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엔진] 세계유산강국, 부산에서 증명된다
'문화엔진'은 우리 문화의 가치 재창출을 위해 칼럼니스트의 비평적 시각과 기자의 보도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는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와 지디넷코리아 기자가 함께 집필하며, 독자에게 문화정책·콘텐츠산업·예술현장에 대한 새 소식을 전하고 인사이트를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K-컬처가 미래산업의 엔진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내년 7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린다. 이 회의는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이자, 유네스코(UNESCO)가 문화·자연유산의 보존과 등재를 논의하는 가장 권위 있는 글로벌 무대다. 이건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다. 한국이 스스로를 세계 앞에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자리이자, '글로벌 소프트파워 유산강국'이라는 국가이미지가 어떤 품격과 책임을 갖추었는지를 증명할 시험대다. K-헤리티지를 국가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한국 문화외교의 분기점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다. 지난 7월 15일, 부산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차기 개최지로 공식 확정됐다. 10월 16일 국회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정연욱 의원은 국가적 준비의 실효성을 짚었다. 내년 행사를 앞두고 올해 미리 준비할 예산이 사실상 '0원'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점, 중앙정부 행사임에도 부산광역시가 선제적으로 재정을 부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담조직의 가시적 출범이 늦어 유네스코 실사와 국제협의 일정이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국가적 위상에 걸맞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정연욱 의원은 '예산 한 푼 없이 유네스코 실사단을 맞을 거냐', '제때 컨트롤타워를 세우지 못해 국제 망신을 되풀이할 것인가'라고 공개적으로 물었다. 이건 준비 부실 재발을 막자는 요구였다. 국회는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바로 그다음 날 행정은 구조로 응답했다. 하루 만에 나온 답, 구조로 응답한 행정 국가유산청은 10월 17일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준비기획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겉으로는 하루 만에 꾸려진 조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8~9월부터 '회의 준비기획단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 법제처 심사와 대통령훈령 근거를 확보해 온 결과다. 이 말은 곧, 이 기구가 국가유산청 내부의 임시 TF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공식 전담조직으로 설치됐다는 뜻이다. 준비기획단은 출범 단계부터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부산광역시 등과의 범정부 협력 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부산 개최 준비팀'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브랜드를 대표해 세계유산위원회를 책임지는 컨트롤타워로 선언된 셈이다. 단순히 사업집행 창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한목소리로 준비할 수 있는 조정 플랫폼을 세운 것이다. 조직 구성을 보면, 유산정책국장이 단장을 겸임해 총괄하고, 부단장이 실무를 총괄한다. 그 아래에 기획·운영·홍보 등 핵심 기능이 한 축으로 묶였다. 현재는 초기(1단계) 체계지만, 개최 시점이 다가올수록 인력과 기능을 단계적으로 확장하는 전제를 두고 있다. 이건 지금 당장 회의만 치르는 팀이 아니라 국가적 행사 전체를 점차적 감당할 수 있게 키우는 플랫폼이라는 의미다. 결국 준비기획단은 한 부처가 알아서 하는 행사 준비 모델에서 벗어나, 정책 수립과 현장 집행의 역할을 분리하고 동시에 굴리는 구조를 공식화했다. 초기에는 국가유산청이 중심이지만 향후에는 외교부, 문체부, 부산시까지 묶는 범정부 거버넌스로 확장될 것이 예고돼 있다. 국회가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행정부는 그 질문에 책임 구조로 답했다. 정책과 현장, 두 축의 유기적 리더십 이제 중요한 건 이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느냐다. 이번 준비 체계의 핵심은 두 축의 정교한 협력이다. 기존 유산정책국 내 세계유산정책과는 여전히 이 구조의 두뇌다. 전체 의제를 기획·조정하고, 회의 본안(상정 의제와 표결 대응)을 관리하며,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지 전략적 스피치라인을 설계·지원한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개최국 의장으로서 어떤 메시지를 내야 하는지 역시 이 라인에서 다듬어진다. 즉 우리는 어떤 나라로 보일 것인가라는 국가 서사를 짜는 곳이 바로 정책 라인이다. 준비기획단은 실행의 허브이자 현장의 매니저다. 정책 라인에서 설계한 방향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바꾼다. 