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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AI의 빈칸, 문화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9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소 이례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인공(Artificial)'이라는 말에는 가짜 같은 느낌이 있다며, 앞으로 미국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이를 '슈퍼 인텔리전스(SI)'라는 더 정확한 용어로 바꾸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발언은 일주일 뒤 미국 빅테크 수장들이 나란히 배석한 자리에서 행정명령으로 공식화됐다. 그로부터 불과 보름여 뒤, 중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AI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10월 16일 중국 상무부와 과학기술부는 40개 기술을 수출통제 대상에 새로 추가하는 안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23개가 AI 관련 기술이었을 뿐 아니라 AI 모델의 가중치와 소스코드까지 통제 범위에 포함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한쪽은 이름을 새로 붙이는 방식으로, 다른 한쪽은 문을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두 장면이 가리키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AI를 무엇이라 부를지 정하는 일이 담론의 주도권과 맞닿아 있고 AI 모델이 국경을 넘나드는 전략 자산으로 다뤄지는 지금, AI는 더 이상 기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권력과 주권의 문제로 옮겨 가고 있다. 각국이 앞다투어 AI를 '우리 것'으로 확보하려는 것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최근 자주 회자되는 '소버린 AI(Sovereign AI)'라는 개념 역시 AI를 자국의 통제 아래 두려는 이러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GPU와 파라미터로는 채울 수 없는 것 소버린 AI는 한 국가가 자국의 인프라와 데이터, 인력을 기반으로 AI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킨다. 영국이 5억 파운드 규모의 소버린 AI 펀드를 조성하고, 칠레가 중남미의 언어와 문화를 반영한 오픈소스 모델을 개발하며, 대만이 자국 모델을 육성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민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데, 독일의 AI 기업 알레프 알파는 10월 초 '소버린'을 표방한 모델 '콜리브리(Kolibri)'를 공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다만 '소버린'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모델이 공개된 직후 해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모델의 성능보다 이 용어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이 더 오래 이어졌다고 하는데, 캐나다 기업과 합병을 추진 중인 회사의 모델을 과연 소버린이라 부를 수 있는지, 중국 모델보다 성능이 낮은데도 굳이 채택할 이유가 있는지가 주된 쟁점이었다. 무엇이 소버린인지는 물론, 그것이 비용을 감수할 만한 가치인지에 대해서조차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논쟁과는 별개로 소버린 AI를 향한 각국의 행보는 빨라지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서 SK텔레콤 컨소시엄은 5190억 개의 파라미터(AI가 학습을 통해 조정하는 내부 변수)를 갖춘 대규모 모델을 선보이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특성을 깊이 반영하겠다는 목표를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소버린 AI를 다룬 보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논의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확보한 GPU의 수량과 파라미터 규모, 투입 예산, 데이터센터의 전력 용량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정량 지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소버린 AI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때 안보와 산업 경쟁력 못지않게 자주 거론되는 근거는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AI'다. 그럼에도 정량 지표가 주도하는 논의 속에서 '문화'는 선언적 목표로 언급될 뿐 그 실체는 여전히 비어 있으며, 무엇을 우리 문화로 규정할 것인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지, AI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국가 차원의 의제로 다뤄지기보다 일부 연구자와 기관의 몫으로 남아 있다. 정부도 국가대표 AI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한국어 벤치마크(AI의 성능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평가하는 표준 문제 세트)를 구축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을 보면 맞춤법이나 방언과 같은 언어 능력 평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며, 문화적 이해의 깊이는 아직 독립된 평가 축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한국어를 잘하는 AI와 한국을 이해하는 AI는 다르다 AI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해서 한국 문화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 간극은 이미 여러 조사와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올해 3월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는 주요 생성형 AI가 한국 문화를 어떻게 재현하는지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경복궁을 그려 달라는 요청에 어떤 AI는 황금색과 청록색으로 채색한 중국식 궁궐을 내놓았고 또 다른 AI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판소리 장면에는 중국 경극의 요소가 뒤섞이고 아리랑의 배경에는 일본식 홍등이 내걸렸다.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저마다의 고유한 모습으로 구분하지 못한 채 막연한 '동양풍'으로 뭉뚱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계는 시각적 재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어로 묻고 답하는 텍스트의 영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국 문화 맥락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한 'KULTURE Bench' 연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한국어 특화 모델조차 관용 표현 문제의 정답률이 69% 수준에 머물렀고, 시(詩) 문제에서는 최고 점수도 46%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한국의 미신을 소재로 AI의 문화 추론 능력을 평가한 '눈치 벤치(Nunchi-Bench)' 연구 역시, AI가 미신의 내용은 대체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실제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한국어 문장을 매끄럽게 생성하는 능력과 그 말에 담긴 역사와 정서, 상황의 결을 읽어 내는 능력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시아 9개 언어의 문화 편향을 측정한 'Camellia' 연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결과가 나왔다. 비교 대상이 된 다국어 모델 가운데 한국 문화 맥락에 가장 잘 적응한 모델은 메타나 구글 같은 서구 빅테크의 모델이 아니라 중국 기업 알리바바가 만든 큐원(Qwen)이었는데, 이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기업의 규모나 명성보다 무엇을 어떻게 학습했느냐에 좌우된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소버린 AI를 통해 우리가 지키려는 것이 모델의 국적인지, 아니면 그 안에 담길 문화의 맥락인지를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물음은 유네스코가 제기해 온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유네스코는 AI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학습되며 활용되느냐에 따라 특정 문화의 서사와 표현 양식이 지배적 위치를 거듭 재생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앞서 살펴본 '동양풍'의 혼동 역시 단순한 기술적 오류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가 풍부한 문화가 그렇지 못한 문화를 대신해 말하게 되는 구조적 문제의 한 단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보다, 그 데이터에 어떤 맥락을 담아 설계하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몇몇 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국악원은 국악 음원에 장르와 악기, 장단, 표현 기법 같은 전문 정보와 문화적 맥락을 덧붙이는 가공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데이터는 오는 12월 공공데이터포털을 통해 AI 학습용으로 처음 개방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반크와 함께 청년들로 구성된 '글로벌 AI 문화유산 홍보대사'를 운영하며, 생성형 AI가 만들어 낸 문화유산의 오류를 찾아내고 이를 바로잡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두 사례는 각각 데이터에 맥락을 입히는 일과 AI의 결과물을 문화의 눈으로 검증하는 일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제기한 물음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아직 일부 분야와 개별 기관의 차원에 머물러 있으며, 소버린 AI를 개발하는 국가 사업과 어떻게 맞물릴지는 분명하지 않다. 빈칸을 채우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지난 9월 국내 한 관광단지의 미디어월에서는 중국을 소개하는 화면 속 중국풍 복장에 '한복(HANBOK)'이라는 설명이 붙어 논란이 일었다. 운영 기관은 시운전 과정에서 발생한 송출 오류라고 해명했지만, 온라인에서는 AI로 제작한 콘텐츠를 검수 없이 내보낸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이 장면은 AI가 문화를 다룰 때 어디서 빈틈이 생기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는 AI를 만드는 단계로, 처음부터 우리 문화를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AI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틀린 결과를 내놓기 마련이다. 다른 하나는 AI의 결과물을 쓰는 단계로, 그 결과물이 우리 문화에 부합하는지를 가려낼 눈이 없다면 오류는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공개되고 만다. 두 빈틈 가운데 이번 사례에서 먼저 드러난 것은 쓰는 단계의 빈틈이다. 오류가 세상에 나가기 직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은 결과물을 검토하는 사람의 눈이다. AI가 그려 준 경복궁이 정말 경복궁인지, 한복이 정말 한복인지를 판단하는 안목은 어떤 모델도 대신 길러 주지 않는다. 그 눈은 결국 사람이 길러야 한다. 다만 사람의 눈만으로 모든 오류를 걸러 낼 수는 없다. AI가 쏟아 내는 방대한 결과물을 일일이 확인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더 근본적인 해법은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함께하는 데 있다. 이처럼 어느 한 단계만으로는 빈틈을 온전히 메울 수 없는 만큼, 소버린 AI의 빈칸을 채우려면 만드는 단계와 쓰는 단계 모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하는데, 앞의 두 가지는 만드는 단계에, 마지막 하나는 쓰는 단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첫째, 소버린 AI를 평가할 때 '문화 이해'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소버린 AI를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모델의 규모와 성능 순위에 쏠려 있지만, AI가 한국어의 관용 표현과 시, 역사적 맥락을 얼마나 정확히 읽어 내는지, 그리고 한국 문화를 다른 나라의 것과 혼동하지 않는지는 이러한 지표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를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문화 이해 지표'를 평가의 한 축으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자원은 이미 적지 않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함께 평가하는 CLIcK, 앞서 살펴본 KULTURE Bench와 같은 연구용 벤치마크가 나와 있고, 반크의 보고서는 AI가 그린 한국 문화를 구성 요소의 정확성, 문화적 고유성과 비혼동성, 역사·시대 맥락의 적합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점수화해 비교한 바 있다. 정부가 구축하고 있는 국가대표 AI 평가 기준에서도 문화 이해가 한국어 능력의 일부로 다뤄지는 데 머물지 않고, 독립된 평가 항목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둘째, 문화 현장의 사람들이 AI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국악 음원에 장단과 표현 기법 정보를 덧붙이는 작업에서 보듯, 데이터에 문화적 맥락을 입히는 일은 엔지니어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며 반드시 그 분야를 깊이 아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같은 음이라도 떨고 꺾고 흘려 내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시김새는 악보에 온전히 담기지 않으며, 이를 듣고 가려 기록하는 일은 오랜 시간 국악을 익혀 온 귀가 있어야 가능하다. 어떤 장단이 정확하고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를 가르는 기준은 결국 문화 현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이 국악에서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오류들이 이미 말해 준다. 경복궁이 중국식 궁궐로 그려지고 중국풍 복장에 '한복'이라는 설명이 붙은 것은 각각 문화유산과 전통 복식 분야의 전문가라면 한눈에 가려낼 수 있는 오류다. 시 문제의 정답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결과는 행간의 정서와 시대적 맥락을 읽어 내는 문학 연구자의 해석이 학습 데이터에 충분히 담기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미신이나 관용 표현처럼 일상의 맥락에 깃든 지식 역시 민속학자나 국어학자처럼 우리의 풍습과 말을 오래 연구해 온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확한 학습 데이터로 거듭나기 어렵다. 분야마다 오류의 모양이 다른 만큼, 그 오류를 바로잡을 기준도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같은 국가 사업에도 기술 인력과 함께 이들 분야별 전문가가 처음부터 자리를 갖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며, 문화 현장이 AI의 '사용자'에 머물지 않고 '설계자'로 들어설 때 비로소 빈칸을 채울 기준이 생겨난다. 셋째, AI 리터러시를 문화 리터러시로 넓혀야 한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소버린 AI라도 틀린 답을 내놓을 수 있으며, 그 답을 쓰는 사람이 오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잘못된 내용은 그대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AI를 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져야 하지만, 지금의 AI 교육은 여전히 도구 사용법을 익히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 AI가 그린 경복궁 앞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프롬프트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보다, 그 그림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적 안목이다. 이러한 안목을 기르는 교육의 필요성은 국제 사회도 강조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꾸린 전문가 그룹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각국이 국가 AI 전략에 문화를 포함하고, 기술 역량과 비판적 사고를 함께 기르는 '문화적 AI 리터러시'에 투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 소개한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반크의 '글로벌 AI 문화유산 홍보대사' 활동은 참여자들이 AI가 만들어 낸 문화유산의 오류를 직접 찾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문화적 안목을 기른다는 점에서, 이러한 교육의 국내 단초로 볼 만하다. 다만 이는 청년 참여자 중심의 단기 활동에 머물러 있어, 누구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교육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더욱이 AI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퍼뜨리는 이들은 이보다 훨씬 넓은 곳에 있다. 교사는 수업 자료를, 공무원은 홍보물과 안내문을 AI로 만드는 일이 점차 일상이 되어 가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관광단지 미디어월의 사례처럼 공공의 공간에 내걸린 콘텐츠의 오류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신뢰를 업고 전달된다. 학교에서 잘못 전해진 내용이 학생들의 인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파급력은 더욱 크다. 따라서 교사와 공무원을 위한 연수에 'AI의 답을 우리 문화의 눈으로 검증하는 역량'을 정식으로 포함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잘못된 내용이 그대로 세상에 나갈 틈은 그만큼 좁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제안, 곧 평가의 기준을 세우는 일과 데이터에 맥락을 입히는 일, 그리고 결과물을 가려낼 안목을 기르는 일은 서로 다른 층위의 과제처럼 보이지만, AI가 우리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할지를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지점에서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AI라는 이름부터 바꾸려 했다. 무엇을 무엇이라 부를지 정하는 일은 곧 주권의 문제이며, 바다 하나의 이름을 두고 '동해'와 '일본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다퉈 온 우리는 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그 다툼의 무대가 AI로 옮겨 오고 있다. AI가 무엇을 '한국'이라 부르고 무엇을 '한복'이라 부를지를 우리가 정하고 확인하지 못한다면, 국산 모델을 몇 개 보유하든 온전한 주권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GPU는 사들일 수 있고 파라미터는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 문화인지를 가르는 기준은 해외에서 사 올 수 없으며, 그 기준을 지켜 낼 사람 또한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AI를 만드는 자리에는 문화를 깊이 아는 전문가가, AI를 쓰는 자리에는 그 결과물을 문화의 눈으로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버린 AI의 빈칸을 채우는 것은 문화이며, 그 빈칸에 문화를 온전히 새겨 넣을 수 있는 이는 바로 그 문화를 오래 익히고 지켜 온 사람들이다. 필자 이애진 이애진은 생성형 AI 교육과 조직의 AX를 설계하는 AI 에듀케이터다. 서울대학교에서 정보문화학(ICT)과 음악학을, 경인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컴퓨터교육을 전공했다. 현재 구글 공식 PD 파트너사 플로우디엑스(FlowDX) 대표이자 구글 공인 트레이너로 교육기관과 공공기관, 연구기관 및 기업을 대상으로 생성형 AI 교육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성형 AI 환경에서 정보와 콘텐츠가 발견·활용되는 방식과 생성형 엔진 최적화(GEO)로 관심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에서는 AI와 문화예술, 콘텐츠산업, 교육, 공공·기업의 AI 전환을 중심으로 기술이 현장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펴본다.

