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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의 헤디트] 미술이 도시를 움직이려면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8월 31일 저녁 7시 서울아트위크가 을지로에서 첫 오프닝나잇으로 문을 연다. 오래된 공구상가와 산업·노동의 시간이 남아 있는 을지로에서 20개 시각예술공간이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전시와 퍼포먼스, 아티스트 토크를 이어간다. 9월 6일까지 미술관과 박물관, 갤러리와 대안·신생공간에서 전시와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같은 주 코엑스에서는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도 열린다. 미술이 전시장 밖으로 이어지면 관람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날까. 작품 앞에 서는 순간뿐 아니라 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 그 사이 마주치는 골목과 건물의 표정까지 관람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번 서울아트위크에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도 전시의 숫자보다 미술을 따라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미술을 보러 가는 길도 관람이다 미술을 보러 갈 때는 대개 목적지가 분명하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도착해 전시장을 돌고 작품을 본 뒤 건물을 나온다. 관람의 시작과 끝도 자연스럽게 전시장 안에 놓인다. 그러나 미술이 도시 곳곳으로 이어지면 작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시간까지 관람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다. 서울아트위크의 레지던시 투어가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관람객은 코엑스에서 출발해 서서울미술관을 거쳐 금천예술공장으로 이동하고, 다른 날에는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작가 작업공간을 찾아간다. 완성된 작품을 보는 시간과 작품이 만들어지는 장소를 만나는 시간이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진다. 큰 행사에 사람을 모으는 것과 그 사람을 다시 도시 안의 다른 문화공간으로 보내는 일은 경험의 구조가 다르다. 후자에서는 목적지 사이의 시간도 의미를 갖는다. 어디에서 내려 어떤 거리를 걷는지, 어떤 동네를 지나 어떤 건물의 문을 여는지가 작품과 함께 기억된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미술행사라면 공간을 많이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에게 다음 장소로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좋은 동선은 가장 짧은 길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음 장소가 궁금해지는 길일 수도 있다. 미술을 보러 가는 길도 이미 관람의 일부다. 도시를 움직이려면 때로 멈춰야 한다 첫날 뉴스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의 제목은 꽤 길다. 《장시간 정체 구간을 주행 중입니다. 안전을 위해 가까운 휴게소에서 쉬어가세요.》 10명의 작가가 참여해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 '쉼'과 '멈춤'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 전시가 을지로에서 열리는 점도 흥미롭다. 오래된 산업과 노동의 흔적, 계속되는 도시의 변화, 사람들의 기억과 새롭게 자리 잡은 미술공간이 한 동네 안에 함께 존재한다. 빠르게 지나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을 잠시 멈춰 섰을 때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전시의 문제의식은 을지로라는 장소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문화행사는 사람을 움직인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게 하고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한다. 그러나 예술은 사람의 걸음을 늦추는 방식으로도 도시를 다르게 보게 한다. 매일 지나던 골목에서 잠시 멈추고, 오래된 건물의 표면을 다시 바라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던 작은 공간의 문을 처음 열게 할 수도 있다. 문화가 도시를 움직이는 방식에는 이동뿐 아니라 멈춤도 있다. 무엇을 더 많이 보여줄 것인가만큼 어디에서 사람의 걸음을 늦추게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잠시 멈춘 순간에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장소가 비로소 하나의 장면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장소가 달라지면 미술의 기억도 달라진다 을지로에는 을지로의 시간이 있고, 신당과 금천에도 저마다 다른 도시의 표정이 있다. 미술관의 화이트큐브에서 작품을 만나는 경험과 오래된 골목을 걷다가 작은 전시공간의 문을 열고 작품을 만나는 경험은 같지 않다. 우리는 작품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걸었던 길과 건물의 표정, 사람들이 오가던 풍경, 우연히 들었던 소리와 잠시 머물렀던 시간도 함께 기억된다. 작품을 만나기 전과 작품을 보고 난 뒤의 시간까지 관람 경험에 들어온다. 서울아트위크가 오프닝 당일 을지로 일대를 순환하는 버스를 운영하고, 갤러리와 함께 독립서점·카페 등의 정보를 담은 '을지美지도'를 마련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전시공간만 가리키기보다 그 주변을 함께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장치다. 도시는 문화행사의 배경이 아니라 관람 경험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작품을 어디에 놓는지만큼 사람이 그곳에 어떻게 도착하고, 무엇을 지나며, 어디에서 멈추는지도 중요하다. 장소가 작품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작품을 본 기억에는 그날 걸었던 도시의 시간도 함께 남는다. 서울아트위크가 어떤 성과를 남길지는 일주일이 지나야 알 수 있다. 다만 이번 기획에서 지켜볼 것은 미술의 공간을 넓히는 것만큼 그 공간 사이를 걷는 사람의 경험이다. 처음 가본 골목 하나, 다시 들어가 보고 싶은 작은 공간 하나, 우연히 알게 된 작가 한 사람, 잠시 멈춰 바라본 풍경 하나가 남는다면 그것 역시 아트위크가 만든 변화로 남을 수 있다. 도시의 문화적 매력은 모든 것을 한곳에 모은다고 생기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길을 걷게 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잠시 멈춰 서게 하며, 늘 보던 도시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게 하는 경험이 쌓일 때 그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미술이 도시를 움직이려면, 먼저 사람이 도시를 이전과 다르게 걷게 해야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2026.08.31 09:33이창근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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