모는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글로벌 수준의 대형 라이선싱 성사 사례도 드물다. 특허 가치평가 역시 금융권과 투자시장에서 절대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 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IP 담보대출 상당수는 정책보증기관의 보증에 의존한다. 즉 시장이 자발적으로 IP를 핵심 금융자산으로 평가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가지 못했다는 의미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 문화다. 한국 기업 상당수는 여전히 특허를 '방어용 자산' 정도로 인식한다. 특허를 공격적으로 행사하거나 수익화(monetization) 하는 전략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특히 NPE나 공격적 라이선싱 모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특허 수익화 자체가 거대한 산업이다. 이를 불편하게만 바라보는 환경에서 'IP를 움직이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IP 중심지', '세계 IP 허브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순서가 뒤바뀐 접근처럼 보인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대한 담론보다 시장의 기초체력을 만드는 일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중간 목표'다. 지금 한국 IP 정책에는 거대한 비전은 많지만, 그 비전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 이정표가 부족하다. '세계 IP 허브국가'라는 표현은 방향성으로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은 결국 실행 가능성과 측정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잘 정의하고 실천방안을 세우고 현실화한다면 IP 허브국가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싱가포르도 처음부터 '글로벌 IP 허브'를 외친 것이 아니다. 국제중재센터 유치, 세제 개선, 해외 로펌 개방, 금융 인프라 구축 같은 구체적 단계들을 수십 년간 축적했다. 중국 역시 먼저 특허법원과 기술거래소, SEP 판례를 쌓았다. 미국은 애초에 거대한 시장과 분쟁 규모를 기반으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반면 현재 한국의 논의는 최종 목표는 거대하지만, 그 사이 단계가 구체적이지 않고, 실행 방향이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아시아 IP 중심지'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국내 특허 거래 규모를 몇 배로 키울 것인지, 해외 기업의 한국 라이선싱 비중을 얼마나 확대할 것인지, 글로벌 수준의 라이선스 전문기업을 몇 개 육성할 것인지, 한국을 선택하는 국제 특허분쟁 사건 수를 얼마나 늘릴 것인지 같은 정량적 목표가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현실감각에 기초한 실효성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비전, 현실 위에 세워야" 기왕에 있었던 IP 허브를 위한 제도와 정책을 보자. 특허법원 국제재판부 설치가 상징적이다. 특허법원은 국제재판부를 통해 외국어 변론과 증거 제출을 허용하고, 통역·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외국 기업들이 한국 법원을 국제 IP 분쟁의 포럼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법원 스스로도 '글로벌 IP 허브 코트(Global IP Hub Court)'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물론 외국의 당사자에게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이용해 볼 의향이 생길 수도 있다. 최근 이용율도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기업이 영어로 재판을 하는 미국에서 소송을 하는 것은 IP 소송을 어디에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언어는 문제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국제재판부에서 영어로 소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사자에 대한 고객서비스 차원의 문제이지, 소송지를 결정하는데는 아무런 고려사항이 아니다. 소송을 어디에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해당 국가가 얼마나 권리자에게 호의적인가, 절차 타당성과 결과 공정성이 보장되고 있는가, 소송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 해당 국가가 생산과 판매가 되는 시장이며 그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소송 상대방의 생산기지나 본사가 어디인가, 소송 승소 시 생산 및 판매금지가 어느 정도 되고 있나, 소송 승소 시 손해액은 얼마나 인정되고 있나 등이지, 소송에서 어느 나라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국제재판부는 글로벌 IP 소송의 허브를 위한 정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결국 IP 허브는 비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래량·분쟁 규모·자본·전문가·기업 집적이라는 현실적 숫자들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글로벌 기업들과 NPE들이 '한국에서 IP 거래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 '한국에서 라이선스 협상을 하면 효율적이다', '한국 법원과 중재기관을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야 비로소 허브가 형성된다. 