한쪽이 방향을 세우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실제 경험으로 완성한다. 다시 말해, 준비기획단은 국가 어젠다를 '말'에서 '행동'으로 전환하는 엔진이다. 허민 청장은 이 두 축을 연결하는 지휘자 역할을 맡는다. 정책과 현장을 한 덩어리의 서사로 묶어, 세계유산위원회의 준비·운영·의제관리를 동시에 이끌어가는 '정책-현장 복합 리더십'을 발휘하는 구도다. 이것은 세계유산위원회를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브랜드의 무대'로 전환하는 운영 방식이다. 정책이 구조가 되고, 구조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이다. 부산은 장소가 아니다, 장면이다 부산 회의에는 196개 협약국 대표단과 유네스코 측 고위 인사, 해외 언론이 집결한다. 공식 대표단만 약 3천 명, 지원 인력까지 포함하면 최대 1만 1천 명 수준까지도 머무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유산위원회 본회의만 해도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11일간 이어지는 장기 일정이다. 여기에 사전행사(7월 12일 시작)까지 더하면 도시 전체는 2주 이상 세계유산위원회 체제로 운영된다. 통상적인 국제행사(3~5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와 밀도다. 그들은 단순한 의제만 보지 않는다. 도시의 표정, 시민의 참여, 문화예술·야간경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재가 유산이라는 국가브랜드로 구현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부산은 단순한 개최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품격이 투사되는 거대한 스크린이다. 중요한 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다루는 것은 등재와 보존의 절차지만, 방문객이 실제로 기억하고 돌아가는 것은 '이 나라가 어떤 정신(Story)을 갖고 있고, 그 정신이 현장에서 어떤 경험(Impact)으로 전달되며, 그 경험이 어떤 미래(Dream)를 약속하는가'라는 흐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이 무대가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라 국가 단위 마이스(MICE) 전략이라는 점이다. MICE는 회의(국제 의사결정), 도시 브랜드(현장 체험), 산업 전시(비즈니스 접점), 글로벌 네트워크(외교 인프라)가 한 번에 맞물리는 구조다. 부산 개최는 'K-헤리티지'를 소재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문화 자산과 도시 역량을 한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계기다. 정신과 경험, 메시지와 장면을 하나의 서사로 엮는 순간, 이 회의는 단순한 외교 절차를 넘어 '경험하고 싶은 국가브랜드', 다시 말해 수출 가능한 국가이미지로 축적될 수 있다. 그것이 한국이 K-컬처 문화강국으로 가는 과정의 실제 무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메시지와 장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일치시켜 하나의 액션플랜으로 만들 수 있느냐다. 메시지와 장면의 정합성이 곧 국격이며, 부산은 그 품격을 검증받는 첫 시험대다. K-헤리티지에서 K-컬처로, 유산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나라 한국은 현재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유산강국이다. 우리는 왜 이 유산을 지키는가, 그리고 그 유산으로 어떤 미래를 제안하고 있는가? 바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나라만이 진짜 경쟁력을 가진다. K-헤리티지는 우리의 뿌리다. 그 뿌리에서 스토리가 태어나고, 그 스토리가 사람들의 경험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콘텐츠가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세계의 감성과 교감하는 순간, 문화의 꽃이 활짝 핀다. 이것이 바로 K-헤리티지->K-콘텐츠->K-컬처로 이어지는 한국형 선순환 구조다. 이번 부산 회의는 그 순환 구조를 세계 무대에서 실증하는 무대다. 국가유산청은 이 기회를 통해 한국이 등재한 17건의 세계유산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회의 기간 중 K-헤리티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의 리더십 아래, 보존을 넘어 산업·콘텐츠·외교로 확장하는 문화국가 전략이 실제로 가동되고 있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유산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한국'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있다. 경주의 오늘에서 부산의 내일로 지금 경주에서는 에이펙(APEC)이 열리고 있다. 세계의 시선이 한국으로 향한다. 그 열기를 부산으로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다음 과제다. 경주는 오늘의 한국을 보여주는 무대라면, 부산은 그 한국의 근거를 증명하는 무대다. 경주는 현재를 말하고, 부산은 미래를 설계한다. 정연욱 국회의원의 질의는 국가 행정부의 준비를 촉구한 입법부의 경고였고, 허민 국가유산청장의 대응은 그 제언을 제도와 구조로 바꾼 해법이었다. 정치는 문제를 제기했고, 행정은 해답을 제시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체계 위에 '경험 가능한 국가브랜드'를 실제로 구현하는 일이다. 그것은 회의장 바깥의 도시, 시민, 야간경관, 공연, 전시까지 하나의 메시지로 엮는 일이다. 부산 개최 세계유산위원회는 그 응답을 직접 보여줄 첫 무대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 미디어아트 디렉터