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업 KT의 대표이사는 정치인이 아니다
KT 윤경림 차기 대표이사 후보가 결국 낙마했다. 낙마라고 쓰고 보니 어쩐지 정치 이야기 같다. 낙마(落馬)는 본디 '말에서 떨어짐'을 가리키지만, '선거에서 떨어지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함'을 뜻하기도 한다. 자진해서 후보 사퇴 의사를 밝혔으니 낙마라기보다는 하마(下馬)라고 하는 게 옳긴 하겠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자진(自進)이 아니다. 하마라 쓰지 않고 낙마라 쓴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KT 대표 이야기가 경제나 산업이 아니라 정치로 채워질 때 그건 비극이다. 사업과 정치는 그림과 격투기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그림 이야기를 해야 할 때 격투기를 논하는 것은 코미디와 같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림 이야기를 망치기 때문이다.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되지만 사업이란 게 어디 그런가.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수많은 사람이 곡소리를 내야 하는 게 사업의 본질 아닌가.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른바 신(新)경영을 선포할 때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정치를 폄하하려는 의도보다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는 말에 함축된 것처럼 경영을 혁신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그 울림은 작지 않다. '2류'이었던 기업은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됐지만 '4류'였던 정치는 '몇류'나 되었을까. '4류'가 '2류'를 업신여기는 풍토는 한 마디로 가관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30년 동안 한국 기업과 정치의 발전 속도를 비교해보라. 굳이 객관적 자료를 찾아 제시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국민의 눈과 귀가 모두 막혀있지는 않을 테니까. 국정감사장을 떠올려보라. '4류'가 '2류'를 윽박지르는 아수라장이란 표현 말고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왜 이런 일이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정권(政權)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여기는 탓이다. 정권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여기는 한 정치는 '4류'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다. 무소불위 권력에 도취되면 무엇보다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격투기 선수가 화가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 것으로 믿는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진 않겠지만 극단적 예외를 보편화할 순 없다. '4류'가 '2류'를 업신여기는 것은 국정감사장에서만이 아니다. 해외순방, 컨퍼런스, 조찬간담회, 만찬 등 그들이 만나는 모든 장소에서 이 현상은 거듭된다. 관계 설정 자체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나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나 영역 측면에서나 유한할 수밖에 없는 힘의 논리만이 그들의 유일한 잣대기 때문이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오판하는 망상이 출발점이다. 이 망상은 격투기 선수가 화가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몇 주 전에 쓴 칼럼 '그들은 왜 KT 대표 자리를 탐내는 것일까'에서 언급한 것처럼 몇몇 정치인은 자신이 KT 대표 자리의 적임자라고 스스로 믿는다. 격투기 선수의 망상과 비슷하다. '힘의 논리'에 취한 나머지 본인 자신에 대하여 세상의 어떤 일도 누구보다 잘 할 '종합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는 거다. 불행한 것은 그들이 실제 그 일을 맡았을 때 KT가 순식간에 망해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2만여 명의 직원이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조직적 노하우가 이 생명체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병은 불가피할 것이고 시간을 길게 놓고 보면 '1류'가 아닌 '4류' 쪽으로 변해갈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종합예술가'들의 경우 이런 속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윤경림 후보의 행보는 아쉽다. 그 속병을 충분히 우려할 만한 입장에 있다고 봤는데 끝내 그걸 책임지지 못했다는 게 첫 번째 아쉬움이다. 현실적인 판단이었겠고 어쩌면 본인의 의사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정권과 타협하기 위해 했던 두 명에 대한 인사도 깔끔하지 못했다. 지배구조 개선을 본질적 차원에서 고민했어야 했지만 정치적 해법을 고려하다 오히려 망신만 당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통찰한 게 우리의 현실이고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화가의 그림을 거실에서 빼내고 그 자리에 격투기 선수가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박수를 쳐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현관 밖에서는 근육질의 격투기 선수가 노려보고 있고.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모든 건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