비전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전은 현실 위에 세워야 한다. 활주로와 항공사, 환승 수요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 허브공항부터 선언한다고 허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IP 허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수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중간 목표를 통해 시장을 실제로 성장시키는 전략이다. 명확한 방향성을 설정하고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한 가운데 실효성 있는 전략과 정책을 만들지 않고, 'IP 허브'라는 거대 담론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이 문제는 특별위원회 인적 구성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민간위원 15명 가운데 순수 기업 출신은 단 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교수, 변호사, 법원관계자 등으로 채워졌다. 특허수익화 전문기업이 포함된 것이 긍정적이고, 표면적으로는 균형잡힌 구성처럼 보일 수 있지만, IP 허브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특허, 기업 현장서 창출" 지식재산은 기업 현장에서 창출된다. 특허를 출원하고, 기술을 라이선싱하고, 글로벌 분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바로 기업이다. IP 허브 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기업이 IP를 통해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그 경험이 정책으로 다시 반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그 현장의 주체인 기업이 전체 민간위원의 13%에 불과하다면, 특별위원회가 아무리 정교한 논의를 이어간다 해도 현장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 교수와 변호사의 시각은 분명 중요하지만, 기업의 생생한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더 깊은 문제는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IP 관련 위원회, 나아가 거의 모든 분야의 정부 위원회가 유사한 구성을 반복해왔다. 학계와 법조계 중심, 여기에 일부 기업 인사를 추가하는 방식은 사실상 관행이되어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위원회는 구성되고, 논의는 이뤄지고, 보고서는나오지만, 정작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이번 특별위원회 역시 그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IP 정책 논의는 수십년간 유사한 문제의식을 반복해왔다. '특허의 질을 높여야 한다', '라이선스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 'IP 금융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러한 명제들은 이미 10년 전, 20년 전에도 위원회 보고서에 등장한 바 있다. 문제는 그 논의가 현장과 동떨어진 전문가 집단 내부 순환 논리에 머물렀다는 데 있다. 기업이 실제 부딪히는 장벽, 라이선스 협상 현장의 구체적인 애로, 글로벌 분쟁에서 한국 기업이 겪는 구조적 불리함 등은 정책문서에서 종종 추상화되거나 단순화되어 왔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려면 새로운 방식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재산을 실제 창출하고 거래하고 방어하는기업들이 특별위원회 중심에 서야 한다. 삼성, LG, SK, 현대차 같은 대기업만이 아니라, 글로벌 특허분쟁 최전선에 있는 중견·중소기업, 실제로 라이선스 수익을 경험해 본 스타트업과 IP 전문기업들의 목소리가 정책 논의의 뼈대를 이뤄야한다. IP 허브의 활주로는 결국 기업들이 깔아야 한다. 그 기업들을 뒷자리에 앉혀놓은 채 교수와 법조인이 앞에서 허브의 청사진을 그리는 구도는, 이번에도 또 하나의 보고서를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지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이번에는 말로만 IP 강국을 외치며 실제로는 한발자국도 떼지 못한 그간의 모습을 혁파하고, 거대한 한걸음을 내딛는 국가지식재산위원회와 세계 IP 허브국가 추진 특별전문위원회를 기대해본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2026.06.12 16:35박병욱 컬럼니스트

[기고] 부스 2개의 나라, INTA 런던이 한국 IP업계에 보낸 청구서

2026년 5월 2~6일(현지시간) 런던 엑셀(ExCeL) 센터에서 국제상표협회(INTA) 제148차 연례회의가 열렸다. 100개 이상 국가에서 1만 명 이상 지식재산(IP) 전문가, 기업 리더, 정책입안자가 한자리에 모인 IP 관련 세계 최대의 이 행사는 전통적인 상표·브랜드 포럼을 넘어 인공지능(AI), 무형자산 금융화, 글로벌 집행전략, 조직 다양성까지 아우르는 종합 IP 비즈니스 포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해줬다. INTA의 최고경영자(CEO)인 에티엔산스 데 아세도는 개회사에서 IP가 더 이상 법률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략자산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브랜드 보호는 기업 수익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이 메시지는 한국 기업이 새겨들어야 할 핵심 프레임이다. AI: 도구에서 인프라로 이번 회의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AI였다. 