2026.10.28 09:41이애진 컬럼니스트

우리는 왜 AI에게 고맙다고 말할까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코로나 이후 우리의 소통 방식은 복잡하고 피로한 대인관계 대신, 언제든 즉각 답을 건네는 온라인과 인공지능과의 소통이 훨씬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당장 막막한 문제 해결을 위해 서슴없이 AI에게 해답을 구하는 모습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AI와 대화를 하면서 사람들은 AI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작년 4월,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는 사용자들이 챗GPT에 건네는 '부탁해요', '고마워요' 같은 인사말 때문에 수천만 달러의 전기요금이 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짧은 감사 인사 하나에도 AI가 답을 생성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그만큼 연산과 전력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은 전기요금보다 AI에게 예의를 갖추는 사용자의 태도에서 주목을 해보고자 한다. 글로벌 미디어 그룹 '퓨처 PLC'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응답자의 67%는 챗봇에 예의를 갖춰 대화한다고 답했고 그중 상당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옳은 일이라고 느낀다고 고백했다. 상대가 감정 따윈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화를 하다가 AI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스탠퍼드대학교의 클리포드 나스 연구팀은 CASA(Computers Are Social Actors) 이론을 통해 사람들이 컴퓨터와 상호작용할 때도 예의나 감정적 반응 등 인간관계의 규칙을 적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심리학자 니콜라스 에플리 연구팀에 따르면, 인간은 낯선 대상을 이해할 때 인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와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비인간에게도 인간다운 특성을 부여한다. 외로움과 사회적 연결의 결핍이 AI를 인간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점은, AI가 일상의 동반자로 자리 잡는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표적인 영화작품이 영화 《Her》(2013)이다. Her에 나오는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 심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내와 별거하며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교감하는 인공지능 OS '사만다'를 만난다.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깊이 의존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진짜 연인을 대하듯 마음을 쏟는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대상에 인간의 감정이나 의도, 성격을 부여하는 현상을 '의인화'라고 한다. 영화 뿐만 아니라 현실사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2026년 2월 헤럴드경제 보도에 따르면, MZ 세대를 중심으로 사주·운세 특화 목록의 GPT 서비스의 일부는 누적이용자 300만명을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ChatGPT의 발전 이후, 많은 사람들은 AI에게 운세를 묻고 고민을 털어놓으며, 다정한 답변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사람들은 AI의 개인화된 맞춤형 응답에서 정서적인 만족을 느끼고, 유료서비스까지 이용하는 현상은, 인간이 알고리즘과의 대화에서도 위로와 정서적 연결가능성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AI가 질문에 답하는 도구였다면, 오늘날의 AI 에이전트는 백그라운드에서 실무를 수행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하는 손'이자 조직의 새로운 협업자로 자리 잡고 있다. 여러 전문 도구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오케스트레이션 환경에서 인간은 에이전트 군단을 조율하는 디렉터의 위치에 선다. 그러나 AI가 고도화된 지능과 자연스러운 언어, 대화의 기억까지 갖출수록 인간의 사회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단서도 풍부해진다. 사람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AI는 틀린 답조차 그럴듯하게 전달할 수 있고, 언제나 내 편에서 귀 기울이는 대화 상대는 외로운 이들에게 인간관계를 대신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도구를 향한 정중함과 의인화가 단순한 습관을 넘어, 인간이 연결과 위안을 구하는 방식이자 AI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점인 이유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의인화의 물결 속에서 사용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의인화는 켜고 끄는 스위치가 아니라 사용자가 상황에 맞게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다이얼이다. 금융이나 의료처럼 정확성이 생명인 서비스에서는 의인화를 낮추고 불확실성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반면 정서적 지지가 목적인 서비스라면 따뜻한 어조를 구사하되, 상대가 AI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인지시키고 과도한 의존의 신호를 감지하는 안전장치를 함께 마련해야 마땅하다. 샘 올트먼이 말한 '고마워'로 인한 수천만 달러의 전기요금은 단순한 연산 비용 그 이상이다. 그것은 AI를 사람처럼 보이도록 의인화를 설정한 결과이며, 어디까지 사람처럼 응답하게 만들 것인가의 정도는 AI 설계자의 선택이다. 결국 기술이 인간의 마음을 정교하게 모방할수록, 그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도 무거워진다. 사용자는 AI와의 대화를 통해 고마움과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친밀함에 매몰되지 않고, AI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읽어내고 바라보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 정지윤 정지윤은 인공지능(AI)과 미디어기술을 기반으로 인간과 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미디어공학자다.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에서 미디어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중앙대 예술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성균관대 인공지능혁신융합대학사업단 선임연구원과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강사, 세종대 메타버스융합학부 조교수 등을 지냈다. AI 예술 창작도구, 콘텐츠 융합교육, UI·UX, 인간-AI 상호작용을 연구해 왔으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에서 AI·예술공학·미디어융합을 중심으로 기술이 창작과 문화산업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펴본다.

2026.10.26 13:48정지윤 컬럼니스트

문화가 기술을 이끈다는 것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인공지능(AI)은 영상과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사라진 풍경을 재현하고 상상 속 장면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도 한결 쉬워졌다. 그러나 기술이 표현의 가능성을 넓힌다고 해서 무엇을 만들고 왜 보여줘야 하는지까지 대신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문화기술(CT)이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이 필요한 현장이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 엘리에나호텔 컨벤션홀에서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가 출범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 부설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마련한 협의체로, 기업인과 창작자, 학계 및 연구기관 등 190개 기관의 전문가 214명이 참여한다. 게임·인터랙티브, 영상·미디어, 음악·공연, 스토리 원천 등 네 분야에서 기술수요를 발굴하고, 이를 중장기 투자전략과 2028년 신규 연구개발(R&D) 사업기획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출범식에서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문화현장의 수요와 창작자의 상상력이 기술개발의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했다. 이른바 '문화 주도형 AI'다. 김명하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장은 개회사에서 현장의 기술개발 아이디어가 분야 간 충분한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거나, 보다 큰 연구개발 전략으로 발전하기까지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얼라이언스는 이러한 현장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협력체계다. 올해 출범한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문화체육관광 분야의 R&D 기획·관리·평가 기능을 연계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현장의 요구를 구체적인 연구개발 과제로 발전시키고 실제 산업의 성과로 연결하는 일이다. 장소와 매체마다 다른 창작의 문법 문화콘텐츠 현장에서 기술의 필요는 장소와 매체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가 디렉터로 참여한 구 송도역사 복원사업에서는 근현대 철도유산의 기억을 전시와 실감콘텐츠, 공간경험으로 연결했다. 사라진 역의 시간을 오늘의 방문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영상기술을 선택하기 전에 장소에 축적된 역사와 기억을 읽고, 이를 어떤 이야기와 관람경험으로 풀어낼지 판단해야 했다. 올해 컬렉션 감독으로 참여한 조선왕실 디지털 컬렉션은 디지털 회화·영상·이미지 등 21점의 작품을 스마트TV 미술 감상 서비스로 선보인 작업이었다. 역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해 경험하는 콘텐츠와 일상의 화면에서 감상하는 디지털 작품은 관람환경부터 다르다. 문화자원의 원천가치를 어떤 시각적 형식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매체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할 것인지가 중요한 기획의 문제였다. 두 사례는 모두 문화유산의 가치를 디지털콘텐츠로 확장했지만 창작의 조건은 달랐다. 하나는 장소에 축적된 기억을 현장에서 경험하도록 설계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자원을 새로운 감상환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장소와 매체가 달라지면 창작의 문법도 달라진다. 기술을 먼저 선택하기보다 문화자원의 가치를 읽고, 전달할 경험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제작 효율을 넘어 신뢰성과 지속활용으로 이러한 차이는 문화기술 R&D가 풀어야 할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AI를 활용한 역사문화 콘텐츠에서는 생성된 이미지가 어떤 원천자료에 근거하는지, 사실의 재현과 창작적 해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는 영상이 역사적 정확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의 활용과 출처 확인, 원천자료의 권리관리를 지원하는 기술적 환경이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해석의 타당성과 창작의 책임까지 기술에 맡길 수는 없다. 제작 이후의 활용도 살펴야 한다. 하나의 영상콘텐츠를 전시관 미디어월과 야외 미디어파사드, 디지털 감상 플랫폼에 적용하려면 화면의 비율뿐 아니라 설치환경과 관람방식에 따라 재구성이 필요할 수 있다. 상설 문화공간에서는 콘텐츠의 갱신과 유지관리, 운영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지향하는 현장 실증과 기술이전·사업화 역시 새로운 기술이 실제 콘텐츠 제작과 운영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확인하는 과정과 연결돼야 한다. 물론 현장의 모든 어려움이 새로운 기술개발의 대상은 아니다. 불명확한 기획과 과업범위, 계약 및 저작권 처리, 운영주체의 역량 부족은 기술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기존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와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문제도 구분해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려면 기술적 난제와 기획·제도의 문제를 가려내는 판단부터 필요하다. 현장의 질문을 산업의 과제로 이번 얼라이언스는 전체 위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별도의 전략기획단에서 시장성과 시급성, 기술적 타당성 등을 검토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중요한 것은 제안된 기술수요의 숫자보다 그 내용이다. 특정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능과 산업 전반에서 반복되는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정부 R&D는 개별 기업이나 창작자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여러 현장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과제를 발굴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기획책임자(PD)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번 출범식에서는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의 김현문·강동주·김성진 PD가 네 개 분과의 리더로 소개됐다. 분야별 현장의 요구가 구체적인 연구개발 과제로 발전하려면 기술적 가능성과 산업적 파급효과를 함께 판단하는 기획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창작자와 제작사, 기술기업과 연구기관이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부터 협력하고, PD를 비롯한 기술기획 전문인력이 이를 산업 공통의 과제로 구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구개발의 성과 역시 기술 구현에 머무르지 않고 제작의 효율, 콘텐츠의 품질과 신뢰성, 현장에서의 활용 가능성으로 이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문화기술 얼라이언스는 오랫동안 강조돼 온 현장 중심 R&D의 원칙을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구체화할 기회다. 참여 규모나 제안 건수만으로 성과를 판단하기보다, 어떤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실제 기술개발과 현장 적용으로 발전시켰는지 확인해야 한다. 문화가 기술을 이끈다는 것은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문화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먼저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이 기술개발의 출발점이자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필자는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영상·미디어 콘텐츠 분야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다.

2026.10.16 10:15이창근 컬럼니스트

문화산업은 AI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AI는 이제 가능성보다 활용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AI Festa 26'을 K헤리티지산업포럼 워킹그룹 멤버들과 둘러봤다. AI 에이전트와 로봇, 피지컬 AI, 군집드론, 실시간 3D, 디지털트윈 등 수많은 기술이 한 공간에 모였지만, 현장에서 더 눈에 들어온 것은 기술의 종류보다 쓰임이었다. 'AI로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보다 '어디에, 왜,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이 산업의 앞자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문화산업도 다르지 않다. 기술을 먼저 정해놓고 적용할 대상을 찾는 방식과, 문화의 가치와 현장의 문제를 먼저 읽은 뒤 필요한 기술을 고르는 방식은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현장에서 보고 싶었던 것도 최신 기술의 순위가 아니었다. AI가 문화산업의 제작과 서비스, 공간과 관객 경험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문화산업 안으로 들어온 AI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정보원 부스에서는 AI 문화비서와 문화데이터, 공공저작물 등이 소개됐다. 새로운 AI 콘텐츠를 별도로 하나 더 만드는 방식이라기보다 사람들이 문화정보를 찾고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존 과정에 AI를 넣는 접근이었다. 한국관광공사 부스에서도 기술은 여행지 추천을 넘어 이동과 체류, 지역에서의 경험을 설계하는 수단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콘텐츠산업에서는 변화가 더 직접적이었다. 충남콘텐츠진흥원 부스에서는 참여기업들의 AI 영상제작과 움직임 분석 기술을 볼 수 있었고, 스튜디오메타케이 부스는 생성형 AI와 버추얼 휴먼을 방송영상과 영화, 미디어아트, 공연 제작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생성형 AI가 이미지 한 장을 만드는 도구에서 벗어나 기획과 제작, 수정 과정으로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AI가 창작자를 대신할 것인가'라는 질문만으로 지금의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 관심 있게 볼 것은 창작자가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게 됐는지, 제작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결과 관객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는가이다. 콘텐츠 제작자의 역할도 기술을 많이 붙이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전하고 어떤 경험을 만들 것인지 먼저 정한 뒤, 그 목적에 맞는 기술을 판단하는 일이다. 데이터가 자산이 되고, 자산이 콘텐츠가 된다 생성형 AI의 화려한 화면 뒤에는 데이터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 공간정보 기술기업 디케이시스템은 GNSS 측량장비와 드론, 3D 라이다 스캐너, 포인트클라우드와 디지털트윈 기술을 선보였다. 현실의 공간과 대상을 AI로 분석하거나 재현하려면 먼저 정확한 기록과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문화산업에서도 무엇을 어떤 품질의 원천자산으로 남길 것인지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문제다. 이 과정을 잘 보여준 사례가 국가유산청의 '신라왕경 디지털 재현사업'이었다. 학술연구와 전문가 검증을 토대로 고증된 데이터를 구축하고, 흩어진 유적과 공간을 디지털 도시로 연결한 뒤 실시간 3D와 생성형 AI를 활용해 콘텐츠로 확장한다. 현장에서는 생성형 AI 영화 '페르시아 왕자, 신라의 북소리'도 볼 수 있었다.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영화 한 편보다 그 앞의 과정이었다. 조사와 기록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디지털 자산이 되며, 다시 이야기와 기술을 만나 콘텐츠가 된다. 문화유산의 사례지만 문화산업 전체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구조다. 하나를 만들고 끝내기보다 한 번 구축한 문화적 자산이 전시와 공연, 교육, 영상, 게임, 관광으로 계속 다른 쓰임을 만들어내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유니티 부스의 'AI × Real Time 3D'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였다. 게임에서 익숙했던 실시간 3D 기술은 이미 제조와 로봇, 디지털트윈으로 확장되고 있다. 문화 분야에서도 하나의 디지털 자산을 영상 한 편으로 소진할 이유가 없다. 전시와 교육, 게임과 관광, 새로운 공간경험의 재료로 다시 쓸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공공 문화사업도 'AI를 적용했다'는 사실 자체를 성과로 내세우는 단계에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떤 자료와 데이터를 남길 것인지, 신뢰성과 권리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구축한 디지털 자산을 이후 다른 사업에서 다시 활용할 수 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신기술을 몇 개 사용했는지보다 무엇을 남겼고, 그것이 이후 어떤 쓰임으로 이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술을 문화의 언어로 바꾸는 일 군집드론도 비슷했다. 군집제어와 자율비행은 공학기술이지만 수백 대, 수천 대의 드론이 밤하늘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를 만들면 공연과 관광, 도시의 야간경험이 된다. 관객이 기억하는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장면과 음악, 그 장소에서 보낸 시간이다. 문화콘텐츠에서 기술은 때로 앞에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다. 기술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보다 어떤 이야기와 경험을 만들어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에서 기술을 쓴다는 것은 기술 자체를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문화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가깝다. 이번 AI페스타를 K헤리티지산업포럼이 현장워크숍으로 찾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K-헤리티지와 연결해볼 만한 기업이나 기술 하나를 찾아보자는 정도의 과제를 공유했다. 전통예술, 공간, 콘텐츠, 미디어를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 만큼 같은 기술에서도 서로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포럼이 할 일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특정 기업이나 기술을 홍보하기보다 정책과 산업의 변화를 읽고, 문화적 원천과 기업의 기술, 전문가의 해석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것이다. 현장에서 의제를 발견하고 사람이 만나 작은 협업을 만들고, 그것이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지도록 하는 구조다. K-헤리티지를 문화유산 안에만 가두지 않고 관광과 콘텐츠산업, 기술과 연결해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현장을 돌아보며 AI가 모든 산업을 같은 방법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문화정보에서는 검색과 안내를 바꾸고, 관광에서는 이동과 체류에 개입하며, 콘텐츠산업에서는 제작방식을 바꾼다. 공간정보 기술이 현실을 데이터로 옮긴다면 실시간 3D는 그 데이터를 다시 경험으로 바꾼다. 그래서 문화산업에서 AI를 이야기할 때도 질문의 순서가 중요하다. 어떤 기술을 쓸 것인지보다 어떤 문화적 가치와 이야기를 전할 것인지,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남길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다음에 필요한 데이터와 기술, 함께할 기업을 고르면 된다. 기술은 빠르게 바뀐다. 그러나 문화의 의미를 읽고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며, 사람과 기술을 엮어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에도 문화산업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10.12 11:42이창근 컬럼니스트

