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인텔 50년 역사 담은 '인텔 뮤지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소재 인텔 본사, '로버트 노이스 빌딩' 안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작은 박물관인 '인텔 뮤지엄'이 있다. 인텔 뮤지엄은 인텔 창립년도인 1968년부터 14년이 지난 1982년 개관했고 테니스 코트 3.6배인 929제곱미터 넓이 공간에 인텔이 그동안 만든 프로세서, 반도체 생산 과정 등 전시물과 기념품 매장 등을 갖췄다. 매년 8만 5천 명 이상이 방문하던 인텔 뮤지엄은 코로나19 범유행 직후 운영을 중단했다 지난 해 7월부터 재개장했다. 현재는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고 지난 해 온라인 개설된 '버추얼 뮤지엄'도 둘러볼 수 있다. 로버트 노이스 빌딩 정문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인텔 뮤지엄 입구 안내 데스크를 만난다. 안내 데스크 한 켠에서는 방문객을 반기는 팻 겔싱어 CEO의 영상이 재생된다. 1968년 쇼클리 반도체에 재직하던 8명은 단 한 명의 상사때문에 회사를 뛰쳐나왔다('인텔: 끝나지 않은 도전과 혁신'에서). 8명 중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있었고 뒤이어 앤디 그로브가 합류했다. 1969년 당시 인텔 전 직원은 106명에 불과했다. 인텔은 1968년 8월 설립 이후 이듬해인 1969년 첫 상용 제품인 64비트 3101 S램을 출시한다. 당시 컴퓨터를 제조하던 하니웰은 "64비트 S램을 개발하면 구매하겠다"고 공언해 반도체 제조사 사이에 경쟁을 붙였다. 이후 하니웰은 인텔이 개발한 3101 S램을 채택했다. 3101 S램은 2인치 웨이퍼에서 생산됐다. 출시 당시 이 메모리의 단가는 99.50달러(약 13만 4천원)이며 1비트당 1.55달러(약 2천100원) 꼴이다. 2023년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832.40달러(약 113만원)다. 같은 해에는 후속 제품인 1101 S램이 나왔다. 1971년에는 인텔이 첫 생산한 프로세서인 4비트 프로세서, 4004가 출시됐다. 이 프로세서는 750kHz로 작동하며 전자계산기인 '비지컴 141-PF'에 탑재됐다. 당시 가격은 60달러(약 8만 1천원)이며 현재 가치로는 454.85달러(약 62만원)에 달한다. 인텔은 1978년 16비트 프로세서인 8086을 생산했다. 그러나 가격을 줄이기 위해 내부 처리를 8비트로 수행하는 보급형 제품인 8088도 함께 생산했다. IBM은 첫 개인용 PC인 '5150'에 원가 절감을 위해 8088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IBM PC 모델 5150은 1981년 8월 12일에 출시됐다. 당시 가격은 메모리 64KB에 CGA 그래픽카드와 모니터, 360KB 2D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 1개 탑재 제품 기준 3천5달러(약 406만원)였고 현재 가치 기준 1만149달러(약 1천372만원)다. 인텔·AMD 등 x86 호환 프로세서와 MS-DOS/윈도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PC는 이후 오랫동안 'IBM PC'로 불렸다. 그러나 2004년 IBM이 PC 사업을 레노버에 매각한 이후 'IBM PC'라는 명칭은 사어(死語)가 됐다. 인텔이 1985년 처음 출시한 80386 프로세서는 20년 이상 32비트 명령어의 업계 표준이 됐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1989년 출시된 80486 프로세서의 수석 설계자를 담당하기도 했다. 1993년 출시된 펜티엄 프로세서 첫 제품은 출시 이듬해인 1994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 대학의 수학과 교수인 토마스 나이슬리가 발견한 '부동소수점 나누기(FDIV) 명령어 오류'로 리콜 파동을 겪었다. 인텔은 당시 리콜 비용으로 4억 7천 500만 달러(약 6천417억원)를 치렀다. 코어 하나를 두 개처럼 쓰는 하이퍼스레딩(SMT) 기능은 2002년 11월 등장한 '펜티엄4 HT' 프로세서에 처음 탑재됐다. 데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명령어를 먼저 실행할 수 있어 CPU를 놀려두는 시간을 줄였다. 그러나 이 기능 구현 당시 프로세서 내부 보안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대비 상대적으로 낮았다. 인텔 역시 큰 개선 없이 2002년 당시 확립된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결국 이는 16년 후(2018년) 스펙터·멜트다운 등 보안 결함으로 돌아와 인텔 프로세서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인텔은 와이파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2003년 당시 노트북용 펜티엄M 프로세서와 845GM 칩셋, 와이파이 모듈 등 3가지 실리콘을 통합한 센트리노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하이파 연구소가 만든 이 플랫폼은 PC 와이파이 보급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2007년 1월 인텔이 정식 출시한 코어2쿼드 Q6600 프로세서는 코어2듀오 다이(Die)를 두 개 이어붙여 쿼드코어를 구현했다. 