주목할 점은 논의의 결이 지난해와 달랐다는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AI를 흥분과 불안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올해는 AI가 이미 IP 실무에 폭넓게 도입된 상황에서 올바르고 안전한 활용법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들이 제기됐다. AI가 단순한 효율화 도구를 넘어 IP 관리와 집행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된 것이다. 실무적 변화도 구체적이다. 위조품은 전자상거래 채널에서 급증하고, SNS는 전례 없는 속도로 바이럴 침해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AI는 브랜드가 직면한 위험과 그 대응수단 모두를 재편하고 있다. 딥페이크 기반의 브랜드 침해는 특히 위협적이다. 미국 사이버보안 업체 시큐리티히어로의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3년 7~8월 유튜브와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이트 게시물 9만 5820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53%가 한국인이었으며, 피해자 대부분이 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이었다. 한국은 이미 딥페이크 IP 침해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다. 상업적 악용도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 모니터링 결과 페이스북에 게시된 온라인 도박 광고 중 딥페이크를 포함한 허위 조작 광고가 38건 확인됐다.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얼굴과 음성을 무단 조작한 사례가 6건, 공중파 뉴스 화면을 편집해 공신력을 도용한 사례도 8건에 달했다. 단순한 명예훼손을 넘어, AI 생성 콘텐츠가 브랜드 자산 자체를 도용하는 체계적인 상업 범죄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AI 기반 딥페이크 스캠은 2024년 기준 전년비 28% 증가했으며, 합성 신원 사기는 31% 급증했다. 이에 대응해 테일러 스위프트, 매튜 맥커너히 등 글로벌 유명인들은 AI 딥페이크에 대응하기 위해 성명·초상권 관련 상표 출원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자동화된 AI 탐지, 스마트 워크플로, 데이터 기반 리스크 예측 등이, 우수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되고 있는 글로벌 현실에서, 한국 기업들의 대응은 여전히 신고·삭제 요청 중심의 사후 대응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비전통적 상표: 보이지 않는 경쟁의 전선 이번 회의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흐름은 비전통적 상표(non-traditional trademarks)의 전략적 중요성이다. 올해 INTA 테이블 토픽 주제들은 고급 상표 조사와 집행, 글로벌 포트폴리오 최적화, AI와 신기술, 복잡한 크로스보더 환경에서 IP 실무 운영까지 폭넓게 망라했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더 이상 로고와 명칭만으로 브랜드를 방어하지 않는다. 사운드, 모션, 홀로그램, UI 디자인까지 권리화하는 전략이 가속화하고 있다. 인도특허청(IPO), 유럽특허청(EUIPO), 미국특허상표청(USPTO) 등을 포함한 전 세계가 3D 마크, 사운드 마크 등 비전통적 상표 출원과 인정 체계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K-팝, 게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뷰티 플랫폼 등 한국이 강점을 보유한 산업 분야는 이 전략과 높은 시너지를 가질 수 있다. 아이돌 그룹의 시그니처 모션, 브랜드 캐릭터의 UI 디자인, 플랫폼 특유의 인터랙션 사운드 등은 모두 비전통적 상표의 잠재적 보호대상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 기업의 상표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로고와 브랜드명 중심에 집중돼 있다. 위조품 대응, AI 규제 탐색, IP 전략을 통한 비즈니스 성장이라는 3가지 주제가 이번 회의 전반을 관통하는 실질적 의제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EUIPO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위조상품 교역 규모는 4670억 달러(약 640조 원)에 달한다. 글로벌 기업들은 위조상품에 대응해 세관·플랫폼·물류사업자·결제사업자·조사기관이 연결된 협업형 집행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동남아시아, 중동, 남미 신흥시장으로 확장할수록 현지 로펌을 통한 개별대응 방식 한계는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노베이션 마켓플레이스: 숫자가 드러낸 한국의 민낯 그러나 이번 런던 회의에서 한국 현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낸 장면은 세션장이 아니라 전시장에 있었다. 이번 INTA 이노베이션 마켓플레이스에는 약 40개국에서 200개 이상 기업과 기관이 참가했다. 아시아, 유럽, 라틴아메리카, 중동까지 폭넓은 국제적 대표성을 자랑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홍보 플랫폼이 아니다. 글로벌 IP 생태계의 이해관계자들이 파트너십을 맺고, 자국 IP 역량과 서비스를 세계 무대에 각인시키는 외교·비즈니스 공간이다. 중국은 국가지식산권국(CNIPA),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까지 4개 핵심 정부기관의 공식 대표단이 런던 회의에 참석했다. 법원과 행정기관이 함께 무대에 서며 중국 IP 집행체계와 정책 방향을 글로벌 시장에 직접 천명했다. 미국은 특허상표청 국장이 기조강연에 나서며 퍼블리시티권과 AI 대응 정책을 직접 설명했다. 