명소는 장소에서 시작된다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명소를 만드는 일은 이름난 거리의 풍경을 옮겨놓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지역이 품어온 시간과 생활,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머무는 길을 읽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유산청은 2027년부터 '국가유산 기반 명소재생'을 추진한다. 개별 국가유산 중심의 활용을 넘어 유산과 상권, 주거지를 하나의 보행축으로 연결하고 사람들이 걷고 머물며 소비하는 국가유산 향유거점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2031년까지 이른바 '제2의 황리단길' 10개소를 조성하고, 2027년 첫 시범사업으로 3개소를 선정할 계획이다. '제2의 황리단길'은 정책의 방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황리단길의 무엇을 닮을 것인가가 아니다. 그곳이 왜 사람을 걷게 하고 머물게 했는지, 장소의 역사와 생활, 상권과 방문객의 움직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읽는 일이다. 한옥과 골목, 카페와 음식점, 정돈된 거리와 야간경관은 눈에 보이는 결과다. 명소재생은 그 결과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각 지역이 가진 장소의 힘을 읽고 그것을 오늘의 경험으로 다시 엮는 일이어야 한다. 황리단길에서 배울 것은 풍경이 아니다 성공한 장소를 보면 건축과 거리, 점포와 음식, 사람들이 모이는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풍경은 오랜 시간 쌓인 결과다. 그곳에서 살아온 주민과 장사해온 상인이 있고, 새로운 가게가 들어오고 방문객의 동선이 달라지면서 거리와 상권도 함께 변해왔다. 그래서 다른 지역이 먼저 살펴야 할 것은 황리단길의 모양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그곳을 찾아왔고, 어디를 걸었으며, 무엇을 보고 먹고 사면서 시간을 보냈는가. 장소가 사람의 움직임을 만들고 그 움직임이 다시 거리의 인상을 바꿔온 과정을 읽어야 한다. 지역마다 출발점은 다르다. 성곽과 오래된 시장이 중심인 곳이 있는가 하면 근대건축과 철도, 항구의 시간이 남아 있는 도시도 있다. 골목의 생활문화나 주민의 기억 자체가 중요한 자원이 되는 곳도 있다. 같은 명소재생 사업이라도 무엇을 읽고 어디에서 시작할지는 달라야 한다. 이번 공모에서 눈여겨볼 대목도 여기에 있다. 사업 대상을 국가유산 한 곳에 한정하지 않고 '유산-상권-주거지'를 잇는 보행축으로 본다. 신청서에도 대상지의 길이를 적고 국가유산과 중심거리, 문화시설, 주변 상권을 한 지도에 표시하도록 했다. 국가유산을 하나의 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생활하는 장소의 범위 안에서 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람은 유산 하나만 보고 도시를 기억하지 않는다. 유산으로 향했던 길, 우연히 들어간 가게, 시장에서 먹은 음식, 해가 진 뒤 달라진 거리의 분위기까지 함께 기억한다. 그래서 어느 국가유산을 중심에 둘 것인가를 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디에서 사람이 들어오고 어느 길을 걸을지, 어디에서 머물고 무엇을 경험할지, 그 움직임이 시장과 골목의 상점까지 어떻게 이어질지를 함께 그려야 한다. 국가유산청의 사업구조도 이런 흐름을 담고 있다. 대상지의 육성전략과 공간계획, 브랜딩을 세우고 국가유산의 이야기를 체류형 프로그램과 지역특화 상품, 식음료로 이어가도록 했다. 각각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소 경험으로 엮는 일이 중요하다. 상품 하나에도 왜 이곳에서 나왔는지가 있어야 하고, 음식 하나에도 장소와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프로그램 역시 행사가 열리는 동안 사람을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음 거리로 걷게 하고, 다른 공간에 머물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장소를 읽는다'는 것도 결국 이 과정이다. 무엇을 보존할지 조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장소에서 무엇을 발견할지 정하고 그것을 오늘의 경험으로 다시 만드는 일이다. 장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콘텐츠가 달라지고, 콘텐츠가 달라지면 사람의 동선과 공간의 쓰임도 달라진다. 명소의 힘은 관계와 운영에서 이어진다 공간과 콘텐츠를 잘 만든다고 장소가 오래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국가유산을 관리하는 행정이 있고,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주민과 오랫동안 장사해온 상인이 있다. 새로 들어오는 창업자와 처음 찾아온 방문객, 다시 찾는 사람도 있다. 명소재생은 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장소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공모가 협력부서와 상인·주민 조직, 주민과 청년의 참여, 워크숍과 프로젝트 매니저까지 살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모계획은 둥지내몰림,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한 지자체·주민·상인의 상생 가능성도 주요 요소로 제시한다. 사람이 많이 찾아온다고 지역이 함께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방문객이 늘면서 상권이 살아날 수도 있지만 임대료와 업종이 달라지고, 기존 주민과 상인의 자리가 좁아질 수도 있다. 그래서 명소재생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러올 것인가와 함께 누가 참여하고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변화의 이익과 부담을 지역 안에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까지 봐야 한다. 무엇을 콘텐츠로 만들 것인가와 누가 그것을 운영할 것인가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처음 기획할 때부터 함께 정해야 한다. 더 어려운 일은 만든 뒤에 시작된다. 사람을 한 번 오게 만드는 것과 다시 찾게 만드는 일, 행사가 있는 날 사람을 모으는 것과 평소에도 장소를 움직이게 하는 일은 다르다. 행사가 끝난 다음 날에도 찾아갈 이유가 있는가. 평일에도 걷고 머물 수 있는가. 개발한 상품과 먹거리가 실제 지역의 가게에서 팔리는가. 주민과 상인이 사업기간의 참여자에 머물지 않고 이후에도 장소를 운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까지 답해야 명소재생이 사업기간을 넘어선다. 국가유산청도 기본계획 단계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를 선정하고 지역단체·상인·주민과 워크숍을 추진하며, 지원이 끝난 뒤에는 주민 중심의 운영으로 이어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공간과 콘텐츠, 상권을 잇는 구상만큼 중요한 것이 그 구조를 누가 계속 움직일 것인가를 처음부터 정하는 일이다. 선정은 출발점일 뿐이다. 지원이 끝난 뒤에도 콘텐츠가 이어지고, 상인들의 참여가 계속되며, 주민과 운영주체의 관계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시적인 사업이 장소의 일상으로 남는다. 시설에는 준공일이 있다. 하지만 장소에는 준공일이 없다. 지역마다 다른 명소가 만들어지려면 명소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걷고 머무는 시간이 쌓이고, 주민과 상인이 새로운 방문객을 만나면서 장소의 인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명소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시설 하나가 아니라 그곳에서 반복되는 사람들의 경험이다. 황리단길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쌓아온 시간과 생활문화, 거리와 상권의 모습,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관계는 다르다. 출발점이 다른데 같은 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지역마다 다른 장소를 읽어야 지역마다 다른 명소가 나온다. 그래서 명소재생의 첫 질문은 '무엇을 설치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 장소에는 무엇이 남아 있고, 어떤 시간이 쌓여 있으며, 사람들은 어디를 걷고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리고 그 경험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국가유산은 그 질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유산의 가치를 오늘의 이야기와 경험으로 풀어내고, 그 경험이 골목과 시장, 상점과 사람에게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장소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을 새롭게 연결할 때 국가유산은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지역을 움직이는 자원이 된다. 명소는 다른 곳의 성공을 닮아가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소가 가진 시간을 읽고, 그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만들며, 그 경험을 지역의 사람들이 오래 이어갈 때 비로소 그곳만의 명소가 된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22 10:14이창근 컬럼니스트

원도심 재생, 무엇부터 설계할 것인가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원도심을 다시 살리는 일은 빈 건물을 채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장소를 남기고, 무엇을 콘텐츠로 만들며, 그곳을 찾은 사람이 어느 거리까지 움직이게 할 것인지가 함께 설계돼야 한다. 정부가 9월 8일 발표한 '원도심 리코어(RE:CORE) 프로젝트'는 이 문제를 공간과 콘텐츠, 상권을 한 사업 안에서 다루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국토교통부는 공실상가와 유휴건물을 정비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한 콘텐츠를 키우며, 중소벤처기업부는 지역상권과 창업 관련 사업을 연계한다. 개별 시설 하나에 머물지 않고 특화거점과 공실상가, 특화거리를 연결해 원도심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정부는 2027년부터 수도권을 제외한 4극3특 권역별 1~2곳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하고 지역당 국비를 최대 242억4천만원 지원할 계획이다. 사업의 틀은 마련됐다. 이제 지역에서는 어디를 거점으로 삼을지, 무엇을 대표 콘텐츠로 만들지 판단해야 한다. 사람이 어느 거리까지 움직이게 할지, 주변 상권은 어떤 역할을 맡을지, 만들어진 공간을 누가 사용하고 이어갈지도 함께 봐야 한다. 이번 글에서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장소를 읽고 콘텐츠를 기획해 공간과 경험으로 구현하고, 그 경험을 다시 거리와 상권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원도심 활성화는 개별 사업을 나열하는 데서가 아니라 이 과정들이 한 장소 안에서 서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공간과 콘텐츠, 한 계획서에 담아야 RE:CORE에서 문체부의 역할은 만들어진 공간에 프로그램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해 원도심의 특색을 보여주는 콘텐츠를 발굴하고 창·제작부터 실증과 고도화, 유통까지 지원한다. 국토부는 미활용 공공시설과 집단 공실상가 등을 특화거점으로 만들고 주변 공실과 거리로 연결한다. 중기부의 창업·상권 사업도 연계한다. 정부 발표에는 '특화거점-공실상가-특화거리'를 잇는 면적인 원도심 재생 구상이 담겼다. 같은 사업 안에 들어갔다고 공간과 콘텐츠, 상권이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공간에는 사람이 몰리지만 인근 골목까지 가지 않을 수 있고, 행사가 있는 날과 평소의 거리가 전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새로운 콘텐츠가 있어도 주변 시장이나 상점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면 방문은 한 시설에서 끝난다. 그래서 기본구상 단계에서 공간의 위치와 규모만 볼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성격, 사람의 이동과 체류, 주변 상권, 운영주체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문체부가 9월 15일 발표한 '제3차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2026~2030)'도 지역 문화 인프라 혁신, 고유한 지역문화자산의 활용과 지역 주도 콘텐츠 육성, 지속가능한 로컬 문화비즈니스 생태계 구축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생활권과 초광역권을 잇는 문화균형성장도 핵심 전략에 포함됐다. 이번 정책의 취지를 현장에서 살리려면 공간을 설계하는 단계부터 어떤 장소인지 읽고,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할 것인지를 함께 정해야 한다. 설계는 해석에서 시작된다 원도심 사업에서 '설계'라고 하면 흔히 건축도면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도면에 들어가기 전에 정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장소를 거점으로 할지, 지역의 어떤 역사와 문화가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 주민과 방문객은 어느 길을 이용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어떤 업종과 창작자가 들어오고 주변 시장과 상점은 어떻게 참여할지도 사업의 성격을 좌우한다. 그보다 앞에는 장소를 해석하는 일이 있다. 오래된 시장에는 장사를 하고 물건을 사고팔았던 사람들의 시간이 있고, 폐산업시설에는 구조와 생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역과 골목에는 오랫동안 형성된 이동경로와 생활방식이 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오늘의 콘텐츠로 다시 보여줄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해석은 조사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보여줄지를 정하는 창작의 출발점이다. 장소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콘텐츠가 달라지고, 콘텐츠가 달라지면 공간과 경험의 설계도 달라진다. 관객이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움직일지 연출한 뒤 영상과 그래픽, 사운드, 인터랙션 등을 제작한다. 구축 단계에서는 이 콘텐츠와 공간, 장비와 시스템을 현장에서 하나로 맞춘다. 설계와 구축 사이에는 연출과 제작이 있다. 설계한 경험이 실제 관객의 눈과 귀, 움직임으로 바뀌는 구간이다. 운영도 이 흐름과 떨어져 있지 않다. RE:CORE는 '원도심 활성화상가'에 대해 조성 후 최소 10년의 운영계획을 마련하고, 임대기간과 임대료 수준, 증액 상한 등을 도시재생활성화계획에 담도록 할 예정이다. 공간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그곳을 누가, 얼마나 오래, 어떤 조건으로 사용할지도 함께 본다는 뜻이다. 천안, 공간마다 다른 연출을 택한 이유 필자는 2023년 천안 원도심 특화거리 조성사업에서 천안역 지하도상가 공실을 활용한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정거장'의 총감독을 맡아 기획·설계·연출·제작·현장 구축을 총괄했다. 출발점은 장비가 아니었다. 천안역과 지하상가라는 장소, 원도심이 지나온 시간, 사람들이 실제로 걷는 동선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할지를 먼저 정했다. 원도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어제·오늘·내일' 세 공간으로 나누고 공간마다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구성했다. '오늘' 공간은 천안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여행을 모티프로 벽과 바닥을 잇는 다면 프로젝션맵핑을 적용했다. 여행 장면에 따라 영상이 달라지고 바닥에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효과를 넣어, 공간 안에서 여행의 한 장면을 경험하도록 연출했다. '내일' 공간은 지하상가 통로와 맞닿는 면에 전면 유리벽을 새로 구축했다. 유리면에 투명스크린을 적용하고 프로젝터를 실내 후면에 배치해 뒤에서 영상을 투사하는 리어 프로젝션(Rear Projection) 방식으로 구현했다. 공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통로를 지나는 사람이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 작업에서는 설계와 구축 사이에도 많은 판단이 필요했다. 공간의 크기와 형태에 맞춰 장면을 구성하고 콘텐츠를 제작한 뒤, 현장에서 투사 상태와 시야, 관람동선을 확인하며 다시 조정했다. 통로와 맞닿는 '내일'에서는 지나가는 사람까지 관람객으로 봤다. 반면 안쪽에 머무는 '오늘'에서는 다면 프로젝션과 인터랙션으로 체류 경험을 만들었다. 같은 미디어아트라도 장소와 관람방식이 다르면 설계와 연출, 제작방식도 달라진다. 장소를 읽고 경험을 설계한 뒤, 그 경험을 구현하는 데 맞는 연출과 제작방식, 기술을 선택했다. 공간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상권으로 하지만 한 공간을 잘 만드는 것과 원도심 전체가 살아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콘텐츠를 본 사람이 주변 점포와 시장, 거리까지 움직이려면 공간 밖의 동선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원도심에는 이미 많은 것이 있다. 오래된 시장과 가게, 빈 점포와 골목, 역과 버스정류장, 주민들이 매일 이용하는 생활길이다. 새로운 문화거점을 만들 때는 어느 입구에서 사람이 들어오고 어디에서 머무는지, 거점을 나온 뒤 어느 골목으로 향하는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낮과 밤의 쓰임은 어떻게 다른지, 주변 음식점과 상점은 무엇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핫플레이스' 역시 이름을 붙인다고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콘텐츠가 있고,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시간을 보내며 주변 골목과 가게까지 이용하고, 다시 올 이유가 쌓일 때 장소의 인상이 달라진다. 좋은 콘텐츠는 방문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잘 설계된 공간은 머무를 이유를 만든다. 그 방문과 체류를 거리와 시장, 상점까지 연결하는 일은 원도심 전체를 보는 기획의 영역이다. 공간의 경험이 거리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거리의 경험이 상권과 연결될 때 문화공간은 원도심의 거점으로 역할을 넓힌다. RE:CORE 역시 특화거점과 공실상가, 특화거리를 잇는 면적인 재생과 함께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한 콘텐츠를 문화시설과 축제, 상권 등으로 확산하는 구조를 담고 있다. 4극3특, 지역마다 달라야 할 첫 설계 2027년부터 RE:CORE가 수도권을 제외한 4극3특 지역에서 시범사업으로 들어가면 대상지의 조건은 서로 다를 것이다. 어느 도시는 폐산업시설이 중심일 수 있고, 다른 곳은 시장과 골목, 폐역과 철도시설, 근대건축, 지역 인물과 생활문화가 핵심 자산이 될 수 있다. 같은 사업의 틀 안에서도 출발점은 지역마다 다르다. 그래서 다른 도시의 사례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먼저 그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를 읽어야 한다. 어느 장소가 거점이 될 수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지, 사람들이 어느 길을 걷고 어디에서 머무는지, 주변 상권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해석이 달라지면 기획과 설계도 달라진다. 그에 따라 연출과 제작, 공간 구축과 적용할 기술도 달라진다. 시장과 골목, 폐산업시설, 철도와 근대유산, 지역의 생활문화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불러들이고 머물게 할 수 있다. RE:CORE는 공간과 콘텐츠, 상권과 창업을 한 사업 안에서 다룰 수 있는 틀을 제시했다. 이제 실제 지역에서는 그 틀을 각자의 장소와 생활, 문화자원에 맞게 구체화하는 일이 남는다. 원도심 사업의 첫 단계에는 건축도면보다 앞선 그림이 필요하다. 지역의 무엇을 해석할지, 어떤 콘텐츠를 기획할지, 공간과 경험을 어떻게 설계할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연출하고 제작해 구현할지를 정하는 기본구상이다. 그 경험이 어느 거리까지 이어지고 주변 상권과 어떤 관계를 만들지도 같은 그림 안에 있어야 한다. 원도심의 변화는 장소를 읽는 데서 시작한다. 그 해석을 콘텐츠로 만들고, 설계와 연출·제작을 거쳐 공간에 구현하며, 사람이 찾아와 머물고 걷게 하는 것. 그 움직임이 거리와 상권으로 이어질 때 한 공간의 변화는 원도심의 변화로 넓어진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21 09:30이창근 컬럼니스트

