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하기만 한 美빅테크와의 플랫폼 3차 대전
우리나라는 'IT 강국'으로 불렸었다. 미국 빅테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IT 분야 여러 영역에서 자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상용화한 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속인터넷망을 구축하고, 그 위에 검색 게임 전자상거래 등의 산업을 꽃피웠다. 미국 빅테크 기업에 맞서 이들 시장을 지켜낸 몇 안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여기에 반도체 스마트폰 TV PC 등 관련 전자산업도 잘 지켜냈다. 우리나라를 지금도 'IT 강국'이라 부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 말이 식상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곳곳에서 미국 빅테크에 밀리는 형국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일반화한 뒤 앱 마켓플레이스는 구글과 애플에 완전히 넘겨줬다. 모바일 운영체제(OS) 싸움에서 도전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탓에 앱 마켓플레이스 또한 우리가 감당할 플랫폼이 아니게 됐다. 빅테크 등에 올라타야만 하는 것이다. 재주는 우리 기업이 부리고 돈은 빅테크가 버는 앱 생태계 구조가 짜인 것이다.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를 인수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 국내 IT 역사에서는 뼈아픈 일로 두고두고 소환될 것이다. 2007년 아이폰이 나온 이후 모바일 시대가 됐지만 우리나라는 OS와 앱 마켓플레이스에서 해볼 사업자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웹 시대에 우리나라가 해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상황이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포함한 동영상 플랫폼 시장도 앱 마켓플레이스와 비슷한 처지가 됐다. 이곳 또한 재주는 우리 기업이 부리고 돈은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버는 생태계가 됐다. 정부가 이제 와서 디지털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에 5천억 원을 투입한다고는 하지만 이 구조가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건 허망해 보인다. 관련 사업자에겐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으로 느껴질 뿐이다.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사업자가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넷플릭스에 비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의 경우 국내 사업자와 달리 투자한 콘텐츠를 글로벌로 유통하기 때문에 돈을 더 쓰고도 더 많이 벌 가능성이 높다. 좋은 콘텐츠 제작자가 모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사용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내 사업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체급이 된 것이다. CJ CGV가 자금난으로 1조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국내 OTT 사업자에 못잖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제 와서 영화관을 '체험형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도 활용해 혁신하겠다고 하지만 '강을 건넌 뒤 쓸모가 떨어진 배'처럼 보인다. CGV는 한국 영화의 붐을 일으킨 1등 공신이다. 국내뿐이 아니다. 글로벌로 약 600개의 점포와 4200개의 스크린을 보유해 규모에서 세계 5위다. 모바일 OS나 앱 마켓플레이스 그리고 OTT는 먼 안 목으로 조기에 반도체 못잖은 대규모 투자를 선행하며 글로벌을 염두에 둔 비즈니스 모델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쿠팡 모델'이 필요한 시장이었다. 국내 OTT 시장에 아쉬운 건 모바일 OS나 앱 마켓플레이스에서처럼 그런 사업자가 없다는 점이다. CGV가 10년 전에 오늘을 내다봤다면 어떻게 됐을까. 모바일 OS나 앱 마켓플레이스 그리고 OTT의 경우 한국 기업에서 주도 사업자가 나오는 게 불가능한 영역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미국에서 수년간 웹툰에 들인 공이 지금 어느 정도 성과로 이어지는 것처럼 OTT도 초기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과 정책과 사업자가 어우러졌다면 지금과 다를 수도 있었다. 기술이 시대를 구분 짓곤 한다. 인터넷 시대나 모바일 시대라는 표현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시대를 구분 짓는 IT 기술 전쟁이 벌어질 때는 플랫폼 대전(大戰)을 동반하곤 한다. 웹 중심의 인터넷 시대에는 검색 플랫폼 대전이 벌어졌었다. 우리는 이 대전에서 세계 어느 나라 못잖게 잘 싸워냈다. 모바일 시대에는 앱 마켓플레이스 대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전에선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했다. OTT 시장에서 우리가 힘을 못 쓰는 건 그 여파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챗GPT가 촉발시킨 AI 시대. 최대 전쟁터는 검색과 생성AI를 결합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미국 빅테크와 벌이는 플랫폼 3차 대전이라 부를 만 하다. 그 싸움의 결과는 5~10년 뒤 우리 IT 생태계를 결정하게 될 거다. 네이버와 카카오 생태계가 모조리 구글과 MS 생태계로 옮겨가는 걸 상상하는 것은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