영국 정부는 IP를 경제성장 전략의 핵심 축으로 내세우며 상표 출원 신기록과 AI·집행·IP 금융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은 대형 로펌의 대규모 단체 참가로 존재감을 과시했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인도 부스도 여러 개였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는 이스라엘, UAE, 우크라이나 등의 부스도 눈에 띄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 존재감은 초라했다. 전체 200여개 부스 가운데 한국 기업 부스는 'We Go Fair'와 'IP WIN' 단 2개였다. 이들 기업 외에는 한국 지식재산처 부스만 있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어떤 로펌도, 특허법인도 부스를 내지 않았다. 이는 한국이 글로벌 IP 시장에서 아직 수비적 참여자에 머물러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여개 부스 중 2개, 비율로는 1%다. 특허협력조약(PCT) 국제출원 세계 4위 국가가, 세계 최대 IP 행사 전시장에서 부스 2개로 존재를 드러내는 현실은 한국 IP 생태계 구조적 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허: 출원 강국에서 수익 강국으로 미완성 전환 상표 중심의 INTA 무대에서도 이번 회의는 특허의 전략적 위상 변화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권력, 특허, 지정학: 지정학적 세계에서의 IP 권리"라는 세션은 오늘날 특허가 단순한 기술 보호 수단을 넘어 국가 경쟁 전략의 핵심 수단이 되고 있음을 정면으로 다뤘다.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거래 복잡성이 맞물리며 인수합병(M&A) 과정에서 특허 실사(patent due diligence)가 갈수록 정교해져야 한다는 점도 집중 논의됐다. AI가 발명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특허 제도의 근간인 발명자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흐름이다. USPTO는 2025년 11월 AI 보조 발명에 대한 발명자 지침을 개정하면서, AI 시스템은 발명자가 될 수 없고 오직 자연인만 특허 출원의 발명자로 인정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동시에 인간이 AI 도구를 사용해 아이디어를 개발하더라도 인간 발명자 지위를 잃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실무 기준을 완화해, AI를 실험실 장비나 소프트웨어 도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AI를 활용한 연구개발(R&D)이 확산되는 기업 환경에서, 발명 공개 절차와 특허 출원 전략을 어떻게 재설계해야 하는가라는 실질적 과제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진 것이다. 한국의 특허 경쟁력은 외형적으로는 글로벌 톱티어에 해당한다. 2024년 한국의 PCT 국제출원은 2만 3851건으로 전년비 7.1% 증가하며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5년 연속 세계 4위를 기록했다. 미국(-2.8%), 일본(-1.2%), 독일(-1.3%) 등 주요 특허 강국이 감소세를 보인 가운데 한국만 역성장 없이 증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출원 건수의 화려한 숫자 뒤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존재한다. 경쟁국들이 특허를 어떻게 수익자산으로 전환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격차는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가 이미 IP 생태계 면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미국과 유럽은 당연히 격차를 인정해야 하겠지만, 우리보다 IP 제도를 뒤늦게 도입하고 제도 정비를 늦게 시작한 중국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통신 분야를 보면 화웨이는 2024년 4G·5G 디바이스와 자동차·소비자 전자기기를 대상으로 한 특허 라이선스에서 약 6억 3000만 달러(약 8600억 원) 수익을 거뒀다. 특기할 점은 화웨이가 지불하는 IP 사용료가 수취하는 금액보다 여전히 크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즉 중국은 아직 전체적으로는 IP 분야에서 적자국이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히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배터리 분야에서 CATL은 이 전환을 더욱 공격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포드, 테슬라, GM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에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기술을 라이선스하는 'LRS(License Royalty Service)' 모델이 대표적이다. 제조 경쟁력이 특허 수익화로 전환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바이오 분야 전환은 더 빠르다. 2025년 1분기 중국 기업의 바이오테크 라이선스 아웃 거래 비중은 전체의 32%에 달해 2023년과 2024년의 21% 대비 급증했다.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 등 글로벌 빅파마가 중국 기업과 잇따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IP 흐름 방향 자체가 뒤집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이 흐름과 얼마나 가까운가? 2024년 기준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PCT 국제출원 세계 2위와 4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두 기업이 특허 라이선스 수익으로 거두는 금액은, 화웨이·CATL·노키아·에릭슨처럼 IP를 수익 엔진으로 체계화한 기업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제한적이다. 