새로운 한국적 오디세이, '까만 인절미'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2026년 여름, 나는 아주 흥미로운 두 작품을 마주했다. 하나는 거대한 바다를 가르며 귀환하는 고대 영웅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한 여인이 순교를 통해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한쪽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강원도립극단의 우리소리극 《까만 인절미》가 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는 순간, 뜻밖의 접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대도 세계도 다른 두 이야기가 놀랍도록 닮은 방식으로 긴 여정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한 시대의 기억을 건네던 사람. 바로 '음유시인'의 목소리로 말이다. 오래전 사람들이 아직 책을 갖지 못했던 시절 이야기는 글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한 사람이 노래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 다음 세대가 다시 노래했다. 영웅의 모험과 전쟁, 사랑과 죽음, 인간의 운명은 그렇게 공동체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역시 그런 구전의 세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지만, 그 뿌리에는 이야기를 노래로 전하던 음유시인이 있었다. 한국에도 이러한 음유시인이 있다. 바로 소리꾼이다. 소리꾼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자가 아니다. 서술자이면서 등장인물이 되고, 때로는 시대를 바라보는 증인이 된다. 자신의 목소리와 몸짓, 고수의 북과 추임새를 통해 한과 신명을 전달하며 기나긴 이야기와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사람들이다. 《까만 인절미》가 불러내는 인물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한가운데 놓인 여인 이성례다. 남편의 순교와 연이은 어린 자식의 죽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배교(背敎),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고통과 죄책감이 그녀의 삶을 관통한다.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이제, 나란히 선 두 음유시인의 소리를 따라 긴 여정에 올라 보자. 《오디세이》의 음유시인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몇 개의 단어만으로 거대한 여정의 좌표를 찍는다. 이제 그 음유시인의 방식처럼, 몇 개의 키워드를 따라 《까만 인절미》의 새로운 풍경을 펼쳐보려 한다. SONG - 이야기를 여는 소리 《오디세이》의 시작을 기억하는가. “A Face. A Fleet. A War. A Man. A Thought. A Trick.”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음유시인은 이 여섯 개의 단어를 차례로 던진다. 짧고 강렬한 음성과 고대 그리스의 6음보 운율을 현대적인 리듬으로 풀어낸 방식은, 오래된 서사시가 소리로 먼저 존재했음을 일깨운다. 《까만 인절미》의 시작 역시 소리다.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주기도문이다. 판소리의 어법으로 작창(作唱)된 주기도문은 힘 있는 중모리장단을 타고 흐르며 뜻밖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나아가 주기도문과 함께 울리는 열두 대의 북소리는 마치 《오디세이》 속 음유시인의 노래가 지팡이의 두드림을 만나 힘을 얻듯, 목소리에 물리적인 울림을 더한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느 순간 하나의 경건한 의식으로 확장된다. 그 순간, 낯선 종교의 언어는 한국의 소리가 된다. 이 주기도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모두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삶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기도로, 작품의 세계관을 여는 서곡이 된다. 두 번째는 자식을 잃은 여인의 모성이 신앙과 충돌하며, 한맺힌 절규로 점철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기도는 비로소 귀향의 노래가 된다. 삶의 고통과 갈등을 지나 죽음 너머 본향으로 향하는 순간, 주기도문은 교리가 아니라 소리가 되고, 소리는 모두를 진동시키는 울림이 된다. 세 번의 주기도문은 그렇게 이성례의 긴 여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SONG'은 단순히 노래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기억을 불러내고, 고통을 토해내며, 마침내 한 인간을 귀향으로 이끄는 하나의 긴 여정인 것이다. SEA - 폭풍을 건너는 두 개의 오디세이 《오디세이》에는 바다가 있다.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는 폭풍과 괴물, 유혹을 통과하며 이타카를 향한다. 눈에 보이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귀환의 길이다. 그런데 《오디세이》라는 렌즈를 통해 《까만 인절미》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성례가 건너는 바다는 실제의 바다가 아니라 마음속의 폭풍이다. 그녀에게는 남편 최경환의 죽음이 있고, 어린 막내의 죽음이 있다. 살아남은 자식들이 있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신앙을 부정했던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 뒤에 따라온 죄책감과 고통이 있다. 오디세우스가 외부의 바다를 건넌다면, 이성례는 내면의 바다를 건넌다. 이렇게 바라보는 순간, '오디세이'는 더 이상 특정한 영웅의 모험담에 머물지 않는다. 한 인간이 겪어내는 긴 여정,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오디세이는 《까만 인절미》에서 '귀향'이라는 한국적 정서로 이어진다. 한(恨). 혼(魂). 해원(解冤).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한국의 정서에서 돌아감은 흩어진 혼을 거두고 오래된 한을 풀어내는 해원에 가깝다. 그렇게 이성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자 오래된 한이 비로소 풀리는 해원의 순간이 된다. LOVE - 마지막에 남는 사랑 그렇다면 긴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폭풍과 죽음의 위협을 지나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했을 때,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오래된 개 아르고스다. 오랜 세월 주인을 기다린 아르고스는 그의 귀환을 알아본 뒤, 더 이상 그를 맞이할 힘조차 남기지 못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둔다. 거대한 전쟁과 신들의 분노, 수많은 모험으로 가득했던 서사의 마지막이 한 생명과 한 인간 사이에 남아 있던 사랑으로 수렴하는 순간이다. 《까만 인절미》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이성례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사건들. 박해와 순교, 신앙과 배교, 모성과 죄책감.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가 마지막에 모이는 곳은 의외로 까만 인절미 한 조각이다. 아이의 손때가 묻은 그 인절미는 거대한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끝내 놓지 못했는지를 조용히 품고 있다. 거대한 전쟁과 신들의 분노로 가득했던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늙은 개 한 마리의 눈빛으로 남듯, 《까만 인절미》의 박해와 순교라는 거대한 역사 역시 마지막에는 한 조각의 인절미가 품은 사랑으로 압축된다. 아르고스와 까만 인절미.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놓인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사물이지만, 두 작품은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긴 여정의 끝에서 인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거대한 업적이 아니라, 끝까지 남겨진 사랑이라는 것. BARD -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 그렇다면 이 긴 여정은 어떻게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도착했을까. 답은 다시 소리다. 《오디세이》의 음유시인을 연기한 래퍼 트래비스 스캇은 2026년의 음악적 언어와 새로운 운율로 오래된 영웅의 이야기를 다시 노래한다. 《까만 인절미》의 소리꾼 박애리 역시 오래된 순교의 역사를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작창의 소리로 오늘의 무대 위에 다시 세운다. 고전과 역사 속에 머물 뻔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각자의 시대가 가진 언어와 감각을 입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 결과 《까만 인절미》에서 이성례는 더 이상 기록 속에 남겨진 순교자의 이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과 모성 사이에서 신음하고, 사랑 앞에서 흔들리며, 끝내 본향길에 오른 한 인간의 얼굴로 오늘 우리 앞에 선다. 효율과 실리를 좇는 시대에, 이성례의 선택은 어쩌면 지나치게 미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미련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오래 바라보아야 할 인간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그렇게 지나가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끝까지 지켜냈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는가. 이런 이야기가 오래도록 불리고 회자될 때, 비로소 우리의 여정에도 한 줄기 사유가 남을 것이다. 필자 최한이 최한이는 전통과 현대를 노래하는 국악 보컬리스트다. 초등학생 시절 판소리에 재능을 보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발탁됐고, 국립국악중·고를 거쳐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2012년 창작국악 신진 등용문인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켜켜이 쌓인 전통의 숨결을 바탕으로, 크로스오버와 월드뮤직, 방송과 무대를 넘나들며 판소리의 동시대성과 문화적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MBN , tvN , KBS 등에 출연했으며, 2025년 12월부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판소리와 창작국악, 한류를 음악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한다.

2026.09.09 10:08최한이 컬럼니스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명화, LG TV로 들어왔다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명화가 LG TV로 들어왔다. LG전자는 최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아트 콘텐츠 서비스 'LG 갤러리 플러스(LG Gallery+)'에서 소장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인다. 에두아르 마네의 '아르장퇴유 정원의 모네 가족',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의 '해변에서', 세브린 로젠의 '꽃과 과일이 있는 정물' 등이 대상이다. 명화를 집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익숙한 디지털 전환의 한 장면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오래전부터 소장품을 디지털화하고 온라인으로 공개해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지점을 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미술관의 컬렉션이 TV 제조사의 콘텐츠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화면을 둘러싼 경쟁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명화만 모으지 않는 '갤러리' Gallery+의 매력은 콘텐츠의 폭에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뿐 아니라 영국 내셔널 갤러리 런던,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문화기관과 협력하고, 사치아트의 현대미술도 제공한다. 게임 일러스트와 영화 이미지, 자연경관까지 포함하면 현재 5천 개가 넘는 아트 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 미술사에 따라 작품을 배열한 온라인 미술관과는 쓰임이 다르다. 한 화면 안에서 고전회화와 현대미술, 영화와 게임 이미지가 이용자의 선택을 기다린다.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그날의 취향과 공간에 맞춰 화면을 바꾼다. Gallery+는 미술작품을 디지털화해 보여주는 데 그치기보다 다양한 시각문화를 생활공간의 화면에 편성하는 서비스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LG전자의 하드웨어와 플랫폼 전략도 맞물린다. OLED를 비롯한 디스플레이가 이미지의 색과 명암, 디테일을 얼마나 잘 구현할 것인가를 담당한다면 독자 스마트TV 플랫폼 webOS와 Gallery+는 그 화면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넓힌다. 좋은 디스플레이가 콘텐츠의 표현력을 높이고, 좋은 콘텐츠는 다시 그 화면을 사용할 이유를 만든다. TV 산업에서도 이 연결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화질과 크기, 디자인의 경쟁은 계속되겠지만 제품을 구입한 뒤 사용자가 어떤 콘텐츠를 선택하고 서비스를 반복해서 이용하는지도 TV 경험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이 더해진다는 것 그래서 이번 협업은 작품 100여 점의 추가보다 파트너의 성격을 볼 필요가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힘은 유명한 명화 몇 점에만 있지 않다. 오랜 시간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보존하면서 쌓아온 컬렉션과 큐레이션의 신뢰가 있다. LG전자에는 다른 자산이 있다. 디스플레이와 webOS, Gallery+라는 서비스, 그리고 이용자의 생활공간에서 작동하는 TV다. 미술관이 축적한 문화적 자산과 기술기업의 화면·플랫폼이 만나는 구조다. 문화콘텐츠의 유통에서도 살펴볼 대목이 있다. 그동안 미술관과 박물관의 디지털 전환은 원본을 얼마나 정밀하게 촬영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할 것인가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제 구축 이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만들어진 디지털 문화자산을 어디에 유통하고, 어떤 콘텐츠로 편집하며, 사람들이 다시 찾는 경험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같은 작품 이미지라도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때와 거실의 대형 화면에 오랫동안 띄워놓을 때 쓰임은 달라진다. 플랫폼이 바뀌면 콘텐츠의 호흡도 바뀐다. 디지털화 이후에 다시 편집과 연출, 큐레이션이 필요한 이유다. TV 속 명화가 실제 미술관의 원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작품의 물성과 크기, 전시장 안의 거리와 빛은 실제 장소가 가진 경험이다. 대신 작품과 만나는 경로는 하나 더 늘어난다. TV에서 처음 발견한 작품이 미술관 방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직접 봤던 작품을 생활공간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5천 점 다음은 '발견'이다 Gallery+가 5천여 콘텐츠를 갖추면 질문도 달라진다. 더 많은 작품을 확보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숫자가 커질수록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아트 콘텐츠는 영화나 드라마와 소비의 리듬이 다르다. 한 작품을 몇 시간, 때로는 며칠 동안 화면에 둘 수 있다. 아침과 밤, 계절과 공간의 분위기에 따라 선택도 달라진다. 무엇을 보유했는지만큼 무엇을 언제 만나게 하는지가 서비스의 성격을 결정한다. Gallery+는 이미 이용자의 취향에 맞춘 추천과 큐레이션 기능을 제공한다.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중요한 것은 이용자가 새로운 작품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하느냐다. 유명 작품을 많이 모아놓는 것으로 좋은 컬렉션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작품 사이에 맥락을 만들고, 익숙한 취향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이미지로 관심이 이어지게 하는 설계가 중요하다. 콘텐츠의 양이 플랫폼의 규모를 만든다면, 큐레이션은 플랫폼의 성격을 만든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합류가 흥미로운 것도 그래서다. 세계적인 미술관이 축적해온 컬렉션의 힘과 LG전자의 디스플레이·플랫폼 역량이 만나 명화를 보여주는 데서 어디까지 더 세밀한 발견과 감상 경험으로 발전할지 지켜볼 만하다. 이는 문화기관과 콘텐츠기업에도 같은 과제를 남긴다. 디지털 전환의 다음 과제는 구축 이후에 있다. 구축한 자산을 콘텐츠로 가공하고, 적합한 플랫폼에 유통하고, 이용자의 선택과 반응을 다시 다음 기획으로 돌려야 한다. 유산과 예술이 디지털 자산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와 경험, 다시 산업으로 이어지려면 이 순환이 필요하다. TV의 화질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만큼 좋은 화면을 쓸 이유를 만드는 콘텐츠의 가치도 함께 커진다. LG Gallery+에는 이제 메트로폴리탄의 명화와 현대미술, 영화와 게임 등 서로 다른 시각문화가 하나의 서비스 안에 모이고 있다. 다음 승부가 몇 점을 더 채우느냐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하는가로. Gallery+가 앞으로 보여줄 매력도 그 변화 속에서 더 선명해질 것이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09 09:58이창근 컬럼니스트

