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의 '챗GPT 활용 열공'은 뉴스가 아니라 코미디다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서재에는 3만권의 책이 꽂혀있다. 이 서재를 본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부류는 에코가 이중에서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왜 꽂혀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읽은 책보다 아직 읽지 않아서 모르는 책이 서재에 쌓여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그의 저서 '블랙스완'에서 이 일을 소개하며 읽지 않은 책을 '반(反)서재'라고 불렀다. 탈레브가 그의 책 서두에 이 사례를 소개한 까닭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현실 세계를 인식할 때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 지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인식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反)서재'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탈레브의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탈레브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가본 사람은 충분히 알 것이다. 줄줄이 늘어선 서가마다 빼곡하게 진열된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대개는 주눅이 들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며 스스로를 기만할 가능성이 높다. 놀라운 건 적당히 배운 사람이 자기기만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서 앎의 수준에 편차는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해독 불가능성과 마주하게 되면 그 수준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덜 배운 사람은 모른다는 걸 인정할 가능성이 높지만 적당히 배운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 꿰맞추려고 한다. 확인편향이 곧 그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이미 알고 있는 그것 때문에 모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봐도 알지 못하는 거다. 아는 만큼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을 알게 되면 다른 것을 외면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계획한 일이 뜻과 달리 틀어지고 전망한 것들이 지나고 보면 거의 맞지 않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안 것만 변수에 넣고 모르는 것은 빼버린 탓이다. 챗GPT는 어떤 사람에겐 '반(反)서재'의 대용이 될 수 있다. 도서관의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챗GPT가 요약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챗GPT에 대해서 환호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더 이상 도서관에 가서 주눅들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라. 기가 막히게 즐거운 일 아닌가. 비단 책 뿐 만이 아니다. 정보나 지식과 관련된 거면 대부분 비슷하다. 우리 모두 이제 박사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챗GPT가 '반(反)서재'의 대용이 된다 해서 우리가 확인편향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탈레브의 생각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도리어 사회 전체로 볼 때 확인편향의 오류를 더 극대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개별인간이 아니라 사회전체로 본다면 챗GPT의 '반(反)서재'엔 이미 읽은 책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챗GPT 활용에 '열공'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조금 쓴 웃음을 지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통령이 챗GPT 활용을 지시했다는 뉴스도 있었는데, 그 이후 열공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니 지시를 잘 따르는 듯하다. 그런데 챗GPT를 대하는 정부의 자세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점이 좀 슬프다. 그 활용을 꼭 대통령이 지시하고 또 따라야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정책 기획자들한테 중요한 것은 챗GPT 활용법이 아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곳으로 급격히 쏠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와 지식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배움의 방식과 가치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의 현실이 지금까지 정립된 모든 이론적 질서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정책 기획자들은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공무원에 대한 챗GPT 활용 지시는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손에 쥐어주는 셈(챗GPT가 현재 공무원보다 더 잘 업무를 처리한다면 그 공무원들은 모두 옷을 벗어야 한다)이고 공무원들은 시키니까 공부하는 척 할 뿐이다. 그럴 시간에 챗GPT가 가져올 변화지만 챗GPT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줄 수 없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노사 문제에 대한 정책 방향을 챗GPT에게 물어 답을 내려서야 되겠나. 공무원들에게 읽지 않은 책, 그러니까 반(反)서재는 챗GPT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며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현장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