출원 건수와 수익 규모 사이의 간극, 그것이 한국 특허 생태계가 당면한 핵심 과제다. 한국 기업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회사의 특허 포트폴리오 중 라이선스 수익으로 전환 가능한 자산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전환 가능한 자산을 어떻게 수익화할 것인가? 전략자산으로서 IP를 비즈니스 전략과 어떻게 조응하게 할 것인가? 특허 실사가 M&A와 투자 협상에서 실질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 무형자산의 금융화: IP는 비용인가, 수익 자산인가 INTA CEO는 IP 자산 가치평가에 관한 새로운 연구와 AI를 활용한 상표 분석 보고서 발간 계획을 발표하며, IP를 전략·재무적 자산으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의제를 명확히 전환했다. "Business of Intangibles"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맥락이다. 행사장 전시공간에서도 IP 가치평가, 라이선스 수익화, IP 담보 금융, 브랜드 애널리틱스 플랫폼 기업들의 존재감이 크게 확대됐다. 이 흐름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특허와 상표는 더 이상 분쟁 방어용 자산이 아니라, 직접적인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수익 자산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화웨이의 6억 3000만 달러, 노키아의 20억 달러, 퀄컴의 55억 7000만 달러가 모두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앞서 예를 든 CATL은 LRS 모델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로부터 라이선스 수익을 거두고 있는데, 이러한 모델은 기술 플랫폼 회사로 전환을 의미한다. 단순히 얘기하면 배터리 업계의 퀄컴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자동차 기업이 공장 투자와 자본지출(CAPEX)을 부담하고, CATL은 생산라인 구축, 공급망 설계, 공정 최적화, 기술 지원을 제공한다. 대신 CATL은 특허 라이선스 로열티와 기술 서비스 비용을 받는 것이다. 이는 기술과 특허를 모두 가져야 가능한 모델이다. 또한, 중국 바이오테크 기업들이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의 계약 상대가 된 것도 같은 흐름이다. 지난해에만 미국 바이오 기업들은 중국 바이오텍과 70건의 계약을 체결했고, 약 56억 달러를 선지급했다. 이러한 흐름은 직접적인 현금흐름을 만드는 것을 넘어, 시장에서 경쟁력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4위의 PCT 국제출원 강국이지만, IP 수익화와 라이선스 생태계는 미국·유럽 대비 여전히 취약하다. 이제는 중국보다도 뒤처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기업들이 특허와 상표를 방어용 자산으로만 인식하고, 라이선스·투자·사업화·분쟁 수익화로 연결되는 능동적 IP 비즈니스 모델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출원 건수라는 투입 지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수익 창출이라는 산출 지표는 이에 걸맞지 않다는 역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IP 가치평가가 M&A, 투자, 파트너십 협상 테이블에서 실질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를 자문할 때다. 전략적 시사점: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런던 INTA가 한국 기업들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IP 경쟁은 이제 권리 확보의 양적 경쟁이 아니라 AI·데이터·브랜드 경험·글로벌 집행·무형자산 수익화를 결합한 종합 생태계 경쟁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승패는 세션장 안의 논의가 아니라, 전시장 부스 배치와 대표단 규모처럼 눈에 보이는 현장 존재감에서도 갈린다. AI가 이제는 필수 인프라가 되고,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시대, IP가 국가의 핵심 전략자산이 되고, 시장에서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시금석이 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글로벌 기업들 전략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기업도, 국가도, 개인도 자문해 보아야 할 때다. INTA 런던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었다. 신뢰가 IP 실무의 핵심 통화가 되고 있는 시대에, IP가 법률비용 항목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의 중심 자산으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보여준 방향표였다. IP5의 멤버이자 글로벌 특허출원 4위의 IP 강국을 자부하고 있으면서, 정작 글로벌 최대의 IP 행사에는 2개의 부스만 있는 나라, 그 숫자의 간극이 한국 IP 업계가 채워야 할 숙제의 크기를 말해준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2026.05.27 16:43박병욱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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