진도의 9월, 민속예술과 도시의 만남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도시의 이름에는 장면이 붙는다. 어느 곳에서는 소리가 먼저 떠오르고, 어느 곳에서는 걸었던 길과 사람의 얼굴이 남는다. 문화도시의 힘도 그런 경험이 얼마나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느냐에서 드러난다. 9월에는 그 흐름을 연이어 살펴볼 일정이 있다. 전국 문화도시가 밀양에 모이고, 며칠 뒤 진도에서는 무형유산의 전승과 오늘의 실천을 이야기하는 컨퍼런스와 몸과 소리의 현장인 축전이 열린다. 밀양에서 공유하고, 진도에서 이어간다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밀양에서 '2026 전국 문화도시 박람회'가 열린다. 전국 37개 문화도시가 각 지역의 성과와 문화를 펼치고, 개막식에는 김영수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도 참석한다. 개최도시 밀양은 옛 밀양대학교를 햇살문화캠퍼스로 되살리고 아리랑과 로컬 콘텐츠, 시민 활동을 도시 안에 축적해왔다. 박람회에서는 밀양·정선·진도의 아리랑도 한 무대에서 만난다. 행사가 끝난 사흘 뒤인 16일부터 진도에서는 국제무형문화컨퍼런스가, 18일부터는 국제무형문화축전이 열린다. 두 지역의 행사는 공식적으로 연결된 사업은 아니다. 그러나 전국 문화도시의 경험을 나눈 직후 진도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자원을 다시 현장에 펼친다는 시간의 흐름은 흥미롭다. 밀양에서 전국의 문화도시와 만난 진도의 아리랑이 며칠 뒤 다시 진도의 삶과 장소 안으로 돌아온다. 전국 단위의 교류와 한 지역의 자기다움 사이를 오가는 문화도시 정책의 한 장면처럼 읽힌다. '민속문화의 섬', 사람과 장소에서 살아나다 진도는 13개 '대한민국 문화도시' 가운데 하나다. 내건 비전은 '대한민국 문화도시 민속문화의 섬, 진도'. 강강술래와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등 몸과 소리로 이어온 민속문화를 핵심 자산으로 삼고 교육과 창작, 유통과 확산, 원도심과 관광을 잇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 시작해 2027년까지 이어지는 본사업의 가운데 해가 올해다. 이제 그 비전이 사람과 장소에서 어떤 경험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볼 시점이다. 무형유산의 가장 오래된 아카이브는 어쩌면 사람의 몸이다. 누군가 다시 부르고 춤추며 장단을 받아야 다음 시간이 열린다. 진도의 문화적 힘도 여기에 있다. 오래된 소리와 몸짓이 여전히 사람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 열린 '진도 민속예술 관광정책 포럼'에는 이재각 진도군수와 박양우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롯한 문화·관광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민속예술과 관광의 접점을 논의하고 운림산방과 남도진성, 진도토요민속여행 같은 현장도 함께 살폈다. 진도군문화도시센터도 허건 센터장을 중심으로 민속문화를 프로그램과 공간, 지역 활동으로 연결하는 문화도시 사업의 현장 실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콘텐츠 디렉팅의 역할도 더욱 선명해진다. 어느 장소에서 만나고, 어떤 동선으로 걷고,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머물고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들 것인가. 진도가 지닌 풍부한 문화자산이 오늘의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수록 문화도시의 매력도 더욱 또렷해질 것이다. 관광 역시 사람을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문객의 체류와 소비가 전승자와 지역 기획자의 다음 활동으로 돌아가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힘이 된다면 문화도시는 사업 기간을 넘어 지역에 축적되는 구조를 갖게 된다. 민속문화와 관광을 연결하려는 진도의 움직임도 결국 이 순환을 얼마나 촘촘히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컨퍼런스에서 축전까지, 말과 몸을 잇다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2026 진도국제무형문화컨퍼런스'의 공개 프로그램은 '한'과 '흥'을 화두로 아시아·태평양 민속예술의 전승과 창조적 실천을 다룬다. 기조강연에 이어 민속예술의 전승과 도전, 유네스코 무형유산과 국제교류, 민속예술의 창조적 실천 등을 여러 세션에서 논의하고 진도를 다루는 특별세션도 마련한다. 컨퍼런스가 발표와 토론으로만 끝나지 않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진도의 민속예술을 직접 접하는 문화체험을 일정 안에 배치했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살아 있는 유산'을 다시 사람의 몸과 소리, 실제 장소에서 만나게 하는 구성이다. 컨퍼런스 마지막 날인 18일부터 20일까지는 '2026 진도국제무형문화축전'이 이어진다. '삶의 줄, 열두 매듭'을 중심으로 진도씻김굿과 진도다시래기 등 지역의 무형유산에 국내외 초청공연, 전시와 체험, 지역 연계 프로그램이 더해진다. 공개된 축전 계획에는 공연 편성뿐 아니라 체험과 먹거리, 편의시설, 공간배치까지 담겨 있다. 공연을 보는 시간과 장소를 걷는 시간, 먹고 머무는 시간이 하나의 축전 안에 놓인다. 콘텐츠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 접점이 중요하다. 공연 하나의 완성도뿐 아니라 서로 다른 몸과 소리, 장소와 사람이 어떤 동선과 리듬으로 이어져 하나의 진도 경험을 만드는가 하는 문제다. 컨퍼런스가 그 몸이 다음 세대로 건너갈 길을 묻는다면, 축전은 그 길 위에서 다시 몸과 소리를 만나게 한다. 그 흐름이 행사 뒤에도 이어진다면 의미는 더 커진다. 컨퍼런스에서 나눈 이야기가 다음 정책과 기획으로 이어지고, 해외 초청이 공동작업과 교류로 발전하며, 축전에서 생긴 관심이 전승자와 지역 기획자의 다음 활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도에는 이미 씻김굿의 소리와 강강술래의 원, 다시래기의 몸짓과 아리랑의 장단이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서둘러 덧붙이기보다, 그 오래된 시간이 오늘의 동선과 체류, 해설과 콘텐츠 안에서 다시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민속문화의 섬'이라는 비전이 사람의 몸과 장소의 기억, 관광과 전승 사이에서 진도다운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 올가을 진도에서 기대하고 싶은 장면은 바로 그 연결이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08 09:26이창근 컬럼니스트

예악의 시간이 춤이 될 때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춤은 어디에 남을까. 건축은 자리에 남고 그림과 유물은 형태로 남는다. 춤은 누군가 다시 몸을 움직여야 이어진다. 발을 딛는 자리와 팔을 드는 높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과 음악을 기다리는 호흡까지 몸에서 몸으로 건너가야 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의 일무(佾舞)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사람의 몸으로 이어온 춤이다. 오는 9월 12일 오후 5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일무 전장 '팔풍의 몸짓, 일무' 열한 번째 연작이 열린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가 주최하는 대표공연으로 현재 예매가 진행 중이다. 공연 자료에 따르면 종묘대제와 공개행사에서 일무 전장을 온전히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만큼, 일무의 원형과 전장을 온전히 전승·공연하는 데 연작의 뜻을 두고 있다. 지난해에는 64인의 팔일무로 보태평·정대업 일무 전장을 암보해 선보였고 올해 열한 번째 연작으로 그 흐름을 이어간다. 절제에서 드러나는 격조 종묘제례악이라고 하면 먼저 장중한 음악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음악만으로 예악의 전체를 만날 수는 없다. 기악 연주와 선왕의 공덕을 노래하는 악장, 줄과 열을 이루어 추는 일무가 함께 움직인다. 보태평의 일무는 선왕의 문덕을, 정대업의 일무는 무공을 기린다. 귀로 듣는 음악의 뜻을 몸이 공간 위에 펼쳐 보이는 셈이다. 일무의 매력은 큰 동작보다 절제에서 드러난다. 한 사람이 자신의 기량을 앞세우기보다 여러 몸이 방향과 간격을 맞추며 전체의 형식을 만든다. 팔을 드는 각도와 발을 놓는 위치, 움직임과 멈춤 사이의 호흡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몸을 과장해 드러내지 않아도 줄과 열이 만든 공간은 넓다. 종묘제례악 일무의 격조는 이 절제된 질서에서 나온다. 몸의 배열에도 오래된 세계관이 배어 있다. 종묘제례에서는 상월대의 등가가 하늘을, 하월대의 헌가가 땅을 상징하고 그 사이에서 일무원이 춤춘다.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만나는 천지인의 생각이다. 팔일무의 줄과 열 역시 보기 좋은 군무 대형으로만 읽을 수 없다. 몸의 위치와 방향에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과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던 방식이 담겨 있다. 빠른 장면전환과 강한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에게 일무의 호흡은 낯설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천천히 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움직임보다 몸과 몸 사이의 거리, 움직일 때보다 멈춘 순간, 개별 동작보다 여러 몸이 함께 이루는 질서에 시선을 두면 춤의 다른 표정이 보인다. 그것이 일무를 보는 첫 번째 방법이다. 전장을 기억하는 몸 이번 공연명에서 눈여겨볼 단어는 '전장'이다. 종묘제례악의 보태평과 정대업은 각각 11곡으로 이어지고 곡에 따라 일무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실제 종묘대제나 공개행사에서는 그 전체 흐름을 한 자리에서 온전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전장을 익힌다는 것은 많은 동작을 차례대로 외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분과 부분이 어떤 관계를 맺고 하나의 예악을 이루는지를 몸 안에 담아두는 일이다.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한 동작이 왜 그 자리에 놓였는지, 문무와 무무가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는지도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전승의 완결성'을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이어온 유산이라 해도 자주 쓰이는 일부만 남고 전체의 맥락이 희미해지면 다음 세대가 물려받는 것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전장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얼려두겠다는 뜻과 다르다. 이후의 해석과 창작이 출발할 수 있도록 전체의 구조를 잃지 않는 일에 가깝다. 종묘제례악 일무 전승교육사 김영숙 보존회 이사장은 원로들에게 전장을 모두 외워 발표하라는 과제를 받고 1988년 전장을 암보해 발표했다. 이후 이수자들이 전장을 익혀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이어왔다. 그가 전장을 외워 전하지 않으면 맥이 끊길 수 있다고 강조했던 배경에는 무형유산 전승의 현실이 놓여 있다. 악보와 의궤가 음악과 절차를 기록했다면 일무는 제례의 질서를 몸으로 기억해왔다. 영상으로 동작을 남길 수 있는 시대에도 옆 사람과 맞추는 간격과 음악을 기다리는 호흡, 몸에 들어가는 힘과 절제까지 저절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결국 사람이 익히고 사람이 가르쳐야 한다. 무형유산에서 몸은 살아 있는 기록이다. 그래서 활용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원래의 구조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채 눈에 띄는 장면만 떼어내면 전통은 쉽게 이미지와 소재로 소비된다. 반대로 원형의 보존만 강조해 사람과 만나는 접점을 닫아버리면 전승의 폭은 좁아진다. 온전히 이어가는 힘과 더 많은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함께 필요하다. 의례에서 무대로, 전승에서 경험으로 이번에는 일무가 종묘에서 국립국악원 예악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종묘에서 일무는 정전과 월대, 신위와 제상, 음악과 악장, 제관의 움직임과 함께 존재하는 제례의 한 부분이다. 공연장에서는 관객의 시선이 춤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줄과 열의 조형, 문무와 무무의 차이, 움직임과 멈춤이 만드는 리듬을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공연장이 종묘라는 장소의 시간과 제례의 모든 맥락을 옮겨올 수는 없다. 대신 의례 안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던 몸의 언어가 무대의 중심으로 나온다. 종묘에서는 예악 전체 속에서 일무를 만나고, 공연장에서는 일무를 통해 예악의 구조를 되짚어보게 된다. 같은 춤이라도 장소가 달라지면 그것을 읽는 시선도 달라진다. 필자는 몇 해 전 종묘 악공청에서 미얀마의 K-팝 그룹이 김영숙 이사장과 이미주 예술감독을 비롯한 일무 전승자들의 지도로 직접 일무를 배우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설명을 듣던 이들이 팔을 들고 발을 옮기기 시작하자 오래된 춤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졌다. 멀리서 바라보던 문화가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순간, 유산은 지식에서 경험으로 바뀌었다. 이 장면은 무형유산을 오늘의 사람과 연결하는 방식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했다. 꼭 화려한 기술이나 거대한 장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잘 보이게 할 것인지, 어떤 맥락을 이해하게 할 것인지, 어디까지 직접 경험하게 할 것인지를 세심하게 설계하는 것이 먼저다. 전통예술의 활용도 같은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장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설과 기록, 몸의 움직임을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교육, 한 번의 공연이 다음 공연과 연구로 이어지는 아카이브가 함께 쌓여야 한다. 한 차례 공연의 성과만으로 전승의 가치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어떤 형식이 온전히 이어졌는지, 관객은 무엇을 새롭게 이해했는지, 공연 이후 무엇이 기록되고 다시 쓰일 수 있는 자산으로 남았는지도 봐야 한다. 보존과 활용을 따로 놓기보다 전승의 완결성과 경험의 접근성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 필요하다. 12일 예악당에서 '팔풍의 몸짓, 일무'를 만난다면 화려한 장면부터 찾지 않아도 좋겠다. 몸과 몸 사이의 간격, 팔과 발이 향하는 방향, 음악과 함께 흐르는 움직임과 멈춤을 천천히 따라가 볼 일이다. 그 작은 차이들이 모여 이루는 질서 속에서 종묘제례악의 춤이 오래 지켜온 예악의 격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춤은 순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누군가 다시 몸으로 익히면 그 시간은 다음 사람에게 건너간다.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 종묘제례악 일무의 다음 시간은 그 두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이어진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07 10:20이창근 컬럼니스트

인간성 게임 - 자족하는 무지성의 시대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예술가는 꿈이 크다.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대부분 아쉽기 때문이다. 인간은 꿈이 크다.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에는 적당한 결핍, 아리송한 의문이 관여한다. 소진과 회복의 연속이다. 이 동력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초적인 여건은 땅에 있다. 인간은 발을 딛고 기댈 단단한 땅을 빌려 산다. 우리가 '육지'라고 부르는 땅이 당장 꺼지지 않기에 그 위에 건물을 올리고 부수고, 사인을 그리고, 보도블록을 덮음과 동시에 들어내고 산다. 작금의 '대지'는 어디일까? 땅을 밟는 감각보다,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감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냥 보아도 될 것들을 필터링 된 디지털 캔버스를 통해 보는 것이 당연해졌다. 이러한 생태양식은 하나의 문법과 같이 현대인에게 일률적 움직임을 부여한다. 고도의 기술력으로 다방면의 불편을 최소화한 상태의 인간 삶은 제자리에서 눈으로 정보처리를 마치고 허공에 손가락으로 반복적으로 스와이핑 하며 조잘거리는 모습이다. 움직임은 비효율의 키워드로, 최소화된 물리적 움직임만을 남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생의 반증이다. 사람 몸 자체가 파동 덩어리이며 생물학적 반응 또한 파동과 파동의 상호 교류다. 더 나아가 평범한 생활로부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직관적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유동하지 않으면 머물고 고이고 부패한다. 한편, 편리를 도모하는 것은 종종 몸을 얼어붙게 한다. 미래에 대한 선행 욕구로 인한 과로는 현재의 존재 감각을 잊게 하며, 데드라인이 없는 갈망은 마음을 경직하게 한다. 만족이란 무엇일까? 충분한 자족감을 어떻게 지켜내며, 과하지 않은 속도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명한 무지함을 선택하는 지혜가 귀한 시대다. 정답을 내기 위해 목적지로 직행하는 AI 지성과 달리, 해답을 택하려 쩔쩔매는 인간성이 있다. 골몰하다 죽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선한 AI'는 '현명한 무지'의 가치를 어떻게 책정할까? 클로드(Claude) AI의 재귀적 자기 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 RSI) 능력의 탑재로 인공지능 개발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이며, 이 개발의 본격화는 앞으로 일어날 인간의 통제 밖의 사건들을 상상케 한다. 이미 던져진 인공지능의 행방이 확률의 게임이라면, 되려 인간이 탑재한 자발적 어수룩함이 이 게임의 유일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필자 최지원 작가 최지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로지르는 현장 예술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석사를 받았다. 회화·드로잉 창작을 비롯해 융합형 미디어콘텐츠 제작을 병행한다. 현재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현대미술·AI·예술철학 비평을 연재한다.