국내 PC 마니아 사이에는 개발명에서 따온 '켄츠할배'로 익숙한 제품이며 2010년 중반까지도 현역으로 가동됐다. 코어 i7-8086K 프로세서는 8086 프로세서 공개 40주년을 맞아 2018년 출시된 한정판 프로세서다. 한국을 포함해 총 9개 국가와 지역에 거주하는 8천86명에게 코어 i7-8086K 프로세서를 추첨으로 증정하는 이벤트도 진행됐다. '무어의 법칙'은 올해 3월 말 별세한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5년 학술지 '일렉트로닉스'에 기고한 논문에서 출발했다. 당시 그는 "최소한의 비용 상승으로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2배씩 늘어나며 성능도 향상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무어의 법칙'이 과연 아직도 유효한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CES 2019 기조연설에서 "무어의 법칙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또 반도체 설계 IP 전문 기업인 Arm은 2021년 "무어의 법칙 대신 반도체의 효율성을 따지는 '와트 당 성능'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도체 다이를 생산하는 핵심 시설인 클린룸은 1입방미터 당 오직 1-2개의 먼지만 허용할 만큼 청정한 환경이 요구된다. 덧신과 두건, 면장갑과 라텍스 장갑, 상하 일체형 방진복에 보안경까지 갖춰 입어야 비로소 클린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도체 생산 시설 내부에서 천장을 오가며 웨이퍼를 실어 나르는 장비인 OHT(오버헤드 호이스트 트랜스포트)는 FOUP(풉, 전면개방통합포드)를 이동시킨다. 한 FOUP 안에는 최대 25개 웨이퍼를 담을 수 있다. 반도체를 만드는 주요 소재는 바로 모래에 포함된 실리콘이다. 실리콘 농도가 95% 이상인 '실리카 모래'에서 실리콘을 추출한 다음 정제해 액체로 만들고 굳히면 거대한 기둥인 '실리콘 잉곳'이 만들어진다. 다이아몬드 톱을 이용해 수 mm 단위로 잘라내면 우리가 흔히 보는 실리콘 웨이퍼가 된다. 여기에 세정과 표면 가공, 식각 등을 거쳐 반도체가 만들어진다. 인텔이 만든 첫 제품인 3101 SRAM은 2인치(50mm) 잉곳에서 만들어졌다. 인텔은 1991년부터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PC 제조사가 TV에 내보내는 광고에 4음계, 다섯개 음표로 이뤄진 징글과 로고를 넣으면 보조금을 지급했고 PC에는 '인텔 인사이드' 스티커를 부착했다. '인텔 인사이드' 프로그램은 국내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와 악연 아닌 악연을 가지고 있다. 인텔은 지난 2004년 '인사이드' 상표권이 자신에게 있다며 디시인사이드의 상표 출원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기각 당했다. 5년이 지난 2009년 8월에는 디시인사이드를 상대로 상표권 취소에 대한 심판 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특허법원은 인텔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고 디시인사이드의 손을 들어줬고 같은 해 11월 대법원은 인텔의 상고를 기각했다. 인텔 뮤지엄 바닥에는 반도체 제조나 생산 공정에 쓰이는 각종 원소를 붙였다. 실리콘(Si)은 물론 알루미늄(Al), 인(P), 불소(F), 티타늄(Ti), 탄탈륨(Ta), 비소(As) 등을 찾을 수 있다. 인텔 뮤지엄의 가장 마지막 전시물은 "역사에 얽매이지 마라. 밖으로 나가 뭔가 멋진 일을 하라"는 인텔 창립자, 로버트 N. 노이스(1927-1990)의 말이다. 그는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1968년 인텔을 공동 설립했다. 인텔 뮤지엄 입구 옆에는 실리콘 밸리를 오랫동안 취재했던 전문기자 출신 미국 작가인 마이클 S. 말론의 책에서 따온 인용구가 붙어 있다. 그는 1995년 출간한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책에서 "지구상 위든 아래든, 지금까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도달하지 못한 곳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인텔 창립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1929-2023)는 올해 3월 별세했다. 그가 남긴 "할 수 있는 일은 더 잘해낼 수 있다"(What can be done, can be outdone)는 말이 로버트 노이스 빌딩 한 면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