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의 헤디트] 디지털 헤리티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문화유산을 디지털로 기록하고 복원하는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정밀한 3차원 스캐닝과 실감형 영상,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까지 기술의 발전은 빠르다. 과거에는 남아 있는 유산을 어떻게 기록하고 복원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였다면, 이제는 그 성과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린 '2026 디지털헤리티지페스타 산업 컨퍼런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을 주제로 국악과 청동 문화유산, AI 영화, 문화유산 데이터, XR 교육, 체험콘텐츠, 플랫폼, 로컬관광, 사운드스케이프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필자는 이번 컨퍼런스의 기획을 맡았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많이 소개하느냐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문화유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 시선들이 만났을 때 어떤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산업과 지역의 가치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 논의가 남긴 것은 기술의 우열보다 기술 이후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산의 가치를 모르면 기술도 방향을 잃는다 문화유산 콘텐츠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유산에 대한 이해다.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가 먼저다. 이날 국악인 최한이는 전통음악을 현대적인 디지털 내러티브로 확장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첨단기술의 사용 여부보다 국악이 지닌 의미와 표현의 고유성을 어떻게 새로운 경험으로 전달하느냐는 문제였다. 조준동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다뉴세문경에서 반가사유상에 이르는 청동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조명했다. 청동기술과 조형성, 역사적 맥락을 다시 살펴보는 발표는 디지털콘텐츠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오늘날 문화유산을 다루는 콘텐츠 제작에서는 화려한 시각적 표현이 먼저 제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유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장소의 맥락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으면 결과물은 익숙한 이미지의 반복에 머물 수 있다. 궁궐과 고분, 불상과 전통음악은 모두 문화유산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경험하도록 설계할 수는 없다. 각 유산의 특성에 따라 서사와 공간, 이미지와 소리가 달라져야 한다. AI가 읽을 수 있는 역사와 사람이 해석해야 할 역사 생성형 AI의 발전은 디지털 헤리티지 분야에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영상으로 구현하고, 소실된 건축물을 가상으로 재현하며, 문화유산의 내용을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하는 일의 기술적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AI가 문화유산을 그럴듯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승민 텍스트웨이 대표는 AI가 문화유산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었다. 역사적 사실과 추정, 문헌의 출처와 맥락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으면 AI가 내놓는 답변에도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기록된 정보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정리하고, 서로 다른 문헌의 관계를 연결하며, 확정된 사실과 학술적 해석을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AI 영화와 실감콘텐츠 제작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장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는 있지만, 그 장면이 역사적 사실인지 창작자의 상상인지는 구분돼야 한다. 문화유산 분야에서 AI를 활용한다는 것은 제작 속도를 높이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재현했는지, 어느 부분에 해석과 상상이 개입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고증과 해석의 책임은 더 중요해진다. 전시장을 떠난 콘텐츠는 어디에서 살아남을까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는 오랫동안 박물관과 전시관, 축제와 행사장을 중심으로 제작돼 왔다. 사업이 종료되면 상영과 운영도 함께 끝나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제작 이후의 유통과 지속적인 활용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경태 엘팩토리 대표는 디지털콘텐츠의 확산을 위해 하드웨어와 플랫폼, 콘텐츠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 구현된 콘텐츠가 가정과 일상으로 이동하려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서비스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애진 대표와 김군호 에이콘팩토리 대표가 소개한 AI·XR 교육과 체험콘텐츠 역시 경험의 설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콘텐츠의 성패를 기술의 완성도로만 판단하기보다 이용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산업화는 단순히 더 많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다. 한 번 제작한 콘텐츠가 교육 현장과 전시공간, 거실의 디지털 화면과 관광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유통과 운영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저작권과 이용권, 기술 유지관리, 플랫폼 운영, 콘텐츠의 지속적인 갱신 또한 중요한 과제가 된다. 관람객 수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행동이다 디지털 헤리티지가 지역관광과 만날 때 질문은 더욱 구체적이어야 한다. 박정숙 청주시정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국가유산 미디어아트와 지역관광 사례를 살펴보며 콘텐츠 관람 이후의 행동에 주목했다. 방문객이 한 장소에 도착해 영상을 관람하고 곧바로 돌아간다면 방문객 수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주변 골목과 상점, 음식점, 숙박시설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지역에 남기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완성도 높은 콘텐츠가 곧 성공적인 지역관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대표 문화유산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방문을 체류로, 체류를 지역 안에서의 소비와 재방문으로 확장하려면 유산 자체뿐 아니라 주변의 역사문화 자원과 골목, 상권, 생활공간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개별 장소들을 하나의 이야기와 동선으로 엮는 경험 설계가 필요한 이유다. 이때 미디어아트는 관광의 전부가 아니라, 문화유산에서 지역의 다양한 공간과 경험으로 발걸음을 이어주는 출발점이 된다. 지자체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문했는가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머물렀는지, 무엇을 경험했는지, 지역 안에서 어떤 이동과 소비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결국 지역 문화유산 사업의 다음 과제는 더 크고 화려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만 있지 않다. 문화유산을 매개로 사람들이 지역을 더 깊이 경험하고,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드는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데 있다. 전통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도 사람이 필요하다 마지막 발표자인 이영재 만지작엔터테인먼트 대표는 AI와 국악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문제를 제시했다. AI가 전통음악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장단의 흐름과 시김새, 연주자의 호흡과 미묘한 표현까지 제대로 구현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는 기술의 한계를 말하는 동시에 새로운 창작의 조건을 보여준다. 전통문화의 정교한 표현을 담아낼 수 있는 자료를 축적하고, 그 자료를 해석할 전문인력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전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기술을 새로운 표현 도구로 사용할 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시각예술과 영상, 공간, 음악, 교육과 관광 등 여러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제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왜 만들어야 하는가 이번 공주 컨퍼런스가 남긴 것은 하나의 정답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제기된 질문들이었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가능성은 특정 기술이나 콘텐츠 형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서 출발해 창작과 기술 구현, 경험과 공간의 설계, 콘텐츠의 유통과 지역 연계까지 서로 다른 전문성이 연결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앞으로 기관과 지자체가 문화유산 디지털 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질문의 순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기술을 적용하고 무엇을 제작할 것인지에 앞서 왜 이 유산을 선택했는지, 누구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나아가 사업이 끝난 뒤 콘텐츠가 어디에서 다시 활용될 수 있는지, 그 경험이 지역과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는 콘텐츠 제작 단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방향과 예산의 우선순위, 기획과 발주, 운영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완성된 콘텐츠의 규모와 기술적 수준뿐 아니라 실제 활용과 지속 가능성까지 살피는 시각이 필요하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미래는 더 화려한 화면이나 정교한 기술에만 있지 않다. 오래된 유산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고, 이를 새로운 경험으로 전환하며, 그 경험이 산업과 지역의 지속적인 자산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데 있다. 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디지털 헤리티지의 다음 장면은 화면 속에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