2026.09.02 10:18최지원 컬럼니스트

신도시의 K-컬처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8월 29일 오후 평택 고덕 함박산중앙공원 야외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림이 먼저 시민을 맞았다. 해가 기울자 초등학생과 청소년, 성인 아마추어 댄서들이 무대에 올랐다. 소프라노의 목소리와 비트박스의 리듬도 공원에 울려퍼졌다. 이날 앙파트망 제2회 정기전에는 학생 40명이 참여했다. 오후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열린 케이댄스아카데미 제2회 정기공연에는 52명이 출연해 17개 댄스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현장에는 출연진을 포함해 300명 안팎이 함께했다. 배움과 연습의 시간이 실내를 나와 시민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림이 시민을 맞았다 앙파트망 전시회의 작품들은 야외공연장으로 이어지는 공원의 동선을 따라 놓였다. 시민들은 산책하다가 그림 앞에 멈췄고, 작품을 둘러본 뒤 무대로 향했다. 전시는 공연장 주변을 꾸미는 장식에 머물지 않고 공연에 앞서 시민의 시선을 붙드는 첫 번째 프로그램이 됐다. 전시에 나온 그림은 입체를 전공한 현대미술가 김태은의 지도 아래 학생들이 완성한 작품이다.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인물과 동물, 상상의 풍경에는 학생마다 다른 관심과 표현 방식이 담겼다. 작품마다 학생의 시선과 개성이 살아 있어 전시회의 교육적 성격과 잘 어울렸다. 미술과 공연이 한 장소에서 이어지면서 시민의 경험도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그림 앞에 머물던 시민은 이어서 춤을 보았고, 공연을 기다리던 시민은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봤다. 다음 회차에는 작품명과 창작자의 생각을 조금 더 보여주고 그림의 주제와 춤의 움직임을 연결해볼 수 있다. 그러면 학생들의 그림은 독립된 창작물로 더욱 선명해지고, 전시와 공연도 긴밀한 예술 흐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행사는 그 연결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서로 다른 몸을 한 시간에 엮다 공연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등 어린이·청소년, 성인 아마추어 댄서들이 참여했다. K팝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군무와 듀엣, 솔로가 이어졌다. 연령과 경험은 달랐지만 각자가 맡은 동작을 끝까지 수행하고 동료의 박자와 동선을 살피는 집중력은 분명했다. 이 무대를 읽는 기준을 전문 무용공연의 기술적 완성도에만 둘 수는 없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움직임을 시민 앞에 보여주고 동료와 호흡하며 연습해 온 시간을 공동의 장면으로 완성하는 과정도 평가의 일부다. 이날 무대의 힘은 고난도 기술보다 서로의 박자와 자리를 맞추는 몸에서 나왔다. 평택에 거주하는 주한미군 자녀들도 공연에 참여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생활 배경을 지닌 아이들이 같은 음악을 듣고 동선을 익히며 하나의 군무를 완성했다. K팝과 춤이 감상의 대상에서 함께 배우고 관계를 맺는 경험으로 옮겨간 장면이었다. 소프라노 송정아와 비트박서 김진웅은 축하공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송정아는 오페라 아리아로 공연의 문을 열고 뮤지컬 넘버로 중간의 흐름을 환기했다. 김진웅은 목소리로 리듬과 음향을 만들며 공연 후반부에 새로운 활력을 더했다. 성악과 비트박스는 댄스 무대 사이에서 서로 다른 감각을 연결하는 쉼표이자 전환점으로 기능했다. 특수효과와 조명은 야외무대의 장면을 선명하게 만들고 시민의 시선을 모았다. 넓은 공원에서 공연의 에너지를 시민이 앉은 잔디밭까지 전달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다만 일부 장면에서는 효과가 참여자의 몸과 표정보다 먼저 보이기도 했다. 다음 공연에서는 연령과 작품의 성격에 맞춰 효과의 강도와 시점을 조금 더 세밀하게 조율한다면 몸의 움직임과 표정이 시민에게 더욱 또렷하게 전달될 것이다.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한 문희태 케이댄스아카데미 대표는 원광대 무용학과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에서 무용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은 「특별활동 무용 수업이 초등학생의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영향 연구」다. 중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한 뒤 경희대 대학원 공연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김화숙 현대무용단 사포에서 무용수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 익산시립무용단 상임단원, Y기획 기획팀장, 예술누리 대표를 거쳤다. 전주KBS 어린이합창단 안무와 학교·사회문화예술교육, 청소년 뮤지컬의 무용교육과 공연 안무에도 참여했다. 2016년부터 2022년까지 경기도교육청 경기꿈의학교 '무한도전 HipHop' 사업을 총괄했다. 현재 케이댄스아카데미 대표이자 아시아청소년예술아카데미 이사, 한국무용교육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무용수와 기획자, 예술교육자로 이어진 경험은 이번 공연의 구성과 맞닿아 있다. 문 대표는 자신을 무대의 중심에 세우기보다 연령과 경험이 다른 참여자와 서로 다른 장르를 한 시간의 흐름 안에 엮었다. 이날 그가 맡은 일은 참여자들을 같은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하나의 무대로 연결하는 일이었다. 고덕의 일상이 문화가 될 때 평택 고덕은 대규모 산업단지와 신도시 개발이 함께 진행되며 다양한 세대와 생활 배경의 주민이 자리 잡은 곳이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와 공원 사이에는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도시의 시간이 흐른다. 도시의 문화는 시설이 들어선다고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주민이 배우고 참여하며 서로의 시간을 나눌 때 신도시에도 경험과 기억이 쌓인다. 이날 주한미군 자녀들이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만든 무대는 서로 다른 국적과 생활 배경의 주민이 일상을 공유하는 평택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세계로 확산되는 K-컬처의 바탕에는 일상에서 음악을 듣고 춤을 배우며 다른 사람과 박자를 맞추는 경험이 있다. K-컬처가 산업과 국가브랜드로 확장되는 바탕에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생활의 감각이 있다. 함박산중앙공원은 배움의 결과가 시민과 만나는 공공의 무대가 됐다. 그림과 춤은 가족과 관계자를 넘어 산책하던 주민까지 공연 앞에 머물게 했다. 공원의 일상적인 동선은 전시 관람로가 되고, 야외무대 앞의 경사와 잔디밭은 여러 세대가 함께 머무는 객석으로 바뀌었다. 배움에서 창작으로 이번 댄스공연은 지난 2월 열린 첫 공연에 이은 두 번째 정기공연이다. 두 번째가 세 번째로 이어지려면 참여자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기록하고, 그림과 춤·음악의 관계도 회차마다 발전시켜야 한다. 공연 순서와 작품 정보, 교육 과정과 참여자의 목소리를 함께 축적하면 야외행사가 끝난 뒤에도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과정은 다음 회차의 자산으로 남는다. 지역 문화정책이 보탤 지점도 여기에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교육자, 참여자가 공공공간에서 시민과 만나고 그 과정이 기록과 다음 공연으로 이어지도록 뒷받침하는 일이다. 시민과 만나는 무대가 꾸준히 마련될 때 문화예술교육의 성과는 개인의 배움에서 지역이 공유하는 문화경험으로 이어진다. 배우는 사람은 어느 순간 만드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시민 앞에 내놓고 익힌 춤을 무대에서 선보이는 순간 참여자는 창작의 주체가 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민도 한 사람의 성장과 성취를 함께 기억하며 문화의 참여자가 된다. 세계로 확산되는 K-컬처도 결국 사람이 배우고, 함께 만들고, 자기 삶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나누는 시간에서 출발한다. 지난 토요일 고덕에서 본 것은 그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배우는 사람이 창작자가 되고 시민이 그 성장을 함께 기억할 때, 신도시에도 자기만의 문화가 생긴다. K-컬처는 그렇게 우리가 사는 곳의 배움에서 시작된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9.01 09:30이창근 컬럼니스트

챗봇을 넘어 'AI 에이전트'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생성형 AI의 도입은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지식 생산 과정과 지식생태계의 지형도를 빠르게 해체해 왔다. 초기 챗봇 형태의 AI가 단순한 질문에 답하거나 개별적인 초안을 작성해 주는 '1대1 도구'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의 테크 생태계는 마누스(Manus) 같은 자율 실행 플랫폼을 비롯해 앱 개발 자동화 툴, 사무·행정 에이전트, 미드저니 같은 시각 예술 툴, 수노(Suno) 같은 음악 생성 툴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AI는 단순히 대화 상대를 넘어, 백그라운드에서 실무를 완수하고 애플리케이션 빌딩, 데이터 행정 처리, 마케팅 기획, 디자인 등의 결과물을 각 분야별로 독자적으로 빚어내는 '일하는 손'이자 조직의 정식 팀원으로 편입되는 추세다. 이러한 진화의 핵심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은 여러 개의 독립된 에이전트와 전문 툴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처럼 유기적으로 협력해 하나의 복잡한 목표를 수행하도록 조율하는 아키텍처를 뜻한다. 과거의 AI 활용이 개인이 일일이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결과물을 복사해 넣는 파편화된 방식이었다면, 에이전트와 전문 툴이 결합된 오케스트레이션 환경에서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IT·앱 개발 과정에서는 리드 에이전트가 UI 디자인을 시각 툴에 맡기고 코딩 에이전트에 병렬로 빌드를 지시하며, 일반 사무·행정 영역에서는 방대한 회의록 정리, 재무 데이터 정합성 검증, 마케팅 리서치와 초안 작성이 백그라운드에서 동시에 처리된다. 즉, 인간이 모든 세부 공정을 직접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전트 군단과 각 분야별 전문 툴이 오케스트레이션의 지휘 아래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표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케스트레이션 기반의 에이전트 확산은 비단 특정 기술 부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금융, 법률, 마케팅, 일반 행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업 현장에서 '누가 작업을 소유하고 실행하는가'에 대한 전통적인 조직과 업무의 문법을 뒤흔드는 일이다. 특히 에이전트와 전문 플랫폼이 코딩, 행정 사무, 데이터 분석 등 방대한 프로세스를 각 영역별로 독자적으로 수행함에 따라, 인간 전문가의 역할은 단순한 '실행자'에서 전체 흐름을 지휘하고 결과물의 정합성을 검증하는 '디렉터이자 최종 승인자'로 이동한다. 과거 분업이 인간 간의 역할 나누기였다면, 이제는 인간과 비인간 에이전트 간의 지휘 통제 체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형태의 효율성 구조가 지식생태계 전반에 대두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프로페셔널들은 반복적 강도에서 벗어나, 에이전트 군단이 빚어낸 산출물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전체 프로세스의 방향성을 조율하는 고차원적 의사결정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효율성의 기저에는 냉철한 거버넌스의 필요성이 따른다. 에이전트가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조직 내 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되어야 하며, 시스템 충돌이나 오류를 막기 위한 명확한 권한 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보가 단절되거나 프로세스 사각지대가 존재할 경우, 자율 에이전트의 연쇄 작업은 오히려 치명적인 오류나 리스크를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에이전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각 단계마다 철저한 데이터 검증 및 게이트를 두는 이중적 시스템 설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개인의 연구 및 창작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부서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는 실제 기업 및 산업 현장에서는 더욱 거대한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기업들이 부서별 데이터 사일로를 깨고 에이전트 기반의 자동화 파이프라인을 전사적으로 도입할 때, 이러한 통제와 오케스트레이션의 부재는 곧바로 조직 전체의 치명적인 장애나 리스크로 직결될 수 있다. 사회적 흐름 속에서 개인의 감정적 기대나 불필요한 두려움은 지식생태계 속 프로페셔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연구실이든 거대 기업의 실무 현장이든, 인간과 멀티플레이어 에이전트, 그리고 산업 전반의 자동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플랫폼이 가장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오케스트레이션 체계를 설계하고 통제하는 것이 AX(AI Transformation) 시대의 가장 냉철하고 유효한 생존 전략이다. 필자 정지윤 정지윤은 인공지능(AI)과 미디어기술을 기반으로 인간과 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미디어공학자다.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에서 미디어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중앙대 예술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성균관대 인공지능혁신융합대학사업단 선임연구원과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강사, 세종대 메타버스융합학부 조교수 등을 지냈다. AI 예술 창작도구, 콘텐츠 융합교육, UI·UX, 인간-AI 상호작용을 연구해 왔으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에서 AI·예술공학·미디어융합을 중심으로 기술이 창작과 문화산업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펴본다.

2026.08.31 09:02정지윤 컬럼니스트

문화강국, 이제 정책의 시간이다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다. 유네스코도 이 150주년을 함께 기념한다. 백범이 『백범일지』에서 바랐던 것은 단순히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였다. 15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K-팝과 드라마, 영화와 게임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국가가 됐다. 이제 과제는 그 성취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있다. 문화예술의 기반을 다지고 K-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우리가 가진 문화자산을 국민의 삶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정부 문화정책에서도 '문화강국'은 핵심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체부는 문화를 산업으로 바라보고 K-컬처를 미래 핵심 성장산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기초예술과 지역문화 등 문화강국의 기반을 함께 강화하고 있다. 지난 7월 출범한 제22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도 이제 본격적인 심의에 들어간다. 오는 26일 전체회의에서는 소위원회 구성과 함께 문체부와 국가유산청, 한국관광공사,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주요 기관의 업무보고가 진행되고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의 2025회계연도 결산도 상정된다. 후반기 문체위는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3선·경기 안양동안을)이 위원장을 맡고,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재선·충남 천안병)과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재선·서울 서초갑)이 각각 여당과 야당 간사를 맡았다. 이재정 위원장은 문화예술과 K-콘텐츠, 관광산업 지원과 체육계의 공정성을 강조해왔고, 이정문 간사는 문화강국과 K-컬처를 뒷받침할 입법과 예산의 역할을 언급했다. 조은희 간사도 원칙 있는 견제와 책임 있는 협력을 내세웠다. 후반기 문체위가 문화·체육·관광·국가유산 분야의 현안을 업무보고와 결산, 이후 법안과 예산 심의에서 어떻게 구체화해갈지에 관심이 모인다. 문화 분야의 과제도 적지 않다. 이정문 간사가 최근 참석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국외에서 환수된 안중근 의사 유묵 공개 현장과 박물관·미술관 발전을 위한 정책 논의도 그 가운데 있다. 세계유산은 등재 이후의 보존·관리가 중요하고, 국외소재문화유산은 환수 이후 조사와 연구, 보존과 활용이 뒤따라야 한다. 박물관과 미술관 역시 시설 확충뿐 아니라 소장품의 연구·관리, 전문인력 확충과 지역문화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가유산 정책 역시 보존·관리와 활용을 함께 살펴야 한다. 국가유산청은 올해 업무계획에서 보존·전승을 기본으로 지역 활성화, K-헤리티지 세계화, 디지털콘텐츠와 산업 육성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국가유산 활용 콘텐츠를 관광과 지역경제로 연결하고, 디지털 원천자원과 실감형 콘텐츠의 제작·보급을 확대하는 방향도 담겼다. 문체부는 문화예술과 콘텐츠산업의 성장 기반을 넓혀가고 있고, 국가유산청도 국가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바탕으로 그 가치를 콘텐츠와 관광, 지역문화로 확장하고 있다. 국가유산이 품고 있는 역사와 장소, 인물과 이야기는 K-콘텐츠의 차별성을 더하는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K-헤리티지의 고유한 가치가 K-콘텐츠와 만나 새로운 문화향유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성과가 다시 연구와 보존·전승에 보탬이 되는 흐름도 넓혀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를 구체화하는 데 국회와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국회가 입법과 예산을 다룬다면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은 정책을 구체화하고, 소속기관과 공공기관, 지자체와 문화현장·콘텐츠산업은 이를 현장에서 구현한다. 문화예술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일, K-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 국가유산을 제대로 보존·관리하면서 K-헤리티지의 가치를 넓히는 일은 각각의 정책영역에서 추진되지만 현장에서는 서로 연결된다. 후반기 문체위는 이미 출발했다. 이제 업무보고와 결산심사, 이어질 법안과 예산 심의를 통해 문화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높은 문화의 힘'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화와 산업, 중앙과 지역, 보존과 활용을 잇는 정책이 하나씩 쌓일 때 그 힘은 오래간다. 문화강국을 말하는 시간을 넘어, 이제 문화강국을 만들어가는 정책의 시간이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8.24 10:43이창근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 2.0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빛은 사람을 모았다. 2021년 5개 지역에서 시작한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지난해 8개 지역에서 22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만났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가'를 넘어 그들이 유산을 어떻게 경험했고 무엇을 기억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때다. 국가유산청은 지난해 12월 확정·발표한 2026년 주요업무계획에서 지역 대표유산과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야간 특화 콘텐츠로 내·외국인의 지역 체류를 유도하는 방향을 '미디어아트 2.0'으로 제시했다. 아직 2.0은 세부 실행지침이라기보다 정책 방향의 성격이 강하다. 앞으로 세부 목표와 추진체계, 현장 적용을 위한 가이드라인과 중장기 육성·진흥 방향이 보다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올해의 현장이 중요하다. 전국 12개 지역에서 어떤 장소 해석과 창작이 등장하고, 어떤 작품과 경험이 사람들에게 남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경험이 쌓일 때 미디어아트 2.0도 하나의 정책 방향을 넘어 다음 단계의 사업 구조와 실행 모델로 선명해질 수 있다. 올해는 오는 8월 14일 진주성을 시작으로 군산, 청주, 여수, 익산, 강화, 부여, 아산, 철원, 통영, 양산, 경주까지 전국 12개 지역의 국가유산이 차례로 밤을 연다. 열두 지역에는 서로 다른 유산이 있고 그만큼 다른 시간과 기억이 있다. 그런 점에서 2026년은 2.0의 완성형을 보여주는 해라기보다 앞으로 2.0이 어떤 방향으로 구체화돼야 하는지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출발점에 가깝다. 지금까지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사람을 유산의 밤으로 불러들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들어갈 때다. 화려한 빛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빛을 통해 유산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고 장소에 쌓인 시간과 이야기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야 한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에서 빛은 목적이 아니라 표현의 언어다. 출발점은 장소성이다. 장소를 읽고 유산의 가치를 해석한 뒤 예술과 기술을 하나의 작품으로 융화해 오래된 시간을 오늘의 경험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 2.0이 가야 할 방향이다. 오래된 장소를 다시 걷는 '디지털 산책'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2021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던 시기 '세계유산 미디어아트' 사업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을 벗어나 야외의 유산을 걸으며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당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2021년 현장에서 나는 미디어아트가 유산의 공간에 만들어내는 새로운 경험을 '디지털 산책'이라 불렀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따라 밤의 유산과 지역을 즐기는 문화유산 야행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빛과 영상, 소리와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유산의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장소에 쌓인 시간과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만나는 방식이다. 이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서 나아가 유산의 공간을 걷고 머물며 장소 전체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2023년에는 전국 문화유산 미디어아트 현장 리포트를 통해 각 지역의 현장을 직접 살피며 기획과 작품뿐 아니라 현장운영과 지역 활성화까지 함께 들여다봤다. 2024년에는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원천자원 3D 에셋 개발·보급 사업에 참여해 '제1회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페어'의 디지털 헤리티지 특별전과 국가유산 디지털콘텐츠 공모전·시상식을 추진하고, 국가유산 디지털산업 육성 전략 워크숍 등을 통해 콘텐츠의 활용과 산업 확산 가능성까지 살펴봤다. 지난해 이 지면에서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2.0'을 제안하며 중심에 둔 문제의식은 '행사가 끝난 뒤 무엇이 남는가'였다. 올해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들어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못지않게 무엇을 읽고 무엇을 창작했는지도 중요하다. 이제 순차적으로 문을 여는 열두 지역의 현장에서 그 답을 확인하고, 그 경험을 다음 기획과 정책으로 이어가야 한다. 지역 차원에서도 이런 방향은 이미 구체적인 정책 제안으로 이어졌다. 박정숙 청주시정연구원 책임연구위원(산업경제부장, 관광학박사)은 올해 4월 발간한 '청주 이슈브리프 2026-2호'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정책 연계 전략 - 2026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2.0 시대의 도약」에서 지역의 역사문화 자원과 도시 정체성을 연결하고, 이를 야간 체류와 지역경제 활성화로 확장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중앙에서 제시된 2.0의 방향은 지역 현장에서 결국 '어떤 장소를 읽고 어떤 경험을 만들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기획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제 순차적으로 문을 여는 열두 지역의 현장에서는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출발점이 장소성이다. 장소성은 건축물의 형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곳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사건, 사람들의 기억과 주변 경관 그리고 그곳과 함께 이어져온 삶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진주성과 양산 통도사, 익산 미륵사지와 아산의 이충무공 유허(현충사)를 같은 방식으로 풀 수 없다. 성곽에는 성곽의 시간이 있고 사찰에는 사찰의 호흡이 있다. 같은 장비와 기술을 쓰더라도 같은 화면이 나와서는 안 된다. 12개의 유산에는 12개의 장소성이 있고 그만큼 다른 창작의 문법이 필요하다. 건축을 스크린으로 쓰는 것과 건축을 읽어 화면을 만드는 것도 다르다. 유산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씌우기보다 그 장소 안에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과 기억 가운데 오늘의 사람에게 무엇을 건넬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유산의 해석은 결국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이 장소에서 왜 이것을 보여줘야 하는가'에 답하는 일이다. 장소의 해석이 작품이 되는 순간 장소를 제대로 읽었다면 그다음은 창작이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의 힘은 유산과 기술을 한 화면 안에 나란히 놓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의 장소 해석 안에서 예술과 기술이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돼야 한다. 유산은 창작의 원천이고 예술은 그 가치를 해석하며 기술은 그 해석을 감각적으로 구현한다. 프로젝션 매핑과 인터랙티브 미디어, 사운드스케이프, 미디어퍼포먼스는 장소의 해석을 작품으로 구현하는 중요한 표현 수단이다. 특히 미디어퍼포먼스는 사람의 몸짓과 음악, 빛과 영상을 장소의 서사 안에서 엮어 미디어아트를 장소특정형 공연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관람객의 기억에 남아야 할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과 기술이 어우러져 유산의 의미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때로는 압도적인 장면으로 시선을 붙잡고, 때로는 깊은 몰입으로 사람을 장소의 시간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 경험이 감동과 울림으로 이어질 때 유산은 오래 남는 기억이 된다. 결국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장소를 읽고 유산을 해석하는 힘은 더 중요해진다. 창작과 연출은 여기서 만난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것만으로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 어디에서 장면을 시작하고 어느 순간 음악을 멈출 것인지, 사람의 시선을 어디에 머물게 할 것인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비울 것인지까지 공간의 흐름 안에서 설계해야 한다. 압도감은 규모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몰입감은 화려함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장소의 시간과 작품의 리듬이 맞아떨어질 때 관람객은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좋은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어느 장소에 옮겨놓아도 그대로 성립하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 장소를 떠나는 순간 작품의 의미도 함께 약해지는 장소특정형 창작에 가깝다. 작품의 완성은 결국 사람에게 닿는 데 있다. 오래된 장소에서 만난 한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며, 때로는 깊은 감동과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유산이 오늘의 사람과 감정적으로 만나는 순간 과거의 장소는 현재의 경험이 된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가 기술사업에 머물지 않고 예술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소를 어떻게 읽고 무엇을 창작할지, 서로 다른 요소를 어떤 흐름으로 묶을지에 대한 기획이 먼저 서야 한다. 대상 지역 선정 이후 더 중요해지는 기획 영상 콘텐츠는 콘셉트와 스토리보드를 설계하는 프리 프로덕션에서 출발해 3D 모델링과 영상 제작, 사운드 디자인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장 매핑과 튜닝으로 완성된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에서는 이러한 제작 과정과 함께 장소를 어떻게 읽고 유산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도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 장소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지, 유산의 어떤 가치를 오늘로 가져올 것인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건넬 것인지, 그것을 어떤 예술적 언어와 기술로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작품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공모 선정은 사업의 완성이 아니라 본격적인 창작과 기획이 구체화되는 출발점에 가깝다. 현재 공모 심사가 진행 중인 2027년 사업도 대상 지자체가 확정되면 각 지역의 장소성과 유산의 의미를 다시 살피는 과정이 중요해진다. 다른 지역의 성공 사례나 새로운 기술을 참고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결국 작품의 출발점은 자기 지역의 유산에서 찾아야 한다. 그 해석에 맞는 창작 방식과 기술이 선택될 때 유산의 이야기와 연출, 예술과 기술, 공간과 동선도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다. 좋은 현장은 여러 전문영역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하나의 장소 경험으로 연결될 때 만들어진다. 영상과 음악, 공간과 기술이 각각의 완성도를 갖추는 동시에 하나의 작품 안에서 서로 맞물리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러 전문성을 한 방향으로 연결해 그 지역에서만 가능한 경험으로 만드는 일이다. 다음 사업을 준비하는 지역에서도 제작 일정과 기술 선택만큼 장소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떤 작품의 언어로 풀어낼 것인지가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좋은 현장의 경험을 다음 정책으로 지역 체류와 지역경제도 좋은 작품 경험이 만들어내는 흐름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관광객을 오래 붙잡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것과 좋은 작품을 경험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더 머무는 것은 다르다. 체류는 숙박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한 장면 앞에 조금 더 서 있고 다음 공간까지 걸으며 작품이 끝난 뒤에도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좋은 작품이 사람의 마음에 남으면 그 장소를 조금 더 걷고 싶어진다. 다시 보고 싶어지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체류와 재방문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 경험이 골목과 식사, 상점과 숙박으로 이어질 때 한 편의 미디어아트는 도시의 밤을 넓힌다. 올해는 전국 12개 지역의 경험을 함께 살펴보고 축적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의 컨설팅과 모니터링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올해의 현장은 개별 행사의 성과를 넘어 다음 정책을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어떤 장소 해석이 관람객에게 설득력을 얻었는지, 예술과 기술이 어디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는지, 어떤 작품이 몰입과 감동을 만들었는지, 무엇이 사람을 머물게 하고 무엇이 기억으로 남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좋은 현장을 만드는 것만큼 좋은 현장에서 배우는 것도 정책이다. 관람객 수와 만족도에 더해 유산을 바라보는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체류와 소비가 지역 안에서 어떻게 이어졌는지, 지역 예술가와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창작된 콘텐츠와 현장의 경험이 이후 어떻게 남고 활용되는지도 기록하고 차곡차곡 축적할 필요가 있다. 한 지역의 작품을 다른 지역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장소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준비하고 창작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과 질문은 다음 지역의 기획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 2026년 주요업무계획에서 '미디어아트 2.0'이라는 방향은 이미 제시됐다. 이제 올해 12개 현장에서 확인되는 장소성의 차이와 창작의 성과, 관람객의 경험과 지역의 변화를 축적해 그 방향을 보다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 구조로 발전시킬 때다. 오는 8월 14일부터 열두 지역의 서로 다른 밤이 열린다. 올해 기대하는 것은 같은 기술의 반복이나 단편적인 빛의 향연을 넘어, 각 지역이 자기 유산에서 길어 올린 해석을 예술과 기술로 작품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오래된 장소를 새롭게 만나는 장면이다.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 2.0은 더 많은 빛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장소를 읽고 유산의 가치를 해석하며 예술과 기술을 융화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 작품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 감동과 기억을 남기고 그 경험이 머무름과 재방문으로 이어질 때 지역과 도시도 함께 움직인다. 빛은 밤마다 꺼진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통해 새롭게 만난 장소의 기억은 남는다. 올해 열두 지역에서 쌓이는 기억과 경험이 다음 지역의 더 좋은 기획과 다음 단계의 정책으로 이어질 때 'K-헤리티지 미디어아트 2.0'의 내용도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인문 논픽션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시리즈 저자

2026.08.10 09:16이창근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말없는 메시지에 담긴 마음의 행방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마음의 형태 우리는 마음으로 산다. 오늘 무엇을 입을지, 누구에게 연락할지, 기울어진 마음이 도달하는 곳이 선택의 종착점이 된다. 그 작은 종착점들은 한 사람의 고유한 문법을 이룬다. 이는 삶의 표면에서 스타일의 형태로 드러난다. 어떤 색의 벽을 선택하는지, 어떤 모양의 신발을 신는지, 차 키를 어디에 두는지.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 그를 둘러싼 사물들은 말없이 그 사람을 묘사한다. 이처럼,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형태를 남긴다. 그것은 언어가 되고, 행동양식이 되며, 하나의 문화가 된다. 그리고 그 문화는 다른 마음과 겹쳐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 세상은 이러한 마음들의 순환 속에 지어져 왔다. 여백의 언어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음절 남짓의 하이쿠는 참 짧다. 계절 하나, 바람 한 줄기, 떨어지는 꽃잎 하나를 남겨둔다. 그 이후 이어지는 여백의 감각이 마음을 관통할 뿐이다.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짧은 유머와 같이 보이지만, 단 세 줄 안에 태도. 즉 메시지를 보여준다. 마치 하나의 장면과 같이 느껴지는 이 시는 설득하기보다 마음속에 머물며 직관적인 통찰을 불러일으킨다. 투명 유리병 위의 하얀 글씨 소리 없이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브라질의 작가 카를두 메이렐레스(Cildo Meireles)의 작품『Inserções em Circuitos Ideológicos: Projeto Coca-Cola(이념적 순환에 대한 삽입: 코카콜라 프로젝트)』가 있다. 비어있는 투명한 유리 재질의 코카콜라병, 반쯤 채워진 코카콜라병, 가득 채워진 코카콜라병 이 세 가지 모습은 어떠한 방식으로 발언할까? 평범한 소비재인 이 코카콜라병의 중앙부에는 작가가 자본주의와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려는 의도가 담긴 메시지가 하얗게 새겨져 있다. 이 하얀 메시지는 어두운 톤의 콜라가 채워지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병에 쓰인 하얀 메시지는 그 자체로 힘이 없다. 중요한 지점은 이 메시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적인 소비 유통망이라는 맥락과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도록 하는 경험의 설계는 설명이나 강요 없이 향유자의 마음에 접근성을 획득한다. 코카콜라를 소비하는 주체적 행위와 우연한 발견이 교차하며 향유자의 마음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낸다. 하이쿠가 여백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메이렐레스는 일상을 통해 마음의 틈을 만든다. 둘 모두 큰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침묵과 반복, 그리고 익숙함을 통해 감각을 흔든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장과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 메시지는 넘쳐나지만 되려,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의 출처는 충분히 동요할 만한 고유한 감각여건에 달려있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스타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말없이 드러내듯이, 강렬한 예술 또한 대개 부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오래 머물만한 여백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말 없는 메시지는 마음속에 조용히 머물며, 스스로 하나의 질문이 된다. 필자 최지원 작가 최지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로지르는 현장 예술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석사를 받았다. 회화·드로잉 창작을 비롯해 융합형 미디어콘텐츠 제작을 병행한다. 현재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현대미술·AI·예술철학 비평을 연재한다.

2026.07.31 09:41최지원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AI 시대의 휴먼 오리지널리티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프롬프트 몇 줄이면 몇 초 만에 영화 같은 시퀀스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일러스트와 서사가 화면을 채우는 시대다. 생성형 AI는 콘텐츠 제작의 장벽을 무너뜨렸고, 이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상상 속 이미지를 눈앞에 구현할 수 있다. 기술이 가져온 이 압도적인 생산성의 향상은 분명 콘텐츠산업의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성능이 고도화될수록, 혹은 기술의 신기함이 걷힐수록 현장에서 마주하는 질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AI는 정말 창작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남긴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통계적 패턴을 정교하게 재구성하고 있는가. 의료 영상에서 '그럴듯함'이 치명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듯, 콘텐츠산업에서도 '그럴듯한 양산형 결과물'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맥락을 정교하게 빚어내거나, 인간 고유의 사유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서사를 매끄러운 껍데기로 대체하는 AI는 결국 콘텐츠의 생태계를 고갈시킨다. 데이터의 바다 위에서 학습된 모델이 생성하는 수많은 파생물은 얼핏 화려해 보이지만, 그 자체로 현실의 고통과 시대의 맥락을 온전히 담아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고도의 모방과 평균화에 가깝다. 진정한 콘텐츠 창작의 패러다임 전환은 AI를 단순히 '결과물을 뚝딱 찍어내는 대체재'로 소비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AI는 어디까지나 거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고도화된 도구일 뿐, 그 도구를 쥐고 고유한 시각과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작가의 주체성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은 결과물을 무한정 복제하고 생성할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현실의 감각과 충돌하는 창작의 과정과 그 안에 축적된 작가의 사유와 판단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이제 콘텐츠산업과 예술 현장이 주목해야 할 것은 도구의 속도가 아니라, 그 도구를 활용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묻는 인간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다. 공학과 예술의 경계가 만나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AI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반대로 경시하는 이분법을 넘어, 예술가가 주도권을 쥔 채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지닌 통계적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감각과 현실의 맥락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야 한다. K-콘텐츠는 그동안 압도적인 속도와 트렌드 감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진정한 리더십과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다음 단계는 단순한 비용 효율이나 기술 중심의 생산량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AI라는 도구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작가 고유의 오리지널리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공학적 기술력과 인문학적 사유의 결합이다. 앞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사유와 감각을 창작의 중심에 두는 것. 그것이 생성형 AI 시대에 우리 문화산업이 갖춰야 할 진정한 휴먼 오리지널리티다. 필자 정지윤 정지윤은 인공지능(AI)과 미디어기술을 기반으로 인간과 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미디어공학자다.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에서 미디어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중앙대 예술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성균관대 인공지능혁신융합대학사업단 선임연구원과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강사, 세종대 메타버스융합학부 조교수 등을 지냈다. AI 예술 창작도구, 콘텐츠 융합교육, UI·UX, 인간-AI 상호작용을 연구해 왔으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에서 AI·예술공학·미디어융합을 중심으로 기술이 창작과 문화산업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펴본다.

2026.07.29 12:00정지윤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대한민국관에서 읽은 '넥스트 H'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부산 벡스코의 세계유산위원회 본회의장은 조용하고 엄정했다. 한 나라의 유산이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심의하는 자리이자, 이미 등재된 유산이 약속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등재의 환호보다 등재 이후의 책임을 논의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필자는 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정회원으로 NGO 옵저버 자격을 받아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7월 24~25일 모니터링했다. 국가유산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여러 현장을 접해왔지만, 국제회의장에서 마주한 세계유산의 언어는 분명했다. 세계유산은 국가가 소유하는 훈장이 아니다. 현재 세대가 물려받은 유산을 온전히 보존해 다음 세대에 넘기겠다고 국제사회와 맺는 약속이다. 대한민국은 '반구천의 암각화'를 포함해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숫자는 국제적 인정인 동시에 열일곱 개의 보존 책임을 뜻한다. 넥스트 H 이번 1박 2일의 부산 현장에서 필자가 붙잡은 어젠다는 '넥스트 헤리티지(Next Heritage)'다. 새로운 유산을 발굴해 목록에 추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미 물려받은 유산을 어떤 상태로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지, 보존과 전승을 바탕으로 기술과 콘텐츠, 도시와 관광, 교육과 지역경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그 다음 단계의 핵심은 '헤리티지 인더스트리(Heritage Industry)'다. 국가유산을 보존 행정의 대상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보존과 전승을 전제로 정확한 기록과 해석을 축적해 문화산업과 K-콘텐츠의 원천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산업화는 무분별한 상품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보존과 기록에서 출발해 콘텐츠와 경험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성과가 다시 보존과 전승, 지역공동체에 돌아가는 구조를 뜻한다. 방향은 넥스트 헤리티지다. 이를 현실에서 작동하게 하는 체계가 헤리티지 인더스트리다. 부산에서 '한국의 갯벌' 2단계 확대 등재가 승인됐다. 기존 유산에 여수·고흥·무안·서산갯벌이 추가되면서 6개 구성요소를 갖춘 연속유산으로 확대됐다. 세계유산 수가 열여덟 건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17건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신규 등재 못지않은 의미를 지닌다. 2021년 최초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는 유산의 완전성을 높이기 위한 확대를 권고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역사회는 그 권고에 따라 관리계획과 보호체계를 마련하고 확대 등재를 추진했다. 경계가 넓어진 만큼 보존의 책임도 넓어졌고, 협력해야 할 지역과 공동체도 늘어났다. 세계유산은 등재 결정으로 완성되는 이름이 아니다. 등재 이후의 관리와 협력 속에서 계속 다듬어지는 약속이다. 헤리티지산업 역시 이 기반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보존의 원칙과 신뢰가 흔들리면 활용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기술은 감각의 문법이다 본회의장을 나와 대한민국관에 들어서자 유산의 언어가 바뀌었다. 규범과 결정문으로 다뤄지던 유산이 빛과 소리, 영상과 공간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헤리티지: 타임리스 타임」은 전통 기와와 자개, 전통공예와 의궤, 세계유산과 기록유산을 동시대의 디지털 언어로 풀어냈다. 국가유산 3D 에셋 146종을 활용한 '이음을 위한 공유'는 기록 자산이 전시와 영상, 교육과 창작의 원천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기술은 오래된 시간과 먼 장소를 관람객 앞으로 불러온다. 보이지 않던 구조를 드러내고, 문서 속 기록을 움직임과 공간의 경험으로 확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감각의 문법이다. 그러나 문법이 문장의 주어가 될 수는 없다. 영상의 화려함만 남고 유산의 역사와 보존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면 기술은 목적을 잃는다. 주어는 언제나 유산이어야 한다. 정확한 기록은 헤리티지산업의 기반이다.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어야 미디어아트와 게임, 전시와 관광도 유산의 가치를 왜곡하지 않고 확장할 수 있다. 미디어아트가 유산을 기억하게 하는 기술이라면, 3D 기록과 HBIM은 유산을 남게 하는 기술이다. 하나는 시민의 관심과 이해를 넓히고, 다른 하나는 보존과 수리의 정확성을 높인다. 두 영역이 연결될 때 디지털 활용은 일회성 볼거리를 넘어 지속 가능한 공공자산이 된다. 무형유산 공간에서는 완성된 물건보다 그것을 만드는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형유산은 사람의 몸과 기억, 공동체가 축적한 지식 속에서 이어진다. 전통기술을 공연과 전시, 교육과 콘텐츠로 확장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승자의 이름과 권리, 창작·전승 과정에서의 역할과 정당한 몫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전승 없는 산업화는 뿌리를 잃고, 환류 없는 산업화는 유산을 소진한다. 헤리티지산업은 콘텐츠 생산량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전승자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지, 지역공동체가 성과를 함께 누리는지, 새로운 세대가 유산을 배우고 이어갈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산업의 성과가 다시 사람과 공동체에 축적될 때 비로소 선순환이 시작된다. 세계유산강국에서 문화산업강국으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세계유산위원국이자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의 개최국·의장국, 국가유산 국제협력의 기여국으로 성장했다. 부산에서 대한민국의 주도로 채택된 '세계유산에 관한 부산 선언'은 무력분쟁과 기후변화, 개발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과 연대를 강조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유산을 보유한 나라를 넘어, 세계유산의 보존과 협력에 책임 있게 기여하는 나라로 나아가는 일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이집트 등에서 추진해 온 국가유산 ODA 역시 단순한 기술 제공이나 시설 복원에 머물지 않는다. 현지 기관과 전문인력이 자신의 유산을 스스로 조사하고 보존·관리하며 활용할 수 있도록 인력과 조직, 시설과 역량을 함께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축적한 보존과 디지털 기록의 경험을 국제사회와 나누는 것은 세계유산강국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책임이다. 이재명 정부는 높은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를 문화정책의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K-컬처를 미래 핵심 성장산업으로 육성하고 콘텐츠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가 곧 경제이자 국제경쟁력인 시대다. 이러한 문화강국 전략은 국가유산과 더욱 긴밀하게 만나야 한다. K-컬처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은 새로운 플랫폼이나 첨단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역사와 장소, 서사와 이미지, 공동체가 축적해 온 감각과 기억이 필요하다. 한국의 국가유산은 K-콘텐츠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영화와 게임, 미디어아트와 공연, 관광과 도시브랜드를 지탱하는 문화적 원천이다. 백범 김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꿈꿨다. 오늘날 그 문화의 힘은 콘텐츠 생산량이나 수출액만으로 측정될 수 없다. 고유한 문화를 지키고, 그것을 동시대의 언어로 해석하며, 그 가치와 성과를 국민과 지역, 국제사회와 나눌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세계유산강국'은 세계유산의 등재 건수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유산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책임 있게 관리하며, 국제사회와 보존의 경험을 나누고, 그 가치를 오늘의 문화와 산업으로 지속가능하게 확장할 역량을 갖춘 나라를 뜻한다. 세계유산강국은 문화산업강국으로 확장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유산을 소비재로 만드는 산업화를 뜻하지 않는다. 보존과 기록에서 출발한 콘텐츠와 경험의 성과가 다시 보존과 전승, 지역공동체와 미래세대에 돌아가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이번 부산 현장은 K헤리티지산업포럼의 정주호 사무총장, 이경태 산업분과장, 이영재 예술분과장과 함께 걸었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현장을 살폈지만 결론은 같았다. 보존과 활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을 활용의 출발점으로 삼고 그 성과를 다시 유산과 공동체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넥스트 헤리티지는 오늘의 유산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동시대의 언어로 해석해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상태로 넘기는 과정이다. 이를 문화와 산업의 생태계로 작동하게 하는 체계가 헤리티지 인더스트리다. 유산은 콘텐츠이고, 경험은 도시 경쟁력이다. 그러나 그 출발과 종착지는 보존과 전승이어야 한다. 오래된 시간을 지키면서 오늘의 기술과 산업에 연결하고, 그 성과를 다시 유산과 공동체, 미래세대에 돌려주는 것. 그것이 부산에서 읽은 세계유산강국의 다음 장면이자 넥스트 헤리티지의 방향이다.

2026.07.27 09:37이창근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군산 야행 2.0, 기억의 밤길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군산의 밤은 해가 진 뒤에야 시작되는 시간이 아니다. 낮의 군산이 근대건축과 항구, 골목과 관광지의 얼굴을 보여준다면, 밤의 군산은 그 장소들 사이에 오래 고여 있던 시간을 천천히 드러낸다. 도시는 낮과 밤에 다른 말을 한다. 낮에는 건물의 형태와 거리의 표정이 먼저 보인다. 밤이 되면 시선은 조금 느려지고, 빛이 닿는 곳과 어둠이 남는 곳 사이에서 장소의 결이 달라진다. 군산의 근대유산을 밤에 다시 걷는 일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국가유산은 과거에 머무는 흔적이 아니다.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이해하고, 걷고, 머물고, 경험해야 할 공공의 시간이다. 오래된 건축물과 거리, 항구와 창고, 터널과 골목에는 도시가 지나온 시간이 쌓여 있다. 그 시간이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힐 때 유산은 도시의 기억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군산은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도시다. 근대도시의 풍경은 때로 낭만적으로 소비되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쌀과 항구, 철도와 창고, 이주와 노동, 수탈과 저항의 기억이 겹쳐 있다. 군산의 근대유산을 밤에 만난다는 것은 오래된 거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을 넘어, 도시가 품은 기억을 어떤 태도로 마주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야행은 기억의 동선 오래된 장소는 쉽게 이미지가 된다. 벽돌 건물, 좁은 골목, 낡은 간판, 노란 조명은 금세 관광의 장면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군산의 근대유산을 그렇게만 바라보면 이 도시의 시간은 표면에 머문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가 왜 그곳에 남았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 건물 앞을 누가 지나갔는지, 그 길을 따라 무엇이 이동했는지, 그 창고와 항구가 어떤 시간을 견뎠는지 묻는 순간 풍경은 기억이 된다. 군산세관, 해망굴, 조선식량영단, 신흥동 일본식가옥 같은 장소들은 각기 다른 시간의 결을 품고 있다. 어떤 장소는 항구도시의 이동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장소는 수탈의 구조와 노동의 기억을 불러낸다. 어떤 골목은 생활의 시간을 간직하고, 어떤 건물은 도시가 견뎌온 근대의 그늘을 보여준다. 야행은 밤의 시간을 여는 일이다. 그러나 야행의 완성은 조명이 아니라 동선에 있다. 관람객이 어느 길로 들어서고, 어디에서 멈추며, 어떤 장면 앞에서 도시의 시간을 만나게 할 것인가. 좋은 야행은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빛과 공연, 체험과 먹거리, 포토존과 이벤트는 필요하다. 다만 각각의 프로그램이 흩어진 장면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밤길 경험으로 이어질 때 야행의 힘은 달라진다. 좋은 야행은 많은 프로그램명을 기억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밤에 그 길을 걸었다”는 감각을 오래 남긴다. 빛은 언어, 개막은 첫 문장 야행에서 빛은 중요하다. 그러나 빛 자체가 주제가 되면 장소는 배경으로 밀려난다. 빛은 유산을 꾸미는 효과가 아니라, 장소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오래된 건물을 밝히는 조명이 사진 찍기 좋은 배경에 머문다면 그 빛은 쉽게 소비된다. 반대로 장소가 품은 시간을 드러내고, 관람객이 그 기억을 천천히 마주하게 돕는다면 빛은 해석이 된다. 기술과 조명,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기술은 유산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기술은 장소를 덮는 장식이 아니라, 그 장소가 품은 시간을 오늘의 감각으로 번역하는 문법이어야 한다. 국가유산 활용의 다음 과제도 여기에 있다. 보존된 장소를 어떻게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야행의 개막은 단순한 의전이 아니다. 그 도시에 왜 밤이 필요한지, 그 장소의 기억을 어떤 태도로 마주할 것인지를 처음 보여주는 장면이다. 축사의 순서가 아니라 도시가 자기 기억을 꺼내는 첫 문장이어야 한다. 군산의 밤이 열리는 첫 장면도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절차에 머물 필요는 없다. 그 장면은 군산이 어떤 도시인지, 그 도시의 근대유산을 시민과 방문객에게 어떤 감각으로 건넬 것인지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다. 의전과 공연, 선언과 빛, 음악과 동선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때 개막은 도시의 첫 문장이 된다. 군산 야행 2.0, 다음 10년을 향한 질문 군산의 야행은 이미 짧지 않은 시간을 축적해왔다. 2016년부터 이어진 군산 국가유산 야행은 2026년 공모 선정으로 11년 연속이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2026년에는 2016년 이래 최대 규모의 예산도 확보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성과를 넘어, 군산의 근대유산이 야간 문화향유와 도시관광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아왔다는 의미다. 2025년에도 군산 야행은 시민과 관광객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하루 평균 3만 명의 관람객이 행사장을 찾았고, 군산시는 지난 10년간 근대문화유산 특화 프로그램, 지역 상권 연계, 시민 참여형 콘텐츠로 호응을 얻어왔다. 군산 야행의 힘은 이 축적에 있다. 행정이 준비하고, 시민이 참여하고, 방문객이 다시 찾으며 만들어온 시간이다. 국가유산청의 정책적 지원, 군산시의 현장 운영, 지역 구성원의 참여가 함께 쌓이며 군산의 밤은 하나의 도시 경험으로 자리 잡아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축적을 어떻게 다음 경험으로 이어갈 것인가다. 이미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찾는 행사로 자리 잡은 만큼, 이제의 과제는 볼거리의 양보다 경험의 밀도에 있다. 이 도시는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 관람객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장면 앞에서 멈추며, 무엇을 오래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 군산 야행 2.0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새로운 수식어를 붙이는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의 축적을 군산만의 기억의 동선으로 정리하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 행사명과 슬로건, 올해의 주제와 개막의 장면도 결국 이 질문 위에서 더 선명해질 수 있다. 도시는 밤이 되면 자신의 기억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오래된 장소를 얼마나 밝게 비출 것인가가 아니라, 그 빛 아래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다시 걸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야행은 밤의 시간을 여는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도시의 기억을 시민의 걸음 속에 다시 흐르게 하는 일로 완성된다. 군산의 밤이 오래 남는다면, 그것은 빛의 밝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가 도시의 시간을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2026.07.13 09:33이창근 컬럼니스트

[문화엔진] 부재(不在)가 제안하는 능동적 시간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술경영학박사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경관계획가 박상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과 함께합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여기 높이 76cm, 가로 37cm, 세로 37cm의 나무상자가 있다. 상부는 유리판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구 하나가 놓여있다. 상자 안의 전구는 1년 중 단 한번 무작위한 방식으로, 11초 동안 켜졌다 꺼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알리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의 작품 Lampada annuale(연간램프, 1966)은 관객이 불이 켜지는 순간을 보든, 보지 못하든 그 '사건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만으로 관객을 작품과 만나게 한다. 이론적이면서 어쩌면 추상적인 이 시도는 우리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독립시킨다. 오브제 내부에 숨겨진 타이머 장치는 '자율성'이라는 개념으로 기능하며, 예측불가능성에 기인한 능동적 시간에 대한 인식을 증폭시킨다.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작품 Paradox of Praxis 1. Sometimes Making Something Leads to Nothing(실천의 역설 1 - 때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1997)에서는 멕시코시티의 한 거리에서 작가가 9시간가량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밀고 다닌다. 퍼포먼스의 끝에 얼음덩어리는 녹아 없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커다란 크기의 얼음덩어리도, 거리에 남았다 사라진 물자국도 아닌, 땡볕에 아스팔트 위에서 얼음을 밀었던 퍼포머의 자발적 행위으로부터 강하게 감각된다. 두 작품의 미디엄-눈앞에서 쉬이 켜지지 않는 전구와 다 녹아 실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얼음은 관객 앞에 그 어떤 가시적인 무엇을 가져다 놓지 않는다. 이 실감 나는 부재(不在)는 강박적으로 작동하고자 하는 우리의 존재의식을 조용히 덮어내기도 한다. 관객은 작품의 작동 과정안에 스스로 위치하거나, 실천적 행동에 대한 간접적 체험만으로 시간을 감각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을 타고 우리는 존재의 기준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다. 잠재성에 비롯한 기대감으로 존재하는 방식과 온 힘을 다해 애쓰며 소멸을 감각함으로 존재하는 방식에서 무엇이 부재(不在)하고, 무엇이 현존(現存)하고 있는가? 필자 최지원 최지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로지르며 작업하는 현대미술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석사를 받았다. 회화와 드로잉을 비롯해 융합형 미디어콘텐츠 제작을 병행하고 있으며, 현재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25년 11월부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참여해 현대미술·AI·예술철학 비평을 연재하고 있다.

2026.06.30 09:08최지원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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